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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중국 상해에서의 유학 생활과 모스크바행)
(독일 베를린에서의 유학 생활과 항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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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서의 유학 생활과 항일 활동===
 
===독일 베를린에서의 유학 생활과 항일 활동===
1922년 4월 '''{{TagInstitution|[[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ref>『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白林大學”(베를린대학)이라고 지칭한다. 이극로가 입학할 당시 교명은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Friedrich-Wilhelms-Universität, 현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였다.</ref> 철학부에 입학하였다. 『고투사십년』에 따르면 전공을 선택함에 있어 정치학, 경제학을 주과로 삼고 철학·인류학·언어학을 부과로 하여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극로가 작성한 독일어 이력서에는 민족경제학, 법학, 철학, 종족학을 공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f>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289쪽(Kolu Li, “Lebenslauf”);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60쪽.</ref> 이극로는 4년 간 정식 학생으로, 1년 간 연구생으로 대학 생활을 하게 된다.</br>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에서 '''{{TagPerson|[[에리히 해니슈]]}}'''(Erich Haenisch)<ref>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8쪽.</ref>에게 몽골어를 배우다가, 함께 공부하던 독일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틈틈이 알려주게 되었는데 그들의 요청으로 정식으로 1923년 10월 조선어강좌를 창설하게 된다. 이극로는 1926년까지 3년 간 조선어과 강사를 무보수로 맡았으며, 독일, 러시아, 네덜란드인 학생 등이 강좌를 수강했다. 이때 수강생들이 조선어의 철자법 통일과 사전 편찬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의구심을 드러냈는데, 이는 이극로가 조선어 사전 편찬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ref>이극로, 「朝鮮語辭典과 朝鮮人」, 『別乾坤』 4-7, 1929.12; 「玉에서틔골르기 縷心刻骨半生獻身, 한글標準語査定에는 으뜸되는殊勳者 朝鮮語辭典編纂에血汗勞心: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조선일보』, 1937.1.1;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0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8-89쪽.</ref></br>베를린에서 결성된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체 '''{{TagGroup|[[유덕고려학우회]]}}'''에서 이극로는 1923년과 1924년에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ref>홍선표, 「1920년대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7, 2006, 446-447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0쪽.</ref> 유덕고려학우회는 1923년 10월 26일 베를린에서 '''{{TagEvent|[[재독한인대회]]}}'''를 개최하고 ‘'''{{TagArticle|[[한국 내 일본의 유혈 통치]]}}'''’라는 인쇄물을 독일어(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 영어(Japan’s Bloody Rule in Korea)로 배포하였다.<ref>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8-154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쪽.</ref> 글의 내용은 일본의 침략사, 일본 관동대지진과 한인 학살 실상, 한인지지 호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ref>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8-154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쪽.</ref> 글의 하단에 이극로, '''{{TagPerson|[[고일청]]}}''', '''{{TagPerson|[[김준연]]}}'''이 대표로 서명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경우 다음 주소로 찾아오기를 바란다며 이극로의 주소가 적혀 있다.<ref>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9쪽, 151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473쪽.</ref></br>1924년 2월, 이극로는 '''{{TagArticle|[[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라는 본문 32쪽의 책자를 율리우스 지텐펠트(Julius Sittenfeld)사에서 인쇄하여 간행하였다.<ref>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66-196쪽;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한국인물사연구회, 2006, 338-34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4쪽. </ref> 머리말에서 이극로는 “이 작은 책자는 4000년 이상 정치적인 독립과 높은 문화를 누려 왔던 한 민족이 어떻게 처음으로 외세의 지배에 놓였으며 다시 독립을 이루어 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ref>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한국인물사연구회, 2006, 341쪽(Kolu Li, 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ref>라며 일본의 조선 침탈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유럽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간행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다.</br>1927년 2월에는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ref>이극로가 ‘세계약소대회’라고 회고하는 이 대회는 반제국침략주의대연맹이 개최한 ‘Kongresses gegen Koloniale unterdrückung und Imperialismus’(영문 공식 명칭은 International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 국제 반식민압제·제국주의 대회)이다. 이극로, 조준희 옮김, 『고투사십년』, 아라, 2014, 151쪽.</ref>에 황우일, 이의경(이미륵), 김법린, 허헌 등과 함께 참가한다. 이극로는 ‘조선 대표단 결의안’(Resolution der Koreanischen Delegation)을 제출하였다.<ref>「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81쪽.</ref> 또한 한국 대표단은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하여 ‘한국의 문제’라는 자료를 각국의 대표에게 배포하였다.<ref>이정은,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1999, 237쪽; 정규화, 『이미륵 박사 찾아 40년』, 범우, 2012, 71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에서 재인용.