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송무역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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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석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0월 22일 (수) 17:15 판 (본문2: 송조의 무역 정책과 여송 무역의 정치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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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麗宋貿易小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7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7년7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44쪽 전체쪽 044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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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1過去 우리와 中國과의 貿易에 있어 대개 貢物이라는 名稱으로 (中國과의)物貨를 交通하는 所謂 朝貢貿易과 兩國 商民에 依하야 行하는 所謂 互市의 두 가지 形式을 보게 되였음은 吾人의 이미 認知하는 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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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2高麗의 宋에 對한 朝貢外交에 나아가 살펴보면 그 本質을 더욱 明確히 看取할 수가 있는 것이니 高麗史入卷 文宗 十二年 八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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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3

王 欲於耽羅及靈岩 伐材造大船 將通於宋 內史門下省上言 國家結妤北朝○北嘲는 遼를 가르침 邊無警急 民樂其生 以此保邦 上策也(中略)况我國 文物禮樂 興行己久 商舶絡繹 珍寶日至 其於中國 實無所資(○○○○○○○○○○○○○○○○○○○○○○○○○○○) 如非永絕契丹 不宜通使宋朝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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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4라 하였다. 當時 麗宋 兩國 사이에 지금 熱河地方을 中心으로 하야 이러난 遼(契丹)는 東으로 高麗, 南으로 宋을 壓迫하야 東亞國際關係는 매우 微妙하게 되였다. 원문주1▶그리하야 高麗에서는 그의 地理上 關係로 이미 成宗 時代부터 和遼踈宋策에 기우러지게 되였던 것이니[1] 그러므로 文宗 時代에 이르러도 宋에 對한 高麗의 態度가 이와 같이 消極的이었던 것은 그러한 政治的 意味도 많이 加味된 것으로 믿거니와 內史門下省의 通宋 反對 理由로서 特히 우리나라의 文物이 일직부터 發達하여오고 珍寶財貨를 실은 商舶이 날로 이르므로 朝貢手段에 依한 中國文物 輸入의 必要가 없다는 것이 主 要한 條件으로 되여있는 것이다. 이 記事로 보아도 高麗의 宋에 對한 朝貢外交의 本面目이 那邊에 있었으며 또한 그것에 對한 高麗人의 觀念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高麗의 朝貢外交에 對하야 宋人도 또한 그와 같이 觀念하고 있던 것이니 文獻通考卷三百二十五, 四 商考 高句麗條 附叙 高麗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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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1

按高麗之臣事中朝也 蓋欲慕華風而利歲賜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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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2라 한 것은 어느 程度까지의 實情을 把掘한 見解라고 할 것이며 그리고 實際에 있어서 宋廷에서는 高麗의 貢物을 商品과 같이 看做하였던 것이니 宋史卷四百八十七 高麗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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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3

前此 貢物至 輒下有司估直(○○) 償以萬縑 至是○宋 神宗 元豊 二年 命勿復估 以萬縑爲定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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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4라 하였다. 宋 神宗 元豊 二年까지는 高麗의 貢物을 打價하야 대개 絹繪萬鎌을 代償으로 보내던 것이 例이었으나 元豊 二年부터는 打價의 煩瑣함을 避하려 함이었든지 高麗 貢物의 代償은 統括的 數値로 萬鎌으로써 그 額數를 定하여버린 것이니 이것은 實際的 國際貿易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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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5다음 互市 即 兩國 商民에 依한 貿易에 있어서는 元來 兩國 內의 經濟發展에 依한 物的 欲求에 基因하야 促致된 것으로서 貿易發展史上으로 보아 이와 같은 民間貿易은 所謂 朝貢貿易에 比하야 自然發達의 途程을 밟어온 것이다. 원문주2▶그리하야 古來로 兩國 사이의 民間貿易에 있어서 가장 旺盛하던 때를 추워보면 대개 二大 時期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니 하나는 新羅末葉에 淸海鎭의 張保皐를 中心으로 한 新羅人의 海外 發展期며[2] 또 하나는 本稍에서 論하려는 高麗時代의 朝貢貿易과 幷行하던 宋商의 活動期라고 믿는다.

































