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鄭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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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파견된 조선 출신의 명의 환관.

개설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1428년(세종 10) 10월 화자(火者: 환관)로 선발되어 북경으로 보내졌다. 이후 단종대부터 여러 차례 사신으로 조선에 왔으며 1483년(성종 14) 마지막 사행 후 명으로 귀국하는 중에 병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정통(鄭通)’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

정동은 환관임에도 명 헌종(憲宗)의 총애를 받아 군사 분야는 물론이고 여러 분야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정동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황제의 측근으로서의 권세를 누렸다. 조선 조정은 조선 출신인 그를 이용하여 명의 어려운 요구 사항을 때로 조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사신으로 올 때면 많은 뇌물과 선물, 또 자신의 고향에 대한 특별한 조치 등을 요구하여 조선 조정을 곤혹스럽게 하였다. 정동뿐 아니라 환관 출신의 사신들이 조선은 물론 명 내에서까지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많아져, 이는 뒷날 중국 정부가 사신을 사대부 출신으로 교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활동 사항

그는 1428년(세종 10) 10월 화자로 선발되어 북경으로 보내졌다(『세종실록』 10년 10월 3일). 이후 1455년(단종 3)에 소감(少監)고보(高黼)의 부사(副使)로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그의 관직은 내사(內史)였다(『단종실록』 3년 4월 3일). 그는 조칙(詔勅)과 고명(誥命) 등을 조선에 전달하는 의례를 끝마치고 조상의 묘에 제사 지내기 위해 고향이었던 신천으로 향하였다(『단종실록』 3년 6월 10일). 부사로 왔던 정동은 금강산 그림 등의 선물을 요구하고 고향과 자신의 가족에 대한 특별한 조치를 요구하기는 하였지만 당시까지는 조선 조정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고향을 방문하는 도중에 병이 났을 때 단종이 약을 특별히 보낸 준 것에 대하여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정동은 1469년(성종 즉위년) 다시 태감 최안(崔安)·심회(沈澮)와 함께 중국 황제가 조선 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문건을 전달하는 고명 사신으로 파견되어 조선에 왔다. 이때부터 정동은 조선 조정에 보다 많은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정동은 우선 이전에 왔던 명사 김보(金輔)가 조선 왕에게 받았던 녹주의(綠紬衣)를 황제가 매우 색깔이 좋다고 언급하였다면서 자신들에게 명주와 함께 구해 오라고 지시하였다고 말하였다. 아울러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칼을 얻어 황제에게 진상하고 싶다며 준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 문제를 의논해서 여러 가지 모양의 칼이 각각 10개가 넘지 않도록 준비해 주기로 결정하였다(『예종실록』 1년 윤2월 24일).

그리고 정동은 태감 윤봉(尹鳳)의 사례를 언급하며, 자신의 고향 신천을 승격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예종실록』 1년 3월 16일). 뿐만 아니라 고향에 갔다가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의 무덤에 새로 만들어 세운 석인(石人)과 표석(標石)을 보고 화를 내며, 석물들의 완성도가 낮으므로 반드시 다시 정교하게 만들 것을 강요하였다. 자신이 돌아오면 다시 확인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예종실록』 1년 3월 24일). 그의 개인적 요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정동은 성종의 재위 기간에도 조선과의 교류를 유지하며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전달하였다. 특히 명으로 파견되었던 사신들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에 대한 청탁을 계속하였다. 1480년(성종 11)부터는 4년 동안 3차례나 정사로 파견되어 지속적으로 조선에 왔다. 그리고 마지막 사행 때는 조선에서 병이 나서 계속 고생하다가 명으로 귀국하던 도중 병사하였다.

물론 정동이 조선 조정의 명에 대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노력한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궁각(弓角) 무역 문제였다. 당시 좋은 활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소의 뿔이 필요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이를 구입하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명에서는 군사와 관련된 중요한 물품으로 분류해 수우각의 수출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성종은 이를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정동의 도움을 받는 방안을 고민하였다. 조정의 신료들은 대부분 역효과를 우려해 정동을 이용해 궁각을 수입하는 방안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수우각의 수입이 국방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던 성종은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윤필상(尹弼商)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유지(柳輊)를 사신으로 파견해서 명에 가서 궁각 수매(收買)를 요청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명 조정의 신료들은 대부분 조선의 궁각 수매를 우려하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정동 등의 도움으로 황제는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성종은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크게 기뻐하였다(『성종실록』 9년 1월 10일)(『성종실록』 9년 1월 11일). 정동은 후일 조선에서 명에서 요구하는 물목이 너무 많고 과도해 백성들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을 설명하며 공물을 줄여 줄 것을 요구하자 궁각 무역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성절사(聖節使) 일행을 강하게 압박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9년 12월 27일).

참고문헌

  • 『명헌종실록(明憲宗實錄)』
  • 『명사고(明史稿)』
  • 『명사(明史)』
  • 『명통감(明通鑑)』
  • 김한규, 『사조선록 연구-송·명·청 시대 조선 사행록의 사료적 가치-』, 서강대학교출판부, 2011.
  • 정구선, 「선초 조선출신 명 사신의 행적」, 『경주사학』 23, 경주사학회, 2004.
  • 조영록, 「동월의 『조선부』에 대하여」, 『전해종교수화갑기념논총』, 1979.
  • 조영록, 「선초의 조선출신 명사고; 성종조의 대명교섭과 명사 정동」, 『국사관논총』 14, 국사편찬위원회, 1990.
  • 조영록, 「수우각무역을 통해 본 선명관계」, 『동국사학』 제9·10합집, 동국대학교사학회,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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