</ref> 베를린의 인쇄소 살라드룩운트스타인코프(Saladruck & Steinkopf)에서 인쇄된 이 자료는 앞뒤 표지를 포함하여 12쪽으로 되어 있으며, 본문은 독일어 4쪽, 영어 4쪽으로 구성되어 있다.<ref>이정은,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1999, 237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ref> 표지에는 ‘한국의 문제’가 영어·프랑스어·독일어(The Korean Problem, Le Problème Coréen, Das Koreanische Problem)로 적혀 있다.<ref>「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ref> 대회가 반영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한국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극로의 강력한 항의로 조선 독립 문제에 대해 논의할지의 여부를 표결에 부쳤으나 결국 부결되어 무산되었다. 3개월 후인 1927년 5월에 이극로는 Korea und sein Unabhängigkeitskampf gegen den japanischen Imperialismus(한국,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독립투쟁)이라는 책자를 발간한다.<ref>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10-12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6-477쪽.</ref> 머리말에 따르면 1924년 발간한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 주로 정치적인 면을 자세히 다루었던 데 비해 이 책자는 경제적·문화적 관계에도 주목하고, 계속 추가된 정치적 운동의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첫 번째 소책자를 보강하는 성격을 지닌다.</br>[[파일:International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png|Center|조선일보 1927년 5월 14일자 기사. 왼쪽부터 황우일, 허헌, 김법린, 가타야마 센, 이의경, 이극로.]]</br> 1927년 5월 이극로는 중국의 생사 공업(“Die Seidenindustrie in China”)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논문은 지도교수 헤르만 슈마허(Hermann Schumacher)의 추천으로 빌헬름 크리스티안 출판사(Wilhelm Christians Verlag)에서 출판되었다.<ref>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2006, 344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76쪽.</ref> 당시 상해에 있던 김두봉에게 편지하여 한글 자모 활자를 받은 뒤, 이를 본떠 독일 국립 인쇄소의 허가로 4호 활자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첫 시험으로 1927년 이광수의 『허생전』 일부를 인쇄하여 동방어학부연감(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에 “Aus dem Leben eines koreanischen Gelehrten”(한 조선 지식인의 삶 한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하였다.<ref>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2006, 335쪽; 이극로, 조준희 옮김, 『고투사십년』, 아라, 2014, 82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47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68쪽(Li Kolu, “Aus dem Leben eines koreanischen Gelehrten,” 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 Jg.30, Berlin : Ostasiatische Studien, 1927, pp. 99-1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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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4월 '''{{TagInstitution|[[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ref>『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白林大學”(베를린대학)이라고 지칭한다. 이극로가 입학할 당시 교명은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Friedrich-Wilhelms-Universität, 현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였다.</ref> 철학부에 입학하였다. 『고투사십년』에 따르면 전공을 선택함에 있어 정치학, 경제학을 주과로 삼고 철학·인류학·언어학을 부과로 하여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극로가 작성한 독일어 이력서에는 민족경제학, 법학, 철학, 종족학을 공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f>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289쪽(Kolu Li, “Lebenslauf”);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60쪽.</ref> 이극로는 4년 간 정식 학생으로, 1년 간 연구생으로 대학 생활을 하게 된다.</br>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에서 '''{{TagPerson|[[에리히 해니슈]]}}'''(Erich Haenisch)<ref>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8쪽.</ref>에게 몽골어를 배우다가, 함께 공부하던 독일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틈틈이 알려주게 되었는데 그들의 요청으로 정식으로 1923년 10월 조선어강좌를 창설하게 된다. 이극로는 1926년까지 3년 간 조선어과 강사를 무보수로 맡았으며, 독일, 러시아, 네덜란드인 학생 등이 강좌를 수강했다. 이때 수강생들이 조선어의 철자법 통일과 사전 편찬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의구심을 드러냈는데, 이는 이극로가 조선어 사전 편찬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ref>이극로, 「朝鮮語辭典과 朝鮮人」, 『別乾坤』 4-7, 1929.12; 「玉에서틔골르기 縷心刻骨半生獻身, 한글標準語査定에는 으뜸되는殊勳者 朝鮮語辭典編纂에血汗勞心: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조선일보』, 1937.1.1;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0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8-89쪽.</ref></br>베를린에서 결성된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체 '''{{TagGroup|[[유덕고려학우회]]}}'''에서 이극로는 1923년과 1924년에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ref>홍선표, 「1920년대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7, 2006, 446-447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0쪽.</ref> 유덕고려학우회는 1923년 10월 26일 베를린에서 '''{{TagEvent|[[재독한인대회]]}}'''를 개최하고 ‘'''{{TagArticle|[[한국 내 일본의 유혈 통치]]}}'''’라는 인쇄물을 독일어(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 영어(Japan’s Bloody Rule in Korea)로 배포하였다.<ref>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8-154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쪽.