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준

North Korea Humanities

조현재(CNU2025)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10일 (수) 18:52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조현재(CNU2025))이 작성했습니다.




김덕준 (金德俊)
김덕준.jpg
출처 : "김덕준(金德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글명 김덕준 한자명 金德俊 영문명 Kim Deok jun 가나명 이칭 원정
성별 남성 생년 1918년 몰년 1987년 출신지 함경남도 함흥 전공 축구 심판·축구 지도자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심판, 1918∼1987. 호는 원정(園丁). 함경남도 함흥출생. 6세 때 캐나다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축구를 시작하여 함흥 영생중학교 3학년 때 선수가 되었고 연희전문학교에서 활약하였다.[1] 축구계의 기인으로 불린 그는 남다른 집념과 열정으로 1951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심판이 되어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심판 공로상을 받았다.[2] 1969년도에 시작해서 미동초등학교 교정에서 쓰러지던 날까지 16년 동안에 7만 여명의 어린이에게 축구를 가르쳤으며, 계획하였던 10만명을 채우지 못하게 될 것을 병상에서도 늘 염려하였다.[3]


생애


출생 및 어린시절

1918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덕준은 6살 때 캐나다 선교사 덕분에 처음 축구를 접하게 됐다.[4] 함흥 영생중에 진학해 함흥 대표로 선정되기도 했고 이후 연희전문에 진학해서는 조선대표팀이라고 할 수 있는 전경성축구단에 뽑히기도 했다.[5]



청장년 시절

946년 심판으로 데뷔한 그는 1951년 김화집, 배종호, 김성간, 이유형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국제 심판이 돼 그 꿈을 이뤘다.[6] 심판 시절 그는 대쪽 같은 판정으로도 유명했고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심판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 때는 멕시코와 헝가리 경기의 주심을 봤다.[7] 무려 20년 동안 심판으로 1천여 경기나 치른 그는 1966년 가을 심판복을 벗었다.[8]



노년 시절

무려 20년 동안 심판으로 1천여 경기나 치른 그는 1966년 가을 심판복을 벗었다. 50세의 문턱에 그가 심판을 그만두자 아내와 아이들은 남편과 아버지가 돌아왔다고 반겼다. 국가대표까지 지내고 실업팀 코치를 하면서 국제심판으로 아시아인 최초 공로상 수상자가 됐으니 축구인으로서 이룰 건 다 이룬 그가 남은 생은 편히 보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때부터가 바로 그의 인생 하이라이트였다. 그는 심판으로 재직하였다.[9] 심판을 그만두면 꼭 어린이를 위해 무언가 해보자했던 그는 심판을 그만두고 곧바로 어린이를 위한 축구교실 설립하였다.[10]












주석


  1. 최은택."김덕준(金德俊)", 『한국민족대백과사전』online,한국민족대백과사전.
  2. 최은택."김덕준(金德俊)", 『한국민족대백과사전』online,한국민족대백과사전.
  3. 최은택."김덕준(金德俊)", 『한국민족대백과사전』online,한국민족대백과사전.
  4. 김현회."김덕준(金德俊)", 『스포츠니어스』online,스포츠니어스.
  5. 김현회."김덕준(金德俊)", 『스포츠니어스』online,스포츠니어스.
  6. 김현회."김덕준(金德俊)", 『스포츠니어스』online,스포츠니어스.
  7. 김현회."김덕준(金德俊)", 『스포츠니어스』online,스포츠니어스.
  8. 김현회."김덕준(金德俊)", 『스포츠니어스』online,스포츠니어스.
  9. 김현회."김덕준(金德俊)", 『스포츠니어스』online,스포츠니어스.
  10. 김현회."김덕준(金德俊)", 『스포츠니어스』online,스포츠니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