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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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朴東鎭)인물
출처 :
 
한글명 박동진인물 한자명 朴東鎭 영문명 Park Dong-jin[1]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899년 몰년 1981년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 전공 건축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박동진인물은 한국의 대표적 1세대 건축가 중 한 명이다.[2] 그의 작품은 근대 합리주의적인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석조의 고딕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3] 주요작품으로는 보성전문학교 본관(1933∼1934)·평안공업학교 본관(1940)·영락교회(1946)·경성여자상업학교 별관(1947)·남대문교회(1955)·고려대학교농과대학 본관(1955) 및 서관(1956) 등이 있다.[4] 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던 박동진인물의 건축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적 성격이 특징적이다.[5]


생애


출생 및 배경

박동진인물은 1899년 4월 29일 정주에서 출생하였다.[6] 1915년 3월 정주定州 오산고등보통학교五山高等普通學校기관를 졸업하고 1917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기관 건축과에 입학하였다.[7] 이 당시 건축학을 택하는 우리들의 선배들이 거의 그러하였듯이 박동진인물도 건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없이 상경上京하였다가 선배들의 충고가 진로결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8] 그는 본래 선비 집안의 출신이었으며, 중학교 졸업 후 문학을 선택하여 일본의 대학에 유학을 갈 예정으로 입학 원서를 내 놓고 일본으로 가는 도중渡日途中에 서울을 들렀다.[9] 서울에서 만난 선배들에게 도일유학 준비중이며, 고학을 해서라도 문학을 공부하려 한다고 상의하자, 선배들은 이제부터는 기술 전공이 시대적 요청이며 평소에 미술을 좋아했으니 서울에 새로 생긴 경성공업전문학교기관의 건축과에 진학해 보라는 충고를 받았다 한다.[10] 우선 시험을 보고 합격했으나, 원래 계획했던 것과 워낙 먼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어 고민하다가 주위의 권유로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11] 하지만, 건축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건축과를 졸업하고 나면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하였고 다만, 이걸 공부하면 장래에 집 짓는 공인工人이 된다는 막연한 추측만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12] 다만 그를 건축과에 지망하도록 하는 데에 유일하게 큰 힘으로 작용하였던 것은 중학시절에 배웠던 역사에서 미켈란젤로도 미술가인 동시에 위대한 건축가라는 기억이었다.[13] 하지만, 건축가가 되어서 모든 건물을 설계도 하고 시공에 참여도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14] 그의 학창시절의 마지막 해가 되었어야 할 1919년에 3.1독립운동사건이 일어나고, 그는 이 운동에 가담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앞장섰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반년을 지냈고, 2년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출감하였다.[15] 이어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로 방랑 길을 떠났다가 1년 반이 흐른 후, 배움을 다시 시작하여 마무리 짓는 것이 우선 할 일이라 생각하고 귀국하여 경성고등공업학교기관[16]에 재입학하여 건축과를 다시 다니게 되었다.[17] 이렇게 마지막 1년을 보낸 후 1926년 3월 20일에 졸업을 하였다.[18][19]


조선총독부 시절

박동진인물은 졸업 후, 조선총독부기관 회계과의 기수로 취업하게 되었다.[20] 1936년 4월에 기사로 승진하고 1938년 4월에 조선총독부기관를 사직할 때까지 그는 실질적인 건축수업을 조선총독부기관에서 하였다고 볼 수 있다.[21] 그 사이 총독부 조직의 일원으로서 많은 프로젝트에 관여하였을 것이나, 이 기간 중에 박동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본관과 도서관을 설계한 것을 비롯하여 당시의 한인사회의 건축전문인으로서 과외의 일을 통하여 민족을 위해 이바지했다고 여겨진다.[22] 조선총독부기관에 재직하고 있던 1938년 이전에 관여하였던 작품이 그 이후 시기의 (광복전 것만 중심으로 살펴 본다면) 작품보다 많은데, 그의 작품은 민족교육을 실현하던 학교건축이 대부분이며 더구나 고향을 중심으로 한 지연과 한인들 사이의 연고에 의해 연결된 일들을 주로 하였다.[23]


