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SixMinistriesOfJoseon"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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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의 관속: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조선시대의 장관, 판서(判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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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증조(曾祖) 정평(靖平) 공이 예조 판서가 되자 임금께, “판서는 육부(六部)의 으뜸인데도 관속(官屬) 한 사람을 거느리니 하관(下官)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청컨대 한 사람을 더해 주시옵소서.”라고 아뢰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시었다. 판서(判書)가 두 관속을 거느리게 된 것은 정평공 때부터 시작되었다.<br/><br/>'''我曾祖靖平公爲禮曹判書。啓曰。判書長於六部。而率皁隷一人。與下官無異。請加一人。上允之。判書兩皁隷。自靖平公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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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db.itkc.or.kr/inLink?DCI=ITKC_GO_1306A_0030_000_0010_2004_001_XML 『慵齋叢話』卷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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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판서 김병국의 입직: 19세기, 이윤선(李潤善)의 일기=====
 
=====호조판서 김병국의 입직: 19세기, 이윤선(李潤善)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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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3일 (토) 19:18 판

목차

육조거리와 출퇴근 풍경


광화문전로: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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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의 법전(法殿)은 남향(南向)을 하는데, 그것은 정사를 듣고 조회를 받는 바른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政府)와 추부(樞府)ㆍ6조(曹) 여러 관청이 모두 광화문 밖에 벌여 있어 동쪽에 있는 것은 서쪽을 향하고 서쪽에 있는 것은 동쪽을 향해 있다. 한갓 관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대부의 사가(私家)나 대청마루도 모두 동향이나 서향으로 되어 있어, 감히 남향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집에 있을 때라도 분수에 넘치게 남쪽을 향해 앉을 수 없어서였다. 도성(都城) 안에, 고가 세족(故家世族)의 집들이 바둑돌같이 벌여 있고 별처럼 흩어져 있으나, 모두 북향하여 있었는데, 중종 이후로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인심이 나날이 사치스러워져, 분수를 어기고 예도를 넘는 일이 끝이 없어 집의 좌향(坐向)이 남인가 북인가는 물을 것도 없었으니, 세도(世道)가 점점 못하여지고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王宮法殿南向。聽治朝饗之正位。故政府樞府六曹諸省。皆列光化門之外。在東者西其向。在西者東其向。非徒公府然也。士大夫私居之室。其廳事則皆或東或西。而不敢南向者。雖處家之時。不得僭分而面南也。都中故家世族之室。碁布星羅。皆是北向。及中廟朝以後。紀法漸解。人心日奢。犯分踰禮之事無有紀極。則家舍所向之南北。不暇問也。可見世道之漸降而人心之不古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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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窩雜說』


묘시 출근과 유시 퇴근: 18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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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관사에 묘시(卯時)[1]에 출사(出仕)하고 유시(酉時)[2]에 퇴근하는 법을 거듭 밝혔다.

申明各司卯〔坐〕酉罷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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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1권, 영조 8년(1732) 5월2일(무오) 기사


창덕궁 앞 출근 풍경: 17세기, 유몽인(柳夢寅)의 시
Quote-left.png 「남소(南所)[3]에서 감회를 쓰다(南所寫懷)」


궁궐에 새벽빛 밝아오니 고관들 조정으로 달려가네.
晨光騰紫闕, 峩弁趨彤墀

老卒鉥前塗, 舍我南廂陲
늙은 병졸이 앞길을 인도하여 나를 남쪽 전각 끝에 두었네.

懸盾警夜所, 植鎩句陳司
야간 경계하는 처소에서 방패 들고 궁궐 호위하는 관소[4]에서 창을 세웠네.

列帥盡虎頭, 酣戰眞雄姿
줄지어 선 장수는 모두 범의 두상[5]이요 싸움에 익숙하니 참으로 씩씩한 자태로다.

駑材眷蒭豆, 僚底摧雙眉
노둔한 사람은 말먹이나 돌보며 동료들 밑에서 두 눈썹 내렸네

東瞻騎省峙, 北矖粉署危
동쪽을 바라보면 병조가 우뚝하고 북쪽을 바라보면 분서(粉署)[6]가 높다랗네.

銅龍狀蠖略, 金馬光陸離
동룡문(銅龍門)[7]은 나아갈 듯한 모습이요 금마문(金馬門)[8]은 눈부시게 번쩍거리네.

昔我雲翮矯, 今何金骨緇
나도 예전엔 높이 나는 새처럼 굳셌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승려처럼 나약해졌나.

將星耀華髮, 擁甲如貙貔
대장은 백발이 빛나고 맹수 같은 갑사를 거느리네.

平生嗜文術, 浪讀古人詩
나는 평생 문장 좋아하여 그저 고인의 시만 읽었네.

從此學投筆, 六弢綜正奇
이제부터 투필(投筆)[9]을 배워서 『육도(六韜)』의 정기(正奇)[10]를 다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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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於于集後集』卷二 「南所寫懷」


광화문전로의 밤풍경: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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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조는 육조(六曹)에 숙직하는 낭관들은 달밤에 창기(娼妓)들과 어울려서 광화문 밖에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노래도 불러 밤새도록 마시고 담소하였으니, 이것은 태평 시대의 일이다. 한갓 육조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미원(薇垣 사간원의 별칭)의 관원도 또한 곡회(曲會 이리저리 꾸며대서 모임)를 일삼았고, 입직하는 밤에는 반드시 기생을 끼고 잤다. 새벽녘이면,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창밖에 서서 뵙기를 청하는데, 이것은 계집을 일찍 내어 보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세상 인심이 점차 박하여지고, 금법(禁法)이 점점 세밀하여져서, 육조에 숙직하는 풍습이 아주 바뀌고 미원에서 밤놀이하던 것도 또한 없어졌다. 그런데 숙직하는 날 밤에 일을 맡아보는 아전이 뵙기를 청하는 고사는 아직도 남아 있다.

祖宗朝。六曹直宿郞官等。月夜各雜娼物。會于光化門外之上。詩酒歌呼終夜談飮。是乃太平之事。非徒六部然也。薇垣之官亦以曲會爲事。入直之夜必携妓而宿。天將曉。掌務吏立於窓外而請謁者。欲令早出尤物也。其後世道漸淆。法禁漸密。六部上直之風頓變。薇垣夜飮亦廢。而獨於直宿之夜。掌務吏請謁古事猶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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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窩雜說』


예조정랑의 기생 감찰: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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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급제한 신생(申生)은 수염이 많으나 누렇고 크기가 작고 등이 굽었다. 그러나 성품이 부지런하고 분명하여 조금도 남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예조 정랑이 되어 기생들을 검찰(檢察)할 때 너무 각박하여 기생들이 모두 노래를 지어 조롱하였다. 또 순채와 송이버섯을 싫어하며 “이것이 무슨 맛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느냐.” 하였다. 친구가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신군은 특이한 사람이다.” 하였다. 또 꾀꼬리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좋도다. 갹조(噱鳥)의 소리여.”하므로, 친구들이, “이는 꾀꼬리인데 어찌 갹조라 하느냐.” 하니, 신생이 말하기를, “그 울음이 갹갹하니 이는 갹조요, 꾀꼬리가 아니다.”하자, 친구들이 모두 그 고지식함을 웃었다. 이때에 어떤 이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年申生。髥多而黃。軆短背曲。然性度勤核。不少假借於人。嘗爲禮曹正郞。檢察伶妓太刻。妓皆作歌嘲之。又性惡蓴菜松菌曰。此物有何滋味。而世人嗜之。僚友皆笑之曰。申君不近人情者也。又聞鶯聲。乃曰好哉噱鳥之聲。僚友曰此是黃鶯。何謂噱鳥。申曰其鳴噱噱。此乃噱鳥。非黃鶯也。僚友皆笑其膠固也。時有作詩者曰。

나뭇가지에는 갹갹하고 우는 꾀꼬리 머물고, 순채와 송이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네.
樹頭𠽁𠽁黃鳥止, 蓴菜松菌非我喜

붉은 수염의 등이 굽은 작은 남아는, 이원(梨園)의 기생을 검찰할 줄 아는구나.
紫髥曲脊小男兒, 猶知檢察梨園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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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慵齋叢話』卷八


호조 서리 이윤선(李潤善)의 업무와 일상


호조 아전 이창린 등의 옥안 판하: 18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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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의 아전 이창린(李昌麟)과 김처신(金處信)이 대궐에 바칠 것이라고 칭탁하고 수리계(修理契)의 종이를 훔쳐내려고 거짓 보고를 하여 계단(啓單)을 받았다가 일이 들통났다. 옥에다 가두고 끝까지 심문하니, 김처신은 꾀를 내어 시킨 자이고 이창린은 직접 죄를 범하여 거짓으로 전한 자였다. 형조가 이창린을 정범(正犯)으로 삼아 옥안을 갖추어 계문하니, 판하하였다.

"법관이 법을 다룰 때에는 털끝만한 것도 다투며, 관청 문서에는 본래 격례가 있는 법이다. 사형죄에 대한 옥안은 법이 매우 중대하여, 글자 하나 낱말 하나를 놓을 때에도 반드시 더할 수도 없고 덜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변통할 수도 없게 해야 한다. 그런 뒤라야 범인을 승복시킬 수가 있고 옥사의 체모를 더욱 높일 수가 있는 것이다. 무릇 사형수에 대한 옥안(獄案)을 형조에서 뽑아 적어 아뢸 때에는 죄수의 이름 아래에다 죄목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쓰고 문서의 윗 부분에다 쪽지 글을 적은 누런 종이를 붙이는데, 그 법의 엄하기가 마치 죽은 사람에 대해서 죽은 원인을 조사하여 기록한 시체 검사 대장과 같다. 이것을 가지고 자복을 받고 이것을 가지고 법률을 상고하고 이것을 가지고 옥사를 완결짓고 이것을 가지고 재심을 하는 것이다. 한 글자 한 낱말의 경중과 출입에 따라서 법 적용이 달라지는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런데 지금 이 옥안에 붙인 황지(黃紙)를 보니, ‘죄인 이창린과 김처신이 전지(傳旨)를 거짓 칭탁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친 일’이라고 하였고, 원래의 옥안에 들어 있는, 호조에서 보내온 공문 및 본조에서 받은 각자의 공초와 완결지은 결론을 살펴보니, 혹은 ‘하교(下敎)라고 칭탁하였다.’ 하고 혹은 ‘허위로 전교(傳敎)를 전하였다.’ 하고 혹은 ‘전지(傳旨)를 거짓으로 전하였다.’ 하고 혹은 ‘전지를 속여서 전하였다.’라고 하였다. 위 아래가 서로 뒤바뀌고 앞뒤가 모순되어 황지에 적힌 죄명과 마디마디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비록 원래의 옥안에 적힌 말을 가지고 확정하여 법률을 적용하려고 하더라도 또한 어느 말을 따르고 어느 말을 버려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대개 전지라는 것과 전교라는 것과 하교라는 것은 체모가 각기 다르다. 벼슬을 내리거나 상을 주거나 형벌을 가하거나 사형을 시키는 일을 각 해당 관사에 내릴 때에 교서를 전하여 내보내면 승지가 대략 추려서 적어 내리고 당후 주서(堂后注書)가 자세히 적어서 접는 문서로 만들어 계하받아 내리는 것을 유음 전지(流音傳旨)라고 한다. 주서가 또 베껴 적어 인장을 찍고 승지가 벼슬 이름을 갖추어 적은 다음 해당 관사에 내려 보내는 것을 하음 전지(下音傳旨)라고 한다. 승지가 임금 앞에서 임금이 말로 하유하는 것을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 승지가 반포하는 것이라든지 사알이 각 담당 승지에게 전하는 것을 담당 승지가 글로 써서 반포하는 것을 전교(傳敎)라고 한다. 경연에 나온 신하들이 직접 임금을 뵙고 들은 것을 물러나와 받들어 행하는 것을 하교(下敎)라고 한다. 또 혹 승전색이 말로 전하는 하교를 받아 내오면 여섯 승지들이 모여 앉아 글로 적어서 전하되 ‘승전색 구전 하교’라고 쓰고 적어서 조지(朝紙)에 반포하는데, 그 체모는 또한 전교와 같다. 왕의 말은 실과 같아서 그 실이 풀려 나오듯이 나오는데 그 말을 사관이 적어서 팔방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한 마디 분부나 한 마디 호령도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궐 안으로 들여오는 물품들을 호조 및 각 관사에서 가져다 쓰는 일은, 전에는 단지 중사(中使)가 전교를 듣고 분부하는 규례만 있었는데, 병신년 이후로는 표지(標紙)로 계하하는 법을 별도로 세웠으므로 각사가 표지가 없으면 거행할 수가 없고 거행한 뒤에는 또 들여온 물품 단자가 있어서 그것으로 빙증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표지를 계하하는 일 이외에 또 정원의 담당 승지로 하여금 출납을 감독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대개 안과 밖을 엄하게 구분하고 궁중과 부중을 하나로 보려는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 표지의 법식을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각 관사의 서리들과 각종 공물을 바치는 백성들까지도 이 제도를 모르는 자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하찮은 호조 서리 하나가 감히 표지도 없는 물품으로 궐내로 들여갈 것이라고 거짓 칭탁을 하였는데 해당 조에서 진짜 하교인 줄로 알았다는 것이 어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더구나 견양초주지(見樣草注紙)는 두꺼운 종이로서 바로 수리(修理)하는 데에 쓰는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10여 권을 가져다 쓴 적도 없고 또한 한 번도 도배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2백 권이나 되는 종이를 장차 어디다 쓴단 말인가. 이와 같이 알기 쉬운 일을 눈을 멀쩡히 뜨고 속임수에 넘어갔으니, 해조의 일은 참으로 너무나 한심스럽다. 그런데도 경의 조에서 올린 계첨에는 ‘전지를 가탁하였다.’는 것으로 두 죄수의 죄목을 삼고 있다. 종이를 궐내로 들여오는 일에 어찌 전지가 있겠는가. 주제를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다. 설령 해조에서 보낸 공문이 처음부터 이와 같이 잘못되어 있었더라도 마땅히 다시 공문을 주고받으며 바로잡았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바로잡기는커녕, 이에 사형죄를 적용하는 옥안에다가 윗부분에는 ‘전지를 가탁하였다.’라고 해놓고는, 완결한 결론 부분에 가서는 문득, 보내온 공문의 공초에도 없는 ‘전교를 허위로 전하였다.’는 말로 경들이 스스로 고쳤다. 또 ‘전교를 허위로 전한 죄는 바로 사형에 해당합니다.’라고 하며 전례대로 결안 취초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다만 한 때의 불찰로만 논할 수 있겠는가. 이 길이 한번 열리면, 초록하여 아뢰는 죄명이라든지 죄수의 옥안에 붙이는 황지라든지 살인 사건에서 죽은 원인을 조사한 문서 등이 모두가 쓸모없는 빈말이 될 것이고, 한 형관(刑官)의 의견으로 멋대로 원래의 옥안을 뭉개버리고 수시로 바꿀 것이니, 이로부터 생길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짜[假]’라는 것과 ‘허위[僞]’라는 것과 ‘속임수[詐]’라는 것도 글자의 뜻이 다르다. ‘가짜’라고 하는 것은 진짜 문서가 있는데 그것을 빙자하여 거짓 칭탁을 하는 것을 말하고, ‘허위’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런 일이 없는데 헛되이 날조하는 것을 말하고, ‘속임수’라고 하는 것은 속에 간사한 마음을 감추고 사실이 아닌 일로 속이는 것을 말한다. ‘가짜’와 ‘속임수’는 조금 가볍고 ‘허위’는 아주 무거운 죄이다. 그런데도 말을 이리저리 바꾸며 뒤섞어 놓았으니 장차 무엇을 표준으로 삼겠는가. 규례라는 것은 조정이 규범을 지켜 유지해 가는 기준이다. 경들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전지와 전교도 분별하지 못하고 임금에게 글을 아뢰는 규례에 대해 어둡기가 그 모양인가. 하나의 옥안에 대한 잘잘못이야 그래도 하찮은 일인 것이다. 대개 그날의 일은 전교도 아니고 하교도 없었으니, 이것이 과연 표지에 계자를 허위로 찍은 것인가? 해방의 분부를 허위로 전한 것인가? 계하한 표지가 위조한 것이 아닐 것같으면, 과연 승지가 들은 전교를 알린 것이라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해당 죄수들은 단지 정원의 분부를 허위로 전해준 죄만 있는 것인가? 해조도 또한 어찌 계하한 표지를 보지도 않고 다만 담당 아전이 입으로 전하는 말만 듣고서 갑자기 시행할 이치가 있는가? 이 한가지 조항은 처음부터 엄밀하게 조사하여 명백하게 하나로 통일시킨 뒤에야 옥안을 완성할 수가 있고 죄목을 정할 수가 있다. 갇혀 있는 죄수들을 도로 해조로 돌려 보내 다시 끝까지 조사하여 수정한 뒤에 완결짓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단지 해조에서 보낸 공문을 고쳐서 보내게 하여 그 보내온 공문을 가지고 죄수들에게 공초를 받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과연 허위로 전한 일이 단지 구전(口傳)이라고 한다면, 구전을 위조하는 것에 대한 죄목이 법률에 있는가? 두 죄수를 가지고 논하더라도, 처신은 죄가 쌓인 교활한 아전이고 창린은 새로 들어온 간사한 무리이다. 창린은 그래도 두려워할 줄을 알아서 나중에 계단(啓單)을 지웠는데, 처신은 먼저 분수 넘치는 욕심을 품었고 뇌물로 주는 돈을 혼자서 받았다. 그 정상을 따져 보자면 처신이 주모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창린은 추종자가 되어야 하는데, 경의 조에서는 한갓 말재간 있는 처신의 공초만을 인하여 창린을 정범으로 규정하는 옥안을 억지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판결하는 법률의 본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경들은 법 조문에 어두운 법관들이므로 법을 적용하면서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필시 별 어려움 없이 해낼 것이다. 그래서 경들에게 다시 넘겨서 잘 처리할 바탕을 삼도록 하는 바이다. 옥사를 결단하는 요체는, 머물려 둘 수가 없는 것이 불과 같아서 감히 지체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재계하기 전에 수정하여 아뢰도록 하라."

또 아뢰었다.

"어두운 방에서 꾀를 낸 것이 비록 처신이 주장한 일이라고는 하겠으나, 공공연한 자리에서 거짓말로 보고한 것은 창린이 직접 저지른 죄입니다. 그 말이 더없이 중대하고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린은 확정하여 주모자로 삼고 처신은 참작하여 다음 법률을 적용하였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법의 뜻에 합당합니다."

판하하였다.

