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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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7일 (일) 14:2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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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日,留泊姑蘇驛前,是日晴,蘇州即古吳王闔閭使伍子胥城而都之,城周又與杭州同,府治及吳縣、長洲縣之治,皆在城中,城之門,舊有姑蘇臺,今廢為驛,植木水中為混柱,作石堤三面,皇華樓據其前,昭陽樓建于後,臣問諸傅榮曰:“此驛若是姑蘇臺之址,則即古吳王所築臺之處乎?”榮曰:“非也,古所謂姑蘇臺在姑蘇山,吳王闔閭因山起臺,夫差侈大之,遺址猶存,紹興間又築臺於此,名姑蘇以存故事,今又廢而為驛,又於城中築臺,扁以姑蘇之名”云云,東有遞運所,又有山海鎮,而太湖之水,由石塘注運 河,由城東而西,以達于驛,因伍子胥所居,又名胥湖,湖廣可百餘步,北抱市衢,榮映射蘭櫃之間,光景浮動,而城西諸山,天平一室,號為郡鎮,其郡山之勝,日靈岩、五、仰天、秦臺,秩秩有序,而驛適臨之,真景致也,當午有按察御史二大人姓王若宋者來疇中,待我禮賓館,問:“你官何品?”臣對曰:“五品官,”又曰:“你能詩否?”臣曰:“我國士子皆以經學窮理.

p.398 為業,嘲弄風月為賤,故我亦不學詩詞,”又問曰:“算子封朝鮮,今有後否?且有廟墓祀事不廢否?”臣對曰:“算子之後算準為滿所逐,奔馬韓以立都,後為百濟所滅,今無嗣,算子廟在平壤,國家每歲春秋,降香祝牲幣以致祭”又問曰:“你國有何長技,能却隋唐之兵乎?”臣曰:“謀臣猛將,用兵有道,為兵卒者,率皆親上死長,故以高勾麗一偏小之國,猶以再却天下百萬之兵,今則合新羅、百濟、高句麗為一國,物聚地大,財富兵强,忠智之士,車載斗量,不可勝數,”二大人問罪,命外郎奉米一盤、黄腐一盤、麵節一盤以魄,臣作詩以謝,又有官人姓鄭者和約軒詩韻,臣即次之,其官人又以米六、鵝一集、菜一盤、胡桃一盤來贈,又有羅太監家偉姓柳者,年繼十五六,言詞清雅,自城中來饋,以及從者,李節、金大,亦買釀來饋,夜三更,又乘月掉舟而北,過間門,間門之外有通波亭臨湖,舊名高麗亭,宋元豐間所築,以待高麗朝貢之使,亭前接屋連槽,軸鱸如柳,(掉)[韓]至接官亭以泊,亭之西望有大塔,即寒山禪寺,所謂「姑蘇城外寒山寺者也.問其地名,則曰楓橋,問其水名,則日射潭河也.蘇州古稱吳會,東瀕于海,控三江帶五湖,沃野千里,士夫淵藪,海陸珍寶,若紗羅綫段,金銀珠玉,百工技藝,富商大賈,皆萃于此,自古天下以江南為佳麗地,而江南之中以蘇杭為第一州,此城尤最,樂橋在城中,界吳、長洲兩縣治間,市坊星布,江湖眾流,通貫吐納乎其中,人物奢侈,樓臺聯絡,又如間門、馬頭之間,楚商圈舶,輻禁雲集,又湖山明媚,景致萬狀,但臣等乘夜到姑蘇譯,翌日又不喜觀望,又乘夜傍城而過,故白樂天所謂“七堰八門六十坊、三百九十橋及今廢舊添新,勝景奇迹,俱不得記之詳也,

고소역 앞에서 유숙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소주[1]는 곧 옛날 오왕(吳王) 합려(固__)[2]196가 오자서(伍子昏)에게 성을 쌓게 하여 도읍으로 정했던 곳입니다.

성 둘레는 항주와 같았으며, 부치와 오현(吳縣), 장주현(長洲縣)의 치소도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성의 서문(胥門)197에 옛날에는 고소대(姑蘇臺)198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역이 되었습니다.