</ref> 글의 내용은 일본의 침략사, 일본 관동대지진과 한인 학살 실상, 한인지지 호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ref>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8-154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쪽.</ref> 글의 하단에 이극로, '''{{TagPerson|[[고일청]]}}''', '''{{TagPerson|[[김준연]]}}'''이 대표로 서명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경우 다음 주소로 찾아오기를 바란다며 이극로의 주소가 적혀 있다.<ref>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9쪽, 151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473쪽.</ref></br>1924년 2월, 이극로는 '''{{TagArticle|[[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라는 본문 32쪽의 책자를 율리우스 지텐펠트(Julius Sittenfeld)사에서 인쇄하여 간행하였다.<ref>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66-196쪽;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한국인물사연구회, 2006, 338-34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4쪽. </ref> 머리말에서 이극로는 “이 작은 책자는 4000년 이상 정치적인 독립과 높은 문화를 누려 왔던 한 민족이 어떻게 처음으로 외세의 지배에 놓였으며 다시 독립을 이루어 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ref>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한국인물사연구회, 2006, 341쪽(Kolu Li, 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ref>라며 일본의 조선 침탈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유럽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간행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다.</br>1927년 2월에는 '''{{TagLocation|[[벨기에]]}}''' '''{{TagLocation|[[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열린 '''{{TagEvent|[[세계약소민족대회]]}}'''<ref>이극로가 ‘세계약소대회’라고 회고하는 이 대회는 반제국침략주의대연맹이 개최한 ‘Kongresses gegen Koloniale unterdrückung und Imperialismus’(영문 공식 명칭은 International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 국제 반식민압제·제국주의 대회)이다. 이극로, 조준희 옮김, 『고투사십년』, 아라, 2014, 151쪽.</ref>에 '''{{TagPerson|[[황우일]]}}''', '''{{TagPerson|[[이의경]]}}'''(이미륵), '''{{TagPerson|[[김법린]]}}''', '''{{TagPerson|[[허헌]]}}''' 등과 함께 참가한다. 이극로는 ‘'''{{TagArticle|[[조선 대표단 결의안]]}}'''’(Resolution der Koreanischen Delegation)을 제출하였다.<ref>「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81쪽.</ref> 또한 한국 대표단은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하여 ‘'''{{TagArticle|[[한국의 문제]]}}'''’라는 자료를 각국의 대표에게 배포하였다.<ref>이정은,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1999, 237쪽; 정규화, 『이미륵 박사 찾아 40년』, 범우, 2012, 71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에서 재인용.</ref> 베를린의 인쇄소 살라드룩운트스타인코프(Saladruck & Steinkopf)에서 인쇄된 이 자료는 앞뒤 표지를 포함하여 12쪽으로 되어 있으며, 본문은 독일어 4쪽, 영어 4쪽으로 구성되어 있다.<ref>이정은,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1999, 237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ref> 표지에는 ‘한국의 문제’가 영어·프랑스어·독일어(The Korean Problem, Le Problème Coréen, Das Koreanische Problem)로 적혀 있다.<ref>「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ref> 대회가 반영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한국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극로의 강력한 항의로 조선 독립 문제에 대해 논의할지의 여부를 표결에 부쳤으나 결국 부결되어 무산되었다. 3개월 후인 1927년 5월에 이극로는 '''{{TagArticle|[[Korea und sein Unabhängigkeitskampf gegen den japanischen Imperialismus]]}}'''(한국,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독립투쟁)이라는 책자를 발간한다.<ref>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10-12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6-477쪽.</ref> 머리말에 따르면 1924년 발간한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 주로 정치적인 면을 자세히 다루었던 데 비해 이 책자는 경제적·문화적 관계에도 주목하고, 계속 추가된 정치적 운동의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첫 번째 소책자를 보강하는 성격을 지닌다.</br>[[파일:International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png|Center|조선일보 1927년 5월 14일자 기사. 왼쪽부터 황우일, 허헌, 김법린, 가타야마 센, 이의경, 이극로.]]</br> 1927년 5월 이극로는 '''{{TagArticle|[[중국의 생사 공업]]}}'''(“Die Seidenindustrie in China”)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논문은 지도교수 '''{{TagPerson|[[헤르만 슈마허]]}}'''(Hermann Schumacher)의 추천으로 빌헬름 크리스티안 출판사(Wilhelm Christians Verlag)에서 출판되었다.<ref>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2006, 344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76쪽.</ref> 당시 상해에 있던 김두봉에게 편지하여 한글 자모 활자를 받은 뒤, 이를 본떠 독일 국립 인쇄소의 허가로 4호 활자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첫 시험으로 1927년 이광수의 『허생전』 일부를 인쇄하여 동방어학부연감(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에 “'''{{TagArticle|[[Aus dem Leben eines koreanischen Gelehrten]]}}'''”(한 조선 지식인의 삶 한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하였다.<ref>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2006, 335쪽; 이극로, 조준희 옮김, 『고투사십년』, 아라, 2014, 82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47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68쪽(Li Kolu, “Aus dem Leben eines koreanischen Gelehrten,” 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 Jg.30, Berlin : Ostasiatische Studien, 1927, pp. 99-110.).</ref>
  
