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법장이 신라 의상에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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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법장이 신라 의상에게'''== | =='''당 법장이 신라 의상에게'''== | ||
{{Blockquote2|작별한지 20여년에 흠모하는 지극함이 어찌 마음에서 떠나리오. 구름 자욱한 머나먼 만리길, 바다와 육지가 천 겹으로 막혀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한하노니 그리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듣자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을 강연하고 법계의 무진연기를 드날리시어 새롭고 새로운 불국(佛國)에 널리 이익 되게 하신다니 그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이로써 여래가 입멸하신 후 불일(佛日)을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돌려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할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나이다. | {{Blockquote2|작별한지 20여년에 흠모하는 지극함이 어찌 마음에서 떠나리오. 구름 자욱한 머나먼 만리길, 바다와 육지가 천 겹으로 막혀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한하노니 그리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듣자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을 강연하고 법계의 무진연기를 드날리시어 새롭고 새로운 불국(佛國)에 널리 이익 되게 하신다니 그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이로써 여래가 입멸하신 후 불일(佛日)을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돌려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할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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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파일:BHST Beomeosa Uisang.jpg|thumb|left|170px|부산 범어사(梵魚寺)의 의상대사영정(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5호)<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0550000,21&flag=Y 범어사의상대사영정]",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의상이 실천한 평등공동체, 부석사=== | ===의상이 실천한 평등공동체, 부석사=== | ||
− | 690년대 초 [[영주 부석사|태백산 부석사(浮石寺)]]. 고희를 앞둔 [[의상|의상(義相, 625-702)]]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표정에는 늘 숙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극한 신심, 뭇 중생에 대한 깊은 연민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스승이 법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그 간절함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아미타불을 등지고 앉지 않는 철저함도 말 없는 큰 가르침이었다.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 + | 690년대 초 [[영주 부석사|태백산 부석사(浮石寺)]]. 고희를 앞둔 [[의상|의상(義相, 625-702)]]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표정에는 늘 숙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극한 신심, 뭇 중생에 대한 깊은 연민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스승이 법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그 간절함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아미타불을 등지고 앉지 않는 철저함도 말 없는 큰 가르침이었다.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이 수많은 제자들에게 [[의상]]은 거대한 산맥이었고, 파도가 그친 드넓은 바다였으며, 현세에 모습을 드러낸 보살의 화신이었다. |
− | 엄격한 골품제도를 요구하는 시대. 하지만 [[의상]]의 [[영주 부석사|부석사]]는 평등공동체였다. 가난한 나무꾼인 진정과 | + | 엄격한 골품제도를 요구하는 시대. 하지만 [[의상]]의 [[영주 부석사|부석사]]는 평등공동체였다. 가난한 나무꾼인 진정과 노비 출신인 지통이 그랬듯 법에 뜻을 둔 이라면 누구든 받아들여졌다. [[의상]]을 깊이 존경했던 국왕이 [[영주 부석사|부석사]]에 토지와 노비를 주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편지를 보내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
“우리의 불법은 평등해 높고 낮음이 균등하며 귀하고 천함이 같은 도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논밭이 필요하고, 어찌 노복을 거느리겠습니까.” | “우리의 불법은 평등해 높고 낮음이 균등하며 귀하고 천함이 같은 도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논밭이 필요하고, 어찌 노복을 거느리겠습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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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이 보내온 ‘화엄탐현기’=== | ===법장이 보내온 ‘화엄탐현기’=== | ||
− |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중국 종남산에서 온 승전이 가져온 여러 권의 책과 편지를 받고나서였다. [[의상]]이 아이처럼 기쁨에 겨워 환히 웃는 게 아닌가. 바로 20년 전 동문수학했던 당의 [[법장|법장(法藏, 643-712)]]이 보낸 | + |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중국 종남산에서 온 승전이 가져온 『[[화엄경탐현기|화엄탐현기(華嚴探玄記)]]』를 비롯한 여러 권의 책과 편지를 받고나서였다. [[의상]]이 아이처럼 기쁨에 겨워 환히 웃는 게 아닌가. 바로 20년 전 동문수학했던 당의 [[법장|법장(法藏, 643-712)]]이 보낸 것이었다. |