"영덕(盈德)의 검관(檢官)이 시체를 검사한 대장에 죽은 원인을 찔리고 맞아서 죽었다고 난잡하게 달아 적었기 때문에 엄한 처벌을 받기까지 하였다. 경들이 지금 이창린과 김처신 등의 문안(文案)에 처음에는 ‘전지를 가탁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 하였다.’고 달아 적었다가 두 번째에는 ‘하교를 허위로 전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고 하였다.’고 고쳐 적은 것이 영덕의 시체 검사 대장에 죽은 원인을 조사하여 적은 것과 어쩌면 이다지도 서로 비슷한가. 가탁하였다거나 허위로 전하였다는 것이 하나의 죄가 되고,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고 하였다는 것이 또 하나의 죄가 된다. 영덕의 사건의 죽은 원인을 조사한 대장에는 맞아죽었다라고 먼저 말해 놓고 겸하여 찔려죽었다라고 하여 참으로 종잡을 수가 없었으나 그 옥안에서는 정범(正犯)이 단지 김득손(金得孫) 한 사람 뿐이었다. 비록 하나의 옥사에 두 사람의 주범이 있더라도 안 될 것은 없겠으나, 이 옥사는 이창린과 김처신이 형과 아우처럼 짝이 되어 저지른 일이라고 할 만하고, 더구나 두 놈이 두 가지 죄에 각각 꾀를 낸 자와 일을 도와준 자라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옥사에 어찌 두 사람의 주범이 있겠는가. 설령 훔치려고 한 죄로는 사형에까지는 이르지 않고 허위로 전한 죄는 죽여도 또한 아까울 것이 없다고 하여, 훔치려고 한 한 가지 죄안은 지워버리고 단지 허위로 전한 죄안만을 가지고 정범(正犯)을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꾀를 낸 김처신을 추종자로 삼고 말을 전한 이창린을 주모자로 삼았으니, 이와 같이 법률을 적용한 전례가 과연 어떤 형법 서적에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달아 적어서 아뢴 죄명을 바꿀 수 없는 것은 시체를 검사한 대장에 죽은 원인을 조사하여 적은 것을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한 번 공문을 보내자 ‘가탁하였다.’는 말이 변하여 ‘허위로 전하였다.’가 되고 ‘전교’가 변하여 ‘하교’가 되었다. 경들이 만약 법이란 털끝만큼이라도 마음대로 올리거나 내릴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면 이치로 보아 당연히 한번 보고는 깜짝 놀라서 관문(關文)을 돌려 보냈어야 하는 것이거늘, 그런데 도리어 개정한 문안으로 추문하여 공초를 받고는 이어서 조율하기를 청하였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와 같은 옥사의 체모는 보지 못하였다. 무릇 죄를 따져 법률을 적용하는 규정에 있어서는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분부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죄율을 거론하는 것이고 사형수에 대해서는 더욱 특별히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결안(結案)을 할 때에는 단지 결안만 받들어야 하고 다시 상복(詳覆)이나 계복(啓覆)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적용할 법률의 명칭을 적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들이 갑자기 《대명률(大明律)》의 사위조(詐僞條)를 끌어다가 이론을 갖춰 죄안을 만든 것은 어찌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닌가. 가령 경들의 말처럼 이 법률이 합당한 법률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적용할 법률은 곧 중대한 사형죄이다. 어두운 방에서거나 공공연한 자리에서거나를 막론하고 꾀를 낸 자는 당사자가 있으니, 거짓으로 보고한 자는 마땅히 일을 거들어준 자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다만 정리(情理)가 조금 무겁다고 하여, 일을 거들어 준 자를 꾀를 낸 주모자로 삼았으니, 또한 과연 말썽이 날 염려가 없겠는가. 경들이 법을 적용한 글에 ‘조지(詔旨)를 속임수로 전하였다 운운.’ 하는 말이 있는데, 조지라는 것은 입으로 내린 분부가 아니니, 처음 아뢸 때에 사용한 ‘전지를 가탁하였다.’고 한 죄명은 그래도 그럴 수 있겠으나, 구전 하교에다가 견주는 것은 단락이 판이할 뿐만이 아니다. 형조에 어떤 놈의 법률을 농간하는 율관이 있어서 경들을 그와 같이 잘못 가르쳤는가. 이 죄수의 죄가 사형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면 어찌 해조로 다시 보낼 수가 있겠는가. 예전 선왕조 때에 수교(受敎)를 내려, 사형수가 포도청에서 승복을 했다가 형조에서 공초를 바꾸자 다시 포도청으로 이송을 하여 공초를 일치시킨 일에 대한 전례를 게시하도록 하고,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엄히 금단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조정에서도 등골이 오싹하다. 어느 겨를에 경들이 즉시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깊이 책망하겠는가. 이 때문에 경들에 대해서는 모든 일을 조금도 거론하지 않고 불문에 부치되, 단지 법을 농락한 율관에 대해만은 반좌율을 적용하여 처리하고자 한다. 우선 엄히 가두어 두고 재계 후의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라. 시체의 죽은 원인을 검사한 기록을 바꿀 수 없다면 계첨(啓籤)도 또한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두 번째 계사의 황지는 불태우도록 하라. 첫 공초에 전지라고 한 것이 진짜 전지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다시 해조로 보내어 철저히 조사하여 돌려보내오도록 하고, 돌려보내오기를 기다렸다가, 황지 가운데의 전지라는 두 글자를 고쳐 쓴 연유를 간단히 보고하고, 그런 뒤에 문안을 수정하고 정범을 다시 결정해서 옥안을 작성하여 다듬어 아뢰도록 하라."

또 아뢰었다.

"이창린의 공초에, ‘과연 하교인 양 거짓 보고하였는데, 전지와 하교를 구분하지 못해서 이렇게 잘못 대답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김처신의 공초에, ‘비록 궐내에 들일 것인 양하여 훔쳐 내기로 함께 모의하였으나 거짓으로 보고한 사연은 모두가 창린이 한 짓이고 보면 하교와 전지에 대해서는 참으로 알 길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전지라는 두 글자가 이창린의 첫 번째 공초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이미 사알(司謁)의 구전(口傳)을 들었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전지가 아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혹 위조한 표적이 있었다면 어찌 그 자리에서 잡히지 않았겠습니까. 그가 잘못 대답한 대로 따라가다가 해조와 신의 조가 구별을 못했습니다만, 창린의 공초에 이미 ‘하교인 양 거짓 보고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계첨 황지에 ‘전지를 가탁하였다[假托傳旨]’라고 한 넉 자는 실로 개정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래서 ‘하교를 허위로 전하여 관청의 재물을 훔치려 하였다.’라고 고쳐 썼습니다. 문안은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수정하여 입계하겠습니다."

판하하였다.

"호조의 아전은 궐문을 밀치고 대궐로 들어 올 수 없으니, 이른바 하교라는 것은 반드시 듣고서 전한 내력이 있을 것이다. 어느 방 승지에게서 들은 것처럼 말한다고 하던가? 승지 이외에는, 병신년 이후로는 구전 하교를 승전색 등으로 하여금 전하게 한적이 없다. 이미 확고한 법이 이루어져 호조의 위아래 관원들이 모두 알고 있다. 호조의 아전이 비록 이것을 빙자하려 하더라도 해조 당상 이하가 누가 믿고 들어줄 자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교를 허위로 전한다는 것이 어찌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설령 잘못 전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니, 그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또 응당 하교했을 법한 일을 잘못 전했다거나 허위로 전했다고 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참으로 가죽 없는 털과 같이 허무맹랑한 말이다. 이 한 조항은 속히 조사하여 바로 문안을 작성하고 수정하여 아뢰도록 하라."

戶曹吏李昌麟、金處信, 假稱內入, 謀竊修理契紙物, 瞞告受啓單, 事覺。 繫獄究問, 處信發謀指使, 昌麟身犯僞傳。 刑曹以昌麟爲正犯, 具案啓聞, 判曰: 司寇關石, 錙銖是爭, 公家文書格例自有。 一律之案, 三尺至重, 下一字措一語, 必須加不得減不得, 移易不得, 闊狹不得。 然後犯者, 可使自服, 獄體可以益尊。 凡死囚之案, 刑曹錄啓單, 抄罪目於囚名之下, 貼黃標書於啓牘之上, 其法之嚴, 如屍帳之實因。 以此而納款, 以此而考律, 以此而完決, 以此而詳覆。 卽其一字一語之輕重出入, 而法以之隨焉, 關係顧何如? 則今觀此案所貼之黃紙, 有曰: ‘罪人李昌麟、金處信, 假托傳旨, 謀竊公貨事云云。’ 而及考原案中戶曹文移及本曹所捧各人等供招, 完(結)〔決〕 結(錢)〔語〕 , 則或曰: ‘托稱下敎。’ 或曰: ‘僞傳傳敎。’ 或曰: ‘假傳傳旨。’ 或曰: ‘詐傳傳旨。’ 上下互換, 前後矛盾, 非但與貼黃罪名, 節節相左, 雖欲以原案措語, 執定擬律, 亦未知孰從而孰違。 夫傳旨也傳敎也下敎也, 體段各異。 爵賞刑殺之下各司者, 傳敎書出後, 承旨抄出書下, 堂后注書, 細書摺貼啓下, 謂之流音傳旨。 注書又謄草蹯印, 承旨具銜下該司, 謂之下音傳旨。 承旨於榻前, 以呼寫之口諭, 承書頒布與或以司謁之傳于各該房, 以文字書頒, 謂之傳敎。 登筵諸臣, 面承耳聆, 退而奉行, 謂之下敎。 又或承傳色奉口傳下敎而出, 則六承旨廳坐, 以文傳書, 書以承傳色口傳下敎, 書頒朝紙, 其體段亦與傳敎同。 王言如絲, 其出如綸, 史官書之, 八方傳之。 朝家所以不敢或忽於一辭敎一號令之間者。 至於內入物種之戶曹及各司取用者, 在前只有中使聽傳敎分付之規, 丙申以後, 別立標紙啓下之法, 各司無標紙, 則毋得擧行, 擧行後又有內入單子, 以憑準之。 而啓標之外, 又令政院該房, 句管出納。 蓋出於嚴內外一宮府之苦心。 標紙之式, 行之已久, 各司吏胥各貢之小民, 亦莫不聞知。 則今此幺麿一曹吏, 敢以無標紙之物, 假稱內入, 而該曹之認以眞箇下敎者, 是豈成說? 況見樣草注紙, 乃是品厚紙地, 卽修理所用也。 御極後未(常)〔嘗〕 取用十許卷, 亦無一番塗褙之擧。 則二百卷紙地, 將用於何處乎? 如此易知之事, 公然見瞞, 該曹事, 固已萬萬寒心。 而卿曹啓籤, 乃以假托傳旨四字, 作爲兩囚之罪目。 紙物內入, 豈有傳旨? 可謂外題之外題。 藉使該曹文移, 自初若是錯誤, 事當往復釐正。 而釐正姑勿論, 乃於一律之案, 上段則旣曰假托傳旨, 忽於完決結語, 以文移供招所無之僞傳傳敎, 卿等自改之。 又曰: ‘傳敎僞傳, 乃是極律。’ 仍請依例結案取招者, 豈可但以一時不察論? 此路一開, 則錄啓之罪名, 囚案之貼黃, 殺獄之實因, 皆爲無用之空言, 而將以一刑官意見, 惟意毁畫, 隨時變幻, 其流之弊, 有不可言。 且曰假曰僞曰詐, 字義亦有分屬。 假者, 眞有文跡而憑藉假托之謂也, 僞者, 元無是事而架虛作僞之謂也, 詐者, 隱匿奸情, 詐不以實之謂也。 假與詐稍輕, 而僞爲最重。 則橫竪說去, 混圇無別, 亦將何以準的乎? 格例者, 朝廷之所防範而維持者也。 卿等位躋崇顯, 而淆雜於傳旨傳敎之別, 奏御文字, 昧例乃爾? 一案得失, 猶屬餘事。 大抵伊日事, 旣非傳敎, 又無下敎, 則此果標紙之僞踏啓字乎? 僞傳該房之分付乎? 啓下標紙, 似非僞造, 則果以承旨聽傳敎知委云乎? 然則該囚, 只有僞傳政院分付之罪乎? 該曹亦豈有不見啓下標紙, 只聞該吏口來之傳, 而遽然施行之理乎? 此一款, 從頭嚴査, 明白歸一然後, 案可成而罪可勘。 在囚各人等, 還送該曹, 更爲究覈修正後, 完決爲當乎, 只該曹文移, 使之改送, 以其文移, 捧招於諸囚爲當乎? 果使僞傳之事, 只是口傳云, 則口傳僞造, 於律有之乎? 雖以兩囚論之, 處信, 稔惡之猾吏也, 昌麟, 新入之奸徒也。 昌麟則猶知畏㤼, 追爻啓單, 處信則先萌濫慾, 獨捧賂錢。 究其情節, 則處信當爲造謀, 昌麟當爲隨從, 而卿曹徒因處信粧撰之招, 硬作昌麟正犯之案者, 亦未知果合於判律之本意乎。 卿等卽眛於法文之法官, 操縱低仰, 必當無難。 故付之卿等, 以爲從長處之之地。 斷獄之要, 不留如火, 莫敢遲滯。 期於坐齋前修啓。 又啓言: 暗室造謀, 雖曰處信之主張, 公座瞞告, 實是昌麟之身犯。 語涉莫重, 罪關極律。 故昌麟則定爲首犯, 處信則勘以次律, 允合法意。 判曰: 盈德檢官之屍帳實因, 以被剌打, 雜亂懸錄, 至被嚴勘。 則卿等之今於李昌麟、金處信等文案, 初以 ‘假托傳旨, 謀竊公貨’ 懸錄, 再以 ‘僞傳下敎, 謀竊公貨’ 改錄者, 與盈德屍帳實因, 何相似也? 假托或僞傳, 爲一件罪, 謀竊公貨, 又爲一(律)〔件〕 罪焉。 盈德實因之先言打, 兼言剌, 固甚疑眩, 而該案正犯只是金得孫一人。 雖無一獄兩犯之嫌, 而此獄則昌麟、處信可謂兄弟發動, 且況兩箇漢, 於兩件罪, 各有造謀加功之輕重。 然則一獄寧有兩犯乎? 設以謀竊之罪, 不至於極律, 僞傳之罪, 誅之亦無惜, 刪却謀竊一件罪, 只就僞傳罪單, 定正犯, 造謀之處信爲從, 傳言之昌麟爲首, 似此律例, 果未知在於何許刑書? 錄啓罪名之不得移易, 與屍帳實因同然。 則一番文移, 假托變爲僞傳, 傳敎變爲下敎。 卿等若知金石之不可毫忽低仰, 則理當一見瞠然, 還送關文, 而反以改定之本, 發問取招, 仍請照律, 往古來今, 未見如許獄體。 凡擬律之規, 議處回下之後, 始乃擧論, 一律之囚, 尤有自別。 結案時只捧結案, 至于詳覆啓覆, 然後始書律名。 則卿等之忽提《大明律》詐僞條, 論理措辭者, 豈不萬萬駭然? 借如卿等跋語, 此律爲當律, 其律卽一律也。 卽無論暗室與公座, 造謀者自有其人, 則瞞告者當爲加功。 特以情理之較重, 加功換作造謀, 亦果無開棘之慮乎? 卿等所照律中, 詐傳詔旨云云, 詔旨, 卽非口敎用之, 於初啓, 罪名之假托傳旨, 尙可擬諸, 口傳下敎, 段落不啻判異。 曹中有何物舞弄法文之律官誤訓, 卿等乃爾? 此囚之罪, 早知爲一律, 則何可更送該曹乎? 昔在先朝受敎, 揭令一律囚之, 承款於捕廳, 變招於刑曹, 而更送歸一之例, 嚴加禁斷, 到今思之, 朝家還甚悚然。 何暇深責卿等之不卽提醒乎? 以是卿等則竝與問備而不爲擧論, 而只弄法律官, 欲準反坐律處之。 爲先嚴囚, 以待過齋後處分。 實因不可換錄, 則啓籤亦不可改書。 再啓黃紙則付丙。 初供中傳旨之眞箇傳旨與否, 更送該曹, 使之究覈還送, 待還送黃紙中傳旨二字, 改書緣由草記, 然後修正文案, 更定正犯, 成案修啓。 又啓言: 李昌麟供: ‘果以下敎樣瞞告, 而傳旨與下敎, 未能區別, 致此錯對。’ 金處信供: ‘雖以內入樣, 同謀於偸竊, 而瞞告辭緣, 皆是昌麟所爲, 則下敎與傳旨, 實無知得之路。’ 大抵傳旨二字, 雖出昌麟初供, 而旣聞司謁口傳云, 則其非傳旨無疑。 若使渠, 或有僞造之標跡, 則豈不現捉乎? 隨其錯對, 而該曹與臣曹之不能區別, 而昌麟所供, 旣以爲下敎樣瞞告, 則啓籤黃紙中, 假托傳旨四字, 實合釐正。 故以僞傳下敎, 謀竊公貨改書。 而文案則請待批下修正入啓。 判曰: 曹吏無以排金門入紫闥, 則所謂下敎, 必有聞而傳之來歷。 聞於何房承旨樣爲說云乎? 承旨之外, 丙申後, 未嘗以口傳下敎, 使承傳色等傳之者。 已成金石之典, 曹中上下皆知。 曹吏縱欲憑藉, 該堂以下, 孰有信聽者乎? 然則下敎之僞傳, 豈非外題? 設或錯傳, 係是無於例之事, 當句內不成說。 又不可以應爲下敎, 事之錯傳, 或僞傳論。 可謂皮之不存。 此一款, 斯速究竟, 卽爲成案修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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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51권, 정조 23년(1799) 5월22일(기묘) 기사


예조 낭관 권상일(權相一)의 장생전 수리 일지


예조정랑 임명과 청탁의 정황


예조정랑 제수: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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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사를 행하였다. 내가 예조 정랑 수망(首望)에 올라 낙점 받았다. 부망(副望)과 말망(末望)은 홍구(洪構)와 여길(汝吉)이었다. 예조 참판에 유명홍(兪命弘), 예조 참의에 홍치중(洪致中), 승지에 김상원(金相元), 공조 참판에 김연(金演), 병조 정랑에 서종섭(徐宗燮), 사성에 조언신(趙彦臣),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이봉상(李鳳祥), 사복시 정에 송성명(宋成明), 장악원 정에 황선(黃璿) 등이 임명되었다. 밥을 먹은 뒤에 여길이 만칙의 처소에 왔기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명언도 왔다. 또 장몽주(張夢舟) 아저씨에게 문병을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흩어져 돌아갔다.

今日爲政事。吾以禮正首望蒙 点。副末望洪構及汝吉矣。禮參兪命弘參議洪致中承旨金相元工參金演兵郞徐宗燮司成趙彦臣楊州牧使李鳳祥司僕正宋成明掌樂正黃璿。食後汝吉來萬則舍。往話。明彦亦來。且向張夢舟叔病所。日暮散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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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1월 21일자 일기


사은숙배: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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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대궐에 나아가 사은숙배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규례대로 예조 판서 권상유(權尙游)에게 명자(名刺)를 올리고, 그길로 경옥(景玉) 어른을 뵈었다. 여길(汝吉)도 왔다. 발길을 돌려 참판의 집에 가서 명자를 들였으나 와병 중이라서 만나지 못하였으니, 다행이다. 또 우윤 신경제(申慶濟)를 찾아뵈었는데, 신일신도 밖에 나갔다가 막 돌아왔기에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曉詣 闕謝 恩。食後以規例投刺于禮判權尙游。因拜景玉丈。汝吉亦來。轉到參判家納刺。以病臥不見。可幸。且拜申右尹慶濟。日新亦出外纔還。穩話而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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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1월 23일자 일기


잡과 청탁의 정황: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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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범(韓士範) 형제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관(譯官)과 의학(醫學) 대여섯 사람이 친구들의 청탁 편지를 들고 찾아왔다. 그들의 취재강(取才講)[11]을 예조에서 맡아보기 때문이다.

韓士範兄弟來話。譯官及醫學五六人。持親舊請札來見。以渠輩取才講。禮曹次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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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1월 22일자 일기


잡과 청탁의 풍조1: 18세기, 민진후의 시장(諡狀)
Quote-left.png 「좌참찬 민공 시장(左參贊閔公諡狀)」

인재를 추천하고 군교(軍校)를 선발할 때에는 조금의 사심도 용납하지 않아 용감하고 재주 있는 자들이 공의 이름만 듣고도 반드시 이르니, 막하에 인재를 둠이 여러 군영 중에 으뜸이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인재를 일으키는 것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권장하여 성취시켜 주는 데에 달렸는데, 근래에는 백이면 백 사사로운 뜻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없다. 심지어 사자관(寫字官)ㆍ화원(畫員)의 취재(取才)와 의관(醫官)ㆍ역관(譯官)ㆍ율관(律官)에 응시하는 자까지도 대부분 청탁을 받아 뽑으니, 술업(術業 천문ㆍ지리 등의 기술업)이 형편없어진 것이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조와 형조, 승문원ㆍ내의원ㆍ사역원 등의 직임에 있을 때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를 힘껏 다하니 그 소속 관원들이 흥기하였다.