 
===런던에서의 유학 생활과 음성학 연구===
 
===런던에서의 유학 생활과 음성학 연구===

2021년 11월 22일 (월) 23:08 판

이극로(李克魯)
LeeGeuk-Ro.png
출처 : 동아일보 1930년 9월 30일자 기사
 
한글명 이극로 한자명 李克魯 영문명 Lee Geuk-Ro 가나명 이칭 Kolu Li
성별 남성 생년 1893년 몰년 1978년 출신지 경상남도 의령군 전공 국어학


개요

국어학자. 한글운동가. 1893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태어났다. 마산 창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만주 동창학교와 백산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다 상해 동제대학에 입학하였다. 동제대학 예과를 마친 뒤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에서 ‘중국의 생사 공업’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을 시찰한 뒤 1929년 귀국하여 조선어학회 간사장 등을 맡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사전 편찬 작업을 주도하였다. 1928년 파리대학에서 조선어 음성 실험에 참여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實驗 圖解 朝鮮語 音聲學』(1947)을 편찬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 조선건민회 대표로 참석한 뒤 평양에 잔류하여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78년 타계하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생애

출생과 성장

1893년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공간에서 태어났다. 자서전 『고투사십년서적』(1947)에 따르면[1]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맏형수와 서모 밑에서 자랐다. 독일어로 쓴 이력서에 따르면 자신이 “의사 이근주인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적혀 있는데,[2] 이극로의 아버지는 전문적인 의원은 아니었지만 동네에서 의원 일을 보았다고 한다.[3]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집은 가난한 농가였고 농사일을 하다가 짬을 내어 글을 몇 자씩 배우며 주경야독하였다고 한다. 8세 이후부터 한시를 짓는 데 재능을 보였다. 동리에서 공동으로 보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세상 소식을 접하고, 가정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1910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출하여 머리를 깎고 마산공간 창신학교기관에 입학한다. 마산 창신학교에서 보통과 1년, 고등과 1년으로 2년 동안 수학하였다. 1912년 4월[4] 이극로는 서간도 신흥강습소로 향한다. 경성역공간안동현공간을 경유한 뒤 강원도에서 서간도로 향하는 이주민들과 동행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회인현공간에 도착한다. 한편 회인현으로 가는 여정 중에 이극로는 평안북도 창성군공간에서 아침밥을 먹게 되는데, 일행 중 한 명이 ‘고추장’을 청했으나 듣는 사람은 평북 방언 ‘댕가지장’으로만 알고 있어 말이 통하지 않는 경험을 한다. 이 경험은 이극로가 표준어 사정 등 어문 정리의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