조선총독부 사임 후

1938년 5월, 태평건물주식회사기관를 창립하여 건설사업에 손을 대었다.[24] 사업적인 수완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근면 성실하게 일하여 경제적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25] 여기에서 그는 고향 정주에 토지를 수만 평 구입하여 노후에 전원 생활을 계획하였다고 한다.[26][27]


광복 후

광복 다음해인 1946년 5월에 박동진건축연구소를 자영하고, 1951년 3월 부터는 대구에서 개교한 청구대학 토건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하였다.[28][29] 1960년 기신건축연구소(紀新建築硏究所)로 발전시켜 계속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미국건축가협회의 초청으로 1964년 4월부터 1년간 미국 및 유럽의 건축계를 시찰하고 돌아왔다.[30][31] 1970년대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업무를 후배들에게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32] 1975년에는 대한건축학회로부터 작품상을 수상받았고, 80세 때인 1979년 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1980년 5월 30일 향년 81세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타계하였다.[33]





연구


우리 주택住宅에 대하야원고와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던 박동진인물의 건축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적 성격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34] 현대건축의 추세가 포함된 동아일보기관 연재 우리 주택에 대하야원고[35][36](1931.3.14∼4.5; 23일 중 16일)에서도 물론이다.[37][38] 이 글은 재래 주택의 현황을 건물배치, 평면, 외관 등으로 나눠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며 합리적 개선 방안을 논한다.[39] 그 논지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합리화·국제화돼가는 ‘현대건축의 추세’인 셈인데, 1회차 글에서 “현대에 있어서 우리 재래 생활방식의 가치는 거의 0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상당히 과격한 견해를 밝혔다.[40] 이런 개혁적 입장은 같은 해 12월 신동아新東亞에 출판한 곡선曲線과 건축미建築美에서 과학적·경제적 관점에서 필연적이지 않은 곡선을 거부하는 시각으로 나타났고, 10년후에 나온 춘추春秋의 북한주택개혁이론朝鮮住宅改革論(1941.8)은 우리 주택에 대하야원고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온돌폐지를 포함해 재래 주택의 완전한 개혁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갔다.[41] 후자는 일제의 식민사관마저도 노출하는 한편으로, 현대건축의 흐름을 적극 수용하려는 그의 일관된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42]

박동진인물은‘건축’을 ‘예술’로 인식했거나 최소한 ‘예술로서의 건축’을 서술 대상으로 했다.[43] 그러는 가운데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주류 경향을 적극 긍정한다.[44] 주류는 장식과 주관의 표현성을 극복한 합리주의와 기능주의였으며, 공통의 좌표는 결국 국제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45] 한편,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시작을 19세기 말의 아르누보와 제체션에서 보되, 바그너야말로 이후 건축운동의 출발점이라 인식했다.[46] 또한 박동진인물은 구성파의 속성으로 “사회성, 산업주의, 예술공업의 융합, 기계화의 물질적 촌요 숭배, 구조욕, 대규모에의 갈앙”을 언급하며 이것이 “콘크리트・철・유리 같은 재료를 물리학에 근거해 기하학적 곡선과 입체로 다룬 대규모 극장・무전탑・작업소로 나타났고, 이는 오직 필요나 충분에만 근거한 매우 극단적인 예술과 공업 간의 융합이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서술한다. [47] 이러한 측면에서, 박동진인물은 구성파의 “구축형성의 진리”와 “기능주의”에서 “신건축양식”과 “예술로서의 건축”의 가능성을 발견했으며, 이를 구성파의 “이상理想을 향한 진전”으로 여겼다.[48]

