"회암사 400탱 사방사불 불화의 상징성과 왕실불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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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탱 사방사불 불화의 제작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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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 400탱 사방사불 불화의 상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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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백四百’ 이 뜻하는 것은 바로 사방 각각의 여래마다 100점씩 제작하였다고 하는 백百' 이라는 수를 염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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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百은 '널리(博)'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각 방위마다 불佛의 정토세계淨土世界가 널리 퍼져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각각 정토변상淨土變相의 형태로 표현된 방위불이 하나의 세계를 나타내는 세트로서 구성되었을 때 이것이 지니는 의미는 바로 사방四方으로 널리 확장해 가는 불국사佛國土를 상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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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징은 바로 명종 20년(1565) 3~4월에 걸쳐 회암사에서 실시된 무차대회無遮大會의 취지와도 다를 바 없다. 이 대회를 통해 13세의 어린나이로 죽은 순회세자의 영혼천도를 비롯하여 왕실의 안녕을 비는 한편, 승속귀천僧俗貴賤 구별없이 일체평등으로 널리 재財와 법法을 베풀어 불법을 국가적 차원으로 널리 선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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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점이 갖는 이같은 상징성과 함께, 다량의 불화를 한꺼번에 제작한 것은 전국에 걸쳐 불교를 진흥시킴은 물론 왕실에 대한 기원을 확산하고자 하는 필요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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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탱이라고 하는 다량의 불화를 제작한 것은 회암사나 내불당內佛堂 등 특정 장소에만 봉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의주요 사찰에 분산 봉안하여 예배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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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화기畵記에서 여러 도민道民들로 하여금 조석朝夕으로 예경禮敬케 하고 축수祝壽를 불가佛家의 주요 업무로 삼으라고 한 내용에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1565년 문정왕후 발원이자 나암(보우)의 발문이 새겨진 400탱의 불화는 16세기 왕실발원 불화의 봉헌화奉獻畵, 기원화祈願畵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도, 道民(도민)들衣(의) 예배용으로 쓰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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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탱 불화의 화기(畵記) 내용과「檜巖寺重修慶讚疏」의 발원 내용의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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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탱 불화의 화기와 같은 시기에 찬술된 「檜巖寺重修慶讚疏」의 발원 내용과 400탱 불화의 화기(畵記) 내용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탱화제작을 발원한 사람도 '나암 보우'이고 「檜巖寺重修慶讚疏」을 기술한 이 또한 '나암 보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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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畵記) 원문<도쿠가와미술관德川美術館 소장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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絹本朱地金泥描, 1副1鋪, 가로30.8cm 세로58.7cm 화면하단 여백에 金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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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靖乙丑正月/日惟我/聖烈仁明大王/大妃殿下爲/主上殿下聖躬萬/歲仁踰解網/治踵結繩螽羽/蟄蟄隣趾振振/王妃殿下頂娠生/知脇誕天縱恭捐/帑宝爰/命良工釋迦弥勒藥/師弥陀皆補處俱各/金画五十彩画五十/并四百 幀莊口畢 偹/謹當檜岩重修慶/席依法點眼/須諸道人使之礼敬/於朝夕常以華封之/祝/堯爲山家務免墮/不忠之抗 其/聖德化海可/朦蠡測於/戲至歌/淸平山人懶/庵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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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畵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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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44년 정월 일에 삼가 우리 聖烈仁明大王大妃殿下께서는 주상전하께서 만세토록 장수하시고 더욱 인자하여 만물을 불쌍히 여기시며, 結繩의 훌륭한 정치를 이어받고, 메뚜기가 많은 알을 낳듯이 왕자를 번성케 할 것이며, 왕비 전하께서는 지혜로운 아이를 회임하여 훌륭한 왕자를 탄생키 바라면서 내탕의 보배를 내어 양공에게 석가 · 미륵· 약사·미타 모든 補處에 각각 金畵 50점과 彩畵 50점씩 모두 400 탱을 갖추게 하였다. 莊嚴을 두루 마치자, 삼가 회암사 중수의 慶席에 맞추어 예에 따라 점안하였다. 모름지기 여러 道의 사람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禮敬케 하고 항상 장수와 부귀, 多子를 祝壽하는 것으로佛家의 일로 삼아 불충의 구렁으로 떨어지는 것을 면해야 할 것이다. 그 聖德이 사해를 교화하여 좁은 식견을 넉넉히 할 만하니, 아! 지극하도다. 淸平山人 懶菴이 삼가 쓰다.
  