− | 측천무후에게서 현수(賢首)라는 법호를 받을 정도로 당나라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법장]]은 편지에서 [[의상]]에 대한 깊은 존경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은 부지런히 정진했건만 성공한 것이 없고 널리 폄이 적어 『[[화엄경]]』을 생각할 때마다 돌아가신 스승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또 스승님의 주해가 뜻은 풍부하지만 글이 간결해 후학들이 그 뜻을 알기 어려워 이를 | + | 측천무후에게서 현수(賢首)라는 법호를 받을 정도로 당나라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법장]]은 편지에서 [[의상]]에 대한 깊은 존경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은 부지런히 정진했건만 성공한 것이 없고 널리 폄이 적어 『[[화엄경]]』을 생각할 때마다 돌아가신 스승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또 스승님의 주해가 뜻은 풍부하지만 글이 간결해 후학들이 그 뜻을 알기 어려워 이를 풀어 쓰니 자세히 살펴보고 가르침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담겨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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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장]]의 서책을 받아든 [[의상]]은 침식도 잊은 채 책 읽기에 몰두했다. 제자들은 [[의상]]이 얼마나 감격스러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스승의 마음이 이 순간 그토록 그리워하던 도반 [[법장]]은 물론, 스승 [[지엄(중국)|지엄(智儼, 602-668)]]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리라는 것을 그들도 느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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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엄의 제자로 법장을 만나다=== | ===지엄의 제자로 법장을 만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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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BHST Facang.jpg|중국 화엄종 제3조(祖), [[법장|법장(法藏)]]<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73452&cid=51397&categoryId=51397 법장]",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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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골 출신으로 열아홉에 출가한 [[의상]]이 당나라로 건너간 것은 661년이었다. 두 번이나 구법을 함께 떠났던 도반 [[원효|원효(元曉)]]는 도중에 깨달아 돌아갔다. 홀로 남은 [[의상]]은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병사들의 눈을 피해 항구로 향했다. 그곳에서 [[의상]]은 당나라로 떠나는 사신의 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구법의 대한 [[의상]]의 열정은 누구도 꺾지 못했다. 아름다운 선묘의 간절한 구애도 그의 발길을 돌려놓지는 못했다. | ||
[[의상]]은 종남산으로 가는 길을 묻고 물어 중국화엄 2조 [[지엄(중국)|지엄]]을 만날 수 있었다. [[지엄(중국)|지엄]]은 전날 밤 꿈에 해동의 큰 나무가 당나라까지 뻗었기에 올라가보니 마니보주가 빛을 내고 있더라는 얘기를 하며 [[의상]]을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였다. [[의상]]은 [[지엄(중국)|지엄]]의 각별한 지도 아래 화엄의 오묘한 진리를 하나하나 체득해나갔다. | [[의상]]은 종남산으로 가는 길을 묻고 물어 중국화엄 2조 [[지엄(중국)|지엄]]을 만날 수 있었다. [[지엄(중국)|지엄]]은 전날 밤 꿈에 해동의 큰 나무가 당나라까지 뻗었기에 올라가보니 마니보주가 빛을 내고 있더라는 얘기를 하며 [[의상]]을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였다. [[의상]]은 [[지엄(중국)|지엄]]의 각별한 지도 아래 화엄의 오묘한 진리를 하나하나 체득해나갔다. | ||
− | [[의상]]이 [[법장]]을 만난 것은 종남산에 도착한 지 오래지 않아서였다. [[의상]]보다 | + | [[의상]]이 [[법장]]을 만난 것은 종남산에 도착한 지 오래지 않아서였다. [[의상]]보다 열여덟이나 어린 그는 그때까지도 머리를 깎지 않은 재가자였다. 하지만 스무 살이었던 젊은 그를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16살 때 이미 대승의 진리를 깨닫겠다고 발원한 뒤 법문사 사리탑 앞에서 연비공양을 했다는 그는 총명함을 넘어 가히 천재적이었다. |
[[지엄(중국)|지엄]]은 [[의상]]과 [[법장]] 두 사람이 장차 이 땅에 화엄의 꽃을 활짝 피울 인재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어느 날 조용히 [[의상]]과 [[법장]]을 불렀다. 그러고는 [[의상]]에게는 ‘의지(義持)’, [[법장]]에게는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다. [[의상]]은 수행자적인 실천수행에 뛰어났고, [[법장]]은 학자적인 이론 탐구에 장점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 [[지엄(중국)|지엄]]은 [[의상]]과 [[법장]] 두 사람이 장차 이 땅에 화엄의 꽃을 활짝 피울 인재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어느 날 조용히 [[의상]]과 [[법장]]을 불렀다. 그러고는 [[의상]]에게는 ‘의지(義持)’, [[법장]]에게는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다. [[의상]]은 수행자적인 실천수행에 뛰어났고, [[법장]]은 학자적인 이론 탐구에 장점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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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을 위한 기도, 낙산사=== | ===중생을 위한 기도, 낙산사=== | ||