剡薦人才。簡擇軍校。一不容私。膽勇才藝之類。聞名必致。幕下得人。爲諸營最。嘗曰 人才之興。在於在上者勸奬成就。而近來凡百。無一不出於私意。甚至寫字官畵員之取才者醫譯律之赴擧者。亦多以請囑取之。術業之魯莽。盖由此也。故其在春秋兩曹及槐院醫司譯院等任。務盡激勸之道。其徒興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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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屛山集』卷十二 「左參贊閔公諡狀」


잡과 청탁의 풍조2: 17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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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가 아뢰었다.
"근래 공도(公道)가 어두워지고 사정(私情)이 너무 기세를 부립니다. 과거는 중대한 일인데도 구차함을 면치 못하여, 심지어 잡과(雜科) 시취(試取)에서까지 청탁만을 따릅니다. 강(講)하는 제반 서책은 초권(初卷) 10여 장의 내용만으로 찌를 붙여 시제(試題)를 뽑아내는 것을 일정한 규칙으로 알고 있으며, 각기 강에 응하는 사람들도 이 이상 더 공부를 하지 않아 관례에 따라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마치 지푸라기 줍는 것과도 같이 쉬워, 한갓 자기의 신역(身役)을 면하는 바탕으로 삼을 뿐입니다. 때문에 합격한 사람이라고 해도 전혀 쓸 만한 사람이 없으니, 조정에서 시취(試取)하는 뜻이 어찌 그렇게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이후로는 강을 하는 책은 모두 평시와 같이 초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시제를 뽑는 범위로 삼아, 비록 뽑으려는 정원이 다 안 차는 한이 있더라도 강하는 실력에 따라 뽑도록 해서 답습되는 구차한 습속을 통렬히 개혁하소서."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司憲府啓曰: "近來公道晦熄, 私情太勝。 科擧重事, 亦未免苟簡, 至如雜科試取之際, 徒循請囑。 所講諸般書冊, 只以初卷十餘丈, 付籤抽試, 視爲恒式, 各該應講之人所讀, 亦不出此外, 循例得科, 有同拾芥, 徒爲自己免役之資。 名雖入格, 了無可用之人, 朝廷試取之意, 豈端使然哉? 今後應講書冊, 一依平時, 自初至終卷, 無不抽試, 雖不滿額, 隨講隨取, 痛革因循苟簡之習。" 答曰: "依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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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해군일기』27권, 광해 2년(1610) 윤3월28일(계유) 기사


잡과 청탁의 풍조3: 19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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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였다.
"잡과(雜科)를 설치하는 것도 가볍지 않은 일인데, 근래 사정(私情)을 따르는 것이 그만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다. 재주도 있고 기예(技藝)를 닦은 자가 매번 떨어지는 반면에 청탁에 능한 자들이 입격(入格)하니, 밤낮으로 하는 짓이란 청탁질할 구멍이나 찾는 것뿐이고 과업(課業)을 폐기하고 게을리하여 익히지 않는다. 어약(御藥)을 공봉(供奉)하는 것이라든지 사대(事大)하고 교린(交隣)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인데, 의원(醫員)은 맥(脈)의 이치나 약의 성질을 모르고, 역원(譯員)은 한어(漢語)와 만주어(滿洲語)도 구분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심지어 음양과(陰陽科)나 율과(律科)도 나라 운영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인데 정통하고 숙련된 자는 없고 그저 흐리멍덩하니, 이것은 모두 법식대로 시취(試取)하지 않은 폐해이다. 이제 잡과 시험이 머지않았으므로 이처럼 미리 신칙해두는 바이니 해당 관청의 당상(堂上) 및 제사(諸司)의 제조(提調)는 시험을 주관하는 날에 공정하고 결백하게 나라 일을 해나가면서 규정대로 해야지 감히 사정을 따라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신칙하라."

二十日。 大王大妃敎曰: 雜科之設, 亦自關係不輕, 而挽近循私, 遂成痼弊。 抱才修藝者, 每見沈屈, 工於干囑者, 乃得入格, 所以晝宵經營, 只在鑽刺蹊逕, 廢閣課業, 漫不攻習。 供奉御藥, 事大交隣, 綦重何如? 而醫官不識脈理、藥性, 譯員不辨漢音、漢語。 以至陰陽科、律科, 無非有國之不可闕者, 而糊塗荒疎, 莫有精通鍊熟, 此皆試取不如法式之弊也。 見今雜科不遠, 玆以豫飭, 各該堂上及諸司提調, 主試之日, 精白秉公, 按法依式, 無敢循私, 自致後悔之意, 各別申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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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1권, 고종 1년(1864) 8월20일(무자) 기사


예조 낭관의 게으름: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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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조(本曹)의 당상은 좌랑 심전(沈㙉)이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허드렛일을 싫어하고 기피하기 때문에 그를 걸러내는 초기(草記)를 작성하였으나 모두 말려서 올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本曹堂上。以沈佐郞㙉稱以有病。厭避曺司之役。草記汰去。多有挽止者。不呈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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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6월 3일자 일기


형조 낭관의 게으름 사례: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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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때 윤백원(尹百源)이 형조정랑이 되었고, 정담(鄭䃫)은 형조좌랑이 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로 방종한 생활에 익숙해져 유약할뿐더러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정당(政堂)에 앉아 있을 날이면, 윤백원은 걸핏하면 제사가 있다고 핑계대고, 정담은 언제나 상(喪)이 있다고 말하였다. 동료들이 그들을 기롱하여 말하길, “윤백원의 조상은 매달 제사를 받아먹으니 또한 영화롭지 않은가? 정담의 가족은 연일 죽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사헌부 사람들은 서로 말하길, “차라리 정랑의 선조가 될지언정 좌랑의 가까운 친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明廟朝, 尹百源爲刑曹正郎, 鄭䃫爲佐郞. 兩人皆綺紈子弟, 習於縱放, 懦不肯仕. 坐堂之日, 尹屢稱時祭, 鄭每告服制. 同僚譏之曰: ‘尹之先每月受享, 不亦榮乎? 鄭之族, 連日而死, 不亦慽乎?’ 司中相與語曰: ‘寧爲正郎之先祖, 勿作佐郞之切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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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艮翁疣墨』(이기 저, 신익철・조융희・이철희 역(2010), 『간옹우묵(艮翁疣墨)』,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p. 172.)


예조정랑 임명과 전후의 어려운 경제사정


예조정랑 제수 이전 성균관직강 역임: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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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비가 내리다가 늦게 갰다. 어제 저물녘의 정사에서 이조 참판 의망(擬望)에 이광좌(李光佐)ㆍ김흥경(金興慶)ㆍ심택현(沈宅賢) 등이 올랐는데, 김흥경이 낙점을 받았고, 예문관 제학에는 송상기(宋相琦)를 임명하였다. 나는 직강 수망(首望)에 올라 낙점을 받았다. 설사를 만나 매우 괴롭다. 단오첩(端午帖)을 지어 올리는 데 차출되어 운자(韻字)가 왔으나 병으로 짓지 못하고 탈이 낫다고 달아 놓았다. 강득지(姜得之)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에 정릉(貞陵) 제관을 차출한 명첩(名帖)이 왔으나 병으로 숙배하러 나가지 못하고 변통해 볼 길도 없었는데, “먼저 제사를 지내고 뒤에 숙배한다.”는 종전의 규례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오후에 길을 나서서 능소(陵所)에 당도하니, 동대문과의 거리가 5리가 채 안되었다. 누렇게 익기 시작한 보리를 구경하고 또 모내기를 한 곳이 있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골 풍취를 느꼈다. 참봉 김성택(金聖澤)과 유언철(兪彦哲) 등을 모두 서로 만나 보았다. 종일 한가하게 앉아 있는데, 때때로 푸른 숲 속에서 산새가 지저귄다. 이곳과 도성이 멀지 않으나 한가롭고 외진 것이 이와 같으니, 더욱 기이하다. 능소의 절일(節日) 제물로 올린 종류는 밀가루ㆍ유밀ㆍ쌀ㆍ콩ㆍ겨자ㆍ후추ㆍ술ㆍ음료수[漿]ㆍ녹두ㆍ미나리ㆍ호두ㆍ대추ㆍ밤ㆍ잣으로, 각각 되[升]나 홉[合]이었다.

朝雨晩晴。昨暮政。吏參望李光佐金興慶沈宅賢。金受 點。藝文提學出宋相琦。吾以直講首望。受 點。得泄瀉。痛苦。見差端午帖。韻來而以病不作。懸頉。姜得之來話。午後 貞陵差 祭名帖來。病未出 肅。而無推移之路。聞先 祭後 肅有前規。故午後發到 陵所。距東大門不五里矣。見麥始黃。且有移秧處。不覺有田家趣。參奉金聖澤兪彦哲皆相見。終日閑坐。時聞山鳥啼綠林間。此去京城不遠。而閑僻如此。尤奇。 陵所節日 祭物數上。眞末油蜜米太芥子胡椒酒漿菉豆水芹胡桃棗栗栢子。各升合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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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19년 5월 2일자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서울 숙소는 창동(倉洞):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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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松坡) 나루에서 말먹이를 먹이고 날이 저물지 않아서 창동(倉洞) 주인집에 왔다.

秣馬松坡津頭。未暮至倉洞主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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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19년 11월 9일자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만나던 영남의 문반들: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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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가친을 생각하며 옆에서 모시지도 못하고 이날을 보내자니, 심사가 울적함을 말할 수 없다. 몽여(夢與) 아저씨와 함께 만칙(萬則)의 처소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객지의 회포를 달랬다. 손 찰방(孫察訪)이 찾아오고 선달(先達)도 왔는데, 밤에 함께 동행하는 이의 만류로 여길(汝吉)의 처소에 갔다. 함께 모인 사람들이 모두 여섯인데, 만칙은 병진생, 몽여 아저씨는 정사생, 여길(汝吉)은 무오생, 나는 기미생, 만부(萬夫)는 경신생, 명언(明彦)은 신유생이니, 이것도 특이한 일이다. 영남의 동반(同伴)은 이 사람들뿐이다. 오직 중첨(仲瞻)만 참여하지 않았다.

遠想庭闈。不得陪侍而過此日。心膓迫鬱不可言。與夢與叔會話于萬則舍。消遣客懷。孫察訪來。先達亦來。夜爲同行所挽。往汝吉舍。同會凡六人。而萬則丙辰夢與叔丁巳汝吉戊午吾己未萬夫庚申明彦辛酉。此亦異事。嶺伴止此。惟仲瞻不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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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1월 1일자 일기


예조정랑 제수 이전 강진현감 말의(末擬):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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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참의가 패초를 하여도 나오지 않자 바로 체직시키고 이병상(李秉常)을 임명하였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사를 열었다. 나는 강진 현감(康津縣監)의 말망(末望)으로 올랐으나 병조 좌랑 김성발(金聲發)이 수망(首望)으로 낙점을 받았다. 여러 달 동안 집을 떠나 와서 벼슬살이 하면서 단지 쇠잔한 고을 수령 자리라도 얻어 어버이의 봉양이나 잘 하려 했으나 지금 또 나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으니, 매우 한탄스럽다.

吏議牌招不進。卽遞出李秉常。晩後始開政。吾末擬康津。兵郞金聲發以首望爲之。累月離庭來宦。只爲得一殘縣榮養。而今又不副所望。極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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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19년 7월 22일자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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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악(壽岳)이 왔는데 퍽 근심스러워 보여서 까닭을 물었더니, 그의 집에 전부터 부채가 3백 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곧 나라 돈으로, 지금 막 납부를 다그쳐서 재앙이 닥칠 조짐을 형언하기 어려워 집안이 어찌 할 줄을 모른다고 하였다. 듣고 나니, 딱한 사정을 견딜 수 없어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壽岳來。頗有愁色。問故。言渠家有前債三百兩。卽國錢方今責納。禍色難形。擧家莫知攸爲云。聞不勝憫然。終宵不成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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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2월 12일자 일기


예조정랑 제수 당시 가난했던 형편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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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 심단(沈檀)을 보러 갔다. 고향에 내려가면 바로 갚겠다는 뜻으로 돈 백 꾸러미를 빌렸다. 이 집도 매우 가난하니, 우리 둘과 같은 사이가 아니라면 정의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나머지 2백 꾸러미는 별도로 주선하여 수악에게 주어서 그의 집의 군색함을 면하게 하였더니, 수악의 모친이 여종을 보내어 사례하였는데, 도로 내가 미안하였다. 흥경(興敬)의 집에 가서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돌아왔다. 이광택(李光澤)이 보러 왔다. 나와 이 친구는 친분이 있는데, 이번에 보러 왔으니 더욱 감사하다.

往見沈判書檀。以下鄕卽報之意。推貸百緡。此家亦甚貧。而非吾兩間。誼如是乎。其餘二百別樣周旋。以給壽岳。使免其窘。壽岳母親使女奴來謝。還爲未安。往興敬家小話而還。李光澤來見。予與此友有契誼。今次來見。尤可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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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2월 13일자 일기


예조정랑의 장생전 수리 업무


예조의 업무 기록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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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의 침수(寢睡)는 어제와 비교하여 퍽 평온하였다. 진시(辰時)에 묵은 쌀로 쑨 미음 7홉과 조기와 말린 꿩고기 절편을 드셨다. 이때 의약청(議藥廳)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맥박은 크고 빠르게 뛰고, 홍진 물집이 난 얼굴과 가슴, 배 및 등 부위 중에 먼저 시작한 곳은 물집이 다소 감소되었다고 한다. 오시(午時)에 생동찰 미음 6홉과 말린 꿩고기 포脯를 드시고, 초저녁에 녹두죽 5홉과 말린 꿩고기 절편을 드셨으며, 인정(人定) 때에 팥죽 3홉을 드셨다. 예조 참판과 좌랑이 효릉(孝陵)의 석물에 회를 바른 뒤에 들어왔다.

東宮寢睡比昨頗穩。辰時陳米飮七合石魚乾雉切進服用。時議藥廳入診。則脈度洪數。紅疹面部胷腹及背部先出處頗消減。午時。靑梁米飮六合。乾雉脯進服。初昏彔豆粥五合。乾雉切進服。人定時豆湯三合進服。本曹參判及佐郞。 孝陵石物塗灰後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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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2월 28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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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경녕전(敬寧殿)에 갔다. 수리할 곳을 살피는 일 때문이다. 예조 참의와 호조 정랑이 함께 오고 선공감 감역도 왔다. 전각은 기와를 갈고 회를 바르고, 여러 곳과 전각 안의 기물, 자리, 주렴, 천막, 제복 등 손을 봐야 할 것이 서른 가지 쯤 이었다. 밥 먹을 때쯤 전각을 나와 임시 막사로 와서 이 사평(李司評)과 함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전각을 수리할 때 신위를 옮겨 봉안하는 제관으로 왔다. 수리를 마치고 옛날 물건들은 참의와 정랑과 함께 앉아서 불태웠다. 이는 봄과 가을에 수리할 곳을 살필 때 국법에 그렇게 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잠시 반촌(泮村)에 가서 권경운(權景運) 중첨(仲瞻)을 만나 보고 왔다. 오늘 주상의 환후는 침수를 드신 뒤에 잠시 정신이 돌아왔지만 기운이 없고 나른한 증세가 특히 심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수라를 끓인 즙汁 3홉을 드시고, 오시(午時)에 데운 수라 반 숟가락 남짓을 드셨다고 한다. 의관에게 전교하기를 “수라를 들기 싫은 마음이 오늘 더욱 심하여 이것 밖에 들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한다. 대궐문을 닫은 뒤에 의관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배가 더부룩한 증세는 어제보다 조금 더하고, 응대하는 목소리는 어제보다 더욱 어려웠으며, 까라지는 증세도 더욱 심하여 애타는 마음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고 한다. 오늘부터 동궁 의약청(醫藥廳)이 물러가도록 전교하였다. 여러 차비관(差備官)이 서계(書啓)를 올렸다. 조군이 병이 났다고 하여 편지로 문병하였다.

曉往 敬寧殿。以奉審修改事也。本曹參議及戶曹正郞同來。繕工監役亦來。 殿闕則改瓦塗灰。各處及 殿內器皿席褥簾幕祭服三十餘種矣。食時出來于依幕。與李司評穩話。以修改時 移還安祭官來矣。修改畢盡。將舊件與參議戶郞同坐燒火。盖春秋奉審修改。 國法然也。罷歸時。暫進泮村。見權景運仲瞻而來。今日 上候就寢後暫覺。則虛憊之候特甚。故雜水剌煮汁三合進御。午時熟水剌半匙餘進御。 傳于醫官曰。水剌厭進。今日益甚。故所進只此。閉門後醫官入診。則 上候飽滿。比昨少加。 玉音酬酢。尤艱於昨日。昏困亦尤甚。煎灼罔措。 東宮醫藥廳今日退出 傳敎。差備諸官書啓。聞趙君得病。札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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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3월 9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3: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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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의 환후는 여러 증세가 더해졌다. 어제 밤에는 밤새도록 괴롭게 뒤척이면서 침수는 완전히 못 든 거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오시(午時)에 데운 수라 겨우 한 숟갈을 물에 말아 드시고, 생치적(生雉炙)과 굴젓을 드셨으며, 신시(申時)에 인삼차 4홉을 드셨으나 종일 정신이 까라졌는데, 정신이 돌아왔을 때도 신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목소리도 가늘어져 가까스로 응대하였다고 한다. 약방 도제조가 영의정에게 통보하여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영의정이 우선 오늘은 지켜보고 설치해 보자는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경황없는 신민들의 애타고 절박한 모습은 한 입으로 다 말하기 어렵다. 아마도 주상의 환후는 여러 해 시든 고질병에 점점 더 기력이 소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살이 빠져서 남은 것이 없고, 다리도 마비되어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으며, 또한 마음대로 반듯이 누울 수도 없고, 눈은 어두워 밤낮을 분간하지 못한다. 이전에는 수라가 2~3홉이라는 것이 분발(分撥)에 기록되어 나오고 있으나, 내간(內間)에서 올린 여러 음식물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원기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지난달부터 음식을 전폐한 것이나 다름이 없고, 간혹 한 숟갈이라고 분발에 기록하여 나오지만 또한 더부룩한 증세 때문에 더 이상 드시지 못한다. 피ㆍ기장ㆍ조를 섞어 밥을 지어서 그것으로 죽을 끓인 뒤에 걸러서 나온 쌀뜨물 같은 즙도 2~3홉에 불과하니, 이렇게 하고도 원기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며칠 전에 약방이 사용한 인삼이 모두 작아 효력이 없었기 때문에 별기군 아무개 집에 크기가 팔뚝만한 인삼이 있어서 이것을 달여 드셨다고 한다. 밥을 먹은 뒤에 장생전(長生殿) 공사를 살피는 일로 갔는데, 호조의 정 정랑(鄭正郞)과 공조의 박 정랑(朴正郞), 신 감역(申監役)이 와 모였다. 오후에 일이 끝나고 돌아왔다. 들으니, 어제 김동필(金東弼)이 수찬으로서 사직 상서(上書)를 하였다고 한다. 그의 논박이 온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이조 판서와 이조 참의, 이조 좌랑, 옥당, 김민택(金民澤) 윤혼(尹焜) 등이 대상이었으며, 아주 참혹하였다고 한다. 연이어 조군을 문병하였다.

上候諸症有加。昨夜達宵煩轉。寢睡無異全失。午時熟水剌菫一匙水澆。生雉炙石花醢進御。申時蔘茶四合進御。而終日昏沉。而覺時呻吟不絶。 玉音低微。艱於酬酢。藥房都提調通于領相。將設侍藥廳。領相以姑觀今日設廳答語云。臣民蒼黃煎迫之狀。一口難說。盖 上候積年沉痼。漸益 敗。卽今肥膚之消脫無餘地。脚痺不能動一步。亦不得任意平臥。眼暗不辨晝夜。曾前水剌以二三合。書出於分撥。而內間所進雜物甚多。故元氣。頼以扶持。卽今則。自去月無異全廢。或一匙書出。而亦不復進以飽滿。炊稷黍粟雜飯。作煎粥後。釃出餘汁若米泔者。亦不過二三合。若是而可扶元眞耶。日前藥房。以所用人蔘。皆短少無力。別軍直▩▩家有人蔘。大若臂脘者。以此煎進云。食後以 長生殿看役事。進去。戶曹鄭正郞朴工郞申監役來會。午後罷歸。聞昨日金東弼以修撰。上書辭職。因駁論滿朝。吏判及參議佐郞玉堂及金民澤尹錕諸人。而極甚慘酷矣。連問趙君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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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3월 11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4: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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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전(長生殿)을 수리하는 것을 가서 보았다. 봉사 홍의인(洪義人)도 왔다. 전각은 벌써 단청을 올리고 대문도 새로 세워서 아주 높고 시원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이조 청사 문안의 임시 막사에서 중첨(仲瞻)ㆍ대숙(大叔)ㆍ천삼(天三) 등을 두루 만났다. 김이복(金爾復)과 조정태(趙挺泰)도 왔다. 영남좌도의 방목이 당도하였는데, 권만(權萬)이 양장(兩場)에서 장원을 하고, 그의 아우 환은 종장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김달룡(金達龍)ㆍ이함(李涵), 윤응두(尹斗應) 아저씨, 김민행(金敏行), 이용우(李龍羽) 아저씨, 전세열(全世烈) 등이 입격하였다. 기쁘고 다행이다. 성칙(成則)은 더욱 기뻐할 만하다. 저녁에 한 화순(韓和順) 어른을 뵈러 회현방(會賢坊)에 갔다. 이장(移葬)하는 일로 말미를 얻어 충주 본가로 가는데, 내일 호읍(湖邑)으로 길을 나설 것이라고 한다.

