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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택住宅에 대對하야와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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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택<sup>住宅</sup>에 대<sup>對</sup>하야와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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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던 박동진의 건축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적 성격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현대건축의 추세가 포함된 동아일보 연재 우리 주택에 대하야<sup><ref>글은 네 장으로 구성됐는데, 1장인 ‘생활<sup>生活</sup>과 주택<sup>住宅<sup>과’는 서론으로서 급변하는 시대상을 논하고, 본론인 3장 ‘우리 집<sup>住家</sup>의 <sup>現狀</sup>’및 4장‘우리의 새 집<sup>住家</sup>’는 각각 재래 주가에 대한 비판과 개선책을 담는다. 2장 현대건축의 추세는 전체 연재의 3∼5회 사흘 분(1931.3.17∼19)에 걸쳐 있으며, 자체로서 다섯 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아르누보와 제체션을 중심으로 도입부를 서술한 후, 당시 건축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네 개 국가인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건축 경향에 대해 차례로 정보를 제공하는 형식이다</ref></sup>(1931.3.14∼4.5; 23일 중 16일)에서도 물론이다.<ref>박동진의 이 같은 시대적 한계 및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그가 출판한 글에서도 확인되는데, 실제 디자인에서보다 개혁적 입장이 훨씬 뚜렷하다.</ref> 이 글은 재래 주택의 현황을 건물배치, 평면, 외관 등으로 나눠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며 합리적 개선 방안을 논한다. 그 논지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합리화·국제화돼가는 ‘현대건축의 추세’인 셈인데, 1회차 글에서 “현대에 있어서 우리 재래 생활방식의 가치는 거의 0이라고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상당히 과격한 견해를 밝혔다. 이런 개혁적 입장은 같은 해 12월 신동아<sup>新東亞</sup>에 출판한 곡선<sup>曲線</sup>과 건축미<sup>建築美</sup>에서 과학적·경제적 관점에서 필연적이지 않은 곡선을 거부하는 시각으로 나타났고, 10년후에 나온 춘추<sup>春秋</sup>의 북한주택개혁이론<sup>朝鮮住宅改革論</sup>(1941.8)은 우리주택에 대하야 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온돌폐지를 포함해 재래 주택의 완전한 개혁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갔다. 후자는 일제의 식민사관마저도 노출하는 한편으로, 현대건축의 흐름을 적극 수용하려는 그의 일관된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 박동진은‘건축’을 ‘예술’로 인식했거나 최소한 ‘예술로서의 건축’을 서술 대상으로 했다. 그러는 가운데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주류 경향을 적극 긍정한다. 주류는 장식과 주관의 표현성을 극복한 합리주의와 기능주의였으며, 공통의 좌표는 결국 국제주의였다고 할 수있다. 한편,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시작을 19세기 말의 아르누보와 제체션에서 보되, 바그너야말로 이후 건축운동의 출발점이라 인식했다. 박동진은‘예술’이 ‘필요’의 결과라는 바그너의 모토를 핵심 이념으로 인용했다. 박동진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은 아무래도 아직 파편적이고 피상적이다.<ref>박동진은 우리 주택에 대하야 글 첫머리에 이미 자신이 ‘전문적’ 논의를 의도하지 않음을 전제하긴 했다. 세계건축의 신경향을 보임으로써 자기 주택개량론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현대건축의 추세만을 떼어놓고 볼 때 자체로서 의의가 큼에도 불구하고 인식의 시차와 한계가 노출됨은 결국 박동진이 처했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제약의 발로라 할 수 있다.</ref> 박동진의 현대건축의 추세는 자기 주택개량론을 위한 일간지 연재물의 한 챕터로 삽입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약된 지면 내의 개괄적 서술만이 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바는 1931년의 이 글이 조선 건축계의 서양 근대건축에 관한 사실상의 첫 텍스트여서 아직 그 지식이 충분히 구비되지 못한 때 작성됐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1931년 당시의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 조선 건축계의 드문 자료라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크다. 더구나 당대 조선의 건축계와 대중에 나름의 신선한 지식을 제공했다고 판단되는데, 이로써 박동진은 최신 건축과 관련한 조선인 전문가로 각인됐을 것이다. 글의 의도처럼 박동진이 자기 주택개량론을 뒷받침하면서 말이다. 