 
=='''현존 탱화 6점의 소장처'''==
 
=='''현존 탱화 6점의 소장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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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양주 회암사지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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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Encyves/Graph/A009/A009.htm 대불정수능엄경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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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Encyves/Graph/D005/stele_hyeguen_silleuksa-hoeamsaji.htm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와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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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Encyves/Graph/D011/monk_hyegeun.htm 선각왕사 혜근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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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지식관계망===
 
===인물 지식관계망===
 
===관련 항목===
 
===관련 항목===

2020년 6월 21일 (일) 23:47 판



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절.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절.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指空이 인도의 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우왕 4년(1378) 懶翁이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공이 창건하기 전에도 고려 명종4년(117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普愚가 충선왕 5년(1313)에회암사에서 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건 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중건자가 지공인 것은 분명하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세종 6년 회암사는 恒居僧 250명, 元屬田 500結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당시 어느 사찰보다도 규모가 컸다.

내용

400탱 사방사불 불화의 제작배경

순회세자의 죽음과 왕실의 대를 이을 세손을 기원하다

불화가 제작되는 명종20년이라는 시기는 당시 왕실의 사정을 고려하면, 명종 집권 말기에 접어드는 시기로서, 명종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는 시점이었고, 順懷世子가 2년 전 사망한 후 왕비심씨가 왕자를 얻지 못하고 있는 시기였다. 화기의 발원 내용을 보면 당시 왕실의이러한 사정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국왕인 명종의 장수와 善政, 왕족의 번성을 빌고, 왕비 仁順王后의 왕자 탄신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도왕비의 왕자 출산이 발원의 핵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를 잃은 왕실로서는 이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00탱 불화의 화기와 같은 시기에 찬술된 「檜巖寺重修慶讚疏」의 발원 내용을 각각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정 44년 정월 일에 삼가 우리 聖烈仁明大王大妃殿下께서는 주상전하께서 만세토록 장수하시고 더욱 인자하여 만물을 불쌍히 여기시며, 結繩의 훌륭한 정치를 이어받고, 메뚜기가 많은 알을 낳듯이 왕자를 번성케 할 것이며, 왕비 전하께서는 지혜로운 아이를 회임하여 훌륭한 왕자를 탄생키 바라면서 내탕의 보배를 내어 양공에게 석가 · 미륵· 약사·미타 모든 補處에 각각 金畵 50점과 彩畵 50점씩 모두 400 탱을 갖추게 하였다. 莊嚴을 두루 마치자, 삼가 회암사 중수의 慶席에 맞추어 예에 따라 점안하였다. 모름지기 여러 道의 사람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禮敬케 하고 항상 장수와 부귀, 多子를 祝壽하는 것으로佛家의 일로 삼아 불충의 구렁으로 떨어지는 것을 면해야 할 것이다. 그 聖德이 사해를 교화하여 좁은 식견을 넉넉히 할 만하니, 아! 지극하도다. 淸平山人 懶菴이 삼가 쓰다.

엎드려 기원하옵니다. 주상전하께서는 문무를 겸비하사 나날로 번성하여 새로워지시고 하늘의 아름다운 도리를 짊어지시어 해와 달보다 현명하시고 五帝보다 덕성스러워지소서. 부처의 돌보심을 더욱 받들어 天地와 같이 장수하시고 三王처럼 인자하게 되소서.