만주와 시베리아에서의 생활

이극로는 만주 회인현 내 독립운동 연락기관인 동창점 여관에 묵게 된다. 여관의 경영자이자 동창학교의 교장인 이원식인물의 소개로, 신흥강습소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동창학교기관에서 교원으로 근무한다. 동창학교에서 이극로는 박은식인물의 등사 일을 돕고 윤세복인물을 알게 되었으며 대종교에 귀의하였다.[5] 또한 동료 교원이자 주시경인물의 제자였던 김진인물과 교유하는데, 김진이 조선어 연구의 좋은 참고서를 많이 가져왔기에 이극로는 그를 만나고 한글 연구의 기회를 얻었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한다.
1913년 동창학교를 떠나 유하현공간으로 간 이극로는, 당시 서간도에서 문사로 유명했던 『신흥교우보』의 주간 강일수인물를 만난다. 강일수는 문학을, 이극로는 육군학을 공부하기로 하고 당시 러시아공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공간에 함께 가기로 계획한다. 1914년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떠난다. 시베리아 남동부 치타공간에 당도한 이극로는, 모자라는 여비를 구하기 위하여 치타에 있는 감자 농장에서 일한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사건이 발발하여 러시아에서의 계획을 이루기 어렵게 되자 다시 회인현으로 돌아온다. 이 시기에 신채호인물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1915년에는 윤세복, 의병대장 이석대인물김동평인물과 함께 백두산 산록에 있는 무송현공간으로 이주하여 독립군 양병에 참여하고 백산학교기관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이 시기 중국 마적단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윤세복의 권유로 1915년 겨울에 무송현을 떠나 서울로 향하게 되는데, 안동현까지 당도하여 여관에 머무르던 중 이우식인물이 자신의 공부를 후원해주리라는 정보를 듣고 서울 대신 상해공간로 가게 된다.

중국 상해에서의 유학 생활과 모스크바행

이우식의 후원은 어렵게 되었지만 신규식인물의 주선으로 학비를 마련하여, 1916년 4월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던 독일인 경영 대학인 동제대학기관에 입학하였다.[6] 당시 공과 4학년이던 중국인 조후달인물(赵厚达)의 주선으로 이극로는 면비생으로 공부하게 된다. 우등의 성적을 가질 것과, 조후달의 타자기 찍는 일을 도와준다는 조건이었다. 또한 상해에서 이극로는 김두봉인물과 함께 한글을 연구했으며, 김두봉의 창안인 한글 자모분할체 활자를 만들기 위해 상무인서관 인쇄소에 함께 다니며 교섭하였다. 상해 유학생회단체 총무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각 단체와 학생층 연락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7]
1920년 2월 예과를 졸업한 뒤, 의과와 공과 중 선택해야 했기에 공과에 입학하였으나 소질에 맞지 않음을 느끼고 자퇴한 후 독일공간 베를린공간 유학을 계획한다. 북경공간에 있는 신성모인물의 집에 머물다가, 의사 이태준인물과 동행이 되어 북경을 떠나려고 하지만 장자커우공간에서 자동차 길이 막혀 귀환한다. 1921년 4월에는 신채호가 작성한, 이승만인물 위임통치청원을 반대하는 ‘성토문원고’에 김원봉인물, 오성륜인물, 장건상인물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8] 상해의 이동휘인물에게서 전보가 온 것을 계기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단체과의 분쟁 해결을 위해 국제공산당 3차 회의사건에 참석하려고 하던 상해파 고려공산당단체 대표단 이동휘‧박진순인물과 동행하여 1921년 6월 해로를 통해 모스크바공간로 가는 여정에 오른다.[9] 이극로는 이때 중국어와 서양어의 통역을 담당하게 된다.[10] 이들은 홍콩공간, 베트남공간 사이공공간, 싱가포르공간, 스리랑카공간 콜롬보공간, 지부티공간, 수에즈 운하공간를 거쳐 이집트공간 포트사이드 항에 도착한다. 카이로공간에서 이틀 간 머문 뒤 알렉산드리아 항공간을 출발하여 이탈리아공간 시칠리아섬공간의 항구 시라쿠사공간카타니아공간를 거쳐 나폴리공간에서 이틀, 로마공간에서 사흘 간 머무른 다음 밀라노공간, 스위스공간 베른공간, 제네바공간를 구경하고 베를린으로 직행한다. 이들은 1개월 간 베를린에 머물다가 독일 공산당 대표 빌헬름 피크인물(Friedrich Wilhelm Reinhold Pieck)와 동행하여 슈테틴공간[11] 항구에 가서 배를 타고 에스토니아공간 탈린공간에 도착한다. 이후 기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구경한 뒤 모스크바로 직행하였다. 모스크바에서 3개월 간 머물며 건설 중에 있는 새 수도의 모습을 구경한다.[12] 통역 업무를 마친 이극로는 유학 생활을 위하여 라트비아공간 리가공간, 리투아니아공간, 폴란드공간를 지나 1922년 1월 베를린으로 돌아온다.[13]