물속에 나무를 세워 황주(滉柱)를 만들고 돌 제방을 3면으로 만들었는데, 황화루(皇華樓)는 그 앞에 기대 있고, 소양루(昭陽樓)는 뒤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이 부영(薄榮)에게 묻기를, "이 역이 고소대의 터라면 바로 옛날 오왕이 대(臺)를 축조했던 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은, “아닙니다. 옛날의 이른바 고소대는 고소산(姑蘇山)(소주의 소=蘇)에 있었으니, 오왕 합려가 산에 의거하여 대를 만든 것을 부차(夫差)가 다시 넓힌 것인데 허물어진 집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소흥(紹興) 연간에 또 대를 이곳에 축조하고는 고소대라 명칭하여 고사(故事)를 보존했는데, 지금 또 없어지고 역이 되었던 것을 다시 성안에 대를 축조하고는 '고소'란 명칭으로 액자를 붙였던 것입니다" 운운하였습니다.

동쪽에는 체운소(遞運所)가 있고, 또 산해진(山海鎭)이 있었는데, 태호의 물은 석당(石塘)을 거쳐 운하로 흘러 들어가고, 성 동쪽을 거쳐 서쪽으로 가서 역에 이르게 됩니다.

오자서가 살았기 때문에 또 '서호(胥湖)'(오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호수의 너비는 100여 보나 되는데, 북쪽으로는 시가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난간 사이로 광선이 반사하니, 빛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하였습니다.

성서쪽의 여러 산 가운데 천평산(天平山)이 한 봉우리를 군(郡)의 진산(鎭山)이라 하였습니다.

그 군에서 경치 좋은 산은 영암산(靈巖山)202, 오오산(五鳥山), 앙천산(仰天山)203, 진대산(秦臺山)204 으로서 질서 정연하게 벌여 있었는데, 역이 적당히 위치하고 있어 참으로 경치가 좋았습니다.

정오에 성이 왕(王)과 송(宋)인 안찰어사(按察御史) 두 대인이, 역 안에 와서 저를 예빈관(禮賓館)에서 대접하고는,

“당신 벼슬은 무슨 품계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5품 벼슬입니다."

“당신은 를 잘 짓습니까?”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모두 경학의 궁리(窮理)로 업을 삼고 풍월을 농(弄)하는 것은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저도 시와 사(詞)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는데 지금도 후손이 있습니까? 또한 사당과 무덤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기자의 후손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서 마한(馬韓)으로 달아나 도읍을 정했는데, 후에는 백제에게 멸망을 당하고 지금은 후사가 없습니다.

기자의 사당은 평양에 있는데, 국가에서 해마다 봄과 가을에 분향을 하고 생폐(性幣)205를 올리며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귀국은 무슨 장기가 있어서 수나라와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지모 있는 신하(=謀臣)와 용맹스런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데 적절하였고, 병졸은 모두 윗사람을 어버이처럼 따르고 그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도 오히려 천하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던 것입니다.[3][4][5][6][7][8][9]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서 한 나라가 되었으니 물산(物産)은 많고 땅은 크며, 재물은 넉넉하고 군사는 강성하며, 충성스럽고 지모 있는 선비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두 대인은 다 묻고 나서 외랑(外郞)을 시켜서 쌀 1쟁반, 두부 1쟁반, 국수사리 1쟁반을 받들고 와서 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를 지어 사례하였습니다.

또 정(鄭)씨 성을 가진 관원이 약헌(約軒)의 시(詩)에 화운(和__)해 주기를 청하기에 바로 차운(次韻)해 주었더니, 그 관인이 또 쌀 6되, 거위 1마리, 채소 1쟁반, 호두 1쟁반을 보내왔습니다.

또 나(羅) 태감의 가동(家__)으로 유(柳)씨 성을 가진 자는 나이 겨우 15-16세인데도 말씨가 맑고 단아하였습니다.

그는 성 안에서 와서 음식을 접대하였는데 종자들에게도 두루 미쳤습니다.

이절과 김태도 반찬을 사 가지고 와서 대접하였습니다.

밤 3경에 또 달빛을 이용하여 노를 저어 북쪽으로 가서 창문(門)을 지나니, 창문 밖에는 통파정(通波亭)08이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예전 이름은 '고려정(高麗亭)'[10]이라 합니다.

