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제1회 황순원 문학상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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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대담의 형식으로 진행된 심사평(김윤식 대표집필, 「2001년도 중·단편 읽기」)의 일부를 발췌했음을 알린다.

수상작

『그리움에 대하여』


“분비선이 고갈된 판에도 사람이 가능한가. 처음엔 웃긴다고 생각하고 읽어가지 않았겠소. 이래저래 분위기에 빠져 한참 지나보니 결말에 이르지 않았겠소. 환갑 진갑의 나이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노인의 당면 과제란 다름 아닌 ‘그리움의 상실’이라는 사실이 그것. ‘그리움’이 없는 마음이야말로 늙음의 본질이라는 것. 마음의 메마름이야말로 노인성 문학의 과제라는 것. 굳이 논리화한다면 ‘그리움이야말로 축복이다’라는 명제.”

후보작

『퇴역레슬러』


“늙고 병들어, 짐승처럼 죽을 곳을 찬아온 한 레슬러의 현재 정신 상태에 초점을 놓고 있다는 점에서 노인성 범주에 드는 작품이지요. 이 작품이 시대적 층위로 읽히는 것은 작가의 분명한 의도의 개입에서 말미암지요. 이데올로기가 그것.”


“세월이 흐른 이 마당(남북 해빙)에 이데올로기 콤플렉스란 대체 무엇인가. 그렇게 읽히기 쉽다는 뜻에서 시대적 층위이겠는데요. 이런 층위가 작가의 어떤 기법을 통해 밀도를 획득했느냐가 핵심 과제 아닙니까.”


“‘기억의 착오’가 이 작가의 강점. 귀향한 이 노인이 처음으로 고향의 냄새를 기억하는 장면, 양파 냄새가 그것이지요. 유년기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후각과 청각이란 고향의 섬을 가득 채운 푸른 보리밭과 그 냄새였을 터인데, 그가 떠난 지 훨씬 뒤에야 이 고장엔 양파 재배가 시작되지 않았던가. 있지도 않은 양파 냄새 맡기란 무엇인가. 이 감각적 치매 현상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색깔 착오에 대응된다는 것이니까.”

『나는 두려워요』


“어째서 주님의 종으로 살아온 윤여은의 임종의 말이 저는 주님을 만나기가 두려워요였을까. 바로 이 대목 아닙니까. 두려움의 이유는 두 가지. 여학교 적 그녀를 사랑한 남학생의 죽음에 대한 것을 그 누구에게도 고해하지 않음, 정욕을 이기기 위해 감행해온 고통 등이 그것. 이 둘은 누가 보아도 영혼이 울리는 그런 통회이기보다는 너무 소박한 한 여인의 개인사적 사건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윤여은이 경험한 기독교의 한계이겠지요. 비록 그것이 좀더 사실에 가깝더라도 아쉬움이 든다고나 할까요.”

『명필 한덕봉』


“정치적 감각 혹은 역사감각이란 문학이 갖출 수 있는 소중한 요소임을 더욱 밀도 있게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이 집안의 장남을 내세웁니다.”


“필경이되 고객 없음이란 무엇인가. 익명성, 곧 민중을 고객으로 한 글쓰기가 그것. 그것은 아비와 맞서는 정치적 감각, 곧 좌익의 선전 비라용으로 둔갑합니다. 깨알 같은 글쓰기, 그것이 바로 ‘비밀주의’에 막바로 통하는 것. 장남이 좌익으로 숨고 끝내 한국전쟁 중 객사한 것이 이른바 이 나라 정치적 감각이 빚은 한 결과이겠지요.”

『달의 향기』


“선생의 지적대로 월식임엔 분명한데 월식치고는 조금 유별나지 않습니까. 스리랑카에서 본 월식과 한국에서 본 월식의 동시적 전개랄까, 병치 현상이 그것. 이 병치 현상이 그대로 작품 구성원리로 작동되어 있기조차 합니다. 아마도 작가의 역량이겠지요.”


“잘 보셨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주인공의 몸은 ‘누와라엘리야’라는 불교국가 스리랑카의 산간 마을에서 그곳 월식을 보고 있으면서 마음은 한국에 와 있고, 이 이중성이 작품의 구성원리이지만, 이 모두는 ‘눈썹 같은 초승달’과 ‘신갈나무’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너도밤나무과에 딸린, 잎이 달걀 모양이고 톱니가 있으며 뒷면에 털이 약간 있는 신갈나무란 초승달만큼 신선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더구나 그 신갈나무의 꽃은 6월에 피는데 ‘암수 한 그루’로 된다는 점도 유의할 대목이고요. 그러나 무엇보다 ‘신갈나무’라는 그 울림에 주목할 것입니다. 뭔가 신성한, 정결한 그런 나무, 그런 여인, 그런 인간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초승달’도 마찬가지. ‘눈썹 같은’이라 할 때도 갈 데 없는 정결한 여성적 이미지이고요. 그 사이에 월식이 벌어지고 있지요. 아니, 월식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지요. ‘누와라엘리야’ 속으로, 초승달도 신갈나무도 물론 월식조차도 흡수되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달이 지닌 종래의 이미지가 흐릿한 색깔, 그러니까 눈썹 같은 초승달이었지만, 또 이를 신갈나무의 청색으로 보강했지만,결국은 ‘누와라엘리야’ ‘스리랑카’ 등의 울림(음향) 속에 흡수되었다 함은 작가 윤씨의 창작방법론이 지닌 블랙홀이라고나 할까. 모든 것이 ‘울림’으로 흡수되어버리기가 그것. 그 속에 작가 스스로를 소멸시키기, 거기에다 글쓰기의 최종 목표 두기.”

