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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5일 (월) 16:36 판
개요
>[원화] 12년(817) 젠뽀가 죽었다.[* 기록 오류인데, 당시 젠뽀 치데송젠은 815년에 사망했다.] 사신 논걸염(論乞髯)이 와서 (알리니), 우위장군(右衛將軍) 오중기(烏重玘)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단균(段鈞)을 보내 조문했다. 가려가족(可黎可足)이 젠뽀에 등극했다. 오중기(重玘)가 부여준(扶餘準), 이참(李驂)과 함께 돌아왔다. 부여준(準)은 동명(東明)[* 660년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세운 5개의 도독부 이름 중 하나이다.] 사람으로, 본래 삭방기장(朔方騎將)이었고, 이참(驂)은 농서(隴西) 사람으로 정원(貞元) 초에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사신이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구해 돌아올 수 있었다. 조를 내려 부여준은 예왕부사마(澧王府司馬)로, 이참은 가왕우(嘉王友)로 삼았다. >- 신당서 권 196 상 토번전
당나라의 인물. 부여씨인 점을 볼 때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백제 유민 출신의 장수인 흑치상지처럼 대토번 전선에서 복무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생애
787년 당나라와 토번(티베트)은 평량에서 회맹을 가지게 되었는데, 토번이 회맹을 깨트리고 당군을 공격했다. 이 때 당군은 대패하고 60여명의 인사들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부여준 역시 이 때 토번의 포로로 잡혀 선주(鄯州)[*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칭하이 성 시닝시 일대로 비정된다.]에 구금당하게 되었다. 당시 부여준의 관직은 대장, 열장(列將)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817년 귀환 당시의 기록으로 보아 삭방 지역의 기병대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부터 30년 뒤, 817년 토번으로 보내진 우위장군 오중기, 단균이 돌아올 때 부여준은 이참과 함께 당으로 귀환하게 된다. 당나라는 부여준을 예왕부사마(澧王府司馬)로 임명했다. 예왕부사마로 임명한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기타
18세기 청나라 시기 편찬된 《고금도서집성》에도 등장한다. 정확히는 무왕, 의자왕과 함께 부여씨 인물로 당나라의 무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헌데 부여씨의 연원을 서술할 때, 오나라 부개왕(夫概王)이 초나라로 도망친 뒤, 그의 아들이 초나라에서 부여를 씨로 삼았다는 명대에 저술된 《풍속통》의 기록을 대고 있다.[*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선산고》에서 《풍속통》에 등장한 기록으로 소개하고 있다. 다만 《오주연문장선산고》에는 부개왕 일화는 소개하고 있지만, 부여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부여태비, 사타충의, 흑치준, 물부순, 예소사, 예인수, 난원경 등과 함께 8세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몇 안되는 백제계 유민이다. 위의 인물들의 생존시기가 8세기 전반에 끝나는 점을 고려하면,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에 등장한 백제계 당나라인이기도 하다.
부여준과는 상관없지만 2010년 방영된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계왕이 '부여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출처
[중국정사조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