본문2: 송조의 무역 정책과 여송 무역의 정치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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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6中國 商人의 半島에의 活動이 宋代에 이르러 活潑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動因이 있을 것이다. 宋代에 드러와 中國의 ▶P4-1商業資本이 發展된 우에 他面에 있어서는 唐代로부터 大食人을 主로 하야 波斯 師子國(錫蘭島) 扶南 眞臘 林邑 等의 商舶이 廣州(廣東) 一帶에 輻湊하야 西南亞洲와의 交易은 唐‧韓愈의 이른바 「其海外雜國 若眈浮羅○耽羅 卽 濟州인 듯함 流求 毛人夷亶之州 林邑扶南眞臘于陀利之屬 東南際天地以萬數 或時候風潮朝貢 蠻胡賈人 舶交海中(中略) 外國之貨日至 珠香象犀玳瑁奇物 溢於中國 不可勝用」送鄭尙書序이라 한 만큼 旺盛하였으며 원문주3▶新羅와의 交易은 唐의 末頃에 登州 揚州 楚州(淮安) 等을 通하야 新羅 商人의 活動이 자못 盛行하였던 것이니[3] 中國 商人의 받은바 刺戟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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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4-2이와 같은 經濟的 또는 歷史的 背景이 宋商活動의 重要한 動機라 할 것이나 宋朝의 貿易政策도 또한 莫大한 關係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歷代 宋朝에서는 海外貿易 獎勵로써 國家收入의 增進을 꾀하였으니 이 같은 政策은 이미 그의 太祖 時代부터 行하게 되였던 것이다. 文獻通考卷十四 征権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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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4-3

恭惟我藝祖○宋太祖開基之歲 首定商稅則例 自後累朝守爲家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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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4-4이라 하였으며 또 宋史卷四百九十 大食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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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4-5

太祖乾德四年 僧行勤 遊西域 因賜其王書 以招懷之 太祖開寶元年 遣使來朝貢 四年 又貢方物 以其使李訶末爲懷化 將軍 特以金花五色綾紙 寫官告以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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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4-6라 하였다. 일로 보면 宋太祖 即位하던 해에 발서 商稅의 規例를 定한 것이니 얼마나 貿易을 重視하였던가를 알 수 있으며 또 當時 蕃商의 中心勢力인 大食人을 招懷하고 또 그의 使節에게 그의 使節에게 官職을 준 것도 다만 中國式의 政治的 扮飾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對外貿易을 獎勵하는 實利的 政策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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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5-1宋太祖의 이와 같은 政策은 歷代에 繼承되여 더욱 그의 發展을 보게 되엿던 것이니 太宗 雍熙年間에는 內侍 八人에게 勅書와 金帛을 주워 海南諸蕃을 招致하였으며 特히 南宋에 이르러서는 北中을 金國에 빼앗기고 江南 一帶의 半壁山河를 지켜 金에 對峙하고 있던 關係上 더욱 國庫收入의 增進을 貿易에 依하야 꾀하였던 것이다. 원문주4▶그리하야 高宗 紹興 二十 九年에는 三市舶司의 收入이 二百萬辮의 巨額에 達하엿다는 것이 그의 著例이니[4] 여기에는 所謂 「市舶之利」의 緊切함을 늣기던 高宗의 貿易 獎勵政策이 그의 一大 動因이엿슴은 疑심치 못할 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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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5-2다시 宋代의 西南諸國과의 實際的 貿易 狀況을 살펴보면 宋史松栢八 互市舶法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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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5-3

