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장영희의 「나와 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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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left.png 아주 옛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빚으면서, 각자의 목에 두 개의 보따리를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보따리 하나는 다른 사람의 결점으로 가득 채워 앞쪽에, 또 다른 보따리는 자신들의 결점으로 가득 채워 등 뒤에 달아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에 매달린 다른 사람의 결점들은 잘도 보고 시시콜콜 이리 뒤지고 저리 꼬투리 잡지만, 뒤에 매달린 보따리 속의 자기 결점은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평판 좋고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마음만 먹으면 비난거리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인간 성향이라는 게 모두 양면적이라서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서로 상반되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주 겸손하고 나서기 꺼려하는 사람은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자신감이 없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박력 있고 당당한 사람은 겸손하지 못하고 되바라졌다고 욕한다. 그런가 하면 쾌활하고 잘 웃으면 사람이 가볍고 진중하지 못하다고 욕하고, 잘 웃지 않고 진중하면 괜히 무게 잡는다고 욕한다. 상냥하고 사근사근하면 내숭 떨고 여우 같다고 욕하고, 상냥하지 못하면 뻣뻣하다고 욕한다. 너그럽고 많이 베푸는 사람에겐 잘난 척하고 우월감을 갖고 있다고 비난하고, 잘 베풀지 않는 사람은 또 구두쇠이고 편협하다고 욕한다.


처음으로 영문학 과목을 듣는 1학년 학생들에게 문학 작품 분석법을 가르칠 때 나는 ‘역할 바꾸기’를 역설한다. 이번 학기 영문학 개론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라는 작품을 읽혔다. 남부 귀족 가문의 마지막 혈통인 에밀리 그리어슨은 빠르게 변하는 현대의 도시 속에서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산다. 그러다가 북부에서 온 십장 호머 배론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떠나려는 그를 붙잡기 위해 그에게 극약을 먹인다는, 아주 기괴한 이야기이다.


작품 분석을 하면서 에밀리의 성격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학생들은 보통, “그 여자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지요.”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면 토론이고 분석이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떤 작품에서 작중 인물이 그저 ‘남’이고, 그의 행위는 괴팍스러운 성향을 가진 ‘남’의 일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나’와 ‘남’ 사이에 공존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을 공부하는 문학은 애당초 의미를 잃는다. 학생들 말마따나 에밀리의 경우는 단지 하나의 정신병 사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 ‘역할 바꾸기’를 통해 스스로 에밀리가 되어 보라고 하면, 학생들의 관점은 달라진다. “에밀리도 가문의 전통을 지키는 귀족이기 이전에,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하나의 인간이지요.”라든가 “에밀리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바깥세상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라든가 “에밀리의 고립된 삶은 지독한 자기와의 투쟁이었고, 그래서 포크너가 장미를 바치는 거지요.”라는 등 에밀리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꽤 그럴듯하게 비평적 접근을 한다.


‘남’이기 때문에 안 되고, ‘나’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논리는 어쩌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많은 학생들 앞에서 강의할 때 나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누구나 다 똑같이 얼굴에는 눈 두 개, 코 한 개, 입 한 개가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조합으로 50명이면 50명, 100명이면 100명의 얼굴이 다 제각각 다를 수 있는가. 100명은 고사하고, 그 똑같은 조합으로 크로마뇽인 이후 완벽하게 두 얼굴이 정확하게 똑같이 겹치는 예는 없었으리라. 그런데 두뇌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의 속 모습은 겉모습보다 더 차이가 난다고 한다. 얼핏 보기에는 똑같이 큰골, 작은골로 이루어져 있고 생김새도 비슷하게 보이지만, 두뇌마다 제각각 조금씩 찌그러진 정도나 굴곡, 주름 잡힌 정도가 달라서, 절대로 두 개의 두뇌가 완벽하게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사람마다 살아가면서 제각각 다른 경험을 하고, 그 경험에 따라 갖는 느낌, 기억, 생각이 두뇌에 작은 선이나 주름을 하나씩 만들기 때문에, 억만년이 지나도 똑같은 두뇌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한 우리들, 앞뒤로 보따리 하나씩 메고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앞 보따리를 뒤적거려 보지만, 결국은 앞 보따리나 뒤 보따리나 속에 들어 있는 건 매한가지이다. 이렇게 보면 장점이 저렇게 보면 단점이고, 저렇게 보면 단점이 이렇게 보면 장점이다. 결국 장단점이 따로 없지만, 어차피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제각각 나에게 맞는 도수의 안경을 끼고 다른 사람을 보니, 이리저리 찌그러지고 희미하고 탐탁지 않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서로 다른 안경을 끼고 서로 손가락질하며 못생겼다고 흉보며 사는 세상이 항상 시끄러운 것도 당연하다. 가끔 누군가 내게 행한 일이 너무나 말도 안 되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며칠 동안 가슴앓이하고 잠 못 자고 하다가도 문득 ‘만약 내가 그 사람 입장이었다면 나라도 그럴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꼭 이해하는 마음이 아니더라도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동정심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그러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그 대상이 나였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씩 풀어지면서 ‘까짓껏, 그냥 용서해 버리자.’라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남’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헤아릴 때 생기는 기적이다.


한 유행가 가사에서 ‘남’에서 점을 하나 빼면 ‘님’이 된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인간관계는 여섯 살짜리 조카가 갖고 노는 자석 글자판의 글자 놀이와 같은 건지도 모른다. ‘남’에서 받침을 하나 빼면 ‘나’가 된다. 사람 사는 게 엎치나 뒤치나 마찬가지이고, ‘나’, ‘너’, ‘남’, ‘놈’도 따지고 보면 다 그저 받침 하나, 점 하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악착같이 ‘나’와 ‘남’ 사이에 깊은 골을 파 놓고 힘겹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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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영희, 『내 생애 단 한 번』(2010).


학습목표

◆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가지는 태도를 성찰할 수 있다
◆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기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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