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무왕
신라 문무왕(新羅 文武王) | |
대표명칭 | 신라 문무왕 |
---|---|
한자표기 | 新羅 文武王 |
생몰년 | 626년-681년 |
이칭 | 김법민(金法敏), 법민왕, 문호왕 |
시대 | 삼국시대 |
배우자 | 자의왕후(慈儀王后) |
부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모 | 문명왕후(文明王后) |
자녀 | 신문왕(神文王) |
전임자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후임자 | 신문왕(神文王) |
목차
정의
신라 제30대 왕이다.
내용
생애 및 업적
문무왕(文武王)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650년(진덕여왕 4)에는 사신으로 당나라로 건너가 당나라 고종(高宗, 649~683)에게 진덕여왕(眞德女王, 647∼654)이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전했고, 대부경(大府卿)의 지위를 받고 귀국했다. 654년 무열왕(武烈王)이 즉위하자 태자에 책봉되었다. 660년(무열왕 7)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공격할 때에는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덕물도(德物島)로 가서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맞이했고, 두 나라 군대가 각각 해로와 육로로 진격해 사비성(泗沘城)에서 만나기로 협의했다. 그리고 웅진성(熊津城)에서 백제 의자왕(義慈王, 641~660)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도 공을 세웠다.[1][2]
661년 고구려를 정벌할 때 아버지 무열왕이 죽자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이어 김유신(金庾信)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백제의 잔적을 소탕, 664년 부인들에게 당 나라 식의 제복을 따르게 하며 당악(唐樂)을 배우게 하는 등 당 문화 수입에 노력하고, 666년에는 고구려 정벌에 착수하여 당나라에 원군(援軍)을 요청, 이적(李勣)이 랴오둥 행군 대총관(大摠管)으로 왔으며, 668년 8월 당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함락,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唐)이 백제ㆍ고구려 옛 땅에 도호부(都護府)를 두고 통치하려 하자, 신라는 당군과 싸워 당군을 북으로 쫓아 반도 통일의 성업을 이룩하였다.[3]
문무왕은 670년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속한 백제의 옛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80여 개의 성을 빼앗으며 당나라와 대립했다. 그리고 당나라에 반기를 든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확대했다. 검모잠(劒牟岑)이 지원을 요청해오자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익산)에 살게 했고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671년에는 석성(石城)에서 당나라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두어 백제의 옛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당나라의 수송선 70여 척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672년(문무왕 12)에는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백수성(白水城)과 석문(石門)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673년(문무왕 13)에는 당나라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북쪽으로 쳐들어오자 호로하(瓠瀘河)와 왕봉하(王逢河)에서 이를 물리쳤다. 674년(문무왕 14)에는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했다.[4]
674년에 신력(新暦)을 쓰고 675년 동인(銅印)을 제작하여 백관(百官)ㆍ주군(州郡)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676년에는 의상(義湘)으로 하여금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게 했다. 또 당나라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하여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을 원조, 677년에는 완전히 한반도 안에서 몰아냈다. 죽은 후 시체는 유언대로 화장하여 감은사(感恩寺) 동쪽 바다 대왕암(大王岩) 가운데의 물 속에 장사하였다. [5]
통일을 이룬 왕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왕으로 숭배되었다. 『삼국사기』의 ‘잡지(雜志)’에는 신라의 종묘(宗廟) 제도에 관해 설명하면서 아버지·할아버지와 함께 김씨 왕조의 시조인 미추왕(味鄒王), 무열왕과 문무왕을 5묘(五廟)로 정해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40대 애장왕(哀莊王, 800~809) 때에는 고조부부터의 4대와 시조를 5묘로 정했는데, 그때에도 무열왕과 문무왕의 2묘(二廟)를 별도로 세워 제사 지냈다고 전해진다.