凡大食, 古邏, 閉婆, 占城, 勃泥, 麻逸, 三佛齊諸蕃 並通貿易 以金銀鍲錢鉛錫雜色帛瓷器 市香藥犀象珊瑚琥頊珠 琲鑌鐵鼊皮瑇瑁瑪瑙車渠水精蕃布烏樠蘇木等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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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5-4이라 하였다. 當時 이러한 西南諸國 中에도 貿易의 中心이 된 것은 依然히 大食人이며 闍婆(爪哇) 三佛齊(今蘇馬答剌의 巴鄰旁)도 豪富의 일음이 높든 것이니 이 三國을 主로 한 西南諸國의 商舶은 盛히 南中沿岸에 輻湊하던 것이다. 원문주5▶이에 딿아 宋廷에서는 廣州(廣東) 明州 杭州를 主로 南中沿岸要港에 市舶司를 두워 物貨出入稅(主로 入口稅)의 徵收 特殊 物貨의 專賣, 貢物의 接濟 等을 管理케 하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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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5-5以上으로서 宋의 貿易政策의 條件 아래에서 宋과 西南諸國rhk의 海上 貿易을 살펴보왓거니와 다음에는 麗宋間의 政治的 關係를 條件으로 하야 兩國 貿易의 消長을 考察해 보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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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5-6元來 兩國의 國交는 高麗 光宗 十三年(宋太祖 建隆 三年)에 비로소 열렸으나 民間貿易은 高麗 顯宗 時代부터 盛行하게 되엿던 것으로 믿나니(次節 表二 參照) 宋에는 太祖 太宗 時代에 國內 統一事業이 完成되고 또 朱의 貿易政策이 實現되기 ▶P6-1시작하엿슴으로 다음 眞宗(高麗 顯宗 時에 當함) 時에 이르러 宋商의 活動이 高麗에서 活潑케 된 것은 또한 偶然한 일이 아니엿슬 것이다. 그리하야 兩國의 貿易 狀況은 北宋末에 이를수록 隆盛의 자취를 보이던 것이니(次節 表二 恭照) 이에는 또한 特殊한 政治的 關係가 交錯되여 있엇던 것으로 생각한다. 宋은 神宗 때로부터 高麗와 結托하야 東北의 強敵인 遼를 牽制코저 親麗策에 注力을 하였으니 宋史卷四百九十七 高麗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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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6-2

神宗熙寧三年 拯○福建轉運使羅拯以聞 朝廷議者 亦謂可結之 以謀契丹(○○○○○○○○○) 神宗許焉 命拯 諭以供擬腆厚之意 (中略) 高麗又表求醫藥畵塑之工 以教國人 詔羅拯 募願行者 九年復遣崔思訓來 命中貴人 做都亭西驛例治舘 待之寢厚 其使來者 亦益多(○○○○○○○○○○○) 元豊元年 始遣安燾左諫議大夫 陳睦假起居舍人 往聘 造兩艦於明州 一曰凌虛安濟致遠 次曰靈飛順濟 皆名爲神舟 自定海 絕洋而東 旣至 國人歡呼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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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6-3이라 하였다. 일로 보면 宋 神宗은 그의 聯麗對遼策을 實現식히려는 데에서 高麗의 歡心을 사기에 얼마나 努力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當時 宋廷에서 이와 같은 親麗策을 取하는 데에도 먼저 商人의 斡旋을 必要로 하던 것이다. 원문주6▶처음에 羅拯 이 親麗策에 關한 神宗의 密旨를 받고 宋商黃愼(宋史 高麗傅에는 黃眞으로 보임)을 二次나 高麗에 派送하야 高麗政府의 動靜을 探索한 後에 그와 같은 親麗策을 비로소 表明하게 된 것이며 그리고 때로는 高麗의 使節도 宋商의 船舶을 利用하야 宋에 건너갓던 것이니[6] 이러한 政治關係는 一面에 있어 商人의 活動을 더욱 旺盛케 하던 것으로 믿는다(次節 表二 黎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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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6-4宋의 이러한 親麗策은 北宋末 徽宗 時에 이르러 一層 濃厚하게 表現되였으니 宋史‧高麗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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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6-5