往見 長生殿役事。洪奉事義人亦來。 殿閣已丹靑。大門亦新建。甚高敞矣。歸路歷見仲瞻大叔天三於吏曹門內依幕。金爾復趙挺泰亦來。嶺南左榜來到。權萬兩場。厥弟(艹+奐)爲終場壯元。金達龍李涵尹叔斗應金敏行李叔龍羽全世烈得參。欣幸。成則尤可喜。夕後往拜和順丈于會賢坊。爲遷厝事由歸忠州本家。明將發歸湖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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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4월 17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5: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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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남소동(南小洞)의 어영청(御營廳) 사청(射廳)에 가서 활쏘기 시험에 참가하였다. 훈련원(訓鍊院)과 모화관(慕華館) 두 곳은 모두 무과 시험을 실시하기 때문에 장소를 옮겨 실시한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이치화 아저씨를 만나보았다. 충주(忠州) 사촌 이집(李鏶)도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주상의 환후는 그대로이다. 녹두죽 2홉을 억지로 드신 뒤에 체한 증세가 오락가락하며 거의 게워낼 듯하여 강다탕(薑茶湯)을 조금 드셨다고 한다. 중첨(仲瞻)이 시험장에서 와 잤다. 일소(一所)의 책제(策題)는 ‘선비를 뽑는 방법에 있어서 경학(經學)과 사장(詞章)의 겸용에 대하여 묻는다.[問取士之法 兼用經學詞章]’이고, 이소(二所)의 책제는 ‘육상산(陸象山)의 학설에 대하여 묻는다.[問陸象山之學]’였는데, 중첨은 일소에서 시험을 보았다.

晨往南小洞御營射廳。參試射。以訓鍊院慕華館兩所。皆設武試故移設也。歸路暫見穉和叔。忠州李從鏶亦來留。 上候一樣。菉豆粥二合强進後。滯膈升降。幾至吐出。薑茶湯少許 進御云。仲瞻自場中出來宿。一所策題。問取士之法。兼用經學詞章。二所。問陸象山之學。仲瞻觀一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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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4월 20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6: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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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辰時)에 의관이 와서 “주상의 환후는 마찬가지입니다. 수습하기 어려운 증세와 훈열(熏熱)로 괴롭게 뒤척이시고, 침수가 더욱 편치 못하시며, 화수(火嗽) 등과 같은 증세는 그대로입니다. 가래침 뱉는 것은 어제와 비교하여 조금 낫고, 연일 송이 죽을 한 홉 반씩 드십니다.”라고 하였다. 오후에 영남우도의 방목이 비로소 왔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종장(終場)에서 2등 제6인으로 입격하였고, 상주(尙州)에서 무려 18인이 입격하였다. 우리 면은 고사건(高師健)ㆍ채윤후(蔡允垕)ㆍ홍서귀(洪瑞龜)ㆍ홍한조(洪漢朝)ㆍ고계서(高啓瑞), 조국룡(曺國龍) 숙질(叔侄), 신사선(申思選) 등이 입격하였으니, 장하다고 할 만하다. 대승사(大乘寺) 종이 장수 편에 고향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전적 김정귀(金正龜)가 다녀갔다. 장생전(長生殿) 수리를 마쳤다. 임진년 전쟁으로 인한 화재 이후 계사년(1593)에 대가(大駕)가 의주(義州)에서 도성에 돌아오니 종묘에는 신위를 봉안할 곳이 없어서 급작스럽게 민간 가옥의 재목을 모아다가 이 전각 모두 14칸을 지어서 임시로 신주를 봉안하였다. 그 뒤 무신년(1608)에 종묘를 건립하여 옮겨 봉안하여 마침내 이 전각에는 재궁(梓宮)을 봉안하였는데, 지금 백 여 년이 지났다. 당초 처음 창건할 때 규모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데다, 지금 또 세월이 오래되어 단청이 벗겨지고 서까래와 벽이 썩고 허물어져서 여름철을 맞아 빗물이 새는 곳이 많았다. 지난여름에 새로 수리하자는 논의가 있어서, 호조와 선공감에서 같이 와서 살펴보고 필요한 목재와 기와 등의 물자를 호조의 산원(算員)이 모두 계산하고 계획하여 아뢰었다. 종부시(宗簿寺)가 막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찬수하여 간행할 일이 있었는데, 전각 뒤 처마가 종부시와 가까워서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우선 수리를 정지하였다가, 올 봄에 신 정랑(辛正郞)이 제조에게 여쭈고 제조가 들어가 아뢰어 비로소 일을 시작하여 지금 달포 남짓 되어 공사를 마쳤다. 감역 신태동(辛泰東)이 처음에 파견되어 일을 살핀 지 20여일 만에 병으로 면직되고, 홍의인(洪義人)이 후임으로 차출되었다. 전각 앞부분의 문미에는 옛날에 ‘내재궁봉안소(內梓宮奉安所)’라는 여섯 글자를 써서 걸고, 대문에는 ‘장생전(長生殿)’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걸었는데, 이번에는 전각 문미에 장생전이라 써서 걸고, 대문에는 동원문(東園門)이라 써서 걸었으며, 동쪽과 서쪽의 정고(正庫)와 서쪽 하고(下庫)에도 모두 현판을 걸었다. 도사 김제겸(金濟謙)이 팔분체(八分體)로 썼는데, 이 모든 것을 제조가 정하고, 또 그의 아들을 시켜 쓰게 하였다고 한다. 좌측 좌기청(坐起廳)의 방들은 모두 아직 수리를 마치지 못하였다. 주서 이중환(李重煥)이 편지로 안부를 묻고, 박사 박성의(朴性毅)가 보러 왔다. 들으니, 참의 최창대(崔昌大)가 어제 세상을 버렸다고 한다. 이 사람은 평소에 문장으로 이름이 나서 피차를 막론하고 모두 문형(文衡)의 솜씨로 기대하였는데,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작년에 양사(兩司)가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기를 청하며 연이어 여러 달에 걸쳐 아뢰어서 끝내 문형인(文衡人)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또한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였다. 신주백(申周伯)이 가장 친하게 왕래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이 애석하다. 또 임호당(林湖堂) 중덕(衆德)도 작년에 죽었으니, 소론의 문운(文運)이 막힘이 심하다. 유시(酉時)에 주상의 환후는 까라져서 신음이 더해졌다고 한다. 송주관(宋周觀)이 보러 왔다. 그는 하동(河東) 사람으로, 옛날 하동 부사 조동양(趙東陽)의 치적을 굉장히 칭송하였는데, 읍민들이 동비(銅碑)를 세웠다고 한다.

辰時。醫官來言。 上候一樣。若難收拾之候。熏熱煩轉。寢睡益不寧。火嗽一樣。痰涎之唾。比昨少愈。連日服松茸粥一合半。午後嶺右榜始來。季父參終場二等六人。尙州凡十八人。吾面。則高師健蔡允垕洪瑞龜洪漢朝高啓瑞曺國龍叔侄申思選。可謂壯哉。因大乘紙商便。付庭書。金典籍正龜來過。長生殿畢役。壬辰兵火後。癸巳大駕自義州還都。 宗廟無可奉安處。倉卒鳩聚村間屋材。成此殿凡十四間。權安 神主。其後戊申歲。建宗廟移奉。遂以此 殿奉 梓宮。今經百餘年。當初草創不成規模。今又年久。丹靑剝落。椽壁腐頹。逢夏雨漏甚多。前夏有改修之議。戶曹及繕工齊來奉審。所入材瓦物力。算員皆算摘磨鍊。因 入達矣。以宗簿寺方有璿源譜略修刊之役。 殿後簷樓。近宗簿有妨碍事。故不得已姑停。今春辛正郞。稟提調 入達。始役今過一月餘訖工。辛監役泰東。初分差看役二十餘日後。以病免。洪義人代出矣。 殿前楣舊揭內梓宮奉安所六字。大門揭長生殿三字。今番 殿楣揭長生殿。大門揭東園門。東西正庫及西下庫。皆揭額。都事金濟謙。皆以八分書之。此皆都提調所定。且使厥子書之云。左邊坐起廳。房舍皆改修。尙未畢矣。李注書重煥札問。朴博士性毅來見。聞崔參議昌大昨日捐世。此人素以詞章名。無論彼此皆以文衡手期之。爲少論領袖。故見嫉於時。昨年兩司請削去仕版。連 啓者累月。終不與文衡人。且恬潔。周伯最親往來。故詳得其爲人。其死可惜。且林湖堂衆德昨年亦死。少黨文運之否極矣。酉時 上候昏困。呻吟有加。宋周觀來見。宋河東人。盛稱舊倅趙東陽令政績。邑民建銅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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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4월 23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7: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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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에 장생전(長生殿) 수리를 마쳤으므로 이달 29일에 재궁(榟宮)을 도로 봉안하는 일로 승정원에 들어가 초기(草記)를 올리고 돌아왔다. 오늘은 대궐 안이 조용한 것 같고, 하인들의 소란스러운 일도 없었다. 이는 병조 참지 조관빈(趙觀彬)이 입직하여 아주 삼엄하게 통제하였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다. 진시(辰時)에 의관이 와서 “밤사이 주상의 환후는 그대로입니다.”라고 하였다. 진사 이처대(李處大)가 찾아왔다. 사시(巳時)에 의관이 “눅진한 대변 5홉과 소변 2홉을 보셨으나 색깔이 매우 누랬습니다.”라고 하였다. 찰방 손경익(孫景翼)이 다녀갔다. 주서 이중환(李重煥)이 심부름꾼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병이 심하여 그저께 직무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경옥(李景玉) 어른의 편지를 받고 바로 답장을 하였다. 오시(午時)에 데운 수라 반 숟갈을 물에 말아 드시고, 송이 적炙을 드셨다고 한다. 미시(未時)에 시약청(侍藥廳)이 들어가 진찰하니, 여러 가지 증세가 어제와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호서(湖西) 동당시(東堂試) 방목이 왔다. 예천(醴泉) 김규석(金圭錫)이 제천(堤川) 도목(都目)으로 입격하였으니, 기뻐할 만하다. 오전에 대신들이 입시하여 아뢰자, 구전(口傳)으로 차출하기를, 예조 판서에 이관명(李觀命), 예조 참판에 이집(李㙫), 예조 참의에 윤양래(尹陽來), 병조 참판에 유명홍(兪命弘), 병조 참지에 이병상(李秉常), 승지에 조명봉(趙鳴鳳)ㆍ조관빈(趙觀彬), 함경도 관찰사에 홍치중(洪致中)을 임명하고, 그 외 나머지 대간과 옥당은 관원들이 많이 빠졌으나 모두 뽑지 않았다. 신시(申時)에 탕약을 드시고, 대궐 문을 닫은 뒤에 흰죽 1홉을 드셨으며, 소변 2홉을 보았는데 색깔이 누랬다고 하고, 2경 3점에 녹두죽 2홉을 드셨다고 한다. 시약청의 구전계사(口傳啓辭)에 “까라짐이 극심한 증세가 더욱 심하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朝前以 長生殿修改畢役。今二十九日 榟宮還安事。入 政院呈草記還。今日則 闕內似肅然。無下人喧亂事。盖兵曹參知趙觀彬入直。禁防甚嚴也。可佳。辰時醫官來言。夜間 上候一樣。李進士處大過訪。巳時醫官言。泥便五合小便二合放下。而色甚黃。孫察訪景翼來過。李注書重煥伻問。以病甚再昨脫直還家云。得李景玉丈書。卽復。午時。熟水剌半匙。水澆松茸灸 進御。未時侍藥廳入診。 諸症候與昨一樣。湖西東堂榜皆來。呂泉金圭錫。以堤川都目參榜。可喜。午前大臣入侍稟 達。口傳差出。禮判李觀命參判李㙫參議尹陽來。兵曹參判兪命弘參知李秉常承旨趙鳴鳳趙觀彬咸鏡監司洪致中。其餘臺諫玉堂多闕員而皆不出。申時湯藥 進御。閉門後白粥一合 進御。小便二合放下。色甚黃。二更三点菉豆粥二合 進御。答侍藥廳口傳 啓曰。昏困特甚之候尤甚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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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4월 27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8: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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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지난 뒤에 장생전(長生殿)에 갔다. 아침 문안을 마치고 난 후에 도제조 영의정과 제조 예조 참의가 왔다. 재궁(榟宮) 10부部를 종친부(宗親府)에서 장생전으로 도로 봉안하였다. 이어서 포쇄(曝晒)하여 전각 안에 안치하고, 외재실(外榟室)도 서쪽 하고(下庫)에서 서쪽 정고(正庫)로 도로 봉안하였다. 좌랑 박필준(朴弼俊)과 봉사 홍의인(洪義人)도 함께 왔다. 오후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소격동(昭格洞) 박기령(朴麒齡) 집에 머무는 조카 희喜를 만나 보았다. 묘시(卯時)에 의관이 와서 “밤사이 주상의 환후는 마찬가지입니다. 까라지고 가슴이 답답하여 호흡이 불편하고, 배가 더부룩한 증세가 아주 심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시(辰時)에 소변 4홉을 보았는데 색깔이 약간 누랬고, 오시(午時)에 데운 수라 반 숟갈을 물에 말아 드시고, 반찬은 전복을 드셨다고 한다. 미시(未時)에 시약청(侍藥廳)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여러 증세는 마찬가지이고, 상추 죽 한 홉 반을 드셨다고 한다. 시약청이 들어가 진찰할 때,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와 우의정 이건명(李健命)이 같이 입시하여 삼사(三司) 이외의 긴급하게 채워야 할 결원은 구전(口傳)으로 비망(備望)하여 들이고, 재상 중에 군직(軍職)을 부여해야 할 자들도 한꺼번에 구전으로 임명할 것을 탑전에서 재가받았다. 이는 동궁이 근래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주상의 뜻으로 임시로 낙점을 행사한 것이다. 형조 판서에 유집일(兪集一), 형조 참의에 홍계적(洪啓迪), 행 부사직에 조태구(趙泰耉)ㆍ권성權ㆍ홍만조(洪萬朝)ㆍ황일하(黃一夏)ㆍ김상직(金相稷) 등이 임명되었다. 유시(酉時)에 의관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까라짐이 아주 심하고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신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저녁때가 지난 뒤에 생원 허즙(許楫)이 다녀갔다. 그는 전례에 따라 세 당상의 임시 막사에 명함을 전하였다. 대궐 문을 닫은 뒤에 흰죽 한 홉 반을 드시고, 2경 2점에 소변 4홉을 보았는데, 색깔이 매우 누랬으며, 2경 4점에 녹두죽 1홉 남짓 드셨다고 한다.

曉後往 長生殿。朝問安後。都提調領相提調禮參來。 榟宮十部。自宗親府。還安 本殿。仍曝晒。奉置 殿內。外榟室亦自西下庫還安西正庫。朴佐郞弼俊洪奉事義人同來。日晩畢事歸。歷見昭格洞朴麒齡家喜姪。卯時醫官來言。夜間 上候一樣。昏困膈間滿悶。呼吸不平。腹部脹滿之候特甚。辰時小便四合放下。而色微黃。午時熟水剌半匙水澆。饍物全卜 進御云。未時侍藥廳入診。諸 症候一樣。萵苣粥一合半 進御云。入診時判府事趙右議政李。同爲入侍。三司外緊急闕員。口傳備望流入。而卿宰應付軍職者。亦一倂口傳事。 榻前定奪。盖 東宮近來晝夜侍側。以 大朝意。權行 落點也。刑判兪集一刑議洪啓廸行副司直趙泰耉權▼(忄+省)洪萬朝黃一夏金相稷。酉時醫官入診。則 昏困特甚。小覺時呻吟未已云矣。夕後許生員楫來過。依例投剌于三堂上依幕。閉門後白粥一合半 進御。二更二点小便四合放下。而色甚黃。四點菉豆粥一合餘 進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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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4월 29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9: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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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罷漏]를 친 뒤에 의관에게 “훈열(熏熱)이 아주 심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배가 더부룩하면서 호흡이 불편한 증세가 아주 심한 데다 숨이 더욱 답답하여 지금까지 잠을 잘 수 없으므로 어떤 약이든지 먹어야겠다.”라고 전교하여, 의관이 붉은 팥 차에 우황 3푼을 섞어 드시는 것이 좋겠다고 청하였다고 한다. 인시(寅時)에 의관이 와서 “밤사이 주상의 환후는 침수를 완전히 못 드신 것이나 다름없고, 우황을 복용하신 뒤에 아주 심한 훈열 증세는 다소 진정되었으나 그 밖의 증세와 수습하기 곤란한 증세는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하였다. 더욱 애타는 마음 지극하여 견딜 수 없다. 미시(未時)에 의관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증세는 그대로이고 눅진한 대변 2홉 남짓을 보았으며, 신시(申時)에 탕약을 복용하셨다고 한다. 한사범(韓士範)과 한사칭(韓士稱)이 다녀갔다. 오후에 장생전(往長生)에 가서 내ㆍ외판을 토실(土室)에서 동쪽과 서쪽 정고(正庫)에 도로 봉안하고 저물녘에 돌아왔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다가 잠시 개고 저물녘에 다시 내렸다. 가뭄 피해가 매우 심하다고 들었는데 때를 맞춘 비라고 할 수 있으니, 농사를 위해서는 아주 다행이다. 유시(酉時)에 의관이 재차 들어가 진찰해 보니, 신음이 어제처럼 잦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궐 문을 닫은 뒤에 탕약을 드시고, 조금 있다가 상추 죽을 1홉 드셨으며, 인정(人定)을 칠 때 소변 8홉을 보았는데, 색깔이 약간 누랬고 눅진한 대변 1홉을 보았으며, 2경 1점에 상지차(桑枝茶)와 자두탕(煮豆湯) 1홉을 드셨다고 한다. 오늘은 망종(芒種)으로, 오월절(五月節)이다.

罷漏後 傳于醫官曰。熏熱特甚。膈間滿悶。腹部脹滿。呼吸不平之候特甚。氣甚益鬱。至今不得入睡。當進何藥。醫官請以赤小豆茶牛黃三分調進爲宜。寅時醫官來言。夜間 上候寢睡無異全失。牛黃 進御後。熏熱特甚則少得鎭定。而其餘症候及若難收拾之候一樣。尤不勝煎迫之至。未時醫官入診。 症候一樣。泥便二合餘放下。申時湯藥 進御。韓士範士稱來過。午後往 長生殿。內外板自土室還安東西正庫。暮還。自曉天雨乍晴。暮復雨。聞旱災甚酷。可謂知時雨。爲農事極幸。酉時醫官再次入診。 呻吟不如昨日之頻數云。閉門後湯藥 進御。小頃萵苣粥一合 進御。人定時小便八合放下。色微黃。泥便一合放下。二更一点桑枝茶煮豆湯一合。 進御云。今日芒種五月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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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4월 30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0: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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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틀 무렵에 장생전에 가서 율자(律字) 재궁(榟宮)을 전각 안에서 토실(土室)로 옮겨 봉안하고 옻칠을 한 차례 더하였다. 예조 참판도 왔다. 묘시에 의관이 와서 “눅진한 대변 1홉을 보시고 소변 두 홉 반을 보셨는데, 색깔이 누렇고 흐렸습니다.”고 하였고, 진시에 의관이 와서 “밤사이 주상의 환후가 한결같이 매우 심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사시에 눅진한 대변 3홉을 보았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만칙(萬則)의 처소에서 장씨 아저씨 형제를 만나보았다. 이달 4일에 남일원(南一院) 농막 뒤쪽에 장사를 지내고 그저께 들어왔으나 집안에 홍역 조짐이 있어서 오늘에야 비로소 초청하여 만나본 것이다. 오시에 맥수라 반 숟갈을 물에 말아 드시고 준치를 드셨으며, 신시(申時)에 의관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물찌 대변 5홉을 보고 까라짐이 매우 심하여 탕약도 드시기 어려웠다고 한다. 유시(酉時)에 재차 들어가 진찰해 보니, 여러 증세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대궐 문을 닫은 뒤에 흰죽 한 홉 반을 드시고, 초경 4점에 물찌 대변 4홉을 보았으며, 2경 4점에 삼령차를 드셨다고 한다.