국가체제정비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 잡찬(迊飡) 문왕(文王)을 비롯한 문훈·진복(眞福)·지경(智鏡)·예원(禮元)·천광(天光)·춘장(春長)·천존 등 8명의 인물이 행정 책임자로서 집사부 중시(中侍)를 역임하였다. 문무왕은 이 중에서 특히 문왕·지경·예원 등 자기 형제들을 중시에 임명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통일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6]
그리고 671년과 672년에 병부(兵部)·창부(倉部)·예부(禮部)·사정부(司正府) 같은 중앙 관부의 말단 행정 담당자인 사(史)의 인원 수를 증가시켜 업무 처리를 원활하게 하였다. 지방 통치를 위해서는 673년 진흥왕 대에 이미 소경(小京)을 설치한 중원(中原)에 성을 축조했으며, 통일 후인 678년에 북원소경(北原小京)을, 680년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어 왕경(王京)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신문왕 대에 완성되는 5소경제(小京制)의 기틀을 마련하였다.[7]
또한 삼국통일 후 신라 군사 조직의 기간은 신라 민과 피정복 민으로 구성된 중앙의 9서당(誓幢)과 지방의 9주에 설치된 10정(停)이었다. 9서당은 대체로 신문왕 대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9서당 중에서 백금서당(白衿誓幢)은 문무왕이 백제 지역을 온전히 점령한 다음 해인 672년에 백제 민으로써 조직한 것이다.[8]
또 같은 해에 장창당(長槍幢)을 두었는데 이것은 693년(효소왕 2)에 비금서당(緋衿誓幢)이 되었다. 이로써 9서당 편제의 기초는 이미 문무왕 대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밖에 672년에 기병을 위주로 하는 지방군제의 하나인 5주서(州誓)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9]
문무대왕릉
문무왕은 681년 음력 7월에 죽었으며, 유언에 따라 화장해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탁본이 전해지는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는 당시 나이가 56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무왕이 죽은 뒤에는 태자인 정명(政明)이 제31대 신문왕(神文王, 681∼692)으로 즉위했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죽기 전에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장례를 검소하게 하며, 불필요한 조세를 모두 폐지하고,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바꾸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나온다. 전설로는 문무왕이 용이 되었으며, 왕의 유해가 안치된 바위를 대왕석(大王石)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이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감은사(感恩寺)을 지었으나 완성시키지 못하고 죽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늘날 경주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의 문무대왕릉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10]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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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태종무열왕 | 신라 문무왕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신라 문무왕 | 신라 진덕여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라 문무왕 | 신라 신문왕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신라 문무왕 | 김유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라 문무왕 | 안승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라 문무왕 | 검모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라 문무왕 | 백제 의자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영주 부석사 | 신라 문무왕 |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신라 문무왕 | 경주 감은사 |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신라 문무왕 | 9서당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라 문무왕 | 해동금석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주 문무대왕릉 | 신라 문무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문무왕 표준영정 | 신라 문무왕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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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년 | 신라 문무왕이 출생하였다 |
650년 |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신라 진덕여왕이 쓴 태평송을 전했다 |
654년 | 신라 문무왕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
660년 |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공격하였다 |
661년 | 신라 문무왕이 즉위하였다 |
664년 |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 문화 수입에 노력하였다 |
668년 | 신라 문무왕이 평양성을 점령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
670년 | 신라 문무왕이 웅진도호부를 공격해 당나라와 대립하였다 |
666년 | 신라 문무왕이 고구려 정벌에 착수하여 당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
672년 | 신라 문무왕이 백금서당을 조직하였다 |
676년 | 신라 문무왕이 의상으로 하여금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게 하였다 |
677년 |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
시각자료
- 고종훈 한국사, "생생 한국사 문무왕", YouTube, 게시일: 2016년 8월 3일.
주석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문무왕", 민중서관,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문무왕",
『두산백과』online .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문무왕", 민중서관,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문무왕",
『두산백과』online .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문무왕", 민중서관,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문무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문무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문무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문무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문무왕",
『두산백과』online .
참고문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온이퍼브 편집부, 『역사속의 문무왕』, 온이퍼브, 2015.
- 권기경, 『문무왕과 대왕암』, 한솔수북,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