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준

North Korea Humanities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조현재(CNU2025))이 작성했습니다.




김덕준 (金德俊)
김덕준.jpg
출처 : "김덕준(金德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글명 김덕준 한자명 金德俊 영문명 Kim Deok jun 가나명 이칭 원정
성별 남성 생년 1918년 몰년 1987년 출신지 함경남도 함흥 전공 축구 심판·축구 지도자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심판, 1918∼1987. 호는 원정(園丁). 함경남도 함흥출생. 6세 때 캐나다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축구를 시작하여 함흥 영생중학교 3학년 때 선수가 되었고 연희전문학교에서 활약하였다.[1] 축구계의 기인으로 불린 그는 남다른 집념과 열정으로 1951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심판이 되어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심판 공로상을 받았다.[2] 1969년도에 시작해서 미동초등학교 교정에서 쓰러지던 날까지 16년 동안에 7만 여명의 어린이에게 축구를 가르쳤으며, 계획하였던 10만명을 채우지 못하게 될 것을 병상에서도 늘 염려하였다.[3]


생애


출생 및 어린시절

1918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덕준은 6살 때 캐나다 선교사 덕분에 처음 축구를 접하게 됐다.[4] 함흥 영생중에 진학해 함흥 대표로 선정되기도 했고 이후 연희전문에 진학해서는 조선대표팀이라고 할 수 있는 전경성축구단에 뽑히기도 했다.[5]



청장년 시절

946년 심판으로 데뷔한 그는 1951년 김화집, 배종호, 김성간, 이유형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국제 심판이 돼 그 꿈을 이뤘다.[6] 심판 시절 그는 대쪽 같은 판정으로도 유명했고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심판 공로상을 받기도 했으며 1964년 도쿄올림픽 때는 멕시코와 헝가리 경기의 주심을 봤다.[7] 무려 20년 동안 심판으로 1천여 경기나 치른 그는 1966년 가을 심판복을 벗었다.[8]



노년 시절

무려 20년 동안 심판으로 1천여 경기나 치른 그는 1966년 가을 심판복을 벗었으며 50세의 문턱에 그가 심판을 그만두자 아내와 아이들은 남편과 아버지가 돌아왔다고 반겼지만 이때부터가 바로 그의 인생 하이라이트였다. [9] 심판을 그만두면 꼭 어린이를 위해 무언가 해보자했던 그는 심판을 그만두고 곧바로 어린이를 위한 축구교실 설립하였다.[10]





연구


자비를 털어 연 어린이 축구교실

30명만 와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했던 첫 수업 날인 1969년 4월 20일 아침 9시 효제국민학교 운동장에 도착한 김덕준 선생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11] 무려 70여 명의 어린이들이 김덕준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12] 아이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 중앙고 선수 세 명과 아들 두 명도 함께 나와 학년별로 어린이들을 지도했지만 결국 네 번째 일요일, 그러니까 일요축구교실이 열린지 한 달 만에 축구를 배우겠다는 어린이들이 무려 200명까지 늘어나 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13] 물론 김덕준 선생은 어린이 회원이 늘어난다고 해 돈을 버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지출만 늘어났다.[14] 김덕준 선생은 자비를 털어 축구공을 사고 코치로 일하는 대학 선수들에게도 자비로 레슨비를 댔고 가난한 어린이들에게는 손수 20원씩의 차비까지 쥐어줬으며 한 번은 폭우가 쏟아지는데 무려 70여 명의 어린이가 축구 수업을 하겠다고 몰린 적도 있다.[15] 결국 축구교실을 열지는 못했지만 김덕준 선생은 이날 70여 명의 어린이에게 자비를 털어 빵 한 개씩을 나눠주고 돌려보냈다.[16]



김덕준 선생, 소파상을 받다

김덕준 선생은 1981년 일요축구교실을 열어 무려 5만여 명에 가까운 어린이들을 위해 노력한 대가로 대한민국 체육상 공로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17] 63세의 일이었다.[18] 하지만 이 자리에서도 김덕준 선생은 겸손했고 10년 동안 10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는 것이 목표였는데 아직 절반도 안 됐다며 이 목표를 이뤄야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 하였다.[19] 그리고 그는 이듬해인 1982년 11월에는 제26회 소파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20]



어린이 축구교실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심판 제의가 오기도 했고 미국 대학에서도 코치로 오길 바랐지만 김덕준 선생은 어린이 축구를 위해 이를 거절했다.[21] 그는 어린이들에게 자비로 트로피와 축구화, 축구공을 선물했고 시합 도중 다친 아이들을 위해 침술까지 배웠으며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필요한 축구공도 하루에 200여개에 달하자 각 실업 팀을 돌아다니며 헌 공을 모으기도 했다.[22] 김덕준 선생이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어린이들과 함께 한 이유는 유소년 육성이 한국 축구의 희망이라는 거창한 목표 외에도 아이들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2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덕준 Group: 아이들 A taught B
Person: 김덕준 Prize: 소파상 A received an B award
Person: 김덕준 Group: 축구교실 A open a B
Person: 김덕준 Group: 전경성축구단 A is picked for the B
Person: 김덕준 Prize: 공로상 A received an B award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주석


  1. 최은택."김덕준(金德俊)", 『한국민족대백과사전』online,한국민족대백과사전.
  2. 최은택."김덕준(金德俊)", 『한국민족대백과사전』online,한국민족대백과사전.
  3. 최은택."김덕준(金德俊)", 『한국민족대백과사전』online,한국민족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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