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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의작품과문예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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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황순원과 주요작품

문예주기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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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은 「나의 꿈」을 『동광』에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아들아 무서워 말라」라는 시 역시 『동광』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황순원의 작품 세계는 이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동아일보에 발표한 동요 「이슬」,「봄밤」,「수양버들」,「봄이 왔다고」,「봄싹」 등과 단편소설 「추억」을 2010년에 권영민 서울대 교수가 발굴해내면서 "동요와 함께 단편소설과 희곡이 초기 습작기에 이미 신문에 발표됐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그동안 우리 문단에서는 황순원 선생의 문필활동이 1931년 시 창작활동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번 발굴로 그 범위를 한정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나의 꿈


                         황순원


꿈, 어젯밤 나의 꿈
이상한 꿈을 꾸었노라


세계를 짓밟아 문지를 후
생명의 꽃을 가득히 심고
그 속에서 마음껏 노래를 불렀노라.


언제든 잊지 못할 이 꿈은
깨어 흩어진 이 내 머릿속에도
굳게 못 박혔더라.


다른 모든 것은 세파에 스치어 사라져도
나의 이 동경의 꿈만은 길이 존재하나니.


단편 소설 「추억」은 소년소설=>중학생 소년 영일이 젊은 처녀의 사진을 품에 넣고 다니다가 동료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 등 주인공의 유년기 체험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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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발굴된 것 중 단편 희곡 「직공생활」도 있다. 1932년 6월 27일-29일 『조선일보』 '독자문예'란에 실렸다.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남매와 병든 어머니에게 닥친 궁핌과 고통을 다루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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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 나온 시들은 대부분 첫 시 「나의 꿈」과 같이 『동광』에서 발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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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은 와세다 대학 제2학원에 입학하여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였다. 그 시기에 그의 첫 시집 『방가』가 간행되었으며 시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시집은 나의 세상을 향한 첫 부르짖음이다. 나는 이 부르짖음을 보다 더 크게, 힘차게, 또한 깊게 울리게 할 앞날을 가져야 하겠다.”
=> 일제 식민시대, 굴복하지 말고 이겨내자는 외침

1935년

삼사문학의 동인이 되어 시 「새로운 행진」 「귀향의 노래」 「거지애」 「새출발」 「밤차」 「가로수」 「굴뚝」 「고향을 향해」 「오후의 일편」 「고독」 「찻속에서」 「무덤」 「개미」를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하였다. 시집 『방가』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동경에서 간행했다 하여 여름방학 때 귀성했다가 평양 경찰서에 붙들려 들어가 29일간 구류 당한다.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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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집 『골동품』 역시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간행되었다.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재학하며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시집 『방가』와 『골동품』에 묶인 두 권 분량의 시를 쓴 것이다.
『골동품』은 사물에 대한 관찰과 응시의 눈길을 재치 있게 표착한 시편들을 동물, 식물, 정물 등 세 부분으로 분류한다.

1937년

첫 번째 단편 소설이라고 알려진 「거리의 부사」 를 발표했다. 시와 소설의 분기점이다.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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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늪』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늪』 에는 집필시기가 기록되지 않은 단편들이 묶여있다. 대표적으로 「늪」, 「소라」, 「갈대」 등이 있고 「거리의 부사」(1937, 첫 소설 작품)도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1942년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이 시작되면서 황순원은 평양의 빙장리로 낙향, 은둔하게 되고 1945년까지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 이 기간에 「독 짓는 늙은이」를 썼다고 알려진다. 또한 1945년 8월에는 해방을 맞이하여 세번째 시집인 『목탄화』에 돌입했다.

1946년

북한에서 토지 개혁이 시작되자 부친이 개간한 토지가 몰수되어 월남하여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본격적으로 소설 집필에 전념하였다.