  • 메뚜기가 많은 알을 낳듯이 聖子의 탄생이 줄을 이어 사방이 편안하고 전쟁이 영원토록 없게 하시며, 들판에 풍년이 들어 백성과 만물이 모두 평안케 하소서. 위아래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여 노랫소리가 中外에 울려 퍼지고, 朝野가 모두 즐거워하며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춤추게 하소서. 왕비 심씨께서는 아름다운 德性을 뚜렷이 드러내시어 國母의 모범이 되게 하시고, 天縱을 바로 회임하여 하루빨리 지혜로운 왕자를 탄생케 하소서.
  • 恭懿王大妃朴氏께서는 和氣가 하늘처럼 높고 온화함이 땅처럼 두터워 수명은 별처럼 영원토록 빛나고 福德은 새벽처럼 길이 밝으소서. 다음으로 기원하나이다. 돌아가신 中宗恭禧大王,仁宗榮靖大王·先王先后 祖宗 제위 靈駕께서는 菩提의 正因을 더욱 마치시어 다시 如來의 大果를 깨달으소서.
  • 순회세자 靈駕께서는 불법의 妙力에 의지하여 부모의 애정哀情을 알아 하루빨리 春宮에 내려와 다시 세자의 자리를 잇게 하소서. 위와 같이 각각 열거한 靈駕께서는 모두 오늘의 秘薦을 欽蒙하시어 함께 극락의 蓮花臺에서 태어나소서.

이러한 발원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회암사중수경찬소檜巖寺重修慶讚疏」의 발원 내용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우선 명종에게는 선정과 국가 평안, 민생 안정을 하나하나 기원한 다음 왕자의 번성을 강조하고 있다. 多見聖子之繩繩 正如益羽之幫幫” 즉, 메뚜기가 많은 알을 낳는 것처럼 聖子가 끊이지 않고 번성하기를 빌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왕비 인순왕후 심씨에게도 덕성의 강조와 함께 역시 왕자의 탄생을 기원하였다. “娠天縱 速誕生知”라 한 것이 그것으로, 화기에서 “頂娠生知 協誕天從”이라표현한 것과 다름이 없다. 특히 순회세자의 靈駕에 기원하면서 "불법의 妙力에 의지하여 부모의 哀情을 알아 하루빨리 春宮, 즉 동궁에 내려와 다시 세자의 자리를잇게 해달라” 고 한 점이 주목된다. 왕자가 하루빨리 탄생하여 돌아간 순회세자의자리를 메우게 해달라는 염원이다.

순회세자 사망 이후 왕실에서 추진한 불사에서 그 발원의 주된 내용은 왕자의탄생에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는 몇몇 불사에서 더 확인할 수 있다. 淸平寺保上春秋水陸齋疏」에서는 국왕에게 “速生聖嗣 早建國儲”라 하여 하루빨리 왕자를 낳아 세자를 책봉할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고 하였고, 왕비에게 “頂娠天縱 脇誕生知" 라 하여 훌륭한 왕자의 출생을 기원한 바 있다.

「世子小祥齋疏」와 「萬世子藥師精勤點眼法席疏」에서는 순회세자가 다시 왕자로 태어나 세자의 자리를 잇게 해달라는 형식으로 왕자 탄생을 염원하였다. 전자에서는 순회세자 靈駕를 기원하면서 “동궁으로 다시 내려와 다시 세자의 자리를 이어종묘사직의 큰 경사에 응하고 신민의 마음들을 위로해 달라"고 하였다. 후자에서도 순회세자의 영혼이 駕 즉 동궁으로 다시 내려와 궁궐의 경사를 거듭 나타내고, 세자의 자리를 이어서 종묘사직의 영광을 다시 빛나게 해달라고 하였다. 순회세자의 환생 기원은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왕자의 탄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명종 18년(1563) 순회세자 사망 후 왕실 불사의 발원은 왕자 탄생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세자를 잃은 왕실로서 이때의 발원은 그 이전의 것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순회세자 사망 한 해 전인명종 17년(1562)에 제작된 淸平寺소장 〈지장시왕도>의 화기에서는 그 왕실 관련발원 내용이 국왕, 왕비, 大王大妃 문정왕후, 恭懿王大妃, 世子, 세자비 德嬪 등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을 뿐 왕자 탄생을 언급하거나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

이상의 발원 내용을 고려할 때 명종 20년에 제작된 400탱 불화는 왕실의 안녕과 왕권의 강화, 특히 세자의 탄생을 통한 순탄한 왕위 계승을 염원하는 것이 그 제작 배경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명종 대 왕실의 동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회암사 중수에 맞춰 400탱 불화가 조성되다

