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제1회 황순원 문학상 심사평"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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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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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이되 고객 없음이란 무엇인가. 익명성, 곧 민중을 고객으로 한 글쓰기가 그것. 그것은 아비와 맞서는 정치적 감각, 곧 좌익의 선전 비라용으로 둔갑합니다. 깨알 같은 글쓰기, 그것이 바로 ‘비밀주의’에 막바로 통하는 것. 장남이 좌익으로 숨고 끝내 한국전쟁 중 객사한 것이 이른바 이 나라 정치적 감각이 빚은 한 결과이겠지요.”
 
“필경이되 고객 없음이란 무엇인가. 익명성, 곧 민중을 고객으로 한 글쓰기가 그것. 그것은 아비와 맞서는 정치적 감각, 곧 좌익의 선전 비라용으로 둔갑합니다. 깨알 같은 글쓰기, 그것이 바로 ‘비밀주의’에 막바로 통하는 것. 장남이 좌익으로 숨고 끝내 한국전쟁 중 객사한 것이 이른바 이 나라 정치적 감각이 빚은 한 결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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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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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향기』'''
  
  

2020년 6월 6일 (토) 14:40 판

(본 문서는 대담의 형식으로 진행된 심사평의 일부를 발췌했음을 알린다.)

수상작

『그리움에 대하여』


“분비선이 고갈된 판에도 사람이 가능한가. 처음엔 웃긴다고 생각하고 읽어가지 않았겠소. 이래저래 분위기에 빠져 한참 지나보니 결말에 이르지 않았겠소. 환갑 진갑의 나이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노인의 당면 과제란 다름 아닌 ‘그리움의 상실’이라는 사실이 그것. ‘그리움’이 없는 마음이야말로 늙음의 본질이라는 것. 마음의 메마름이야말로 노인성 문학의 과제라는 것. 굳이 논리화한다면 ‘그리움이야말로 축복이다’라는 명제.”

후보작

『퇴역레슬러』


“늙고 병들어, 짐승처럼 죽을 곳을 찬아온 한 레슬러의 현재 정신 상태에 초점을 놓고 있다는 점에서 노인성 범주에 드는 작품이지요. 이 작품이 시대적 층위로 읽히는 것은 작가의 분명한 의도의 개입에서 말미암지요. 이데올로기가 그것.”


“세월이 흐른 이 마당(남북 해빙)에 이데올로기 콤플렉스란 대체 무엇인가. 그렇게 읽히기 쉽다는 뜻에서 시대적 층위이겠는데요. 이런 층위가 작가의 어떤 기법을 통해 밀도를 획득했느냐가 핵심 과제 아닙니까.”


“‘기억의 착오’가 이 작가의 강점. 귀향한 이 노인이 처음으로 고향의 냄새를 기억하는 장면, 양파 냄새가 그것이지요. 유년기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후각과 청각이란 고향의 섬을 가득 채운 푸른 보리밭과 그 냄새였을 터인데, 그가 떠난 지 훨씬 뒤에야 이 고장엔 양파 재배가 시작되지 않았던가. 있지도 않은 양파 냄새 맡기란 무엇인가. 이 감각적 치매 현상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색깔 착오에 대응된다는 것이니까.”

『나는 두려워요』


“어째서 주님의 종으로 살아온 윤여은의 임종의 말이 저는 주님을 만나기가 두려워요였을까. 바로 이 대목 아닙니까. 두려움의 이유는 두 가지. 여학교 적 그녀를 사랑한 남학생의 죽음에 대한 것을 그 누구에게도 고해하지 않음, 정욕을 이기기 위해 감행해온 고통 등이 그것. 이 둘은 누가 보아도 영혼이 울리는 그런 통회이기보다는 너무 소박한 한 여인의 개인사적 사건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윤여은이 경험한 기독교의 한계이겠지요. 비록 그것이 좀더 사실에 가깝더라도 아쉬움이 든다고나 할까요.”

『명필 한덕봉』


“정치적 감각 혹은 역사감각이란 문학이 갖출 수 있는 소중한 요소임을 더욱 밀도 있게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이 집안의 장남을 내세웁니다.”


“필경이되 고객 없음이란 무엇인가. 익명성, 곧 민중을 고객으로 한 글쓰기가 그것. 그것은 아비와 맞서는 정치적 감각, 곧 좌익의 선전 비라용으로 둔갑합니다. 깨알 같은 글쓰기, 그것이 바로 ‘비밀주의’에 막바로 통하는 것. 장남이 좌익으로 숨고 끝내 한국전쟁 중 객사한 것이 이른바 이 나라 정치적 감각이 빚은 한 결과이겠지요.”

『달의 향기』


“선생의 지적대로 월식임엔 분명한데 월식치고는 조금 유별나지 않습니까. 스리랑카에서 본 월식과 한국에서 본 월식의 동시적 전개랄까, 병치 현상이 그것. 이 병치 현상이 그대로 작품 구성원리로 작동되어 있기조차 합니다. 아마도 작가의 역량이겠지요.”


“잘 보셨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주인공의 몸은 ‘누와라엘리야’라는 불교국가 스리랑카의 산간 마을에서 그곳 월식을 보고 있으면서 마음은 한국에 와 있고, 이 이중성이 작품의 구성원리이지만, 이 모두는 ‘눈썹 같은 초승달’과 ‘신갈나무’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너도밤나무과에 딸린, 잎이 달걀 모양이고 톱니가 있으며 뒷면에 털이 약간 있는 신갈나무란 초승달만큼 신선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더구나 그 신갈나무의 꽃은 6월에 피는데 ‘암수 한 그루’로 된다는 점도 유의할 대목이고요. 그러나 무엇보다 ‘신갈나무’라는 그 울림에 주목할 것입니다. 뭔가 신성한, 정결한 그런 나무, 그런 여인, 그런 인간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초승달’도 마찬가지. ‘눈썹 같은’이라 할 때도 갈 데 없는 정결한 여성적 이미지이고요. 그 사이에 월식이 벌어지고 있지요. 아니, 월식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지요. ‘누와라엘리야’ 속으로, 초승달도 신갈나무도 물론 월식조차도 흡수되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달이 지닌 종래의 이미지가 흐릿한 색깔, 그러니까 눈썹 같은 초승달이었지만, 또 이를 신갈나무의 청색으로 보강했지만,결국은 ‘누와라엘리야’ ‘스리랑카’ 등의 울림(음향) 속에 흡수되었다 함은 작가 윤씨의 창작방법론이 지닌 블랙홀이라고나 할까. 모든 것이 ‘울림’으로 흡수되어버리기가 그것. 그 속에 작가 스스로를 소멸시키기, 거기에다 글쓰기의 최종 목표 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