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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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목넘이 마을의 개」를 발표함으로써 활동을 재개했다. 해방 후의 혼란과 6.25의 수난, 그 속의 고통스런 삶과 참담한 현실을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로 다룬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또한 1950년대 이전의 단편소설은 시적 서정성의 문장이 주를 이루며 간결성이 나타나는 반면 「목넘이 마을의 개」를 발표하면서 50년대 이후에는 1인칭의 단문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전란을 배경으로 가난하고 피폐한 삶, 당대의 혼란하고 무질서한 사회 등을 표출하고자 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해방 이후의 단편만을 모아 육문사에서 단편집 『목넘이마을의 개』 를 간행하였다.


1950년

최초의 장편 소설 『별과 같이 살다』를 집필. 해방 전과 해방 후의 가난한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삶을 비참한 가운데 따뜻하게 그려서 휴머니즘의 면모를 보인다.
6.25 동란이 일어나고 부산 피난 생활을 시작한다.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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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940년부터 해방 이전의 단편을 수록한 『기러기』를 명세당에서 간행하였다. 이는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으로 인한 탄압 속에서 발표하지 못하고 숨겨 둔 소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작품 내에서 삶의 마지막 길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심한 내면적 고통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 개인을 통해 자연스러운 휴머니티를 발현한다. 또한 주로 아이와 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민족 전래의 설화적 모티프와 현대소설의 정제된 기법이 악수하는 깔끔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의 눈에는 그제야 눈물이 괴었다. 어느새 어두워지는 하늘에 별이 돋아났다가 눈물 괸 아이의 눈에 내려왔다. 아이는 지금 자기의 오른쪽 눈에 내려온 별이 돌아간 어머니라고 느끼면서, 그럼 외쪽 눈에 내려온 별은 죽은 누이가 아니냐는 생각에 미치자 아무래도 누이는 어머니와 같은 아름다운 별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머리를 옆으로 저으며 눈을 감아 눈 속의 별을 내몰았다.
-「별」

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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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살이의 설움과 고생을 핍진하게 드러낸 단편 「곡예사」를 『문예』를 통해 발표한다. 이는 황순원 일가의 어려움을 극한 삶과 작가의 울분 그리고 뜨거운 가족 사랑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인생에 대한 환멸과 쓰라림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평화와 행복에 대한 간곡한 기원으로 절망의 가락을 넘길 바란다.

그래 마음대로들 너희의 재주를 피워보아라. 나는 너희가 이후에 오늘의 이 곡예를 돌이켜보고, 슬퍼해할는지 웃음으로 돌려버릴는지 어쩔는지 그건 모른다.
(중략)
그저 원컨대 나의 어린 피에로들이여, 너희가 이후에 각각 자기의 곡예단을 가지게 될 적에는 모쪼록 너희들의 어린 피에로들과 더불어 이런 무대와 곡예를 되풀이하지 말기를 바란다.
-「곡예사」

6월, 「곡예사」를 비롯하여 전란 바발 이후에 쓰려진 작품들을 모아 단편집 『곡예사』를 명세당에서 간행한다.


19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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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단편 「학」과 「소나기」를 발표한다. 이들은 황순원 문학의 대표적 작품이라 칭해지며 단편소설로서는 원숙의 경지에 이른 기교와 선명하고 감동적인 주제, 따뜻한 인간사랑 정신이 담겨있다. 또한 아름답고 목가적인 생의 뒷면에 숨어 있는 죽음이 체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데 뛰어났다. 시에서부터 출발하여 온갖 간난신고를 해치면서도 갈고 다듬어 온 단편소설 창작의 기량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부분.