平明往 長生殿。律字 榟宮自 殿內移安土室。加漆一度。禮曹參判亦來。卯時醫官來言。泥便一合放下。小便二合半放下。色黃濁。辰時醫官來言。夜間 上候特甚一樣。巳時泥便三合放下。歸路會見張叔兄弟于萬則舍。今初四日過葬事于南一院農幕後。再昨入來。而以家有紅疫漸。今始邀見。午時麥水剌半匙水澆眞魚 進御。申時醫官入診。滑便五合放下。昏困特甚。湯藥亦難 進御云。酉時再次入診。諸 症候一樣。閉門後白粥一合半 進御。初更四点滑便四合放下。二更四点蔘苓茶 進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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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5월 10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1: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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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시에 의관이 와서 “밤사이 주상의 환후는 한결같이 아주 심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시에 소변 두 홉 반을 보았다고 한다. 밥을 먹은 뒤에 장생전에 가서 옻칠 하는 것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장씨 아저씨와 여길과 함께 만칙의 처소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시에 의관에게 “밤부터 배가 더부룩한 증세가 심하다. 수라 한 숟갈을 물에 말아 먹고 싶지만 배가 더부룩하고 구담증(口淡症)이 아주 심하여 끝내 먹을 수 없었다.”라고 전교하니,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오시에 의관이 환후를 여쭈자 “배가 더부룩한 증세가 아주 심하기 때문에 호흡이 불편하다.”라고 전교하였다고 한다. 미시에 물찌 대변을 조금 보았고, 신시에 시약청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후박차(厚朴茶)를 단번에 드신 뒤에 배가 아주 심하게 더부룩한 증세는 조금 덜하다고 전교하였다 한다. 소변 반 홉을 보고, 유시에 물찌 대변 2홉을 보았으며, 초저녁에 송이죽 1홉을 드시고 2경 2점에 후박차를 드셨다고 한다. 대궐 문을 닫은 뒤에 의관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배가 더부룩한 증세가 아주 심하였다고 한다.

卯時醫官來言。夜間 上候特甚一樣。辰時小便二合半放下。食後往 長生殿。看漆。歸路與張叔汝吉會話于萬則舍。午時 傳于醫官曰。自夜來脹滿特甚。欲以水剌一匙水澆 進御矣。脹滿及口淡特甚。終不得 進御云。唐遑尤罔措。午時醫官問候。則 傳曰。脹滿特甚。故呼吸益不平矣。未時滑便少許 放下。申時侍藥廳入診。厚朴茶頓 進後。脹滿特甚。少似減歇爲 敎。小便半合放下。酉時滑便二合放下。初昏松茸粥一合 進御。二更二点。厚朴茶 進御。閉門後醫官入診。 脹滿特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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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5월 12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2: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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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뜰 때 붉은 기운이 해를 가렸는데, 지난번에 본 것과 같았다. 이러한 변고는 지난달 29일 이후로 없다가 오늘 아침에 또 나타났으니, 경황없는 신민들의 여러 가지 애타고 절박해하는 모습에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진시에 의관이 와서 “밤사이 주상의 환후는 한결같이 매우 심각하고, 인삼탕(人參湯) 절반을 다 드셨다고 전교하셨습니다.”라고 하고, 같은 시각에 소변 4홉을 보았다고 한다. 오시에 수라를 물에 말아 드시고자 하였으나 끝내 드실 수 없었다고 한다. 미시에 의관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맥박이 왼쪽 삼부(三部)는 약하며 잦았고, 오른쪽 삼부는 미약하였으며 배가 더부룩한 증상이 심한 것은 한결같았다고 한다. 장생전에 가서 옻칠하는 일을 보고 돌아왔다. 유시에 의관이 재차 들어가 진찰해 보니, 까라지고 배가 더부룩하며 가슴이 답답하여 호흡이 불편한 증세가 모두 매우 심해져서 실로 견디기 어렵다고 전교하였다고 한다. 대궐 문을 닫은 뒤에 귤피차(橘皮茶) 한 홉 반을 드시고, 초저녁에 소변 두 홉 반과 물컹한 대변 3홉을 보았다고 한다.

日出時有赤氣掩蔽。與頃日所見同。此變自去月二十九日後無之。今朝又現。臣民種種蒼皇煎迫之狀。不知所措。辰時醫官來言。夜間 上候特甚一樣。人參湯一半盡進爲敎。同時小便四合。午時水剌水澆欲進。而終不得 進御。未時醫官入診。脈度左三部微數。右三部微弱。脹滿特甚一樣云。往 長殿看漆役還。酉時醫官再次入診。昏困脹滿。膈間滿悶。呼吸不平之候。俱爲特甚。實爲難堪爲 敎云。閉門後橘皮茶一合半 進御。初昏小便二合半。潤便三合放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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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5월 14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3: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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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夏至)이고, 오월중(五月中)이다. 인시(寅時)에 의관이 와서 “4경 2점에 물컹한 대변 2홉을 보셨고, 밤사이 주상의 환후는 한결같이 매우 심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시에 소변 2홉을 보았고, 사시에는 설사 1홉 남짓하였다고 한다. 오시에 의관에게 “수라를 먹기 싫은 마음이 점점 심하다. 오늘도 알려 줄 것이 없다.”라고 전하였다고 한다. 장생전에 가서 옻칠하는 일을 보고 돌아왔다. 장씨 아저씨 형제와 신덕수(申德秀)와 함께 만칙(萬則)의 처소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동야(沈東野)가 찾아왔다. 미시(未時)에 의관이 들어가 진찰해 보니, 여러 증세는 마찬가지이고, 설사를 여러 번 하였으며, 까라짐이 더하다고 전교하였다 한다. 신시에 설사를 조금 하였고, 술시에 흰죽 2홉을 드셨으며, 초저녁에 소변 2홉을 보았고, 2경 1점에 물찌 대변을 조금 보았으며, 2경 4점에 녹두죽을 한 홉 반 드셨다고 한다. 수라를 전폐한 나머지 연이어 묽은 죽이라도 드시니, 조금이나마 기쁘고 다행이다.

夏至。五月中。寅時醫官來言。四更二点潤便二合放下。夜間 上候特甚一樣。辰時小便二合放下。巳時泄便一合餘放下。午時。 傳于醫官曰。水剌厭進漸甚。今日亦無可出示者矣。往 長殿看漆役還。與張叔兄弟申德秀會話萬則舍。沈東野來訪。未時醫官入診。諸 症候一樣。泄便累度放下。而昏困有加爲 敎。申時泄便少許放下。戌時白粥二合 進御。初昏小便二合放下。二更一点滑便少許放下。四点菉豆粥一合半 進御云。水剌永廢之餘。連進粥飮。稍切喜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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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5월 16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14: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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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 시험은 활터를 열지 않았다고 한다. 아침에 장생전에 가서 옻칠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주상의 환후는 한결같이 아주 심각하다. 미시에 시약청이 들어가 진찰하고, 신시에 녹두죽을 조금 드셨으며, 오시에 까라짐이 더해졌다고 한다. 몽여(夢與) 아저씨 형제가 날마다 와서 모인다.

試射不爲設場云。朝往 長殿。看漆還。 上候特甚一樣。未時侍藥廳入診。申時菉豆粥小許 進御。午時昏困有加云。夢與叔兄弟。逐日來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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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5월 20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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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월 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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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월 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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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월 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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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월 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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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월 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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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월 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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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월 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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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월 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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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월 일자 일기


예조의 업무 기록: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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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월 일자 일기


병조에서 이조의 낭관으로, 윤기(尹愭)의 이상과 현실


병조좌랑의 업무와 억울한 파직


병조좌랑의 업무1: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감군에 낙점 받고 감군패를 받아 순청(巡廳)에 이르자, 순청의 벽에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의 시가 적혀 있기에 한가로이 그 운을 따라 짓다(監軍蒙點 受牌至廵廳 廳壁有游齋李玄錫詩 謾步其韻)」

저녁놀이 먼 나무 덮는 걸 앉아서 보노라니, 만사를 경영함이 모두 부질없게 여겨지네.
坐看夕烟遠樹籠, 經營萬事摠成空

검어질 길 없기에 백발은 더욱 가련하고, 빈곤한 청포라서 홍포만 속절없이 부럽네.[12]
無緣髮黑還憐白, 最困袍靑謾羡紅

소청(小廳)에서 야간 순찰하는 병졸 점검하고, 궁궐에서 시간 알리는 아이 오길 상상하네.
點去小廳廵夜卒, 想來淸禁報時童

마음 달래노라 함께 한 고향 사람이, 날씨가 순조로와 풍년 들거라 말하기에.
寬心賴有鄕人伴, 解說休徵歲可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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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監軍蒙點 受牌至廵廳 廳壁有游齋李玄錫詩 謾步其韻」


병조정랑의 임명: 19세기, 정원용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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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 일군색 정랑에 첫째 후보로 올랐다. 둘째 후보는 김기은, 셋째 후보는 조종진이었다. 병조판서 서영보가 자벽하였다.

首擬兵曹一軍色正郎. 副金箕殷, 末趙琮鎭. 兵判徐英輔, 自辟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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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經山日錄』冊二 1813년 5월 7일자 일기


감군의 업무1: 19세기, 정원용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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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군에 낙점되어 밤에 동소문, 동대문에서 적간하였다.

監軍受點, 夜摘奸東小門東大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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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經山日錄』冊二 1813년 5월 14일자 일기


감군의 업무2: 19세기, 정원용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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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군 일소에 낙점되어 밤에 순회하며 살피는 일을 하였다.

監軍一所受點, 夜作巡綽之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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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經山日錄』冊二 1813년 5월 26일자 일기


감군의 업무3: 19세기, 정원용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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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소 감군에 낙점되었다.

一所監軍受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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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經山日錄』冊二 1813년 6월 1일자 일기


병조좌랑의 업무2: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병조에서 숙직을 하던 중 우연히 장편시를 짓다(兵曹直中 偶成長篇)」

병조는 육조에서도, 직무를 수행하기 가장 어렵네.
騎曹於六曹, 最難供厥職

내사는 외사와 달리, 좌랑이 번갈아 숙직을 하네.
內司異外司, 佐郞遞宿直

심엄한 구중 궁궐 안이요, 근밀한 정전의 곁이네.
深嚴九閽內, 密邇正殿側

병마와 숙위를 통솔하고, 자물쇠 단속을 엄히 하네.
兵馬総宿衛, 門鑰謹察敕

엄숙하게 잡인을 물리치고, 감독하여 소란을 잠재우네.
肅穆雜人屛, 董責喧譁息

사강(射講)[13]은 시험마다 반드시 참여하고, 수리와 청소는 조금도 폐한 적 없네.
射講試必參, 修掃廢罔或

성기(省記)[14]는 신시(申時)를 기준으로 하고, 군호(軍號)[15]는 황혼을 정식으로 삼네
省記申是限, 軍號昏爲式

각 문에선 흑의(黑衣)[16]를 점검하고, 두 역에선 금륵(金勒)을 살핀다.[17]
各門點黑衣, 雙驛考金勒

그 책임이 참으로 막중하고, 그 임무 역시 매우 긴박하네.
其任固莫重, 其務亦旣亟

하물며 이경(二更) 초부터, 순검(巡檢)하는 것이 본디 법임에랴.
況是二更初, 巡檢自成則

장사(仗士)는 곤봉을 을러메고, 어패(御牌)는 가죽 표식을 차네.[18]
仗士騰木棍, 御牌佩韋飾

대궐에 밤이 깊으면, 간악배 단속해 남북으로 두루 순찰하네.
紫禁夜沈沈, 驗奸遍南北

자정 되면 비로소 돌아오되, 감히 옷깃을 풀지는 못한다네.
夜分始乃歸, 未敢解襟襋

선잠 들었다가 이내 깨니, 뜨락 희끄무레 동이 하마 텄네[19]
假寐旋驚覺, 盈廷已辨色

세수 급히 하고 의관을 정제해, 자리 옮겨 헌영(軒楹)에 나아가네.
整帽梳洗忙, 移座軒楹卽

소장(䟽章)과 이례(吏隷)에 대해, 출입을 관여하지 않음이 없네.
䟽章與吏隷, 靡不關通塞

법전(法殿)에 보의(寶扆)[20]가 설치되자, 시위(侍衛)가 시각 맞춰 달려오는데
法殿設寶扆, 侍衛趁時刻

칼과 채찍 및 활과 동개를 찬, 군복은 어찌 그리 삼엄한지.
刀鞭及櫜鞬, 戎服何整飭

한 자락 붉은 구름[21] 옆에서, 종일토록 꼼짝 않고 섰다네.
紅雲一朶邊, 竟日立如植

성상을 가까이 함이 어찌 영광 아니랴만, 근력이 이토록 노쇠했음에야 어이하리.
豈不榮近光, 奈此衰乏力

때때로 이 몸을 감군(監軍)으로 삼으니, 은명(恩命)은 항상 예측할 수 없네.
有時作監軍, 恩命恒不測

궁전 문에서 포시(晡時)[22]에 패를 받고, 순청에서 저녁마다 밥을 전달받네.
殿門晡受牌, 廵廳夕傳食

앉아서 종이 다 울길 기다리며, 간편한 복장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네.
坐待鐘鳴盡, 輕裝恐人識

눈서리 칠 때는 언 손을 참고, 비바람 불 때는 칠흑 같은 밤길 다니네.
霜雪忍指直, 風雨踏月黑

궁묘와 성곽을, 차례대로 꼼꼼히 규찰하여,
宮廟與城闉, 次第細糾劾

만나는 사람마다 번번이 검문하니, 간악한 무리들이 죄를 숨길 수 없다네.
逢人輒搜詰, 有奸莫諱匿

차마 법 어기고 변명 일삼다 걸리느니,[23] 부끄러이 입을 다무는 것이 낫지 않겠나.
忍事詭以遇, 無寧愧自默

다음 날 배알하고 패를 반납하면, 마음이 매번 황송하네.
平明拜還納, 中心每惶仄

늙은 몸이나마 아직 채찍 휘두를 수 있으나, 탈 말이 없는 것이 몹시도 군색하구나.
有疾尙強策, 無馬最窘逼

듣기로 병조의 관리들이, 국정을 관장해 나라를 평안히 하고,[24]
甞聞夏官屬, 掌政平邦國

태재(太宰)가 육전(六典)을 세워, 백성들의 법이 되었으며,[25]
太宰建六典, 所以爲民極

기보(祈父)가 범법자를 축출하고,[26] 진운(縉雲)도 사특한 자 제거했네.[27]
祈父乃薄違, 縉雲亦去慝

돌이켜보면 부끄럽게도 병무에 어두워, 일에 임해 미혹함이 많았네.
顧慙昧戎經, 臨事多迷惑

장헌(張憲)[28]의 재주야 진즉 없거니와, 감히 요숭(姚崇)[29]의 덕을 바라겠는가.
旣乏張憲才, 敢望姚崇德

죄과가 혹 장차 이른다면, 성은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으랴.
罪郵行將至, 報答安可得

직무 수행하며 왕명 기다려, 부디 근실히 수행해야 하리.[30]
修職以俟命, 庶用勤自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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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兵曹直中 偶成長篇」


병조 낭관과 서리의 배종: 18세기, 이긍익(李肯翊)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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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관(郞官)은 각각 서리(書吏)를 대동하여 배종[陪]을 삼았는데, 유독 병조 낭관을 배종하는 자는 이(利)가 가장 많았으므로 이 자리를 원하는 자는 입술을 태우고, 얼굴에 땀을 흘리며, 발꿈치를 접혀 가면서 앞을 다투었다. 전조(銓曹 이조(吏曹)ㆍ병조(兵曹))에서 병조 낭관을 주의(注擬)할 즈음에는 나이도 젊고 얼굴도 예뻐서 배리(陪吏) 되기에 합당한 자가 바지를 걷고 늘어서서 낙점(落點)을 기다리고 있다가 가장 잘 달리는 자가 얻었는데, 만약 일시에 같이 달려오는 경우에는 먼저 관(冠)을 벗어 그 문 안으로 던지는 자가 낙점을 얻었으니, 이는 이서의 한 고사(故事)이다. 옛날 전조에서의 의망에 심우정(沈友正)이 수망(首望)에 참여하고, 민몽룡(閔夢龍)이 부망에 참여하였는데, 심의 집은 남문 밖에 있었고, 민의 집은 태학(太學 성균관)곁에 있었다. 심에게 낙점을 받은 교활한 서리가 큰 소리로 속여 말하기를, “민몽룡이 낙점을 받았다.” 하여, 여러 서리가 모두 태학을 향하여 달렸지만 한 서리는 곧장 남문으로 달려 갔었다. 남대문 다락 위에 한 서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송현동(松峴洞)으로부터 엎어지면서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고 드디어 먼저 달려갔다.문에 들어간 지 한참 만에 여러 서리들이 관을 벗고 문에서 앞을 다툰 일이 있었다. 사대부가 벼슬을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았으니, 옛날 이조 판서의 집에 금관자를 붙인 손이 마루에 가득히 찼으나 모두 어물어물하고 감히 먼저 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음관이 맨 나중에 와서 여러 손님들보다 먼저 말하고, 말이 끝난 뒤에 바로 가니, 판서가 크게 기뻐하며 먼저 그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다. 아아, 이도 남문 다락의 서리의 일과 같은 것이 아닌가. 『어우야담』에 언급.

(원문 미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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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燃藜室記述』別集十 「官職典故」


병조좌랑 파직: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궁궐의 야간 순찰이 끝나고 돌아오니 병조의 아전이 말하기를 “승정원의 원례(院隷)가 문틈으로 이조 판서의 소장을 받았는데, 이는 승정원의 승지가 연이어 원례를 재촉했기 때문입니다. 병조의 입직 당상관이 이 꼴을 보고서 초기를 올리자, 승지가 자구 가운데 흠이 있다고 트집 잡아 재차 돌려보내어 고쳐 바치게 하고는, 자신이 먼저 아뢰어 ‘병조의 당상관과 낭관을 벌하소서.’라고 청하여, 상이 파직하라고 명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일이 비록 천만 뜻밖에 어이없이 벌어진 것이기는 하나 매우 황공하여 절구시 한 수를 짓는다. 이조 판서는 심환지(沈煥之)이고, 승지는 정상우(鄭尙愚)이고, 병조의 당상관은 참판 이경일(李敬一)이다(禁中夜巡歸 則吏言政院隷從門隙受吏判疏 盖承宣連促之也 兵曹入直堂上見之呈草記 則承宣以字句之有欠 再次還送 使之改納 而先自啓請 罪兵曹堂郞 上命罷之 余則雖出於夢寐之外 其惶蹙甚矣 因成一絶 吏判沈煥之 承宣鄭尙愚 兵曹堂上參判李敬一也)」

궁궐을 순찰하느라 의관을 정제하였으니, 감문에서 병졸 점검하는 것을 감히 노고라 하랴.
禁中巡檢整冠袍, 點卒監門敢謂勞

한밤중 돌아와 아전의 말 들으니, 사단이 승정원에서 “병조를 벌하소서”라고 청한 데서 났다 하네.
夜半歸來聞吏語, 事由喉院罪兵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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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禁中夜巡歸 則吏言政院隷從門隙受吏判疏 盖承宣連促之也 兵曹入直堂上見之呈草記 則承宣以字句之有欠 再次還送 使之改納 而先自啓請 罪兵曹堂郞 上命罷之 余則雖出於夢寐之外 其惶蹙甚矣 因成一絶 吏判沈煥之 承宣鄭尙愚 兵曹堂上參判李敬一也」


이조좌랑 임명과 관직생활


이조좌랑 임명과 감회: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이조 좌랑에 배수되어 느낌이 있어 짓다(拜吏郞 感而有作)」

병조에서 파직되자 이조에 임명되었으니, 벼슬살이 형편 너무 박하다는 말은 말아라.
騎郞纔罷又天郞, 官况休言太薄凉

야간 순찰과 금훤을 모두 벗어버렸으니, 이 몸에 은혜의 영광 아닌 곳 없어라.
巡夜禁喧都卸却, 此身無處不恩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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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拜吏郞 感而有作」


이조 낭관의 위상1: 17세기, 차천로(車天輅)의 시
Quote-left.png 「임시로 이조의 낭관이 되어 한 달 넘게 분주하다가 희롱 삼아 짓다(以假吏郞 閱月奔忙 戲題)」