송나라 원풍(元豊) 연간209에 건축하여 고려에서 조공하던 사신을 대접했던 곳이었습니다. 고려정 앞에는 집과 담이 잇닿아 있으며, 배들이 빗살처럼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노를 저어 접관정(接官亭)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접관정의 서쪽에 큰 탑이 보였는데 이곳이 곧 한산선사(寒山禪寺)로서 이른바 고소성 밖의 한산사라는 곳입니다. 그 땅 이름을 물으니 풍교(楓橋)[11]라 하고, 그 물 이름을 물으니 사독하(射흰河)라 하였습니다.

소주는 옛날에 오회(吳會)라 불렸던 곳으로 동쪽으로는 바다에 연하고, 삼강(三江)을 끼고 오호(五湖)를 둘렀으며 비옥한 들판이 천 리나 되고, 사대부들이 많이 모인 곳입니다. 사라능단(紗羅綾殺), 금은주옥과 같은 바다와 육지의 진귀한 보물과 온갖 기술을 가진 장인(匠人)들과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이 모두 이곳에 모입니다. 옛날부터 천하에서는 강남을 수려한 곳으로 여겼는데 강남에서도 소주와 항주가 제일가는 주(州)이고 특히 소주성이 최고였습니다. 낙교(樂橋)5는 성안에 있는데, 오현(吳縣)과 장주현(長洲縣) 두 현치의 사이에 있었습니다. 상점이 별처럼 촘촘히 놓여 있고 강과 호수가 여러 갈래로 그 속을 꿰뚫어 흘렀으며, 사람과 물화가 사치스럽고 누대가 서로 연이어져 있었습니다. 또 창문(門)과 나루터 사이에는 초(楚)의 상인과 민()의 선박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호수와 산은 아름답고 고왔으며 온갖 경치가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밤을 이용해 고소역에 도착하였고, 그 이튿날은 구경하지 못하였으며, 또 밤을 이용하여 성을 옆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런 까닭에 백낙천의 이른바 ‘칠언(七堰)·팔문(八門)·육십방(六十坊)·삼백구십교(三百九十橋)’'삼백구십교(三百九十橋)'와 지금 옛 것을 없애고 만든 새 것과 더불어 빼어난 경치와 기이한 자취를 모두 상세히 기록할 수가 없었습니다.


  • 호구사, 호구탑
  • 합려 무덤, 검 3,000개.


(178-179)





관장하고 있었는데, 지금 또한 소주를 지나 북경을 향해 가면서 먼저 와서 이곳에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어사(御史) 세 대인이 와서 배 위에서 전송하다가 신을 맞이하여 앞에 오게 하고는 예절로 대우하고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의 좋은 사람이므로, 우리들 모두 당신을 존경합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묻기를,

천순(天順), 성화(成化) 연간에 태감칙서(勅書)를 받들고 당신 나라에 사신 갔었는데, 당신은 성명을 차례대로 댈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천순 연간에는 제가 강보 속에 쌓여(??????????????) 있었던 까닭에 나랏일을 알지 못합니다. 성화 연간에는 태감 정동(鄭同)[12]222 · 강옥(__玉)223. 김흥(金興)224 이 서로 잇달아 사신으로 왔었습니다”[13][14] 라고 하였습니다.

또 글을 써서 보이기를, “정 태감과 강 태감은 모두 이미 작고(作古)하고, 김 태감만이 북경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작고란 두 글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중국 사람은 죽은 사람을 일러 작고라 하니, 이미 고인이 되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어서, “당신나라에서는 무엇이라 이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물고(物故)라고 합니다.”

“물고는 무슨 뜻입니까?”

“물(物)은 일이고 고(故)는 없음이니, 죽은 사람은 다시 일을 할 수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나라에서는 어떤 경서를 높이고 있습니까?”

“유사(儒士)들은 모두 사서와 오경만 배워 익히고 다른 기예(技藝)는 배우지 않습니다.”

“당신 나라에도 학교가 있습니까?”

“국도(國都)에는 성균관(成均館)이 있고, 또 종학(宗學)225과 중학(中學)·동학(東學)·서학(西學)·남학(南學) 26이 있고, 주(州)·부(府)·군(郡)·현(縣)에도 모두 향교(鄕校)와 향학당(鄕學堂) 28이 있고, 또 집집마다 모두 국당(局堂)이 있습니다.”

“옛날의 어떤 성현을 숭상합니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230을 숭상합니다.”

“당신 나라에서는 상례(喪禮)를 몇 해나 행합니까?”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를 따르고, 참최(斬衰)와 자최(齊衰)는 모두 3년을 행하며, 대공(大功)232 이하의 상복(喪服)도 모두 등급이 있습니다.”