박동진인물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은 아무래도 아직 파편적이고 피상적인데,[49] 박동진인물의 현대건축의 추세는 자기 주택개량론을 위한 일간지 연재물의 한 챕터로 삽입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약된 지면 내의 개괄적 서술만이 가능한 조건이었다.[50][51] 그러나 더 중요한 바는 1931년의 이 글이 조선 건축계의 서양 근대건축에 관한 사실상의 첫 텍스트여서 아직 그 지식이 충분히 구비되지 못한 때 작성됐다는 점일 것이다.[52]1931년 당시의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 조선 건축계의 드문 자료라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크다.[53] 더구나 당대 조선의 건축계와 대중에 나름의 신선한 지식을 제공했다고 판단되는데, 이로써 박동진인물은 최신 건축과 관련한 조선인 전문가로 각인됐을 것이다.[54] 글의 의도처럼 박동진인물이 자기 주택개량론을 뒷받침하면서 말이다.[55] 박동진인물의 현대건축의 추세 (1931.3)은 1930년대 조선의 건축계에서 나온,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관한 한국 최초의 역사서술적 성격의 글로 판단된다.[56]


건축관

박동진인물의 작품은 조선일보사옥(1935년)과 같이 모던한 건물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석조건축물이었다.[57] 양식적으로도 보성전문학교 본관에서부터 비롯된 네오 고딕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58] 고향인 평북 정주의 오산중학교 각교사와 보성전문과 같은 재단의 중앙중학교의 새로운 본관[59]에서도 일정한 스타일의 설계안들이 탄생하였다.[60] 이러한 경향의 건축물들은 광복 후에도 계속되어 영락교회, 남대문교회에서 그의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61] 그리고 그의 이러한 작품 경향, 특히 학교건축에서 고딕양식의 석조건축이라는 공식이 꽤나 오랫동안 이 나라의 교육기관의 건축문화를 이끌었다.[62] 광복전후에 세워지는 학교건물중, 일본계의 관립학교들은 빨간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였으나, 민족 자본으로 세워지는 학교들은 석조로 세워지는 것들이 많았음은 보성전문과 그 설계자 박동진인물의 영향이 상당부분 있으리라 생각한다.[63]


작품리스트

작품 연도
보성전문학교 본관 (현 고려대 본관)普成全文學校本館(現 高麗大本館)[64] 1933~34년
조선일보사 사옥 (없음, 코리아나 호텔 자리)朝鮮日 報社社屋(無, 코리아나 호텔 자리)[65] 1934~35년
아서원 (현 없음)雅敘園(現無)[66] 1934년
보성전문학교 도서관普成全文學校圖書館[67] 1935~37년
오산중학교 본관 (평북 정주)五山中學校本館(平北定州)[68] 1935년
오산중학교 대강당五山中學校大講堂[69] 1936년
오산중학교 과학관五山中學校科學館[70] 1936년
중앙중학교 본관中央中學校本館[71] 1936년
중앙중학교 대강당中央中學校大講堂[72] 1937년
명신중학교 본관 (재령)明新中學校教本館(載寧)[73] 1937년
명신중학교 대강당明新中學校大講堂[74] 1938년
명신중학교 기숙사明新中學校寄宿舎[75] 1939년
대전지방법원 청사大田地方法院廳舍[76] 1939년
평안공업학교 본관 (2층)平安工業學校本館[77] 1940년
보성중학교 별관 교실普成中學校別館教室[78] 1940년
평안공업학교 대강당平安工業學校大講堂[79] 1941년
경방 남천 공장 (남천)京紡南川工場(南川)[80] 1942년
이성봉 소아과 의원李聖鳳小兒科醫院[81] 1942년
백인제 외과 수술실白麟濟外手術室[82] 1944년
영락교회榮樂教會[83] 1948년
남대문교회南大門教會[84] 1954년
고려대학교 준공 건물高麗大學校早今建物[85] 1955~65년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박동진 Institution: 경성고등공업학교 A graduates B
Person: 박동진 Institution: 오산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Event: 3.1독립운동 Person: 박동진 A isRelatedTo B
Person: 박동진 Institution: 조선총독부 A worksAt B
Person: 박동진 Article: 우리 주택住宅에 대하야 A isWriterOf B
Person: 박동진 Institution: 태평건물주식회사 A isMemberOf B
Article: 우리 주택住宅에 대하야 Institution: 동아일보 A publisher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 윤일주, "박동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석