금장 낭관[31] 임시적인 직책이긴 하지만, 이십 년간 출입하니 그 또한 영광이지.
錦帳郞官縱假名, 卄年出入亦爲榮

통부(通符)를 차다가 금장(金章)을 대신 찼으니[32], 생기(省記)[33]를 옥수로 받들라고 말 말게.
通符且替金章佩, 省記休言玉手擎

승정원의 말직도 스스로를 중시하는데, 이조의 늙은 관리 너무나 경시하네.
政院小胥還自重, 天官老吏最相輕

행인들이 나 보고 양쪽 빈모 다 희도록, 종 데리고 날마다 출근한다 비웃었지.
路人笑我雙星鬢, 短僕羸駑日日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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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五山集』卷二 「以假吏郞 閱月奔忙 戲題」


이조 낭관의 위상2: 18세기, 이의현(李宜顯)의 시
Quote-left.png 「우연히 읊다 을유(1705)(偶吟 乙酉)」

처음 벼슬해 조정에 오른 지 십 년이 지나니, 외로운 모습으로 우두커니 앉아 흰 머리만 자랐구나.
釋褐登朝過十霜, 畸形兀兀鬢絲長

변변찮은 재주 금화전(金華殿)[34]의 숙직 분수에 넘치니, 영화로운 벼슬 이조 낭관을 어찌 편안히 여기랴[35]
微才不分金華直, 榮宦何安吏部郞

성시는 시끄러워 마음에 이미 괴롭고, 강호의 안개 낀 달 흥을 잊기 어려워라.
城市囂塵顔已苦, 江湖煙月興難忘

조정에서 물러나와 밥을 먹으니[36] 맑고 한가로워, 저물녘의 서늘함이 서창에 들어오니 흡족하네.
自公退食還淸暇, 隨意西窓納晩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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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陶谷集』卷一 「偶吟 乙酉」


이조좌랑 윤기의 관직생활1: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다시 한가함을 시로 읊다(又以詩詠其閑)」

청렴한 관직으론 이조가 최고인데다, 더구나 머릿수만 채우는 잠랑(潛郞)[37]임에랴.
淸寒官府最東銓, 況是潛郞但備員

한 푼어치 값도 못하니 월봉이 없고, 정사에 참여 못하여 수시로 잠만 자네.
不直一文無月俸, 未參諸政有時眠

궁궐 문엔 종일토록 말 울음 소리뿐이요, 궁중 나무엔 가을 맞아 매미 소리 좋구나.
宮門盡日惟嘶馬, 禁樹迎秋好聽蟬

아전(衙前)과 조례(皁隷)를 본 적이 있었던가, 매양 공무 임해서야 잠시 올 뿐인 걸.
吏隷何曾相對面, 每當公故暫來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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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又以詩詠其閑」


이조좌랑 윤기의 관직생활2: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7월 19일 희정당에서 친정(親政)을 하였다. 내가 이조 낭관으로 정사 자리에 참여하여 즉흥적으로 읊조리다(七月十九日 親政于煕政堂 余以吏郞參政席 口占)」

새벽부터 편전에 달려가 어광을 가까이 뫼셔, 대정(大政)에 친림한 우리 임금 우러르네.
便殿晨趍近耿光, 親臨大政仰吾王

술과 음식 하사한 은혜는 자리를 적시고, 풍운제회(風雲際會)[38]의 화합은 온 당을 감동시키네.
恩私酒饌霑方丈, 際會風雲動一堂

감히 이조와 병조의 마음이 저울같이 바르다 보장할 수 있을까마는, 단지 삼복더위에 땀을 간장처럼 흘리듯 신중해야 하네.
敢保兩銓心似秤, 只應三伏汗如漿

여러 공들 성대하게 공론 펴는 자리에, 부끄러워라 노쇠한 흰머리의 낭관이여.
諸公濟濟恢張地, 慙愧龍鍾白首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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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七月十九日 親政于煕政堂 余以吏郞參政席 口占」


이조좌랑 윤기의 관직생활3: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이조에서 숙직하며 시로 그 직무를 시로 기록하다(吏曹直中 以詩記其職)」

이조의 옛 관아 가는 건 헛일 되었으니, 금호문 앞이 숙직하는 건물이라.
天衙舊廨謾成虛, 金虎門前是直廬

계청(啓請)하는 관리들 새벽부터 붐비고, 정리해 올리는 성기(省記)는 신시(申時) 초에 하지.
啓請官班侵曉色, 修呈省記趁申初

농간 적발 제향 품계 하느라 말타기 걱정이고, 정사 따라 자급 인준하려고 장부를 살피네.
摘奸禀祭憂鞍馬, 隨政準資按簿書

늘그막에 이조 낭관이 참으로 내 분수지만, 기력이 이미 다한 것 한스러울 뿐이네.
白首郞潛眞分內, 只嘆筋力已無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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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吏曹直中 以詩記其職」


이조좌랑 윤기의 관직생활4: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또 스스로 조소하다(又自嘲)」

아침에 이조 참의에게 명받아 통금 인경이 치도록 공무를 보니, 검은 관문에 붉은 인장이 종횡으로 그득하네.
朝受吏參夜報更, 墨關朱印也縱橫

가련하다 헛된 광경 도리어 무익하니, 열흘 동안 술 한 잔 마시지 못했어라.
可憐虛景還無益, 十日何曾一盞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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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又自嘲」


이조좌랑 윤기의 관직생활5: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이조좌랑으로 명을 받들어 사직 대제를 받드는 제집사가 재숙하는 곳을 적간하러 가는 길에 어린아이의 말을 기록하다(以天郞奉命摘奸於社稷大祭諸執事齋宿處路中記小兒言)」

역말 타고 나가려고 안장을 빌릴 때에, 거리의 아이들 손뼉 치며 이조 낭관 비웃네.
乘出郵驄却借鞍, 街兒拍手笑天官

양군(兩軍)[39]을 앞세우고 주의를 뒤세워, 사직의 맑은 재청에 적간하러 간다고.
兩軍前導朱衣後, 社稷淸齋去摘奸

이조좌랑으로 명을 받들어 사직 대제를 받드는 제집사가 재숙하는 곳을 적간하러 가는 길에 어린아이의 말을 기록하다.
【驛馬無鞍故借之。摘奸之行,例以兩卒前導,吏朱衣騎馬以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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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又自嘲」


육조 당상, 그 빛과 그늘


낭관과 당상의 사이, 참의(參議)


병조 낭관과 당상을 반복하다: 16세기, 이수광(李睟光)의 시
Quote-left.png 「기성만영병서(騎省漫詠 幷序)」

내가 경인년(1590) 이후로 누차 병조에서 벼슬을 했는데, 좌랑(佐郞)을 지낸 것이 한 번, 정랑(正郞)이 두 번, 참지(參知)가 네 번, 참의(參議)가 열두 번이다. 어떤 이가 내게 말하기를 “그대는 오로지 문학(文學)에만 전념하였으나 세상에 쓸모가 없고, 군려(軍旅)의 업무는 그대가 능한 것도 아닌데 병조의 관리에 이처럼 오래도록 있으니, 어째서인가? 병법을 논하는 자리에 걸맞은 노련한 계모와 기묘한 책략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한바탕 크게 웃고, 인하여 이 시를 지어 조롱에 해명한다.
余從庚寅以來。屢忝騎省。凡爲佐郞者一正郞者二參知者四參議者十二。或謂余曰。子專精詞學。而無所用於世。軍旅之事。非子所能。而久於兵官若是。何也。無乃有老謀奇略合着論兵地耶。余大笑。因作此詩以解嘲云。

일평생 관직과 봉록이 병조에 있으니, 이십년 동안에 열아홉 번이나 된다오.
一生官祿在兵曹, 二十年來十九遭

낭관을 지낸 것도 외려 외람스러운데, 당상에 오래 처함 어찌 탐욕이 아니랴.
曾歷郞中猶是忝, 久居堂上詎非饕

허리의 상전은 쌍검 용천의 검광이요,[40] 흉중의 풍운은 육도 표도의 병법이라오[41]
腰間霜電龍雙劍, 心下風雲豹六韜

이제부터 내 운명을 스스로 확신하니, 문성이 장성 높이에 미치지 못하리라.[42]
從此命途方自信, 文星不及將星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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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芝峯先生集』卷十五 「騎省漫詠 幷序」


형조참의로서의 첫 출근: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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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형조에서 좌기(坐起)하라는 고목(告目)이 와서 밥을 먹은 뒤에 가서 참석하였다. 판서도 왔다. 판서와 인사를 차린 뒤에 낭청들이 일제히 지위에 따라 예를 행하였다. 하리들이 차례로 인사를 했다. 소송이 많기로는 번화한 부府보다도 심하다. 이전의 규례에 의하면 판서가 맡아보았던 문서나 장부는 비록 그가 갈려 면직이 된 뒤에라도 신임판서가 맡아야하고, 참판이나 참의들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업무가 섞이지 않는다. 상일방(詳一房)은 판서가 담당하고, 고이방(考二房)은 참판이 담당하며, 예이방(隸二房)은 참의가 담당하고, 예일방(隸一房)은 정랑 임수관(任守寬)이 담당하고, 고일방(考一房)은 정랑 류서(柳恕)가 담당하며 -으레 고이방을 겸임한다- 금일방(禁一房)은 정랑 김치온(金致溫)이 담당하고, 예이방(隸二房)은 좌랑 송문흠(宋文欽)이 담당하며, 상이방(詳二房)은 좌랑 임현중(任顯重)이 담당하고-으레 상일방을 겸임하고, 형방(刑房)도 겸임한다-, 금이방(禁二房)은 좌랑 임지호(林志浩)가 담당한다. 서리들의 경우는, 고이방은 김영환(金英煥)이, 상일방은 전춘상(田春祥)이 담당하고, 그 나머지 김서항(金瑞恒)ㆍ이덕운(李德運)ㆍ김성대(金成大)ㆍ김학량(金學良)ㆍ장서규(張瑞奎)ㆍ김중대(金重大)는 위 사항의 각 방房에 의거하여 차례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다. 오후 늦게 전옥서의 일차죄인(日次罪人)들이 압송되어 와서 시험 삼아 곤장을 쳤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아서 입계(入啓) 문서를 수정한 뒤에 마치고 돌아왔다. 이는 승전죄인(承傳罪人) 26명과 본조죄인(本曹罪人) 56명으로, 오직 승전죄인만 매번 좌기하여 곤장을 치며 심문한 것이다. 문안을 살펴보니, 임자년(1732)과 계축년(1733)에 갇힌 무리가 많았으며, 그 중에는 간혹 백여 차례나 곤장을 맞은 자도 있었다.

曉頭。本曹坐起告目來。食後往。參判亦來。與判書行私禮後。郎廳一齊禮數。下吏以次見謁。詞訟之繁甚於劇府。前規判書次知文安。雖遞免後。新判書次知。參判參議亦然。不得相雜矣。詳一房判書次知。考二房參判次知。隷二房參議次知。隷一正郎任守寬。考一正郎柳恕二房例兼。禁一正郎金致溫。隷二佐郎宋文欽。詳二佐郎任顯重一房例兼刑房兼。禁二佐郎林志浩。 書吏考二金英煥。詳一田春祥。其餘金瑞▼(忄+百)李德運金成大金學良張瑞奎金重大依上項房次隨行。晩後。典獄日次罪人押來。試杖。而皆不承服。修正入 啓文書後。罷歸。蓋承 傳罪人二十六名。本曹罪人五十六名。而惟承 傳罪人每坐起杖問。考文案。則多有壬子癸丑年囚徒。或經刑杖百餘次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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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十 1747년 10월 21일자 일기


병조참의의 입직: 17세기, 유몽인(柳夢寅)의 시
Quote-left.png 「규오 유인길의 「대궐에서 비를 읊다」에 차운하다(次葵塢禁中詠雨)」

차가운 소리가 밤중에 대나무 끝에 떨어지는데, 섬돌 위에서 분주히 달리며 개미처럼 고생하네.
寒聲夜瀉綠篁梢, 階上追奔戰螘勞

관아가 파하여 아전들이 다투어 가죽신을 씻으니, 숙직하며 잠자는 학사의 귀는 어찌 그리 소란한가.
衙罷小胥靴競洗, 直眠學士耳何騷

흰 벽에 얼룩 생겼으니 파리를 잡았기 때문이요, 다구에 방울 떨어지니 토끼털 붓 움츠러드네.
斑生粉壁排蠅翼, 鈴墮茶甌蹙兔毫

가을장마 느닷없기가 도리어 나와 비슷하니, 우묵한 마루의 배가 된 지푸라기 신세[43] 부끄럽네.
秋潦無根還似我, 坳堂慚愧芥爲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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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於于集』卷一 「次葵塢禁中詠雨」


병조참의의 입직: 18세기, 정약용(丁若鏞)의 시
Quote-left.png 「기성에서 짓다. 을묘년 2월 19일 병조참의로 입직하였다(騎省作 乙卯二月十九日 以兵曹參議入直)」

금작(金爵)[44] 별빛 머금어 움직이는 때, 용마루에 새벽빛 차츰 밝아져.
金爵含星動, 觚稜曙色分

궁중 도랑 눈 녹은 물이 흐르고, 방안 휘장 구름이 환히 비치네.
御溝流煖雪, 宿帳照明雲

술자리에 어약(魚鑰)[45]을 나누어 주고, 서생으로 용감한 군사 거느려.
酒席頒魚鑰, 書生領虎賁

우리 속에 갇힌 새 천성을 어겨, 동류 떠난 신세를 서글퍼하네.
樊籠欺野性, 惆悵憶離群


정남문 동쪽에 작은 집이 놓였는데, 솔 소리 박달 그늘 온종일 맑은 기운.
午門東畔小堂橫, 松籟檀陰盡日淸

숙직하며 경호할 때 이용할 무기 없어, 탈 없이 삼경 되길 남모르게 기원하네.
未有寸兵資宿衛, 黙祈無事到三更


바람이 운하 걷어 먼동이 트려 할 제, 팔방 문 어약 열려 봄잠을 깨뜨리네.
風捲雲河欲曙天, 八門魚鑰破春眠

열 사람 중 아홉 사람 승정원 향해 간다고, 시위병 가끔 와서 베갯머리에 알리네.
十人九向銀臺去, 仗卒時來報枕邊


근정전의 두 행랑채 동서로 줄지은 곳, 봄추위 속 대궐 군사 몸이 꽁꽁 얼어붙듯.
法殿東西列兩廂, 春寒禁旅飽氷霜

차디찬 옷 남루하고 아침거리 변변찮아, 연영이라 선기대의 낭관된 게 부끄러워.
鐵衣襤褸朝餐薄, 羞殺蓮營選騎郞


장용영(壯勇營)을 연부(蓮府)라 부르는데 그 안에 선기대(選騎隊)가 있다.
壯勇營謂之蓮府, 有選騎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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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與猶堂全書詩集』卷二 「騎省作 乙卯二月十九日 以兵曹參議入直」


병조참의 또는 병조참지의 역할: 18세기, 권상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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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에 장생전(長生殿) 수리를 마쳤으므로 이달 29일에 재궁(榟宮)을 도로 봉안하는 일로 승정원에 들어가 초기(草記)를 올리고 돌아왔다. 오늘은 대궐 안이 조용한 것 같고, 하인들의 소란스러운 일도 없었다. 이는 병조 참지 조관빈(趙觀彬)이 입직하여 아주 삼엄하게 통제하였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다.

朝前以 長生殿修改畢役 今二十九日 榟宮還安事 入 政院呈草記還 今日則 闕內似肅然 無下人喧亂事 盖兵曹參知趙觀彬入直 禁防甚嚴也 可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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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臺日記』四 1720년 4월 27일자 일기


아경(亞卿)이라는 지위, 참판(參判)


아들 예조참판 정기세를 향한 정원용의 시선: 19세기, 정원용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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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판이 화성의 건릉을 봉심하라는 명을 받아 왔다가 이곳에서 묵었다. 일산(日傘)을 펼치고 역마를 타고서 금패(金牌)를 앞장 세워 오다가 우연히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그 영광스러움이 배가 되었다. 이것 또한 선음(先蔭)이 미친 것이다.[46]

參判承華城健陵奉審之命來宿於此. 張盖騎馹, 金牌前導, 偶値此會, 榮輝倍動. 此亦先蔭攸及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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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經山日錄』十一冊 1853년 3월 7일자 일기


호조참판 이기조를 향한 장유의 시선: 17세기, 장유(張維)의 시
Quote-left.png 「참판 이기조가 경상도 관찰사로 나갈 때 전송한 시 두 수(送李侍郞基祚 出按嶺南二首)」

호조에 몸담은 15개월, 나라 살림 떠맡은 고달픈 생활.
度支十五月, 米鹽苦埋頭

황금 비단 요구하며 찾아드는 썩은 객들, 목마르게 부르짖다 칼칼해진 목구멍.
腐客索金幣, 渴呌生塵喉

기쁘겠네 그대 혼자 몸을 빼어서, 맑은 가을날 관찰사로 부임하네.
喜君獨抽身, 按節行淸秋

고삐에서 놓여 난 말처럼 상쾌하고, 버렁 떠난 새매처럼 펄럭이며 날아가리.
快若馬脫銜, 翩若鷹辭韝

내려가서 이런 말은 하지를 마오, 처리할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休言到部日, 堆案如山丘

오직 벽력처럼 민첩한 솜씨 발휘하여, 지체없이 단번에 끝내야 하리.
唯應霹靂手, 揮霍無停留

위엄에 곁들여 은혜 펼쳐 교화하면, 칭송하는 노랫소리 울려 퍼질텐데.
威風挾惠化, 千里爭歌謳

이따금씩 두고 온 벗을 생각하여, 멀리 편지나 전해 주구려.
時時念故人, 札翰遙相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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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谿谷先生集』卷二十五 「送李侍郞基祚 出按嶺南二首」


조선시대의 장관, 판서(判書)


판서의 관속: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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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증조(曾祖) 정평(靖平) 공이 예조 판서가 되자 임금께, “판서는 육부(六部)의 으뜸인데도 관속(官屬) 한 사람을 거느리니 하관(下官)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청컨대 한 사람을 더해 주시옵소서.”라고 아뢰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시었다. 판서(判書)가 두 관속을 거느리게 된 것은 정평공 때부터 시작되었다.

我曾祖靖平公爲禮曹判書。啓曰。判書長於六部。而率皁隷一人。與下官無異。請加一人。上允之。判書兩皁隷。自靖平公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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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慵齋叢話』卷三


호조판서 김병국의 입직: 19세기, 이윤선(李潤善)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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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판서【김병국】가 공가(貢價) 중 무명에 대한 이자 문제로 인해 상하가 좌기할 때 아문에 왔다.【처음 방문한 것이라고 ○○○ 한다】

戶曹判堂【金炳國】以貢價木邊上下坐起進衙【初見事○使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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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公私記攷』卷四 1868년 6월 23일자 일기


판서의 출근 문제: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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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世宗朝)에 신상(申商)은 예조 판서가 되고, 허조(許稠)는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신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집무하러 나가서 해가 기울면 돌아오고, 허는 이른 아침에 집무하러 나가서 해가 지고 난 뒤에 돌아왔었다. 하루는 허가 먼저 나가서 조(曹)에 앉았는데 신이 이조에 이르렀다가 얼마 안 되어 돌아갔다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가서 고하기를, “어찌 늦게 출근하여 일찍 파하시오.” 하니, 신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인은 일찍 출근한다 해도 무슨 이익되는 일이 있으며, 내가 비록 늦게 출근한다 하나 무슨 손해를 끼치는 일이 있습니까. 각각 자기의 수완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신은 때에 임하여 결단을 잘 하였고, 허는 부지런하되 각박하게 시행하니 성격이 같지 않은 것이다.