− | [[의상]]이 [[지엄(중국)|지엄]] 문하에서 수학한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지엄(중국)|지엄]]은 [[의상]]에게 그동안 공부한 내용으로 화엄의 이치를 밝혀볼 것을 권유했다. 이에 [[의상]]이 며칠 동안 방문을 잠그고 완성한 것이 바로 30구 210자의 법성게(法性偈)와 그 글자들로 도인(圖印)을 만든 것이다. [[지엄(중국)|지엄]]은 크게 감탄하며 이를 널리 유포할 것을 허락했다. 668년 7월 | + | [[의상]]이 [[지엄(중국)|지엄]] 문하에서 수학한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지엄(중국)|지엄]]은 [[의상]]에게 그동안 공부한 내용으로 화엄의 이치를 밝혀볼 것을 권유했다. 이에 [[의상]]이 며칠 동안 방문을 잠그고 완성한 것이 바로 30구 210자의 법성게(法性偈)와 그 글자들로 도인(圖印)을 만든 것이다. [[지엄(중국)|지엄]]은 크게 감탄하며 이를 널리 유포할 것을 허락했다. 668년 7월 무렵, [[의상]]이 46살 되던 해였다. |
[[지엄(중국)|지엄]]은 그해 10월29일 입적했다. 한동안 종남산에 머물던 [[의상]]이 귀국한 것은 670년이었다. 신라에 화엄을 전해야겠다고 내심 다짐하던 [[의상]]에게 어느 날 당에 볼모로 와 있던 [[신라 태종무열왕|태종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김인문(金仁問)]]이 은밀한 소식을 전해왔다. 당나라가 군사 50만을 보내 신라를 침공하려 하니 이를 신라에 알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 [[지엄(중국)|지엄]]은 그해 10월29일 입적했다. 한동안 종남산에 머물던 [[의상]]이 귀국한 것은 670년이었다. 신라에 화엄을 전해야겠다고 내심 다짐하던 [[의상]]에게 어느 날 당에 볼모로 와 있던 [[신라 태종무열왕|태종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김인문(金仁問)]]이 은밀한 소식을 전해왔다. 당나라가 군사 50만을 보내 신라를 침공하려 하니 이를 신라에 알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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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로 이어진 화엄 연구=== | ===제자들로 이어진 화엄 연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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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BHST Facang letter.jpg|일본 텐리대학 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현수법장의 편지 원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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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의 책과 편지를 받은 [[의상]]은 『[[화엄경탐현기]]』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열흘이 지난 뒤 [[의상]]은 제자 중 가장 기량이 뛰어난 진정, 상원, 양원, 표훈을 불렀다. 그리고 각각 5권씩 나눠준 뒤 이를 깊이 연구하도록 했다. 훗날 [[의상]]은 직접 제자들에게 『[[화엄경탐현기]]』를 강의하기도 했다. | [[법장]]의 책과 편지를 받은 [[의상]]은 『[[화엄경탐현기]]』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열흘이 지난 뒤 [[의상]]은 제자 중 가장 기량이 뛰어난 진정, 상원, 양원, 표훈을 불렀다. 그리고 각각 5권씩 나눠준 뒤 이를 깊이 연구하도록 했다. 훗날 [[의상]]은 직접 제자들에게 『[[화엄경탐현기]]』를 강의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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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 *[[영주 부석사]] | ||
*[[양양 낙산사]] | *[[양양 낙산사]] | ||
*[[화엄경탐현기]] | *[[화엄경탐현기]] | ||
*[[삼국유사]] | *[[삼국유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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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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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람, 「철학자 법장(法藏)의 정치가와 신이승(神異僧)으로서의 면모」, 『문사철』 Vol.20, 한국불교사연구소, 2010, 116-163쪽. | *박보람, 「철학자 법장(法藏)의 정치가와 신이승(神異僧)으로서의 면모」, 『문사철』 Vol.20, 한국불교사연구소, 2010, 116-163쪽. | ||
− | [[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분류:승탑/ | + | [[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분류:승탑/완료]] |
2024년 3월 29일 (금) 09:4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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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당 법장이 신라 의상에게
의상이 실천한 평등공동체, 부석사
690년대 초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고희를 앞둔 의상(義相, 625-702)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표정에는 늘 숙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극한 신심, 뭇 중생에 대한 깊은 연민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스승이 법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그 간절함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아미타불을 등지고 앉지 않는 철저함도 말 없는 큰 가르침이었다.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이 수많은 제자들에게 의상은 거대한 산맥이었고, 파도가 그친 드넓은 바다였으며, 현세에 모습을 드러낸 보살의 화신이었다.