“당신나라의 예절에는 몇 조목이 있으며, 형벌에는 어떤 조목이 있습니까?"

“예절에는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嘉禮)233가 있고, 형벌에는 참형(斬刑)·교형(敍刑)·유형(流刑)·도형(徒刑)·장형(杖刑)·태형(刑) 234 이 있어 한결같이 《대명률(大明律)》의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당신나라는 어떤 정삭(正朔) 235을 사용하며, 어떤 연호를 사용합니까?”

“한결같이 대명(大明)의 정삭과 연호를 따릅니다.”

“금년은 무슨 연호입니까?”

“홍치(弘治) 원년입니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대명이 해상에 처음 돋아서 만방에 비치거늘, 하물며 우리나라는 대국과 한 집안이 되어 공물을 헌납함이 끊어지지 않는데,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당신나라의 관복(冠服)도 중국과 같습니까?”

“무릇 조복(朝服)236 · 공복(公服)237. 심의(深衣) 238 원령(圓領)239은 한결같이 중화의 복제와 같으나, 다만 철릭의 주름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이어서 신으로 하여금 배리(__吏) 이하 종자들을 불러 와서 상하의 주례(酒禮)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정보 이하 종자들에게 명령하여 읍양(揖讓)240으로 예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태감은 세 대인과 함께 눈짓을 하며 담소하고는 이어 쌀 20되, 돼지고기 1쟁반, 채소 1쟁반, 약과(藥果) 1쟁반, 술 5동이를 주었습니다.