世宗朝。申商爲禮曹判書。許稠爲吏曹判書。申日中而往日側而還。許侵晨而往日沒乃還。一日許先往坐曹。聞申到南宮。未幾還出。許令人往告之曰。何晩仕早罷。申大笑曰。大人早仕。有何加益之事。余雖晩仕。有何加損之事。不如各弄掌而已。申臨機善決。許勤苦刻行。所性不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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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慵齋叢話』卷二


이희보의 숙직을 두고 장난친 정사룡: 16세기, 이기(李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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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분당(이희보)이 오위장이 되어 위소(衛所)에 들어가 숙직할 때, 정호음(정사룡)은 형조판서로 당 위에 앉아 있던 날이라서 시를 지어 안분당에게 주었다.
安分堂爲五衛將, 入直衛所, 鄭湖陰以刑曹判書, 坐堂之日, 吟詩寄安分云

문 앞이 조용해서 글 쓰는 데 빠져드니, 소송 일던 관아에는 새 소리만 시끄럽네.
抱關岑寂著書淫, 囂訟公庭聒鳥音

살구꽃에 연지 빛 돈다 하더니, 이제 보니 낡은 담장 아래 봄 냉이 돋았구려.
已報臙脂歸杏萼, 更看春薺老牆陰

시서(詩書)는 본업이니 어찌 본성을 어기리오, 명성과 이익은 낯선 일, 마음에 맞질 않는다네.
詩書舊業寧違性, 聲利新知不稱心

강 남쪽 안개비 저편으로 머리를 돌려볼 뿐, 꿈에나 함께 만나 낚시하고 땔나무 해보세.
回首江南煙雨裏, 釣磯樵逕夢相尋


안분당이 차운하여 답한 시의 한 연구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安分堂次答一聯云

송사 몰리는 가운데 시를 생각하시니, 병사들 지키고 선 곳에서 평소 생각 부끄러울 뿐.
鼠牙叢裏還詩思, 虎旅巖邊愧夙心


호음이 다시 오언율시 한 수를 지었다.
湖陰又有短律云

벌써 봄날은 절반이 지나고, 들판에 복사꽃 물이 올랐네.
已復春垂半, 郊原物色桃

얇게 깔린 눈 위로 푸성귀 싹 올라오는데, 매서운 추위는 솜옷에도 스며드네.
菜纖穿薄雪, 寒峭入重袍

푸른 하늘에 뻗치는 흥 사그라지지 않는데, 공문서 읽는 수고로움에서 몸을 빼기 어렵구나.
未減擎蒼興, 難抽判牘勞

그대와 나란히 숙직하노니, 누구의 고생이 더 심한가.
周齋兼李直, 酸苦問誰高


안분당이 오래도록 숙직한 것을 놀린 것이다. 유자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장난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譏安分久入直也. 其歡欣游戱於斯文, 可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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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艮翁疣墨』(이기 저, 신익철・조융희・이철희 역(2010), 『간옹우묵(艮翁疣墨)』,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pp. 160~161.)


봉심(奉審)과 회창(回倉) 그리고 순심(巡審), 출장을 빙자한 외유


동대문 밖 인가의 철거와 풍수설: 16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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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소대하였다. 시강관 심봉원(沈逢源)이 아뢰었다. 동대문(東大門) 밖에 조종조부터 있었던 오래된 인가(人家)를 이번에 문을 막고 있는 산줄기를 점거하였다고 하여 모두 철거시키라고 하였습니다. 풍수설(風水說)이 성인(聖人)의 경전(經典)에는 있지 않은 것이니, 진실로 성주(聖主)로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덕을 닦으면 하늘에다 영명(永命)을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도(道)를 어기고 덕을 손상시키면 스스로 위망(危亡)에 이를 것인데 풍수설이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上召對。 侍講官沈逢源曰: 東大門外, 自祖宗朝久遠人家, 今者以侵占捍門山來脈, 皆令撤毁。 風水之說, 不在於聖經, 固非聖主之所可信也。 人君修德則可以祈天永命, 若不然而反道敗德, 則自至於危亡, 何關於風水之說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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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종실록』6권, 명종 2년(1547) 8월13일(신묘) 기사


연지(蓮池)와 누정(樓亭), 휴식과 위안의 공간


예조의 풍경


예조의 건립: 15세기, 성현(成俔)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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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예조는 바로 예전의 삼군부(三軍府)이다. 정삼봉(鄭三峯)이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을 맡았을 때 의정부의 제도를 보고 말하기를, "정부와 군부는 일체이다." 라고 하고 드디어 그 제도에 의하여 만드니 높다랗게 동서가 상대가 되어 그 청사가 굉장한 것이 다른 관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뒤에 삼군부를 혁파하고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여 군무를 맡기지 않고, 예조로써 오례(五禮)를 맡아보게 하고 또 다른 나라의 사신을 대접하게 하니, 그 임무가 중대하여 그 부(府)를 예조로 삼고, 중추원은 도리어 예조의 남쪽 곁채에 우거(寓居)하였다. 경복궁 서쪽 가에 수맥(水脈)이 많은데, 경회루의 연못 물은 비록 옛날 중국의 곤명지(昆明池)ㆍ태액지(太液池)라도 이보다 좋지 못할 것이다. 서문 밖에 샘이 있어 넘쳐 흐르니, 얼음과 같이 맑고 차가워 사람들이 모두 쪽[藍]을 물들이기 때문에 쪽샘[藍井]이라 불렀다. 예조의 우물도 또한 맑고 깨끗하고 마르지 않아 흘러서 큰 못을 이루니 비록 몹시 가물어도 한결같았다. 못 남쪽에 조그마한 땅이 중추부로 뻗어서, 수초가 우거지고 더럽더니 금상(今上) 기미년에 중추부에서 아뢰기를, “개 이빨처럼 우리 관아에 들어오니, 마땅히 분할하여 우리 못으로 해야겠습니다.” 하니, 예조가 이르기를, “외국 사람을 대접하는 곳을 좁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서로 다투었다. 임금이 승지와 내관 등에게 물어서 쪼개어 나누어주니, 중추부에서 그 땅을 파서 서지(西池)를 만들고, 대청을 개축하고 대청에 연이어 서헌(西軒)을 만들고, 돌기둥을 물 속에 세우니 아로새겨지는 그림자가 물결 위에 떨어지고, 서쪽은 산봉우리가 높고 집들이 좋고 나무가 빽빽하여 풍경이 서울에서 제일이었다. 그 밑에 있는 사헌부와 옛 병조ㆍ형조ㆍ공조ㆍ장예원(掌隸院)에도 모두 못이 있어 연꽃을 심었고, 동쪽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에는 비록 못이 있으나 서쪽 못보다는 훌륭하지 못하였다.

今禮曹是古三軍府 鄭三峯 掌軍國重事 見議政府所搆之制 乃曰 政府軍府一體 遂依其制而搆之 屹然東西相對 其棟宇宏壯 非他官府之比 其後革三軍府 而置中樞院 不任軍務 以禮曹掌五禮 且接異國之使 其任重大 以其府爲禮曹 而中樞院反寓曹之南廊 景福宮西邊多水脉 慶會樓池水 雖古之昆明太液不能過也 西門外有泉濫出 淸冷如氷 人皆染藍 故謂之藍井 禮曹之井 亦澄澄不竭 流爲大池 雖盛旱如舊 池南尺地 斗入中樞府 沮洳荒穢 今上己未年樞府啓曰 犬牙入吾司 宜割爲吾池 禮曹曰 外夷接待之處 不可狹隘 相爭不已 上命承旨內豎等審之 割分與之 樞府鑿其池爲西池 改搆大廳 連廳作西軒 樹石柱於水中 彫欄影落波上 西望峯巒崷崒 人家甲第 樹木蔥鬱 風景甲於都中 其下司憲府古兵曹刑曹工曹掌隷院皆有池種蓮 東邊議政府吏曹漢城府戶曹 雖有池 不如西池之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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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慵齋叢話』卷十


예조의 낭관청: 17세기, 이정귀(李廷龜)의 시
Quote-left.png 「예부에서 낭관청을 중건하고 풍악을 연주한 후 간소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낭료들과 즉흥적으로 읊다(禮部重建郞官廳 閱樂後仍作小酌 酒席與郞僚口占)」

남궁에서 잔치 풍악 울리며 인청(寅淸)[47]이 모이니, 절후는 삼원(三元)[48]에 가까워서 고운 햇살이 밝아라.
南宮演樂會寅淸, 節近三元麗景明

이 늙은이는 십 년을 이제 여섯 번 보태었고, 이 작은 관청은 해를 넘겨 이제야 중건되었네.[49]
老子十年今六忝, 小堂經歲始重營

연못과 누대에는 아직도 잡초 자취 남았으니, 북과 피리 소리 도리어 서글픈 감회를 일으키네.
池臺尙帶蓬蒿迹, 鼓篴還挑感念情

공무를 마치고 우연히 모여 한바탕 취하노니, 이 잔치를 이대로 낙성식으로 삼은들 어떠리.
衙罷偶然拚一醉, 不妨仍作落新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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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月沙先生集』卷十七 「禮部重建郞官廳 閱樂後仍作小酌 酒席與郞僚口占」


예조의 풍경: 17~18세기, 홍세태(洪世泰)의 시
Quote-left.png 「김참봉, 홍진사와 함께 예조 뒷산에 오르다(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번역문 미비)
崇岡龍虎抱南宮, 御氣樓臺北極通

(번역문 미비)
暗向池心窺雪水, 高攀樹杪坐春風

(번역문 미비)
孤峰忽在斜陽外, 萬戶平沉沓靄中

(번역문 미비)
采采滿盤新艾綠, 飯香羹滑飽衰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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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柳下集』卷三 「同金參奉 洪進士。登南宮後岡」


예조의 풍경: 18세기, 이시항(李時恒)의 시
Quote-left.png 「예조 낭관으로 옮겨 임명되어 본사(本司)에서 숙직하다(移拜春曹郞 直宿本司)」

(번역문 미비)
十年重入舊南宮, 老吏依俙記是翁

(번역문 미비)
昔者紅顔今白首, 向來員外此郞中

(번역문 미비)
池㙜柳亞微風撼, 庭院苔荒澹月空

(번역문 미비)
持被西廳仍閱案, 卷中名錄弟兄同

(번역문 미비)
-仲汲吾後亦題名。故結句及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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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和隱集』卷三 「移拜春曹郞 直宿本司」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예조에 근무하며 우연히 읊다(直禮曹偶吟)」

광화문 앞이 바로 예조이니, 낭관의 재미는 극히 쓸쓸하네.
光化門前是禮曹, 郞官况味極蕭騷

전교를 받들 때엔 바삐 말을 몰고, 초기를 올릴 때엔 급히 도포 입네.
聽傳敎際忙驅馬, 呈草記時急整袍

봉인이 옆에 있으나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눈앞의 담장은 어찌 그리 높은지.
封印在傍非自用, 築墻當面一何高

단지 북창 아래로 옮겨 앉아, 멀리 맑은 이내 바라보면 흥이 문득 호쾌할 뿐.
只應移席北窓下, 遙看晴嵐興却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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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禮曹偶吟」


예조의 풍경: 18세기, 윤기(尹愭)의 시
Quote-left.png 「예조에 입직한 날, 인왕산을 마주해 한가로이 4수를 짓다(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인왕산 솟은 바위 서울을 진무하니, 구름 속 기봉이 그림처럼 산뜻해라.
仁王矗石鎭王京, 雲裏奇峯畫裏明

본디 서산에 상쾌한 기운 많아, 늘 바라보매 돌아가고픈 정 없어라.[50]
自是西山多爽氣, 長看不必有歸情


깎아지른 봉우리는 하늘을 찌르고, 빙 두른 성곽엔 초목이 우거졌네.
高峯戍削與天參, 粉堞周遭草樹毿

빼어난 기운은 세속에 물들지 않아, 아침마다 저녁마다 남기 절로 맑아라.
秀氣不爲塵土染, 朝朝暮暮自晴嵐


예조에 숙직하는 것이 시름겹지만, 산색이 홀연히 눈길 가득 새롭구나.
南宮鎖直足愁顰, 嶽色忽然滿目新

인왕산 보노라면 산야의 흥취 일어, 이 몸이 홍진에 있는 줄을 잊노라.
對此却生山野思, 不知身在軟紅塵


성근 버들 줄지어 있고 산색은 새로운데, 맑은 바람에 느긋이 누웠노라니 정신이 상쾌해.
疎柳成行山色新, 淸風高卧爽精神

연명이 어찌 천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랴, 나 또한 희황 이전의 사람[51]이로다
淵明千古寧專美, 我亦羲皇以上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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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無名子集詩稿』冊三 「直春曹日 對仁王山 漫成四絶」


병조의 누정과 연지


병조의 누정: 16세기, 윤두수(尹斗壽)의 시
Quote-left.png 「병조의 작은 누대에서 우연히 시를 짓다(兵曹小樓偶題)」

별을 보고 갔다가 별을 보고 돌아오니, 봄이 다 저물도록 술 한 잔 할 겨를 없네.
見星而往見星來, 春暮何曾把一杯

서둘러 작은 누대에 올라 물색을 감상하니, 실버들 늘어진 곳에 녹음이 아른거리네.
急上小樓探物色, 柳絲垂處綠徘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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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梧陰先生遺稿』卷一 「兵曹小樓偶題」


병조의 연지: 17세기, 이수광(李睟光)의 시
Quote-left.png 「병조 청사 뒤쪽 작은 못이 깊고 검푸른데, 거기에 연꽃 몇 송이가 있어(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누가 섬돌 앞 한 자락 사초를 파헤쳤나, 못 속에 담긴 물이 웅덩이도 못 채우네.
誰破階前一席莎, 池中貯水不盈科

멀리 흘러가[52] 바다로 들어가진 못 해도, 실버들 늘어진 곳에 녹음이 아른거리네.
朝宗縱隔滄溟路, 咫尺潛通太液波

칠흑빛 깊이 고여 옛 거울 잠긴 듯하고, 은빛 물고기 부침하매 여린 연잎 흔들리네.
漆色深泓涵古鏡, 銀鱗瀺灂動新荷

여기에 무한한 강호의 뜻 있을지니, 만 리의 가을바람 저물녘에 세차구나.
此間無限江湖意, 萬里西風日夕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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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芝峯先生集』卷四 「騎曹廳後小池深黑中有種荷數朶」


병조의 연지: 17세기, 김육(金堉)의 시
Quote-left.png 「달밤에 병조에 입직하다(月夜直騎省)」

백합꽃 피어 있고 파초잎 기다란데, 비 온 뒤라 못가 누각 여름에도 서늘하네.
百合花開蕉葉長, 雨餘池閣夏生凉

맑은 밤에 입직하니 일 없어 한가함에, 누운 채로 구름 가고 달빛 토함 바라보네.
淸宵禁直閑無事, 臥看流雲吐月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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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潛谷先生遺稿』卷二 「月夜直騎省」


병조의 연지: 18세기, 정간(鄭榦)의 시
Quote-left.png 「병조 당상대청 뒤에 네모진 못이 있고, 못에는 연꽃이 못가에는 창포가 둑에는 수양버들이 있어, 마침내 ‘淸’자 운으로 읊어 화답을 구하다(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번역문 미비)
植物知無數, 憐渠抵死淸

(번역문 미비)
明波爲樂國, 君子錫嘉名

(번역문 미비)
露結珠團淚, 風撞玉散聲

(번역문 미비)
朱花將大發, 吾且製裳行

(번역문 미비)
右蓮


(번역문 미비)
根遇石逾怪, 葉抽泥更淸

(번역문 미비)
周菹稱美味, 軒草擅芳名

(번역문 미비)
廬岳聖賢態, 杏壇琴瑟聲

(번역문 미비)
何當長服餌, 羽化瞥天行

(번역문 미비)
右菖蒲


(번역문 미비)
裊裊池邊柳, 風來面上淸

(번역문 미비)
曾供程叔諫, 更助晉臣名

(번역문 미비)
濃暗夕烟色, 新靑朝雨聲

(번역문 미비)
絲長寧縶馬, 我自不南行

(번역문 미비)
右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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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鳴臯先生文集』卷一 「騎省正衙後有方塘 塘有芙蕖 渚有菖蒲 堤有垂柳 遂用淸字 詠以求和」


병조의 연지: 19세기, 임천상(任天常)의 시
Quote-left.png 「비오는 가운데 병조에 입직해 있으면서 장난삼아 ‘무와행’을 짓다(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번역문 미비)
憲府有池無蛙聲, 暑潦令人耳根淸

(번역문 미비)
世傳昔時姜監察, 投檄戒蛙蛙不鳴

(번역문 미비)
蛙本水産性喜水, 得雨喧聒卽其理

(번역문 미비)
一片坳塘何所無, 兩部鼓吹隨處起

(번역문 미비)
我官兵曹直曹齋, 齋西有池亦無蛙

(번역문 미비)
夜來不眠但聽雨, 雨中無蛙理亦乖

(번역문 미비)
憲府無蛙固有說, 兵曹無蛙孰分別

(번역문 미비)
試看物理本不齊, 種種誠難爭口舌

(번역문 미비)
我姑推類一爲言, 潮鰐河虎感應存

(번역문 미비)
風稜憲府主禁亂, 職責兵曹掌禁喧

(번역문 미비)
禁喧禁亂威素立, 蛙雖蠢虫應有慴

(번역문 미비)
不然陰澇許大池, 安肯呑聲過不入

(번역문 미비)
却歎今人不如渠, 喙喙爭鳴反惱余

(번역문 미비)
爲私爲公何足問, 如蜩如螗莫能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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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窮悟集』卷四 「雨中直兵曹 戱爲無蛙行」


형조와 호조의 누정과 연지


형조의 연지: 16세기, 신광한(申光漢)의 시
Quote-left.png 「형조의 연못에서 즉흥으로 읊어 송 정랑에게 보여주다(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번역문 미비)
渴雨池塘水暴盈, 新荷無數蓋相傾

(번역문 미비)
紅蕖一朶嫣然咲, 似爲郞官媚晩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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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企齋集』卷六 「秋部官池卽事 示宋正郞」


형조의 연지: 17세기, 홍석기(洪錫箕)의 시
Quote-left.png 「형조의 연못 누각을 이 참판의 부채에 제하다(秋曹池閣 題李侍郞扇)」

(번역문 미비)
水面風生纈, 荷心雨瀉珠

(번역문 미비)
携樽池閣晩, 夏熱十分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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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晩洲遺集』卷二 「秋曹池閣 題李侍郞扇」


형조의 연지: 17세기, 조선왕조실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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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에 있는 연못 물이 핏빛과 같이 붉었다.