엄격한 골품제도를 요구하는 시대. 하지만 의상의 부석사는 평등공동체였다. 가난한 나무꾼인 진정과 노비 출신인 지통이 그랬듯 법에 뜻을 둔 이라면 누구든 받아들여졌다. 의상을 깊이 존경했던 국왕이 부석사에 토지와 노비를 주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편지를 보내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우리의 불법은 평등해 높고 낮음이 균등하며 귀하고 천함이 같은 도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논밭이 필요하고, 어찌 노복을 거느리겠습니까.”
터럭만치도 계율에 어긋나지 않고,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늘 침묵했던 의상. 그런 스승을 바라보며 제자들은 세상 그 무엇도 의상의 마음을 흔들 수 없다고 여겼다.
법장이 보내온 ‘화엄탐현기’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중국 종남산에서 온 승전이 가져온 『화엄탐현기(華嚴探玄記)』를 비롯한 여러 권의 책과 편지를 받고나서였다. 의상이 아이처럼 기쁨에 겨워 환히 웃는 게 아닌가. 바로 20년 전 동문수학했던 당의 법장(法藏, 643-712)이 보낸 것이었다.
측천무후에게서 현수(賢首)라는 법호를 받을 정도로 당나라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법장은 편지에서 의상에 대한 깊은 존경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은 부지런히 정진했건만 성공한 것이 없고 널리 폄이 적어 『화엄경』을 생각할 때마다 돌아가신 스승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또 스승님의 주해가 뜻은 풍부하지만 글이 간결해 후학들이 그 뜻을 알기 어려워 이를 풀어 쓰니 자세히 살펴보고 가르침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담겨 있었다.
법장의 서책을 받아든 의상은 침식도 잊은 채 책 읽기에 몰두했다. 제자들은 의상이 얼마나 감격스러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스승의 마음이 이 순간 그토록 그리워하던 도반 법장은 물론, 스승 지엄(智儼, 602-668)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리라는 것을 그들도 느꼈다.
지엄의 제자로 법장을 만나다
진골 출신으로 열아홉에 출가한 의상이 당나라로 건너간 것은 661년이었다. 두 번이나 구법을 함께 떠났던 도반 원효(元曉)는 도중에 깨달아 돌아갔다. 홀로 남은 의상은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병사들의 눈을 피해 항구로 향했다. 그곳에서 의상은 당나라로 떠나는 사신의 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구법의 대한 의상의 열정은 누구도 꺾지 못했다. 아름다운 선묘의 간절한 구애도 그의 발길을 돌려놓지는 못했다.
의상은 종남산으로 가는 길을 묻고 물어 중국화엄 2조 지엄을 만날 수 있었다. 지엄은 전날 밤 꿈에 해동의 큰 나무가 당나라까지 뻗었기에 올라가보니 마니보주가 빛을 내고 있더라는 얘기를 하며 의상을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였다. 의상은 지엄의 각별한 지도 아래 화엄의 오묘한 진리를 하나하나 체득해나갔다.
의상이 법장을 만난 것은 종남산에 도착한 지 오래지 않아서였다. 의상보다 열여덟이나 어린 그는 그때까지도 머리를 깎지 않은 재가자였다. 하지만 스무 살이었던 젊은 그를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16살 때 이미 대승의 진리를 깨닫겠다고 발원한 뒤 법문사 사리탑 앞에서 연비공양을 했다는 그는 총명함을 넘어 가히 천재적이었다.
지엄은 의상과 법장 두 사람이 장차 이 땅에 화엄의 꽃을 활짝 피울 인재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어느 날 조용히 의상과 법장을 불렀다. 그러고는 의상에게는 ‘의지(義持)’, 법장에게는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다. 의상은 수행자적인 실천수행에 뛰어났고, 법장은 학자적인 이론 탐구에 장점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중생을 위한 기도, 낙산사
의상이 지엄 문하에서 수학한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지엄은 의상에게 그동안 공부한 내용으로 화엄의 이치를 밝혀볼 것을 권유했다. 이에 의상이 며칠 동안 방문을 잠그고 완성한 것이 바로 30구 210자의 법성게(法性偈)와 그 글자들로 도인(圖印)을 만든 것이다. 지엄은 크게 감탄하며 이를 널리 유포할 것을 허락했다. 668년 7월 무렵, 의상이 46살 되던 해였다.
