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주영섭

red

주영섭.jpeg

인물

작가, 극작가, 연극연출가, 시인, 친일반민족행위자 (1912년 ~ ?)

그의 일생

  •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시인 주요섭의 동생이다.

주공삼목사는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경상골의 경치 좋은 동네에 그의 집이 있었는데, 여러 채의 한옥으로 아주 훌륭했다고 한다. 주목사의 아들들은 키가 무척 컸다.

주목사의 부인의 키는 작았고 한쪽 다리를 절었고, 매우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주공삼 목사 가족의 막내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주영섭은 광성학교 출신으로, 리더십이 훌륭했다. 그는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 현대극장의 창립공연인 유치진의 「흑룡강(黑龍江)」(1941)을 연출했으며, 그 외에도 함세덕(咸世德)의 「추석(秋夕)」(1941), 유치진의 「북진대(北進隊)」(1942)를 연출하는 등 현대극장의 중심 연출가로 활동했다. 연극 외에도 영화 활동에 관심을 기울여 시나리오로 「광야(曠野)」(1940)·「창공(蒼空)」(1941)·「어머니」(1941)·「해풍(海風)」(1941) 등을 남겼다.

일본에 유학하기 전에 보성전문학교에 다녔으며, 이 당시 연극부를 만들어 고리키의 <밤주막>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하였다.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와 관련을 가지고 있었던 극단 <신건설(新建設)>의 제1회 공연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1933)에 찬조 출연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법문학부에 입학하였고,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해방 직후 월북한 것으로 보이나, 그 후의 활동 사항은 알 수 없다.


  •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밤 주막>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 당시 동경학생예술좌 <춘향전>의 월매 역으로 그의 여동생이자 박동근의 아내가 출연하였다.


황순원과의 관계

1934년 황순원과 더불어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단하고 기관지 『막(幕)』의 발간을 주도하면서 그 모임을 이끌었다.1939년에 귀국해 극연좌(劇硏座)를 중심으로 좌익연극을 꾀하였다는 혐의인, 이른바 동경학생예술좌사건(좌익연극단 사건)으로 마완영·박동근·이서향과 함께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주변인물이 말하는 주영섭

화가 김병기: 평양 문단에는 주영섭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있다. 그는 나의 광성고보 4년 선배로서 보성전문과 도쿄 법정대 법과를 다녔다. 주영섭은 나(김병기)와 인연이 깊다. 왜냐하면 우리 부부가 주영섭 부부를 중매했기 때문이다. 내 아내의 평양 서문고녀 동창생(채정숙)을 주영섭에게 소개해 두 사람이 맺어졌다. 도쿄 시절 주영섭은 학업 대신 연극 운동에 전념했다. 그가 있어 동경학생예술좌가 존재한 셈이다. 그는 귀국 이후에도 서울과 평양에서 연극 활동을 했다. 이해랑이나 김동원 같은 '1세대 연극인'을 만들어낸 것도 그였다. 유치진과도 관계가 있다. 그는 연극운동을 하다가 영화제작자가 되었고 일본 영화사에도 있었다. 북에 남아 <금강산 처녀>라는 영화를 찍은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그가 서울에서 활동했으면 연극계의 중심 인물로 주목받았을 것이다. 그는 학처럼 키가 크고 장발에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을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