박동진의 현대건축의 추세 (1931.3)은 1930년대 조선의 건축계에서 나온,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관한 한국 최초의 역사서술적 성격의 글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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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던 박동진의 건축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적 성격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현대건축의 추세가 포함된 동아일보 연재 우리 주택에 대하야<sup><ref>글은 네 장으로 구성됐는데, 1장인 ‘생활<sup>生活</sup>과 주택<sup>住宅<sup>과’는 서론으로서 급변하는 시대상을 논하고, 본론인 3장 ‘우리 집<sup>住家</sup>의 <sup>現狀</sup>’및 4장‘우리의 새 집<sup>住家</sup>’는 각각 재래 주가에 대한 비판과 개선책을 담는다. 2장 현대건축의 추세는 전체 연재의 3∼5회 사흘 분(1931.3.17∼19)에 걸쳐 있으며, 자체로서 다섯 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아르누보와 제체션을 중심으로 도입부를 서술한 후, 당시 건축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네 개 국가인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건축 경향에 대해 차례로 정보를 제공하는 형식이다</ref></sup>(1931.3.14∼4.5; 23일 중 16일)에서도 물론이다.<ref>박동진의 이 같은 시대적 한계 및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그가 출판한 글에서도 확인되는데, 실제 디자인에서보다 개혁적 입장이 훨씬 뚜렷하다.</ref> 이 글은 재래 주택의 현황을 건물배치, 평면, 외관 등으로 나눠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며 합리적 개선 방안을 논한다. 그 논지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합리화·국제화돼가는 ‘현대건축의 추세’인 셈인데, 1회차 글에서 “현대에 있어서 우리 재래 생활방식의 가치는 거의 0이라고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상당히 과격한 견해를 밝혔다. 이런 개혁적 입장은 같은 해 12월 신동아<sup>新東亞</sup>에 출판한 곡선<sup>曲線</sup>과 건축미<sup>建築美</sup>에서 과학적·경제적 관점에서 필연적이지 않은 곡선을 거부하는 시각으로 나타났고, 10년후에 나온 춘추<sup>春秋</sup>의 북한주택개혁이론<sup>朝鮮住宅改革論</sup>(1941.8)은 우리주택에 대하야 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온돌폐지를 포함해 재래 주택의 완전한 개혁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갔다. 후자는 일제의 식민사관마저도 노출하는 한편으로, 현대건축의 흐름을 적극 수용하려는 그의 일관된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 박동진은‘건축’을 ‘예술’로 인식했거나 최소한 ‘예술로서의 건축’을 서술 대상으로 했다. 그러는 가운데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주류 경향을 적극 긍정한다. 주류는 장식과 주관의 표현성을 극복한 합리주의와 기능주의였으며, 공통의 좌표는 결국 국제주의였다고 할 수있다. 한편,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시작을 19세기 말의 아르누보와 제체션에서 보되, 바그너야말로 이후 건축운동의 출발점이라 인식했다. 박동진은‘예술’이 ‘필요’의 결과라는 바그너의 모토를 핵심 이념으로 인용했다. 박동진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은 아무래도 아직 파편적이고 피상적이다.<ref>박동진은 우리 주택에 대하야 글 첫머리에 이미 자신이 ‘전문적’ 논의를 의도하지 않음을 전제하긴 했다. 세계건축의 신경향을 보임으로써 자기 주택개량론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현대건축의 추세만을 떼어놓고 볼 때 자체로서 의의가 큼에도 불구하고 인식의 시차와 한계가 노출됨은 결국 박동진이 처했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제약의 발로라 할 수 있다.</ref> 박동진의 현대건축의 추세는 자기 주택개량론을 위한 일간지 연재물의 한 챕터로 삽입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약된 지면 내의 개괄적 서술만이 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바는 1931년의 이 글이 조선 건축계의 서양 근대건축에 관한 사실상의 첫 텍스트여서 아직 그 지식이 충분히 구비되지 못한 때 작성됐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1931년 당시의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 조선 건축계의 드문 자료라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크다. 더구나 당대 조선의 건축계와 대중에 나름의 신선한 지식을 제공했다고 판단되는데, 이로써 박동진은 최신 건축과 관련한 조선인 전문가로 각인됐을 것이다. 글의 의도처럼 박동진이 자기 주택개량론을 뒷받침하면서 말이다. 박동진의 현대건축의 추세 (1931.3)은 1930년대 조선의 건축계에서 나온,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관한 한국 최초의 역사서술적 성격의 글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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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8일 (금) 13:0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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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朴東鎭)
출처 :
 