  1. 영문명은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을 참고하였다.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0쪽.
  2.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 윤일주, "박동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윤일주, "박동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6.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0쪽.
  7.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8.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9.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10.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11.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12.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13.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14.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15.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16. 경성공업전문학교기관가 조선총독부제학교관제朝鮮總督府制學校官制에 따라 학교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17.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18. 어찌 보면 박길용 보다 1년 늦게 입학하여 경성고등업학교기관를 제2회로 졸업하여 초창기의 졸업생으로서 역할을 해 내었을텐데, 식민지의 청년으로서 핍박과 어려움을 겪다가 드디어 건축계의 일선으로 나서게 되었으며 그때 나이 27세로 순조롭게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면, 경력 8년의 중견 실무자였을 것이다.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1쪽.
  19.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 1996, 80쪽.
  20.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21.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2쪽.
  22.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2쪽.
  23. 이는 공직에 있으면서 단지 돈벌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전문인으로서 민족을 위한 봉사로 행한 일들이라 생각된다.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2쪽.
  24.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2쪽.
  25.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2쪽.
  26. 그러다 1945년 8월, 46세때 광복을 맞았으나 38선 이북에 속해 버린 고향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다시 6.25를 겪으면서 혼란을 겪었다.
  27.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2쪽.
  28. 1950년 태평건물주식회기관사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9.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2쪽.
  30. 1960년대 초에 그는 약 1년간 구미 각국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는데, 국내의 모든 정세가 변해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3쪽.
  31.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32.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3쪽.
  33.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3쪽.
  34.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5. 글은 네 장으로 구성됐는데, 1장인 ‘생활生活과 주택住宅과’는 서론으로서 급변하는 시대상을 논하고, 본론인 3장 ‘우리 집住家現狀’및 4장‘우리의 새 집住家’는 각각 재래 주가에 대한 비판과 개선책을 담고 있고, 2장 현대건축의 추세는 전체 연재의 3∼5회 사흘 분(1931.3.17∼19)에 걸쳐 있으며, 자체로서 다섯 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6. 2장의 구성은 아르누보와 제체션을 중심으로 도입부를 서술한 후, 당시 건축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네 개 국가인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건축 경향에 대해 차례로 정보를 제공하는 형식이다.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7. 박동진의 이 같은 시대적 한계 및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그가 출판한 글에서도 확인되는데, 실제 디자인에서보다 개혁적 입장이 훨씬 뚜렷하다.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8.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9.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40.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41.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42.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43.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44.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45.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46. 박동진인물은 ‘예술’이 ‘필요’의 결과라는 바그너의 모토를 핵심 이념으로 인용했다.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47. 이홍렬, 이경규, 「서구 모더니즘 건축운동을 통해 바라본 일제강점기 가정개량 담론 형성 - 1930년대 고유섭・박동진・박길룡의 관련 동아일보 연재기사 중심으로-」, 『일본근대학연구』 84, 한국일본근대학회, 2024, 82쪽
  48. 이홍렬, 이경규, 「서구 모더니즘 건축운동을 통해 바라본 일제강점기 가정개량 담론 형성 - 1930년대 고유섭・박동진・박길룡의 관련 동아일보 연재기사 중심으로-」, 『일본근대학연구』 84, 한국일본근대학회, 2024, 82쪽
  49. 박동진인물은 세계건축의 신경향을 보임으로써 자기 주택개량론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우리 주택에 대하야원고 글 첫머리에 이미 자신이 ‘전문적’ 논의를 의도하지 않음을 전제하긴 했다.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50. 하지만 현대건축의 추세만을 떼어놓고 볼 때 자체로서 의의가 큼에도 불구하고 인식의 시차와 한계가 노출됨은 결국 박동진인물이 처했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제약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51.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52.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53.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54.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55.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56.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57.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4쪽.
  58.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4쪽.
  59. 구 본관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빨간벽돌 건물이었으나, 화재로 소실된 후 박동진인물설계로 석조건물이 건립되었다.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4쪽.
  60.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4쪽.
  61.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4쪽.
  62.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4쪽.
  63.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4쪽.
  64.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65.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66.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67.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68.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69.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70.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71.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72.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73.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74.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75.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76.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77.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78.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p81쪽.
  79.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80.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81.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82.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83.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84.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
  85.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대한건축사협회, 1996, 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