400탱의 불화는 聖烈仁明大王大妃, 즉 문정왕후의 발원으로 명종 20년 1월 제작되었다. 회암사 중수에 맞춰 점안한 후 이를 각 도에서 아침 저녁으로 禮敬하고 장수와 부귀, 그리고 多子를 축수케 하기 위함이었다. 불화 조성의 발원자가 승려 보우였다는 점에서 그 제작 배경에는 당시 불교계의 동향과 회암사 중수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차대회에 사방사불 불화가 걸리다

회암사 중창은 시작한 지 3년만인 명종 20년 1월경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400탱 불화가 회암사 중수에 맞춰 조성되었고, 그 시기가 이해 1월이라고 화기에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암사가 중수되고 불화가 조성되자 같은 해 3월부터 無遮大會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다.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다음 글에 잘 나타나고 있다.

楊州 회암사에서 무차대회를 베풀었는데, 內官을 보내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때 세자를 갓 잃자 요승 보우가 복을 기원해야 한다는 말을 떠벌여 무차대회를 베풀기를 청하였는데, 慈殿이 그 말에 혹하여 그대로 따랐다. 승려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몇 천 명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였으며, 조각 장식의 물건을 극도로 화려 사치하게 하여 옛날에도 보지 못하던 정도였다.

또 붉은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고 황금으로 輦을 꾸미고 앞뒤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 大駕가 친히 임어하는 상황처럼 베풀었으며, 또 拜位를 마련하여 마치 상이 부처에게 배례하게 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 凶悖함을 형언할 수 없었다. 창고의 재정이 고갈되고 종실·戚里도 또한 곡식과 비단을 내어 그 일을 도왔다. 자전이 그 戒律을 따라 목욕 재계하고 素食하기를 수십여 일동안 하다가 병환이 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병세가 위독하게 되자 내관을 보내어 중지하게 하였는데, 무차대회를 베푼 지 이미 며칠이 되었다.

무차대회는 승려· 속인 · 남녀노소 · 귀천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널리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집행하는 법회이다. 이전에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조각 장식의 물건을 극도로 화려 사치하게 하였다거나, 붉은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고 황금으로 輦을 꾸몄다고 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이미 조성된 400탱 불화도 일단 이 무차대회에 莊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무차대회는 문정왕후가 직접 참여하고 있다. 계율에 따라 목욕 재계하고 수십일 동안 素食함으로써 병을 얻을 정도로, 세자 사망 후 왕자 탄신의 염원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무차대회는 회암사 중수, 400탱 불화의 조성을 이은 왕실발원 불사의 결정판이었던 것이다. 세자의 사망, 명종의 건강 악화로 말미암은 왕실의 위기를 불력에 의지하고 대중에 호소하면서 타개해보기 위한 대대적인 불사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명종 20년에 조성된 400탱의 불화는 왕실, 회암사, 무차대회라는 공간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400탱탱.png

불화 400탱 사방사불 불화의 상징성

사백四百’ 이 뜻하는 것은 바로 사방 각각의 여래마다 100점씩 제작하였다고 하는 백百' 이라는 수를 염두해야 한다. 백百은 '널리(博)'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각 방위마다 불佛의 정토세계淨土世界가 널리 퍼져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각각 정토변상淨土變相의 형태로 표현된 방위불이 하나의 세계를 나타내는 세트로서 구성되었을 때 이것이 지니는 의미는 바로 사방四方으로 널리 확장해 가는 불국사佛國土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상징은 바로 명종 20년(1565) 3~4월에 걸쳐 회암사에서 실시된 무차대회無遮大會의 취지와도 다를 바 없다. 이 대회를 통해 13세의 어린나이로 죽은 순회세자의 영혼천도를 비롯하여 왕실의 안녕을 비는 한편, 승속귀천僧俗貴賤 구별없이 일체평등으로 널리 재財와 법法을 베풀어 불법을 국가적 차원으로 널리 선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400점이 갖는 이같은 상징성과 함께, 다량의 불화를 한꺼번에 제작한 것은 전국에 걸쳐 불교를 진흥시킴은 물론 왕실에 대한 기원을 확산하고자 하는 필요를 가지고 있었다.