한글명 박동진 한자명 朴東鎭 영문명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899년 몰년 1981년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 전공 건축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한국의 대표적 1세대 건축가 중 한 명이다.[1] 석조건축 혹은 고딕부흥식의 어휘를 자기 브랜드로 나타냈으며, 기능주의 건축을 추구했다.[2] 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던 박동진의 건축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적 성격이 특징적이다.[3]


생애


출생 및 교육

평안북도 정주 출생이다.[4] 1915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에 입학하였으나, 재학 중 3·1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재입학하여 1924년에 졸업하였다.[5] 졸업 후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수(建築技手)로 들어가 많은 업무를 담당하여 기량을 닦았으며, 1936년 기사(技師)로 승진하였다.[6] 이곳에서 그는 대전지방법원 등 몇몇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전하지만 그의 역할을 논하기에는 한계가 크다.[7] 이 기간 그에게 더 중요한 프로젝트는 보성전문 학교 본관(1933∼34)과 도서관(1935∼37)으로 대표되는 여러 개인 작업이었다.[8]


조선총독부 시절

조선총독부에서 15년을 근무하며 근대적 건축술을 익혔다.[9] 관직에 있을 때인 1932년경부터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본관과 도서관의 설계를 시작으로 많은 교육시설을 설계하였는데, 이때의 대표작으로는 조선일보사옥(1933∼1934)·아서원(1934)·오산중학교(1935∼1936)·중앙중학교(1936∼1937)·명신중학교(1937∼1939)·대전지방법원(1939) 등이 있다.[10]


조선총독부 사임 후

1940년 총독부 사임 후 태평건물주식회사, 박동진건축연구소, 기신건축연구소를 설립해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명륜동 자택(1943), 영락교회(1946∼50), 남대문교회(1955∼69) 등에 석조건축 혹은 고딕부흥식의 어휘를 자기 브랜드로 나타냈다.[11] 하지만 이런 중에도 그는 조선일보사(1934∼35), 고려대학교 여학생회관(1959) 등을 통해 근대 기능주의로의 전이를 시사했고, 고려대학교 과학관(1959∼60)과 이공대학 본관(1957∼64) 등에서 전형적 기능주의 건축을 보여줬다.[12]


광복 후

광복 후 1950년 태평건물주식회사 사장직을 사임하고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 청구대학 건축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53년 박동진건축연구소를 개설하였다.[13] 1960년 기신건축연구소(紀新建築硏究所)로 발전시켜 계속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미국건축가협회의 초청으로 1964년 4월부터 1년간 미국 및 유럽의 건축계를 시찰하고 돌아왔다.[14]





연구


우리 주택住宅에 대하야와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던 박동진의 건축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적 성격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현대건축의 추세가 포함된 동아일보 연재 우리 주택에 대하야[15](1931.3.14∼4.5; 23일 중 16일)에서도 물론이다.[16] 이 글은 재래 주택의 현황을 건물배치, 평면, 외관 등으로 나눠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며 합리적 개선 방안을 논한다. 그 논지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합리화·국제화돼가는 ‘현대건축의 추세’인 셈인데, 1회차 글에서 “현대에 있어서 우리 재래 생활방식의 가치는 거의 0이라고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상당히 과격한 견해를 밝혔다. 이런 개혁적 입장은 같은 해 12월 신동아新東亞에 출판한 곡선曲線과 건축미建築美에서 과학적·경제적 관점에서 필연적이지 않은 곡선을 거부하는 시각으로 나타났고, 10년후에 나온 춘추春秋의 북한주택개혁이론朝鮮住宅改革論(1941.8)은 우리주택에 대하야 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온돌폐지를 포함해 재래 주택의 완전한 개혁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갔다. 후자는 일제의 식민사관마저도 노출하는 한편으로, 현대건축의 흐름을 적극 수용하려는 그의 일관된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 박동진은‘건축’을 ‘예술’로 인식했거나 최소한 ‘예술로서의 건축’을 서술 대상으로 했다. 그러는 가운데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주류 경향을 적극 긍정한다. 주류는 장식과 주관의 표현성을 극복한 합리주의와 기능주의였으며, 공통의 좌표는 결국 국제주의였다고 할 수있다. 한편,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시작을 19세기 말의 아르누보와 제체션에서 보되, 바그너야말로 이후 건축운동의 출발점이라 인식했다. 박동진은‘예술’이 ‘필요’의 결과라는 바그너의 모토를 핵심 이념으로 인용했다. 박동진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은 아무래도 아직 파편적이고 피상적이다.[17] 박동진의 현대건축의 추세는 자기 주택개량론을 위한 일간지 연재물의 한 챕터로 삽입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약된 지면 내의 개괄적 서술만이 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바는 1931년의 이 글이 조선 건축계의 서양 근대건축에 관한 사실상의 첫 텍스트여서 아직 그 지식이 충분히 구비되지 못한 때 작성됐다는 점일 것이다. 다만 1931년 당시의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 조선 건축계의 드문 자료라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크다. 더구나 당대 조선의 건축계와 대중에 나름의 신선한 지식을 제공했다고 판단되는데, 이로써 박동진은 최신 건축과 관련한 조선인 전문가로 각인됐을 것이다. 글의 의도처럼 박동진이 자기 주택개량론을 뒷받침하면서 말이다. 박동진의 현대건축의 추세 (1931.3)은 1930년대 조선의 건축계에서 나온,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관한 한국 최초의 역사서술적 성격의 글로 판단된다.