신 등은 사례하고 물러 나왔습니다. 드디어 배를 타고 보원교(普圓橋)·보은교(普恩橋)·호서포(清單鋪)·오가점(吳家店)·장공포(張公鋪)·불평득승교(不平得勝橋) 242. 통병교(通兵橋) 243망정순검사(望亭巡檢司)·마묘포(馬墓鋪)·순안교(純安橋)를 지나, 밤을 타서 가다가 4경에 석산역(錫山驛)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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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th Day. Moored in Front of Ku-su Station. This day was fair. Su-chou is the place to which Ho-lü [r. 514-496 B.C.], King of old Wu, sent Wu Tzu-hsü to enclose it with a wall and make it the capital.51 The circumference of the wall is equal to that of Hang-chou, and the prefectural capital and the seats of Wu County and Ch’ang-chou County are within it. At Hsü Gate in the wall was formerly a Ku-su Tower, which is now done away with for a station. Trees have been planted in the water, forming great pillars, and a stone levee has been built on three sides. Huang-hua Tower stands in front, and Chao-yang Tower is built in the back. I asked Fu Jung about it: “If this station is on the ruins of Ku-su Tower, is this the place where the tower was built by the old King of Wu?” Fu Jung said, “No. What was called Ku-su Tower in olden times was on Ku-su Mountain. King Ho-lü of Wu put up the tower because of the mountain. Fu Ch'ai [r. 495-473 B.C.] enlarged it. The ruins still exist. 52 In the Shaohsing period [1131-1162], another tower was built here and named Ku-su to keep the tradition. Now it has been done away with for a station. A tower was also built inside the wall and given a signboard with the name Ku-su.” To the east was a transfer station and also Shan-hai Market. But the waters of Lake T'ai, flowing into the Grand Canal between stone levees, go east and west along the wall and come out at the station. Because Wu Tzu-hsü lived there, it is also called Hsü Lake. It is about five hundred feet wide. In the north it curves round markets and junctions, winding and sparkling among railings, light dancing from it. Of the mountains west of the wall, the peak T’ien-p'ing is called the guardian mountain of the prefecture. The outstanding mountains of the prefecture are Ling-yen, Wu-wu, Yang-t'ien, and Ch’in-t’ai, one after another. It happens that the station looks out on them, making for an extremely beautiful view. At noon, two eminent persons, Regional Inspecting Censors [An-ch'a yü-shih] named Wang and Sung, came into the Station and received me in the Li-pin-kuan. They asked, “What is your official rank?” I answered, “Fifth Rank.” They said, “Can you write poetry?” I said, “The gentlemen of my country consider studying the Classics and probing to principles to be their concern and moaning about the wind and moon to be cheap; 1, therefore, have not studied poetry.” They asked, “Chi Tzu having been enfeoffed in Korea, are there now descendants of his ? And are his shrine, grave, and rites still kept up?" I answered, “Chi Tzu's successor, Kijun, was expelled by Wei Man. He fled to Ma-han, set up a capital, and later was destroyed by Paekche. There are now no descendants. Chi Tzu's shrine is in P'yongyang, and every year in spring and fall, the state ritually burns incense and sacrifices animals and money.” They asked, “What great technique did your country have, to have been able to repel the Sui and T’ang armies?” I said, “The ministers, who planned well, and the generals, who were bold, knew the right way to wage war. All the soldiers cherished their leaders and died for them. That way, Koguryo, though a remote little country, was capable of twice repelling the armies of China. Now that Silla, Paekche, and Koguryo have been combined into one country, its resources are many, its land big, its wealth great, and its soldiers strong. Its loyal and wise gentlemen are too many to be counted.' When the two eminent persons had finished their questioning, they ordered a deputy secretary to present to us one plate of rice, one plate of bean-curd, and one plate of wheat noodles. I wrote a poem and thanked them. Then an official named Cheng wanted me to match the rhymes of “Yüeh hsüan shih," and I did so. He presented to me six bushels of rice, one duck, one plate of fish and meat delicacies, and one plate of walnuts. One Liu, a house servant of Overseer Lo, was fifteen or sixteen years old and elegant of speech. He came from inside the wall and presented food to [me] and my staff. Li Chieh and Chin T’ai also bought food and came and presented it. In the third watch of the night we rowed the boats north in the moonlight, past Ch’ang Gate. Outside Ch’ang Gate, T’ung-po Pavilion overlooked the lake. Its old name had been Koryo Pavilion, and it had been built in the Yüan-feng period of Sung (1078-1085] to receive tribute-bearers from Koryð. In front of the pavilion, adjoining roofs and rows of masts were as thick as the teeth of a comb. We rowed to Chieh-kuan Pavilion and stopped. To the west, the pavilion looked out on a great pagoda, which was Han-shan Ch’an Temple, the one commemorated in the line, “Outside the Ku-su wall is Han-shan Temple.”53 I asked the name of the place, and [someone] said, “Feng Bridge.” I asked the name of the river, and [someone] said, “She-tu River.” XXX In olden times, Su-chou was called Wu-k’uai. It borders the sea in the east, commands three large rivers and five lakes, and has a thousand li of rich fields. Learned men and gentry abound there; and all the treasures of the land and sea, such as thin silks, gauzes, gold, silver, jewels, crafts, arts, and rich and great merchants, are there. It has been accepted in China from olden times that the land south of the Yangtze River is the beautiful and good land and that within that land Su-chou and Hang-chou are the first departments, especially Su-chou. Yüeh Bridge is inside the wall and separates Wu and Chang-chou counties. Market quarters are scattered like stars. Many rivers and lakes flow through [the region], refreshing and purifying it. The people live luxuriously. There are solid rows of towers and stands, and in such places as the space between Ch’ang-men and Ma-t'ou (the wharves?], merchantmen and junks from Honan, Hopei, and Fukien gather like clouds. The lakes and mountains are fresh and stimulating, the scenic splendors innumerable. But we came to Ku-su Station at night. The following day we did not have the pleasure of looking about either, but, traveling again at night, went along and past the wall. I have not been able, therefore, to record in detail any of the seven dams, eight gates, sixty quarters, or 390 bridges spoken of by Po Lo-t'ien,54 or old things now ruined, new things now added, unusually beautiful scenery, or marvelous remains. XXX

