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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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楊州 檜巖寺 無學大師碑)
BHST Hoeamsa Muhak stele.jpg
대표명칭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영문명칭 Stele for Buddhist Monk Muhak
한자 楊州 檜巖寺 無學大師碑
주소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1번지
문화재 지정번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문화재 지정일 1974년 9월 26일
찬자 변계량(卞季良)
서자 공부(孔俯)
각자 미상
서체 해서(楷書)
승려 자초(自超)
건립연대 1828년
승탑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檜巖寺)에 있는 조선 초기의 승려 무학대사 자초(無學大師 自超, 1327-1405)탑비.

내용

개요

높이 256cm, 너비 91cm, 두께 29cm.[1]

높직한 4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결한 모습이며,[2] 탑비의 오른쪽에는 처음 비석에 쓰였던 사각 받침과 연꽃잎 형태의 지붕이 올려 있다.[3]

태종이 평소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존경하고 따르던 상왕인 친형 정종의 뜻을 받아들여 당대의 문장가이자 문신인 변계량(卞季良)으로 하여금 비명을 짓게 하여 세웠다.[4]

비문

전면

비문에는 무학대사(無學大師)고려 공민왕 때 연경(燕京)에 가서 지공대사(指空大師)를 찾아 법을 구하고, 이어서 법천사(法天寺)에 가 있는 나옹선사(懶翁禪師)를 만나보고 제자가 된 일, 태조의 부름을 받아 왕사(王師)가 되어 한양 천도에 큰 역할을 한 일, 회암사(檜巖寺)에 두 스승의 묘탑을 세운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5]

그리고 비문의 기록을 통해 무학대사 부도(無學大師 浮屠)가 1407년(태종 7)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6]

Quote-left.png 3년이 지난 정해년(태종 7, 1407년) 겨울 12월, 상감께서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에게 대사의 뼈를 회암사 탑에 모시도록 하셨고, 또 4년이 지난 경인년(태종 10, 1410년) 7월, 시호를 내리셨다. Quote-right.png
출처: "무학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후면

원래의 탑비는 1410년(태종 10)에 제작되었으나,[7] 1821년(순조 21)에 파괴되었고 1828년(순조 28)에 다시 세워졌다.[8] 이러한 과정은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의 음기(陰記)[9]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Quote-left.png 우리나라의 세 분의 조사(祖師)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의 사리를 안치한 탑과 사적비(事蹟碑)가 양주(楊州)의 천보산(天寶山) 북쪽 벼랑에 있으니, 지공과 나옹의 두 비는, 목은(牧隱) 이문정공(李文靖公)이 글을 짓고, 한수(韓修)와 권중화(權仲和)가 써서 고려 말에 세운 것이다.

무학(無學)의 비는 태종께서 즉위하신지 10년(태종 10, 1410년)되던 해인 경인년에, 왕명을 받들어 문신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공부(孔俯)가 써서 두 분 왕사(王師)의 탑 아래에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절은 폐허가 되었고 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금상 21년(순조 21, 1821년) 신사년에 이응준(李膺埈)이란 자가 술사(術士) 조대진(趙大鎭)과 함께 사리탑을 헐은 뒤 자기 아버지를 묻고, 지공, 무학의 두 비를 두들겨 부쉈다.
관찰사가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임금께서 깜짝 놀라시어, 이응준과 조대진은 섬으로 유배하고, 이응준 아비를 묻은 무덤을 파버리라 명하셨다. 이어 “부서진 비는, 개국 초에 선조의 분부에 따라 세운 것인데, 오늘날 보존치 못함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말씀하시며, 경기(京畿) 감영(監營)에 명하시어 일을 주관토록 하였다. 지공의 비는 문정공의 후손인 목사(牧使) 희현(羲玄)에게 다시 쓰게 하고, 무학의 비는 많이 훼손되지 않았으므로 예전에 새긴 공부(孔俯)의 글씨를 모방하여 새기도록 하였다. 무자년(순조 28, 1828년) 가을에 공사가 비로소 끝나 옛터에 세웠다.

Quote-right.png
출처: "무학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또한, 각수(刻手) 박지춘(朴枝春)과 석수(石手) 박종석(朴宗錫)·문수조(文守兆)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기술력을 중시하였던 조선 후기 당시 사회상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10]

비문 보러가기
"무학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지식 관계망

  • 양주 회암사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자초 A는 B를 위한 비이다 1828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자초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1407년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변계량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공부 A는 B가 비문을 썼다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양주 회암사 A는 B에 있다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A는 B와 관련이 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양주 회암사 A는 B에 있다
지공 자초 A는 B의 스승이다
혜근 자초 A는 B의 스승이다

시각 자료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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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주석

  1. "무학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2. "무학대사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3. 이도남, "무학대사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78쪽.
  5. 허균, "무학대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이도남, "무학대사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이도남, "무학대사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무학대사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9. 비갈(碑碣)의 등뒤에 새긴 글
  10. 이도남, "무학대사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무학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무학대사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 "무학대사비", 답사여행의 길잡이:경기북부와 북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무학대사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이도남, "무학대사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허균, "무학대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72-2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