작품리스트

작품 연도
보성전문학교 본관 (현 고려대 본관)普成全文學校本館(現 高麗大本館)[18] 1933~34년
조선일보사 사옥 (없음, 코리아나 호텔 자리)朝鮮日 報社社屋(無, 코리아나 호텔 자리)[19] 1934~35년
아서원 (현 없음)雅敘園(現無)[20] 1934년
보성전문학교 도서관普成全文學校圖書館[21] 1935~37년
오산중학교 본관 (평북 정주)五山中學校本館(平北定州)[22] 1935년
오산중학교 대강당五山中學校大講堂[23] 1936년
오산중학교 과학관五山中學校科學館[24] 1936년
중앙중학교 본관中央中學校本館[25] 1936년
중앙중학교 대강당中央中學校大講堂[26] 1937년
명신중학교 본관 (재령)明新中學校教本館(載寧)[27] 1937년
명신중학교 대강당明新中學校大講堂[28] 1938년
명신중학교 기숙사明新中學校寄宿舎[29] 1939년
대전지방법원 청사大田地方法院廳舍[30] 1939년
평안공업학교 본관 (2층)平安工業學校本館[31] 1940년
보성중학교 별관 교실普成中學校別館教室[32] 1940년
평안공업학교 대강당平安工業學校大講堂[33] 1941년
경방 남천 공장 (남천)京紡南川工場(南川)[34] 1942년
이성봉 소아과 의원李聖鳳小兒科醫院[35] 1942년
백인제 외과 수술실白麟濟外手術室[36] 1944년
영락교회榮樂教會[37] 1948년
남대문교회南大門教會[38] 1954년
고려대학교 준공 건물高麗大學校早今建物[39] 1955~65년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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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2.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4.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5.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6.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7.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8.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9.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10.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11.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12.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13.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15. 글은 네 장으로 구성됐는데, 1장인 ‘생활生活과 주택住宅과’는 서론으로서 급변하는 시대상을 논하고, 본론인 3장 ‘우리 집住家現狀’및 4장‘우리의 새 집住家’는 각각 재래 주가에 대한 비판과 개선책을 담는다. 2장 현대건축의 추세는 전체 연재의 3∼5회 사흘 분(1931.3.17∼19)에 걸쳐 있으며, 자체로서 다섯 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아르누보와 제체션을 중심으로 도입부를 서술한 후, 당시 건축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네 개 국가인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건축 경향에 대해 차례로 정보를 제공하는 형식이다
  16. 박동진의 이 같은 시대적 한계 및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그가 출판한 글에서도 확인되는데, 실제 디자인에서보다 개혁적 입장이 훨씬 뚜렷하다.
  17. 박동진은 우리 주택에 대하야 글 첫머리에 이미 자신이 ‘전문적’ 논의를 의도하지 않음을 전제하긴 했다. 세계건축의 신경향을 보임으로써 자기 주택개량론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현대건축의 추세만을 떼어놓고 볼 때 자체로서 의의가 큼에도 불구하고 인식의 시차와 한계가 노출됨은 결국 박동진이 처했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제약의 발로라 할 수 있다.
  18.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19.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0.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1.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2.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3.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4.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5.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6.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7.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8.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9.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0.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1.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2.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3.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4.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5.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6.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7.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8.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9.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