참 먹장구름 한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소나기」

얘, 우리 학사냥이나 한 번 하구 가자
(중략)
내 이걸루 올가밀 만들어 놀께 너 학을 몰아오너라
포승줄을 풀어쥐더니, 어느새 성삼이는 잡풀 새로 기는 걸음을 쳤다.
(중략)
때마침 단정학 두세 마리가 높푸른 가을하늘에 큰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날고 있었다.
-「학」


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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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카인의 후예』을 집필한다. 소설은 해방 직후 북한에서 지주계급이 탄압받는 이야기가 중심축이 되어 있으며 폭력과 야만을 증오하고 모순을 시인하지 않는 주인공의 고집스러움과 정직함이 특징이다. 황씨 가문의 자전적 요소와 월남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잘 내비치고 있다. 이듬해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1955년

장편 『인간접목』을 집필한다. 작가가 30대 후반에 체험한 동란의 비극을 소설로 옮긴 것이며, 이 민족적인 아픔을 본격적인 장편문학으로 수용한 한국 문학의 첫 6.25 장편소설로 일컬어 진다.


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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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단편집 『학』을 중앙문화사에서 출간한다. 작품의 소재와 시대적 배경이 그러한 만큼, 전란과 전후의 상황을 예민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 대다수이다.


1957년

4월, 경희대 문리대 조교수로 취임하여 이때부터 정년퇴임을 하는 날까지 23년 6개월 동안, 단 한가지의 보직도 갖지 않은 채 그야말로 평교수로서 초연히 살아오면서, 전체 작품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단편과 『잃어버린 사람들』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등 주요한 장편들을 집필하였다.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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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여섯 번째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이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다. 1956년 이후에 쓴 다섯 편의 단편과 중편 『내일』이 수록되어 있다.
전후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의식, 황순원이 운명적으로 겪어야만 했던 한국전쟁에 대한 생체험적인 진정성이 담겨 있다.

부산 피난 시절, 자는 자갈치 시장 쪽 부둣가에 있는 선술집에를 단골로 다녔다. 전복 한 마리를 썰어달래서 초고추장에 찍어먹으면서 약주 두잔을 마시는 것이 상례가 돼 있었다.
-「안개구름 끼다」

몇 살 때 일인지는 모르겠다. 어머니 등에 업혔던 기억이 분명한 걸 보면 네 살이 아니면, 기껏해야 다섯 살밖에는 안되었을 때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일』

=> 일인칭 서술방식에 의거, 회상 속에서 재체험되는 세계로 나타나낟. 이는 경험적 자아로서의 작가 자신과도 연결될 수 있다.


1960년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집필, 6.25를 겪은 젊은이들이 각기 나름의 상처를 입고 치유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발표 당시 허무주의자 주인공 현태를 자포자기의 자살로 버려두었던 것을 일부 수정하여, 일말의 정신적 구원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을 바꾸었다. 이듬해 예술원상 수상을 가져다 주었다.

1962년

『일월』을 집필. 백정이라고 하는 가장 천민층이었던 사람들의 소외·갈등을 소설적 형상력으로 표출하면서, 위선과 허휘를 거부하고 사랑보다 현실과 부딪치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구원의 길을 제시한 이 작품으로 작가는 1966년 3·1 문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19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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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너와 나만의 시간』 간행. 40대 중반에 쓰여진 작품 열네 편이 수록되어 있다.


1965년

단편 「소리그림자」를 필두로 '세상을 복합적이며 함축적이고 원숙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단편'들을 지속적으로 제작.

그림은 목탄지에 연필로 그린 것들이었다. 한장 한장 넘겨가는 동안 나는 단순한 선들 속에 어떤 공통된 요소가 들어 있음을 느꼈다. 무엇인가 그림 속에서 불타고 있는 것이었다.
-「소리그림자」

1968년

『움직이는 성』을 집필. 1973년 출간한다. 삶의 실존적 고통 및 존재론적 자아의 위상에 관한 탐색을 활발히 전개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의 작품들이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되는가 하면, 여러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황순원의 소설작법이 전반적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작품의 중심과제를 종합적으로 투시하려는 시선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그 대상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사회적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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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부터 약 15년여의 공백을 딛고 시가 쓰임. 이는 시집 『세월』로 묶이는 일련의 시들이다.