徽宗政和中 升其使爲國信 禮在夏國上 與遼人 皆隸樞密院 改引伴押伴官 爲接送舘伴 賜以大晟燕樂籩豆簠簋尊罍▶P7-1等器 至宴使者于睿謨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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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7-2이라 한 記事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關係는 장차 次節에서 表示하려는 바와 같이 高麗의 顯宗 以後 仁宗에 이르기까지 兩國 貿易이 旺盛케 된 政治的 動因으로서 吾人의 興味를 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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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7-3다시 南宋에 이르러서는 遼의 代로 新興金國으로 因하야 一層 壓迫되고 있었음으로 宋의 聯麗制金策은 자못 緊張味를 띄우고 있었다. 그리하야 때로는 高麗에 親和使를 보내여 麗金 兩國의 離間에 努力하였으며 그뿐만 아니라 所謂 靖康之難의 結果로 金人에게 捕虜된 徽宗(高宗의 父) 鄭后(高宗의 母) 欽宗(高宗의 兄) 等의 奪還計劃으로서 熱烈히 高麗에 向하야 假道를 請하던 것은 東洋國際史上의 一塲의 劇的 情況이였다. 高麗에 길을 빌리는 것이 金에의 捷徑이며 또 側面으로부터 不意에 金國에 突入하야 그들의 目的을 達하려던 것이다. 그러나 宋의 이러한 要求는 國防上 見地로 보아 또는 當時 國際情勢로 보와 到底히 高麗의 聽許할 배가 되지 못한 것으로서 이 假道問題를 싸고 도는 南宋의 聯麗運動 漸次 焦燥한 氣勢를 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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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7-4이 時期에 있어 宋商의 政治的 活動이 上述한 神宗 時의 例로 보와도 一仔 顯著하게 될 것은 또한 自然의 勢로서 兩國 貿易 發展에 重大한 意義를 가진 것으로 믿는다. 高麗史卷十五 仁宗 六年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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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7-5

三月丁亥 宋綱首蔡世章 賷高宗即詔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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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7-6라 한 것으로 보면 綱은 元來 物貨量數의 稱으로서 綱首(또는 都綱)는 買辦 또는 商人 頭目의 稱이니 南宋 高宗의 對高麗 外交에도 먼저 商人의 斡旋이 있었음을 알지며 원문주7▶그後에도 宋帝(高宗‧孝宗)의 密詔와 國際情報가 자조 宋商을 通하야 高麗에 報達케 되였다.[7] 이와 같은 南宋의 親麗政策은 그의 貿易獎勵策과 아울러 兩國貿易에 掉尾의 盛況을 이르켯▶P8-1던 것이니 毅宗 時(南宋 高宗‧孝宗時代에 當함)에 宋商의 渡來가 約 千六百七十餘名의 數字를 뵈인 것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次節 表二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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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8-2그러나 北宋 神宗 以來로 南宋 初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麗制遼金策이 언제나 高麗의 中立態度로 말미암어 失敗에 도라갔던 것이니 이에 따러 南宋의 高麗에 對한 感情이 漸次로 踈隔이 되였다, 그리하야 高宗 時代에 발서 宋臣 中에는 高麗와의 通交를 끄려 하며 高麗의 態度를 疑心하는 者가, 나타나게 되였으니 宋史‧高麗傳에 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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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8-3

高宗建炎三年八月 上謂輔臣曰 上皇遣內臣宮女各二人 隨高麗貢使來 朕聞之 喜悲交集 呂願浩曰 此必金人之意 不然高麗必不敢 安知非窺我虛實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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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8-4라 한 것을 비롯하야 또 仝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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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8-5