196. 춘추시대 吳나라 왕이다. 기원전 515년 楚나라에서 망명하여 온 伍子胥와 함께 자객 事諸의 힘을 빌려 오왕 僚를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오자서를 재상으로 삼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兵書인 《孫子》의 저자인 孫武로 하여금 군대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하 여 초나라를 위협, 결국 그 수도를 공략하였고, 오나라의 세력을 中原에까지 넓혔다. 후에 越王 句踐에게 패하여 죽었다. 197. 府城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姑胥門이라고도 한다. 합려가 이 서문을 지어 고소대를 유람하고 太湖를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姑骨山에서 따온 이름이다. 光緖《蘇州府志》 권4, 城池. 198. 일명 胥臺 혹은 姑胥臺라 한다. 吳縣에서 서남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다. 光緖《蘇州府志》권35, 古蹟. 199. 제방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심은 나무. 200. 춘추 말기 吳나라의 왕(재위 B.C. 496-B.C.473)으로, 間의 아들이다. 합려가 越나라에 패해 전사하자 원수를 갚기 위해 월나라를 공격하여 월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句踐을 신하로 삼았다. 또 艾陵에서 齊나라를 크게 물리치고 제후국간 會盟을 주도하 여 중원의 霸者가 되었다. 그러나 伍子骨의 충간을 물리치고 월나라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 한 데다 寵姬 西施에게 빠진 끝에 구천의 반격을 받아 나라를 잃고 자살하고 말았다. 201. 吳縣治에서 서쪽으로 20리 거리에 있는 산으로 府內에서는 가장 높고 기암괴석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光緖《蘇州府志》권6, 山1; 《吳郡志》권15, 山 등 참조. 202. 府治에서 서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는 산으로 일명 視石山이라 한다. 光緖《蘇州府志》권6, 1. 203. 천평산과 5리도 되지 않는 가까운 산이다. 舊名은 馬鞍山이다. 光緖《蘇州府志》권6,1. 204. 천평산의 서쪽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이 회계를 유람할 때 이 산에 올랐던 적이 있기 때문에 秦臺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光緖《蘇州府志》권6, 山1. 205. 제사 때 올리는 가축과 幣帛. 206. 지방 관아의 小吏 207. 約軒은 寧海人 方의 別號이다. 方에게는 〈約軒稿)라는 저작이 있다. “《約軒稿》寧海縣志 方 著”《浙江通志》 권249, 經籍 9, 集部 2. 208. 후에 通波新館으로 바뀌었다. 光緖《蘇州府志》 권23, 公署3. 209. 高麗亭이 세워진 것은 元豊7년(1084)이다. 光緖《蘇州府志》권23, 公署3. 210. 詔勅을 맞이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皇華亭이라고도 한다. 元代에 창건되었고 明洪武 연간에 重建되었다. 光緖《蘇州府志》 권23, 公署3. 211. 唐 張繼의 詩〈楓橋夜泊>에 나오는 구절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月落烏蹄霜滿天, 江楓漁火對愁民.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唐百家詩選》권. 212. 秦漢代에 會稽郡治가 吳縣에 있었기 때문에 郡과 縣을 함께 칭해서 吳會라고 했다. 來決代에 회계군은 吳郡과 會稽郡으로 분리되었는데 합쳐서 吳會라고 칭했다. 唐代이후에는 일반적으로 平江府, 즉 오늘날의 江蘇 蘇州 일대를 吳會라고 칭했다. 213. 吳松江, 錢塘江, 浦陽江을 가리킨다. 214. ___웬는 얇은 비단이고, 綾은 두터운 비단으로서, 絹織物을 총칭하는 말이다. 215.? 216.? 217.? 218.? 219.? 220.? 221. 成化 연간 蘇杭督織太監을 역임한 羅政을 가리킨다. 孫孤, 《蘇州織造局志》권1, 沿革; 권2, 職員 (江蘇人民出版社, 1959). 222. 鄭同은 조선 출신 환관으로서, 成化4년(조선 세조14년)에 세자를 왕(睿宗)으로 책봉하는 목적으로 出使하였다. 《明史》권320, 列傳208, 外國 1, 朝鮮. 223. 姜玉은 조선 출신 환관으로서, 세조14년에 조선에 出使하였고 후에도 여러 번 出使했다. 특히 성종11년 5월 1일에는 正使 정동과 함께 副使의 신분으로 조선에 파견된 바 있다. 《朝鮮世祖實錄》 14년 2월 24일조;《朝鮮成宗實錄》 11년 5월 1일조 등 참조. 224. 성종14년에 正使 정동과 함께 副使의 신분으로 조선에 파견되었으나, 정동이 병으로 활동을 하지 못하자, 金興이 사실상 正使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선 성종실록》 14년 7월 임진 ; 9월 신해 ; 9월 무오. 225. 조선시대 종실의 교육을 담당하던 곳으로 성균관의 司成 이하 典籍 이상의 관원이 겸직했다. 세종10년(1428)에 설치하여 연산군 때 폐지했다가 중종 때 복구했지만 후에 다시 폐하였다. 226. 조선시대 양반 자제를 위하여 京城에 설치한 교육기구이다. 중학은 북부의 觀光坊, 동학은 동부의 彰善坊, 서학은 서부의 餘慶坊, 남학은 남부의 誠明坊에 두어졌는데 이상을 줄여서 四學이라 하였다. 227.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이다. 孔子를 제사하는 文宣王廟를 중심으로 강당으로 明倫堂이 있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先哲과 先賢을 제사하는 東西無, 東西兩齋가 있다. 향교는 중앙의 四學과 같은데 여기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한 자는 생원과 진사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가게 되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 官位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중기 이후 향교는 과거를 준비하는 장으로 되고 書院이 발흥하면서 점차 쇠미하여졌다. 228. 각 지방에서 국자감에 들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설치한 관립학교, 229. 원래 평민층의 자제에게 經典과 弓術을 교습시키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설치한 고구 러의 사립 교육기관인 高堂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미혼의 평민자제를 교육시키던을 뜻한다. 230. 元 至大원년(1308) 7월에 加號된 孔子의 封號.