지엄은 그해 10월29일 입적했다. 한동안 종남산에 머물던 의상이 귀국한 것은 670년이었다. 신라에 화엄을 전해야겠다고 내심 다짐하던 의상에게 어느 날 당에 볼모로 와 있던 태종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이 은밀한 소식을 전해왔다. 당나라가 군사 50만을 보내 신라를 침공하려 하니 이를 신라에 알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의상은 서둘러 신라로 향했다. 『화엄경』에 통달한 법장은 한 해 전 측천무후가 창건한 태원사(太原寺, 후에 숭복사로 개칭)에서 삭발하고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됐다. 신라에 당의 침략 계획을 알린 의상은 귀국한 후 수도 경주가 아닌 낙산의 관음굴로 향했다. 전쟁이라는 피의 바다에 난파당한 사람들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고, 그들을 구제하고 위로할 수 있는 해답이 관음보살의 자비에 있다고 믿었다. 그곳에서 목숨을 돌보지 않는 지극한 기도로 관음보살을 친견한 의상은 낙산사(洛山寺)를 세우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화엄의 빛을 밝힌 의상
화엄을 펼칠 도량을 찾아 헤매던 의상이 이른 곳은 소백산이었다. 676년 2월, “세세생생 스님께 귀명해 대승을 배워 익히겠다”며 용이 된 선묘의 도움으로 의상은 이곳에 부석사를 창건했다. 그는 불당에 오직 아미타불상만 조성해 모시고 늘 정성을 다해 예배하고 발원했다.
의상은 부석사를 근본도량으로 삼아 화엄의 법을 펼쳤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은 그의 법석에 불법에 뜻을 둔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의상은 그들을 위해 때론 『화엄경』을, 때론 『법계도(法界圖)』를, 때론 『아미타경(阿彌陀經)』을 강의했다. 또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투사례(投師禮)』, 『서방가(西方歌)』 등 게송을 지어 가르치기도 했다.
간혹 의상은 세간의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갖기도 했다. 681년,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여러 성을 쌓고 궁궐을 단장한 데 이어 도성까지 새로 짓겠다는 얘기가 들려왔을 때였다. 의상은 국왕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밭에 선을 그어서 성이라고 해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할 것이요,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아무리 견고하고 긴 성이 있더라도 재앙이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된 부역에 시달려야 하는 백성들을 돕기 위한 의도였다. 왕은 곧바로 의상의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공사를 중지하도록 했다.
제자들로 이어진 화엄 연구
법장의 책과 편지를 받은 의상은 『화엄경탐현기』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열흘이 지난 뒤 의상은 제자 중 가장 기량이 뛰어난 진정, 상원, 양원, 표훈을 불렀다. 그리고 각각 5권씩 나눠준 뒤 이를 깊이 연구하도록 했다. 훗날 의상은 직접 제자들에게 『화엄경탐현기』를 강의하기도 했다.
귀국 후 지극한 신앙과 화엄의 밝은 빛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환히 밝혔던 그는 702년 세상과의 인연을 접고 그토록 원했던 서방정토로 떠났다. 또 당대 최고의 학승으로 후대 동아시아 화엄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법장은 측천무후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불교가 융성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편지는 의천의 『원종문류(圓宗文類)』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편지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오랜 세월 신라에 있던 이 편지는 11세기 송나라로 건너갔다가 1816년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우여곡절 끝에 이 편지는 대만을 거쳐 지금은 일본 천리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같이보기
- 당 법장과 신라 의상 지식관계망
주석
- ↑ "범어사의상대사영정",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지엄",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법장",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 김상현, 『신라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1991.
- 정병삼, 「8세기 신라의 불교사상과 문화」, 『신라문화』 Vol.25,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5, 189-207쪽.
- 최치원,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 이병도, 「당법장치신라의상서(墨蹟)에 관해서」, 『비부리아』 48.
- 소재영,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편지」, 『한남어문학』 Vol.13, 한남대학교 한남어문학회, 1987, 231-243쪽.
- 박보람, 「철학자 법장(法藏)의 정치가와 신이승(神異僧)으로서의 면모」, 『문사철』 Vol.20, 한국불교사연구소, 2010, 116-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