刑曹池水, 色赤如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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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1647) 3월24일(을축) 기사


호조의 연지: 16세기, 유홍(兪泓)의 시
Quote-left.png 「호조의 연지를 읊다(詠戶曹蓮池)」

바람이 불자 연꽃 향기 흩어지고, 뜰에 볕이 들어 섬돌 이끼를 데우네.
風動荷香散, 庭暄砌蘚溫

올해는 못에 비가 충분히 와, 지난해 흔적이 물에 잠겼네.
今年池雨足, 水沒去年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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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塘集』卷一 「詠戶曹蓮池」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심정진(沈定鎭)의 시
Quote-left.png 「9월 21일 숙직 중 연못 누정을 마주하고 우연히 읊다(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번역문 미비)
沙池徹底動淸光, 疎柳紅亭照夕陽

(번역문 미비)
竚立却生塵外想, 不知身是戶曹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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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霽軒集』卷一 「九月念一日 直中對池亭偶吟」


호조의 연지와 누정: 18세기, 유숙기(兪肅基)의 글
Quote-left.png 「불염정기(不染亭記)」

(번역문 미비)

君子雖處世應俗 而能不爲世俗所轉移 斯其所以異於衆人也 周先生以蓮之出淤泥而不染 比之君子 觀先生之隱居濂溪 濯纓自樂 則疑若離羣絶俗 果於忘世 而及其居官任職 施於爲政 則又却精密嚴恕 務盡道理 然其光霽氣像 固應隨處自若 不以應接之煩而有損也 然則先生之愛蓮而稱之以不染者 乃所以形容其一般意思也 推是道也 雖至於磨不磷涅不緇可也 其旨豈不深哉 地部有小方塘 種蓮百本 宜於暑月淸賞 而第顧無亭以臨之 歲甲子 尙書道谷趙公 判是曹 與諸郞僚謀焉 營屋數椽於塘之北 不數旬而功告訖 結搆端妙 丹雘璀璨 極幽夐蕭灑之趣 公遂命名以不染 而得李積城宜炳筆 刻板而揭之 屬不佞爲記 余惟不染之義 濂翁之發揮已盡 知己之說 本自高簡 無庸復贅 獨公命名之意 有可得以言者 地部素以腴膩稱 終日所事 不越乎米布錢帛之出納 金銀珠玉之照管 居其任者 一或踈脫 吏胥之奸弊立至 而欲留心鄙瑣 析利毫忽 事事而不放過 則如入鮑魚之肆 浸浸然久而俱化 心隨眼遷 手因物滑 或至朶頤染指 以惹簠簋之誚者 亦不甚難 於是焉登是亭而遠觀 顧厥名而思義 雖所處之近垢 所管之不雅 而能超然自持 澹然無累 如蓮之亭亭凈植 不染淤泥 則其有得於斯亭之助者 顧不大歟 噫 以公處地 黽勉從宦者 豈有他哉 以其心之不爲世所轉者在焉已矣 况公前後判是曹再耳 而月俸騶直 皆籍記而納之官 不以一物自私 亦可謂深體不染之義 而卒又以此名亭者 盖欲推己所得 勉人以君子之道也 夫君子 人中之蓮也 蓮則花中之君子也 以人中之蓮 對花中之君子 物我相得 兩忘其形 則吾不知人爲蓮耶 蓮爲人耶 聖人之不磷不緇 固不敢擬議 而濂溪之居官盡道 不失光霽氣像者 庶乎可以馴致之 斯則不染之盡頭 請以是對公命而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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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兼山集』卷七 「不染亭記」


주석


  1. 묘시(卯時) : 오전 5시에서 7시까지.
  2. 유시(酉時) : 오후 5시에서 7시까지.
  3. 남소(南所): 오위(五衛)의 위장(衛將)이 숙위(宿衛)하던 위장소(衛將所)의 하나로, 창덕궁의 금호문(金虎門)과 경희궁의 개양문(開陽門) 안에 있었는데, 궁궐의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남소라 불렸다.
  4. 궁궐 호위하는 관소: 원문의 '구진사(句陳司)'. 궁궐을 호위하는 금군(禁軍)을 말한다. '구진(句陳)'은 별자리 이름으로 자미궁(紫微宮)을 호위하는 별이다.
  5. 범의 두상: 후한(後漢)의 반초(班超)가 어린 시절 관상가가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로 날아서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만리후에 봉해질 상이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6. 분서(粉署): 하얗게 벽을 칠한 관청이라는 뜻으로 중국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인데, 우리나라는 의정부 및 중앙 관서를 뜻한다.
  7. 동룡문(銅龍門): 창경궁 세자전 옆에 있던 문이다.
  8. 금마문(金馬門): 창덕궁 후원에 있던 문이다.
  9. 투필(投筆): 붓을 던진다는 말로, 종군(從軍)을 뜻한다. 후한(後漢)의 명장 반초(班超)가 젊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글씨를 써 주는 품팔이 생활을 하다가 붓을 던지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이 없다면 부개자(傅介子)나 장건(張騫)을 본받아 이역에 나아가 공을 세워 봉후가 되어야지, 어찌 오래도록 필연(筆硯) 사이에만 종사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더니, 훗날 서역(西域)에 나아가 공을 세워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10. 정기(正奇): 병법(兵法)의 용어로서, 정면으로 접전을 벌이는 것을 ‘정(正)’이라 하고 매복(埋伏)이나 기습(奇襲) 등의 방법을 쓰는 것을 ‘기(奇)’라고 한다.
  11. 취재(取才): 조선시대 하급 관리를 채용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 예조(禮曹)의 취재(取才)는 의학(醫學)·한학(漢學)·몽학(蒙學)·왜학(倭學)·여진학(女眞學)·천문학·지리학·명과학(命課學)·율학(律學)·산학(算學)을 전공한 기술관(技術官) 및 화원(畵員)·도류·악생(樂生)·악공(樂工) 선발 등이 있었다. 예조의 취재는 각 기술학의 전공자인 제학생도(諸學生徒), 잡과 합격자인 권지(權知), 전직 기술관 등을 대상으로 하여 주로 각각의 전공 서적들을 시험하였다. 예조의 취재에 선발된 기술관은 해당 기술아문의 녹관체아직(祿官遞兒職)이나 군직체아직(軍職遞兒職)을 받았으며, 차점자는 외직에 임명되었다.
  12. 빈곤한 청포라서 홍포만 속절없이 부럽네: 늘그막에 미관말직에 있는 데다 말도 없이 걸어서 순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적은 나이에 고관이 된 사람들이 마냥 부럽다는 뜻이다. 청포는 육품의 하급관리가 입던 푸른색의 관복이다. 두보의 시 「도보귀행(徒步歸行)」에 “청포 입은 조관들 중에 가장 빈곤한 이는, 수레 없이 걸어가는 백발의 습유라네(靑袍朝士最困者 白頭拾遺徒步歸).” 한 데서 온 말이다. 홍포는 3품 이상의 고관이 입던 관복이다.
  13. 사강(射講): 활쏘기와 병서 강독(兵書講讀)의 통칭.
  14. 성기(省記): 병조에 입직하는 낭관(郞官)이 매일 궁궐을 경비하는 장수에게 교부하는 군호(軍號)와 각 문에 입직하는 장사(將士)의 이름을 나열해 적어서 승정원을 거쳐서 임금에게 올리는 기록이다.
  15. 군호(軍號): 군대의 순찰이나 도성의 순라(巡邏)를 돌 때, 미리 약속해두었다가 자기편의 식별이나 비밀의 보장을 위해 쓰는 암호나 신호를 말한다. 매일 저녁 신시(申時)에 입직한 참의(參議) 또는 참지(參知)가 3자 이내의 군호를 만들어 밀봉(密封)해 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은 다음, 병조를 거쳐 경수소(警守所)에 내려 보내 시행하게 하였다.
  16. 흑의(黑衣): 왕궁의 숙위 무사(宿衛武士)들이 검은 옷을 입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흔히 숙위를 흑의랑(黑衣郞)이라고 한다.
  17. 두 역에선 금륵(金勒)을 살핀다: 금륵(金勒)이란 유사시에 궁중에서 사용할 말과 수레를 가리킨다. 병조의 마색은 청파역(靑坡驛)과 노원역(蘆原驛) 두 곳의 역에 288명의 병졸을 두고 교룡기(蛟龍旗)를 봉지(奉持)하는 말과 승용마(乘用馬), 즉 짐을 싣는 말을 관리한다. 매일 두 역의 말〔馬〕 각 25필이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는 마군영(馬軍營)에서 번을 서며 궁중의 여러 가지 사역에 충당한다. 『萬機要覽』 「兵曹 馬色」
  18. 어패(御牌)는 가죽 표식을 차네: 『萬機要覽』에서는 어패에 대해 "본부에 내려주는 패가 둘인데, 하나는 당상관이 좌직(坐直)하는 곳에 영구히 보관하고, 하나는 매일 신시(申時)에 번을 드는 낭관이 당상관으로부터 받아서 밤 순찰 때 차고 다니다가 이튿날 아침에 반납한다."라고 하였다.
  19. 뜨락 희끄무레 동이 하마 텄네: 『예기』 「옥조(玉藻)」에, "조회는 변색에 비로소 들어간다〔朝辨色始入〕."라고 한 구절에 대해 이덕무는 "변색(辨色)은 먼동이 트는 매상(昧爽) 이후 일출(日出) 이전이니, 즉 이른 아침으로서 겨우 물건 빛깔을 분별할 수 있을 때이다."라고 하였다.
  20. 보의(寶扆): 임금의 자리 뒤에 설치하는 병풍을 말한다.
  21. 한 자락 붉은 구름: 황제의 궁궐을 가리킨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시종신이 고니처럼 줄지어 선 통명전, 한 떨기 붉은 구름이 옥황상제를 모셨어라〔侍臣鵠立通明殿 一朶紅雲捧玉皇〕."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卷36 「上元侍飲樓上三首呈同列」
  22. 포시(晡時): 오후 3~5시 사이로, 곧 신시(申時)의 다른 말이다.
  23. 차마 법 어기고 변명 일삼다 걸리느니: 궤우(詭遇)는 짐승을 사냥하기 위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말을 모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조간자(趙簡子)가 말을 잘 몰기로 소문난 왕량(王良)으로 하여금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인 해(奚)와 함께 수레를 타고 사냥하게 하였는데, 종일토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러자 해가 조간자에게 “왕량은 천하에 보잘것없는 말몰이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량이 다시 말을 몰겠다고 청하여 다시 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열 마리의 짐승을 잡았다. 그러자 해가 다시 조간자에게 복명하기를 “왕량은 천하에 더없이 훌륭한 말몰이꾼입니다.” 하였다. 이에 조간자가 왕량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해의 수레를 타고 말을 몰게 하니, 왕량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제가 그를 위하여 말 모는 것을 법도대로 하였더니 종일토록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부정한 방법으로 말을 몰아 짐승을 만나게 해주었더니〔詭遇〕 하루아침에 열 마리의 짐승을 잡았습니다. 저는 소인과 함께 수레 타는 법을 익히지 못하였으니, 사양하겠습니다.”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여기서는 이 고사를 인용하여, 불량한 무뢰배들이 법을 어기고 못 된 짓을 하다가 감군의 탐문을 만나 걸리고는, 다시 그것을 속이려고 이리저리 터무니없는 말로 둘러대는 것을 말하였다.
  24. 병조의 관리들이 국정을 관장해 나라를 평안히 하고: 『주례(周禮)』 「하관사마(夏官司馬)」에 "왕이 국가를 세워 방위를 분변ㆍ정립하고, 도성의 규모를 구획하고 교외를 경영하여, 관직을 설립ㆍ배치하여 백성들의 법이 된다. 이에 하관 사마를 세워 그 소속 관리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관장하여, 왕을 도와 국가를 평안하게 한다〔惟王建國 辨方正位 體國經野 設官分職 以爲民極 乃立夏官司馬 使帥其屬而掌邦政 以佐王平邦國〕."라고 하였다.
  25. 태재(太宰)가 육전(六典)을 세워, 백성들의 법이 되었으며: 『주례(周禮)』 「천관총재(天官冢宰)」에 "왕이 국가를 세워 방위를 분변ㆍ정립하고, 도성의 규모를 구획하고 교외를 경영하여, 관직을 설립ㆍ배치하여 백성들의 법이 된다. 이에 천관 총재를 세워 그 소속 관리들을 거느리고 국가의 다스림을 관장하여, 왕을 도와 국가를 고르게 한다〔惟王建國 辨方正位 體國經野 設官分職 以爲民極 乃立天官冢宰 使帥其屬 而掌邦治 以佐王均邦國〕."라고 하였다.
  26. 기보(祈父)가 범법자를 축출하고: 기보는 옛날에 병갑(兵甲)을 관장하던 관명(官名)으로, 즉 후세의 병부(兵部)에 해당한다. 『서경』 「주고(酒誥)」에 "하물며 너의 짝인, 법을 어긴 자를 축출하는 기보와 백성들을 순히 하여 보존하는 농보와 땅을 열어 경계를 정해주는 농보에 있어서랴〔矧惟若疇 祈父薄違 農父若保 宏父定辟〕."라고 하였다.
  27. 진운(縉雲)도 사특한 자 제거했네: 염제(炎帝) 때에 병사와 기찰을 맡은 전설상의 인물 진운씨(縉雲氏)를 말한다. 이 때문에 뒤에 하관(夏官) 곧 병조의 별칭이 되었다. 또 황제(黃帝)가 처음 즉위(卽位)할 때 구름의 상서(祥瑞)가 있었으므로 관직명(官職名)에 모두 구름을 붙였으니, 이를테면 춘관(春官)은 청운(靑雲), 하관(夏官)은 진운(縉雲), 추관(秋官)은 백운(白雲), 동관(冬官)은 흑운(黑雲), 중관(中官)은 황운(黃雲)이라 하였다. 『春秋左傳』 「昭公17年 楊伯峻註」
  28. 장헌(張憲): 남송의 명장(明將)으로, 젊은 시절 백건적(白巾賊) 적의 수괴를 베었다. 또 악비(岳飛)를 도와 수주(隋州)를 회복하고 금의 침략에 대항한 인물이다. 『宋史』 「列傳 127 張憲列傳」
  29. 요숭(姚崇): 650~721. 섬주(陝州) 사람으로 자는 원지(元之)이다. 본명은 원숭(元崇)이었으나 현종(玄宗)의 연호를 피해 요숭으로 바꾸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오른 이래 중종(中宗), 예종(睿宗)과 현종 초기에 걸쳐 여러 번 재상의 직에 올라 국정을 숙정하고 민생의 안정에 힘썼으며, 716년에 은퇴하였다. 송경(宋璟)과 함께 개원(開元)의 명재상으로 숭앙되어 ‘요송(姚宋)’이라 병칭되며 당나라 명상(名相)의 대명사가 되었다.
  30.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는 병조의 숙직과 수행 업무에 대해, "입직(入直) 당상관과 낭관 각 두 명이 번갈아서 드는데, 당상은 표신(標信)이 내려올 때에 수령하고, 낭관은 날마다 선인문(宣仁門)과 통화문(通化門)을 여닫을 때의 검사와 건양문(建陽門) 이동(以東)의 동쪽으로 있는 번 서는 군병 검사를 전담하여 거행하며, 야간 순찰을 할 때에도 역시 건양문에서 여러 곳의 위장ㆍ부장(部將)들이 시간을 맞추어 순찰하는 것과 각 문에 대하여 검찰하고, 이튿날 아침에 사고가 없다는 상황 보고를 승정원에 제출한다."라고 설명하였다.
  31. 금장 낭관(錦帳郞官): 한(漢)나라 제도에 상서랑(尙書郞)이 대중(臺中)에 들어가 숙직하면 비단 이불과 비단 휘장을 제공하였으므로 후세에 금장랑을 낭관의 지칭으로 사용하였다. 『後漢書』卷41 「鍾離意列傳」
  32. 통부를 차다가 금장을 대신 찼으니: 통부는 의금부(義禁府)ㆍ병조(兵曹)ㆍ형조(刑曹)ㆍ한성부(漢城府)의 입직관(入直官)이나 포도청의 종사관(從事官)과 군관이 차는 부찰(符札)이고, 금장은 금으로 만든 관인(官印)이다.
  33. 생기(省記): 생기는 매일 신시(申時)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입직 당상관(堂上官)이 대궐 안팎의 각 관사에서 입직하는 인원(人員) 및 군호(軍號)나 각 문의 파수인(把守人)을 적어서 승정원을 거쳐 보고하는 봉서(封書)이다.
  34. 금화전(金華殿): 경연(經筵)이나 서연(書筵)을 뜻한다. 원래 한나라 때 미앙궁(未央宮) 안에 있던 궁전의 이름인데, 성제(成帝)가 이곳에서 『상서(尙書)』와 『논어』 등을 강론하였으므로 후세에 경연이나 서연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35. 영화로운 벼슬 이조 낭관을 어찌 편안히 여기랴: 이의현은 37세 되던 1705년(숙종31) 6월 25일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36. 조정에서 물러나와 밥을 먹으니: 『시경』「소남(召南) 고양(羔羊)」에 “공문(公門)에서 물러나와 밥 먹으니 자득하고 자득하도다(退食自公 委蛇委蛇).” 하였는바, 조정에서 퇴근한 뒤에 집에서 한가로이 지내는 것을 말한다. 공문은 궁궐 문을 가리킨다.
  37. 잠랑(潛郞): 재능이 있으면서도 불우하게 오랫동안 낮은 관직에 묻혀있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안사(顔駟)가 문제(文帝) 때 낭관이 되었으나, 경제(景帝)를 거쳐 무제(武帝)에 이르도록 승진하지 못하고 낭서(郞署)에서 늙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文選』 「思玄賦」
  38. 풍운제회(風雲際會): 현명한 임금과 충직한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는 좋은 인재를 제대로 등용했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39. 양군(兩軍): 어영청(御營廳)과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군졸이다. 주의(朱衣)는 붉은 옷을 입은 하급 아전으로, 길을 인도하거나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40. 허리의 상전은 쌍검 용천의 검광이요: 남아의 드높은 기상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말이다. ‘상전(霜電)’은 청상(靑霜)과 자전(紫電)이란 뜻으로 보검의 명칭인데, 엄정하고 강렬한 기상을 비유한다. ‘쌍검(雙劍)’은 춘추 시대 간장(干將)과 막야(莫邪)가 제작했다는 ‘용천(龍泉)’과 ‘태아(太阿)’ 두 보검으로, 웅대한 기상이나 충정을 비유한다. 진(晉)나라 때 충신 장화(張華)가 일찍이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자기(紫氣)가 뻗치는 것을 보고, 뇌환(雷煥)을 보내 풍성현(豐城縣)의 옛 옥사(獄舍)에서 용천과 태아라는 한 쌍의 보검을 얻은 고사가 전한다. 『晉書』卷36 「張華列傳」
  41. 흉중의 풍운은 육도 표도의 병법이라오: 웅대한 도략이 가슴속에 끓어오른다는 말이다. ‘풍운(風雲)’은 웅대한 도략이나 원대한 심지를 비유한다. ‘육도(六韜)’는 원래 주(周)나라 때 강 태공(姜太公)이 저술했다고 전하는 병서(兵書) 이름으로,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표도(豹韜)」, 「견도(犬韜)」 6권으로 되어 있는데, 후세에는 군대를 운용하는 도략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42. 이제부터 내 운명을 스스로 확신하니 문성이 장성 높이에 미치지 못하리라: 문관 출신이지만 병조 참의를 맡은 이상, 군무에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다. ‘문성(文星)’은 문운(文運)을 주관한다는 ‘문창성(文昌星)’의 약칭으로 곧 문관을 가리키고, ‘장성(將星)’은 대장(大將)을 상징하는 별로 곧 무관을 가리킨다.
  43. 우묵한 마루의 배가 된 지푸라기 신세: 『장자』 「소요유(逍遙遊)」의 "물이 많이 모이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물 한 잔을 우묵한 마루에 부으면 지푸라기는 배처럼 뜨지만 잔을 놓으면 바닥에 붙는다. 물이 얕고 배가 크기 때문이다(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44. 금작(金爵): 궁전의 용마루 위에 장식한 구리쇠로 만든 봉황.
  45. 어약(魚鑰): 물고기 모양으로 된 자물통.
  46. 정원용은 한식 절제(節祭)를 지내기 위해 일가의 묘역이 있던 시흥에 내려가 있었다. 아들 정기세가 화성 건릉 봉심을 위해 지나다 들렀을 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47. 인청(寅淸): 『서경』 「순전(舜典)」에서 후대의 예조(禮曹)에 해당하는, 종묘(宗廟) 제관(祭官)의 장(長)인 질종(秩宗)에게 "밤낮으로 공경히 일을 하되 마음이 곧아야 정신이 맑아서 일을 잘할 수 있으리라(夙夜惟寅 直哉惟淸)."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언행이 신중하고 마음가짐이 청정한 사람을 가리킨다.
  48. 삼원(三元): 음력 정월 초하루로.
  49. 이 작은 관청은 해를 넘겨 이제야 중건되었네: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다시 중건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50. 본디 서산에 상쾌한 기운 많아 늘 바라보매 돌아가고픈 정 없어라: 원문의 '歸情'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고 싶은 마음이다. 곧 인왕산을 늘 가까이 대하고 있으므로 서울 한복판에 있음에도 탈속의 정취가 많기 때문에 굳이 전야로 돌아갈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서산의 상쾌한 기운'은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의 고사이다. 왕휘지는 성품이 본디 잗단 세속 일에 전혀 얽매임이 없었다. 그가 일찍이 환충(桓沖)의 기병 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적에 한번은 환충이 그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부(府)에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 요즘에는 의당 사무를 잘 알아서 처리하겠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쳐들고 수판으로 뺨을 괴고는 엉뚱하게도 "서산이 이른 아침에 상쾌한 기운을 불러온다(西山朝來 致有爽氣耳)."라고 했다. 이 고사에서 만들어진 말로, 전하여 세속 일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히 유유자적하는 풍도를 가리킨다. 『晉書』卷80 「王徽之列傳」
  51. 연명이 어찌 천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랴 나 또한 희황 이전의 사람: 도연명이 자엄등에게 주는 글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내 나이 쉰이 넘었는데, 젊어서는 곤궁하였다. 늘 집안 일로 동분서주하였으며, 성미는 강직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세상 사람들과 어긋남이 많았다.……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 누워 시원한 바람이 선들 부는 때를 만나면 스스로 복희 시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다(吾年過五十 少而窮苦 每以家弊 東西遊走 性剛才拙 與物多忤……五六月中 北窓下臥 遇涼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라고 한 말에 근거를 둔 표현이다. 『陶淵明集』卷7 「與子儼等疏」
  52. 멀리 흘러가: 이에 해당하는 원문 ‘조종(朝宗)’은 원래 제후가 천자에게 가서 뵙는 것으로 봄에 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는데,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 역시 제후가 천자국에 가는 것과 같다 하여 조종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