400탱이라고 하는 다량의 불화를 제작한 것은 회암사나 내불당內佛堂 등 특정 장소에만 봉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의주요 사찰에 분산 봉안하여 예배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화기畵記에서 여러 도민道民들로 하여금 조석朝夕으로 예경禮敬케 하고 축수祝壽를 불가佛家의 주요 업무로 삼으라고 한 내용에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1565년 문정왕후 발원이자 나암(보우)의 발문이 새겨진 400탱의 불화는 16세기 왕실발원 불화의 봉헌화奉獻畵, 기원화祈願畵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도, 道民(도민)들衣(의) 예배용으로 쓰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400탱 불화의 화기(畵記) 내용과「檜巖寺重修慶讚疏」의 발원 내용의 일치

400탱 불화의 화기와 같은 시기에 찬술된 「檜巖寺重修慶讚疏」의 발원 내용과 400탱 불화의 화기(畵記) 내용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탱화제작을 발원한 사람도 '나암 보우'이고 「檜巖寺重修慶讚疏」을 기술한 이 또한 '나암 보우'이다.

  • 화기(畵記) 원문<도쿠가와미술관德川美術館 소장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

絹本朱地金泥描, 1副1鋪, 가로30.8cm 세로58.7cm 화면하단 여백에 金書 「嘉靖乙丑正月/日惟我/聖烈仁明大王/大妃殿下爲/主上殿下聖躬萬/歲仁踰解網/治踵結繩螽羽/蟄蟄隣趾振振/王妃殿下頂娠生/知脇誕天縱恭捐/帑宝爰/命良工釋迦弥勒藥/師弥陀皆補處俱各/金画五十彩画五十/并四百 幀莊口畢 偹/謹當檜岩重修慶/席依法點眼/須諸道人使之礼敬/於朝夕常以華封之/祝/堯爲山家務免墮/不忠之抗 其/聖德化海可/朦蠡測於/戲至歌/淸平山人懶/庵謹跋」

  • 화기(畵記) 해석

가정 44년 정월 일에 삼가 우리 聖烈仁明大王大妃殿下께서는 주상전하께서 만세토록 장수하시고 더욱 인자하여 만물을 불쌍히 여기시며, 結繩의 훌륭한 정치를 이어받고, 메뚜기가 많은 알을 낳듯이 왕자를 번성케 할 것이며, 왕비 전하께서는 지혜로운 아이를 회임하여 훌륭한 왕자를 탄생키 바라면서 내탕의 보배를 내어 양공에게 석가 · 미륵· 약사·미타 모든 補處에 각각 金畵 50점과 彩畵 50점씩 모두 400 탱을 갖추게 하였다. 莊嚴을 두루 마치자, 삼가 회암사 중수의 慶席에 맞추어 예에 따라 점안하였다. 모름지기 여러 道의 사람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禮敬케 하고 항상 장수와 부귀, 多子를 祝壽하는 것으로佛家의 일로 삼아 불충의 구렁으로 떨어지는 것을 면해야 할 것이다. 그 聖德이 사해를 교화하여 좁은 식견을 넉넉히 할 만하니, 아! 지극하도다. 淸平山人 懶菴이 삼가 쓰다.

현존 탱화 6점의 소장처

위키로 제작한 사이트

소장처 공식 사이트

  • 1. 名古屋徳川美術館 薬師三尊図

https://www.tokugawa-art-museum.jp/

  • 2. 龍乗院 薬師三尊図

ja.wikipedia.org/wiki/ 龍乗院

  • 공식사이트 없음.
  • 3. 寶壽院 薬師三尊図
  • 공식사이트 없음.
  • 호쥬인 약사삼존도는 야마쿠치켄리쯔미술관山口県立美術館에서 개최된 고려*이조의 불교미술전高麗*李朝の仏教美術展(97.10.16~11.16)에 전시된 바 있다.
  • 4. 江善寺 釈迦三尊図

https://search.yahoo.co.jp/search?p=%E6%B1%9F%E5%96%84%E5%AF%BA+&x=wrt&aq=-1&ai=kqeHwcTbQxePc6AJHUeKmA&at=s&ts=54283&ei=UTF-8

  • 5. Newyork Mary and jackson Burke Collection 薬師三尊図

http://burkecollection.org/about

  • 대여기관이라 특정 adress 없음.
  • 6. 국립중앙박물관 薬師三尊図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1261

  • 소장처 구글맵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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