高宗紹興元年十月 高麗將入貢 禮部侍郎柳約言 四明殘破之餘 荒蕪單弱 恐起戎心 宜屯重兵 以俟其至……三十二年三月 高麗綱首徐德榮詣明州言 本國欲遣賀使 守臣韓仲通以聞 殿中侍御史吳芾奏曰 高麗與金人接壤 昔稚圭之來 朝廷懼其爲間(○○○○) 亟遣還○紹興 六年에 高麗使 金稚圭가 건너가매 宋人이 疑惑을 품고 明州에서 酬應하야 還法케 하였음 今兩國○宋金交兵 德榮之請 得無可疑(○○○○)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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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8-6이라 하였다. 元來 南宋의 聯麗策은 高麗의 自衛政策上 容許치 못할 것이니 隔海殘弱의 南宋과 結托하야 宋의 代로 強鄰 金國의 銳鋒을 받을 愚策은 高麗로서 取할 바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南宋은 일로 因하야 高麗에 不滿을 품고 高 麗使에 對하야서도 金의 間諜的 役割을 함이 안닌가 誤解하야 極度의 畏忌心으로써 敬遠策을 쓴 結果 麗宋의 公的 通交가 漸次 杜絶케 되였으며本節 末附 表一 參照 그의 影響은 다시 兩國民間 貿易上에 나타나게 된 것이니 宋史•高麗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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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8-7

寧宗慶元間 詔禁商人持銅錢入高麗 蓋絶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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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9-1라 한 것으로 그의 事情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麗宋 兩國의 政治的 關係의 踈隔과 他面 南宋勢力의 衰頹로 말미암어 高麗에서의 朱商의 活動도 漸漸 殘退의 길을 밟던 것이니 毅宗의 다음 明宗 二十七年間에 宋商의 出入이 約 三回에 不過하였으며 神宗 七年間에는 全無 熙宗 七年間에 겨우 一回에 지내지 못하고 高宗 四十六年間에 二回 다음 元宗 忠烈王 時에는 北方에서 勃興한 蒙古人이 이미 世界的 大帝國의 建設工作을 거의 成就하였으며 南宋은 겨우 半壁山河의 江南一隅에서 殘喘을 僅保하고 있던 때임으로 그의 國際貿易도 더욱 衰殘할 것은 說明을 기다리지 아니하는 바어니와 特히 元宗時代에 보이는 唯一의 宋商에 關한 記事로서 高麗史卷二十五 元宗 元年 十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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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9-2

宋商陳文廣等 不堪大府寺內侍院侵奪 道訴金仁俊曰 不予直而取綾羅絲絹六千餘匹 我等將垂槖而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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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9-3라 하였다. 이는 六千餘 匹이라는 多額의 綾羅絲絹을 大府寺‧內侍院에게 侵奪을 當한 宋商이 當時의 權力者인 金仁俊에게 道上에서 呼訴한 것이니 一時에 六千餘 匹의 綾絹이 侵奪되였다는 것은 當時 宋商의 貿易의 規模가 얼마나 컷슴을 알 수 있으며 元來 國際貿易은 本國勢力을 背景으로 하는 것인 만큼 當時 宋商의 그와 같은 外侮를 입은 것도 南宋國勢 衰頹의 餘波일지니 이 또한 麗宋貿易의 衰亂을 말하는 記事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음 忠烈王 四年에 宋商馬嘩의 渡來가 그의 最後的의 것이니 이때에는 南宋이 서 滅亡의 구렁에 빠져 있던 것으로서(翌年에 名實共히 滅亡)「宋商人馬嘩 獻方物 賜宴內庭」高麗史 卷二十八 忠烈王 四年條이라 한 것은 긴 歷史를 가진 麗宋貿易을 紀念하는 最後의 終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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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9-4다음 兩國 使節의 往來 狀況을 各 時代에 나누워 表로 써 提示하야 우에서 論述한 國交·貿易의 相關關係를 考察하는 데에 便宜를 圖하고 아울러 下節에서 論할 朝貢貿易의 狀況을 槪觀하는 데에 一助를 삼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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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1表一主로 高麗史 及 宋史에 依據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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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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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1-1
時代 高麗使의 渡宋回數 宋使의 渡來回數 備考
高麗 光宗
十三年 以後 十四年間
景宗
六年間
北宋 太宗時代에 當함
成宗
十六年間
仝上
成宗
十六年間
仝上
穆宗
十二年間
顯宗
二十二年間
遼의 勢力이 미처옴
德宗
三年間
靖宗
十二年間
文宗
三十六年間
北宋 神宗 時에 當함 宋商 黃愼이 二回나 宋廷으로부터 派送됨
順宗
一年間
宣宗
十一年間
獻宗
一年間
肅宗
十年間
睿宗
十七年間
北宋 徽宗時에 當함
仁宗
二十四年間
北宋 徽宗時에 當함
毅宗
二十四年間
宋廷으로부터商人의派送이 있었음
明宗
二十七年間
仝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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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1-2右表의 宋使 渡來回數에는 宋廷에서 派送한 商人은 算入치 아니하였음






