『일식』


“이 작품에서 보면 사랑ᄋᆜ 한 가지 변종인 불륜에 관련되어 있지요. 일식스런 현상으로서의 불륜 말입니다. 일식이란 무엇이겠는가. 태양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현상 아니겠는가.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의 죽음과 태양을 직시할 수 없는 법. 만고의 진리 아닙니까. 그런데 그 일식을 맨눈으로 보고자 덤볐다면 어떻게 될까. 작가는 이 점에 썩 민첩하여 인상적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사랑’의 변종인 ‘불륜’도 감행해서는 안 되는 법. 금기 사항에의 도전은 파멸(죽음)을 의미하니까, 보지 말아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맨눈으로 보아서는 망막이 불탄다는 것, 거기까지 알 만한데, 문제는 ‘어째서’ 아닙니까. 왜 인간은 목숨을 걸고 그런 짓을 감행하는가, 왜 그런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있겠는데요.”

“작가도 그 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어 보입니다. 작가는 이 난처한 물음을 외면한 채 열대야 속의 초승달과 주인공 영월이 어울리지 않음을 되풀이 강조해놓습니다. 거실 여기저기에 숨어 살고 있는 열대지역 특유의 작은 도마뱀을 아주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기법으로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주제 자체가 워낙 막연한 것이어서 단편으로는 투명도가 약해졌다고나 할까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농촌이란 거룩한 희생물이라는 것. 도시를, 근대를 위한 제물의 일종이라는 것. 이러한 속죄양 의식이 만들어낸 도식이란 불을 보듯 뻔한 것. 도시=근대=악종이며 이들은 한결같이 살기를 띤 독종이며 반생명적‧반전통적‧반인간적 존재이며 이들이 어떤 기기묘묘한 수완, 방법으로 생명적‧전통적‧인간적 가치를 갈가리 찢고 망가뜨리는가를 묘파함으로써 모종의 쾌감조차 얻어내고 있지요.”


“작가 성씨의 자질이 빛나는 곳은 따로 있는데, ‘토끼고개’ 에피소드가 그것. 대한민국의 근대가 몸과 마음이 ‘팔 푼’인 황만근을 수용할 수 없겠다는 것. 이 대목에서 작가는 놀라운 장면을 펼쳐 보임으로써 황만근의 ‘팔 푼’을 ‘십 푼’(온전함)으로 이끌어올립니다. 이에 비하면 도시(근대)의 살인적 간악스러움이 황만근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식의 결말 부분은 한갓 통속적인 마무리 찾기의 넋두리가 아닐 것인가.”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이 작품에서 ‘습니다체’ 도입은 여인의 ‘바람기’와 교묘히 엉겨붙어 있어 분리되기 어려운 형국. 간촌죄로 피소된 여인의 자기 변호인 까닭이지요. 어째서 나는 간통죄로 기소되었느낙, 내게 그 부당함 혹은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며 외치는 자기 변론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고백’의 형식을 띠는 것은 문학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 것인가. 신 앞에서 이 점을 제일 잘하는 것은 종교이겠지만. 그동안 수천 년 갈고 닦은 종교 쪽의 ‘고백 스타일’이 의외로 이 법정에서는 안중에도 없는데, 그만큼 작가의 수사학에 대한 무신경함의 탓이 아닐까.”


“이 작품에 드러난 색기란, 농촌/도시, 본래적 가치/시장가치, 근대/반근대 틈에 낀 색기라는 점. ‘그는 착하나 바보다’ 또는 ‘그는 바보이지만 착하다’를 넘어설 수 있는 부분이란 뜻에 지나지 않는 것. 색기란 무엇이겠는가. 단순명쾌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향기로운 우물’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 이 꿈을 그 누구도 짓밞을 수 없다는 것. 농촌이라고 해서 도시라고 해서 이 점에 뭐가 다르겠는가. 이 순간 도시=악당, 농촌=희생의 이분법적 지적도가 조금 허물어지거나 적어도 그 강도가 약화될 수 있다는 것. 이때 중요한 것은 색기랄까, 바람기 도입이 자칫하면 통속성과 혼동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이 나라 소설판에서는 이 점에 대한 인식이 너무 경직되어 있지 않았던가요. 이 작가는 따라서 그동안 매우 불리한 처지에 있었던 셈이지요.”

『크리스마스 캐럴』


“소시민성을 위협하는 암적 존재인 조진숙이 그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진숙의 존재는 결코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 베란다 창문을 열고 던져버려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울리고 있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입력된 그 단조로운 전자 칩 멜로디의 여운처럼 존재하며 괴롭히고 있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소시민 중산층의 자화상이 아닐까. 거울에 비친 자화상. 그 거울을 깨버려도 여전히 금이 간 채로 존속하는 거울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