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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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지성사에서 단편집 『탈』 간행. 50대 이후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1965년에서 1975년까지 11년간에 걸쳐 쓰여진 작품을 모았으며 그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노년이나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잔을 달라니까.
나는 원을 괴롭혀온 모든 것들에 대해 새삼 통분을 느끼며 병 및의 술을 탁자 옆 허공에다 쏟아부었다.
자, 받게!
그리고 덧붙였다.
앞으루도 내 마지막 잔은 자네에게 부어줌세! 그리고 자넬 그토록 괴롭혀온 모든 것들을 되새김세!
-「마지막 잔」

석양 그늘 속에 은행나무는 한창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을이 온통 한데 응결된 듯만 싶었다. 얼마든지 풍성하고 풍요했다.
그 둘레를 서성거리고 있는데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이 일어 은행 나무를 휘몰아쳤다. 순식간에 높다란 나무 꼭대기 위에 새로운 장대하고도 찬란한 황금빛 기둥을 세웠는가 하자, 무수한 잎을 산산이 흩뿌려놓았다. 아무런 미련도 없는 장엄한 흩어짐이다.
-「나무와 돌, 그리고」

이 무렵에는 이미 황순원이라는 이름이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아온 세월이 얹어져 있었다. 각종 교과서에서 「소나기」「별」「학」「목넘이마을의 개」 등의 작품이 게재되고 있어서 그 작품을 교과서에서 접한 학생들이 그의 이름만 보고 대학을 지원하는 사례가 늘 정도가 되고, 외국어 번역으로 세계에 그 작품이 알려지고 있었으며, 국내의 무수한 지면에서 그를 심사위원, 기획위원으로 모시고 있을 때였다.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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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한국문학』에 시 「돌」「늙는다는 것」「고열로 앓으며」「겨울 풍경」 등을 발표한다. 이들은 모두 늙는다는 것에 두터운 관심을 보인다

겨울 풍경

눈은 내리고
해거름에서 담배 한 대 참은 족히 지나간 시각
철부지 아이들의 떠드는 모양 멀리 물러나고
팔낀 연인들 어룽히 드러났다 그냥 풀리어드는
뭉크보다 조금은 더 어둑신한 속에
노인이 하나 서 있다.
눈은 내리고

밀어

내 가슴속은 묘지
묘지기는 나.

내게 한끝 줄을 남기고 간 이들을
나는 내 가숨속 묘지 안에
부활시켜 놓는다.
나는 죽음에 대한 얘기가 듣고 싶은데
그들은 자꾸 어떻게 사느냐는 얘기만 한다.

시-단편-장편의 발전단계를 거쳐온 황순원이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시편들, 그 언어의 절약과 여백의 활용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문학을 정리하고 완결한다는 의미[1]이다.


1980년

경희대학 교수를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로 취임.


1982년

『신들의 주사위』 간행. 한국 농촌의 한 소읍과 한 중산층 가정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과 사치관의 유입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대사회의 교육·통치문제 등을 복합적인 시각으로 조명한다. 구원이 상징적으로 처리되었던 이전의 작품드에 비해 현실적으로 살아가면서 찾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듬해 대한민국 문학상 본상을 수상한다.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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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서·1」「죽음에 대하여」 등 여덟 편의 시를 『현대문학』에 발표.

죽음에 대하여

나와 마누라는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한날 한시에 같이 죽으면 다시없이 좋으련만
그러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고
누구고 앞서가는 길밖에 없다
마누라가 아주 담담한 말씨로
여자 노인 혼자 남는 것보다 남자 노인 혼자 남는 것은
불쌍하고 처량하다고 한다
나는 전적으로 이에 동의하여
내가 앞서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우리 둘이 같이 일흔일곱이라는 나이에

2000년

9월 14일, 서울 사당동 자택에서 별세


각주

  1. 김종회 외, 『황순원』, 새미, 1998, 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