본문3: 여송 상인의 활동 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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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무역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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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무역품의 종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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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6: 여송의 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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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7: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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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1. 高麗史 卷三 成宗 十三年 六月條에 「遣元郁如宋乞師 以報前年之役(○成宗 十二年 契丹蕭遜寧侵入) 宋以北鄙甫寧 不宜輕動 但優禮遺還 自是 與宋絕云」
  2. 本 學報 第一, 二卷 所載 拙槁 「羅末海上 發展에 就하야」.
  3. 仝上 拙稿 參照.
  4. 宋·李心傳, 建炎以來繫年要錄 卷 百八十三 紹興 二十九年 九月條.
  5. 宋史 卷 百八十六, 互市舶法條 及 仝書 卷 百六十七 職官志 參照. 特히 專賣에 關하야는 宋史·互市舶法條에 「詔諸蕃香藥寶貨 至廣州交阯兩浙泉州 非出官庫者 無得私相貿易 其後及詔 自今 惟 珠貝玳瑁犀象鑌鐵皮珊瑚瑪瑙乳香禁權外 他藥官市之餘 聽市於市云」
  6. 高麗史 卷八 文宗 二十二, 四年條 宋史 卷四百八十七 高麗傳 東坡全集 卷三十四 奏議三十五論 高麗買書利害劄子.
  7. 宋代의 商人은 海外 貿易을 行하는 一面에 國書의 委托 傳達 及 間諜的 活動의 例가 許多한 것이니 우선 그의 高麗에서의 멧기지 例를 드러보면 高麗史 卷十六, 仁宗 九年條에 「宋都綱卓榮來奏云 少師劉光世 遣將黃夜叉 將大兵過江 擊破金人 横尸蔽野 (中畧)皆言 遣一介行李告奏便」 仝 十六年條에 「宋商吳迪等六十三人 持宋明州牒 來報徽宗皇帝及寧德皇后鄭氏崩于金」 仝書 卷十八 毅宗 十六年條에 「宋都綱侯林等四十三人來 明州牒報云 宋朝與金 舉兵相戰 至今者大捷(中略)盖宋人欲示威我朝 未必盡如其言」 仝 十七年條에 「宋都綱徐德榮等來 獻孔雀及珍玩之物 德榮 又以宋帝密旨 獻金銀合二副 盛以沈香」 宋史·高麗傳에 「〔紹興〕三十二年 三月 高麗綱首徐德榮 詣明州言 本國欲遺賀使 守臣韓仲通以開云云」 또 高麗人 가운데에는 當時 本國에 出入하던 宋商과 結托하야 賣國的 陰謀를 꾀하던 일이 있었나니 高麗史 卷十七 毅宗 二年條에 「冬十月(?宁)卯 初親袷于大廟 赦 深 智之用 與宋人張喆同謀 深變名 稱東方昕 通書宋大師秦檜 以爲 若以伐金爲名 假道高麗 我爲內應則高麗可圖也 之用 以其書及柳公植家藏高麗地圖 附宋商彭寅 以獻秦檜 至是 宋都綱林大有 得書及圖 來告 囚喆深之用于獄 鞠之皆伏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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