231. 喪服名이다. 五服 가운데 참최는 가장 무거운 상복으로 가장 거친 麻布로 만들고, | 자최는 두 번째 무거운 상복으로 조금 덜 거친 마포로 만든다. 232. 五服의 하나로 9개월의 喪服을 말한다. 233. 吉禮는 祭事, 凶禮는 喪事, 軍禮는 軍事, 殯禮는 葬事, 嘉禮는 結婚에 관한 예의를 뜻한다. 234. 참형은 참수형, 교형은 교수형, 유형은 邊遠지방에 보내어 勞役하도록 하는 형벌, 도형은 구금시킨 뒤 勞役하도록 하는 형벌, 장형은 大前條나 大竹板으로 둔부 등을 치는 형벌, 태형은 小前條나 小竹板으로 치는 형벌을 말하는데 이상을 합하여 六刑이라 한다. 235. 正朔은 정월 초하루를 의미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제왕이 새 왕조를 열고 새로 반포하는 曆法을 뜻한다. 236. 朝會時 君臣이 입는 禮服. 237. 帝王와 百官이 공무를 볼 때 입는 옷으로 官服의 통칭으로도 쓰인다. 238. 上衣와 下衣가 서로 연결되어 아래는 주름이 잡히고 소매는 넓은 옷으로 평상시에 입는 常服을 말한다. 239. 관리의 常服을 뜻하는 團領의 다른 이름이다. 團領에 대해서는 앞의 주 참조. 240. 賓主가 相見하는 禮. 241. 원문은 普恩橋'로 되어 있으나, ‘普思橋'의 誤記로 보인다. 본문에 의하면 普恩橋는 清單에 위치하고 있는데, 隆慶《長洲縣志》권12, 橋梁에 의하면 墅에 普思橋가 위치하고 있다. 242. 太平得勝橋의 誤記이다.

243. 원문에는 通兵橋로 되어 있으나, 通吳橋의 誤記로 보인다. 본문에 의하면 通兵橋는 望亭巡檢司로 가기 바로 직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光緖《無錫金眞縣志》 권5, 橋梁에 의하면 無錫縣과 長洲縣의 분계에 위치한 通吳橋는 일명 望亭橋라고 하였다고 한다.
  1. ‘동양의 베니스’ 중국 쑤저우(蘇州), 신동아, 2010.01.08
  2. 와신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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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고구려가 수-당과 벌인 90년 전쟁이 자기네 국내전쟁이라는 중국의 궤변, 동아일보, 2014.02.18
  9. 우리가 변해야 중국이 바뀐다, <칼럼>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통일뉴스, 2017.12.20
  10. [박현규 교수와 함께 한 대륙 속 우리문화 흔적을 찾아서<2> 장쑤 성 쑤저우 시의 고려정]
  11. 楓橋夜泊(풍교야박), 한겨레신문, 2016.09.06
  12. [이한우의 朝鮮이야기(14) 명나라의 환관 최고위직에 오른 정동, 주간조선, [1935호] 2006.12.25]
  13. 성종실록 156권, 성종 14년 7월 2일, 임진 1번째기사,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모화관에 나가 사신을 맞고 경복궁에서 칙서를 받다
  14. 15세기 말 중국(明)을 견문한조선 지식인의 환관 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