독일 베를린에서의 유학 생활과 항일 활동

1922년 4월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기관[14] 철학부에 입학하였다. 『고투사십년』에 따르면 전공을 선택함에 있어 정치학, 경제학을 주과로 삼고 철학·인류학·언어학을 부과로 하여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극로가 작성한 독일어 이력서에는 민족경제학, 법학, 철학, 종족학을 공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5] 이극로는 4년 간 정식 학생으로, 1년 간 연구생으로 대학 생활을 하게 된다.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에서 에리히 해니슈인물(Erich Haenisch)[16]에게 몽골어를 배우다가, 함께 공부하던 독일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틈틈이 알려주게 되었는데 그들의 요청으로 정식으로 1923년 10월 조선어강좌를 창설하게 된다. 이극로는 1926년까지 3년 간 조선어과 강사를 무보수로 맡았으며, 독일, 러시아, 네덜란드인 학생 등이 강좌를 수강했다. 이때 수강생들이 조선어의 철자법 통일과 사전 편찬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의구심을 드러냈는데, 이는 이극로가 조선어 사전 편찬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17]
베를린에서 결성된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체 유덕고려학우회단체에서 이극로는 1923년과 1924년에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18] 유덕고려학우회는 1923년 10월 26일 베를린에서 재독한인대회사건를 개최하고 ‘한국 내 일본의 유혈 통치원고’라는 인쇄물을 독일어(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 영어(Japan’s Bloody Rule in Korea)로 배포하였다.[19] 글의 내용은 일본의 침략사, 일본 관동대지진과 한인 학살 실상, 한인지지 호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20] 글의 하단에 이극로, 고일청인물, 김준연인물이 대표로 서명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경우 다음 주소로 찾아오기를 바란다며 이극로의 주소가 적혀 있다.[21]
1924년 2월, 이극로는 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원고(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라는 본문 32쪽의 책자를 율리우스 지텐펠트(Julius Sittenfeld)사에서 인쇄하여 간행하였다.[22] 머리말에서 이극로는 “이 작은 책자는 4000년 이상 정치적인 독립과 높은 문화를 누려 왔던 한 민족이 어떻게 처음으로 외세의 지배에 놓였으며 다시 독립을 이루어 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23]라며 일본의 조선 침탈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유럽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간행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1927년 2월에는 벨기에공간 브뤼셀공간 에그몽 궁전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사건[24]황우일인물, 이의경인물(이미륵), 김법린인물, 허헌인물 등과 함께 참가한다. 이극로는 ‘조선 대표단 결의안원고’(Resolution der Koreanischen Delegation)을 제출하였다.[25] 또한 한국 대표단은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하여 ‘한국의 문제원고’라는 자료를 각국의 대표에게 배포하였다.[26] 베를린의 인쇄소 살라드룩운트스타인코프(Saladruck & Steinkopf)에서 인쇄된 이 자료는 앞뒤 표지를 포함하여 12쪽으로 되어 있으며, 본문은 독일어 4쪽, 영어 4쪽으로 구성되어 있다.[27] 표지에는 ‘한국의 문제’가 영어·프랑스어·독일어(The Korean Problem, Le Problème Coréen, Das Koreanische Problem)로 적혀 있다.[28] 대회가 반영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한국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극로의 강력한 항의로 조선 독립 문제에 대해 논의할지의 여부를 표결에 부쳤으나 결국 부결되어 무산되었다. 3개월 후인 1927년 5월에 이극로는 Korea und sein Unabhängigkeitskampf gegen den japanischen Imperialismus원고(한국,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독립투쟁)이라는 책자를 발간한다.[29] 머리말에 따르면 1924년 발간한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 주로 정치적인 면을 자세히 다루었던 데 비해 이 책자는 경제적·문화적 관계에도 주목하고, 계속 추가된 정치적 운동의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첫 번째 소책자를 보강하는 성격을 지닌다.
조선일보 1927년 5월 14일자 기사. 왼쪽부터 황우일, 허헌, 김법린, 가타야마 센, 이의경, 이극로.
1927년 5월 이극로는 중국의 생사 공업원고(“Die Seidenindustrie in China”)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논문은 지도교수 헤르만 슈마허인물(Hermann Schumacher)의 추천으로 빌헬름 크리스티안 출판사(Wilhelm Christians Verlag)에서 출판되었다.[30] 당시 상해에 있던 김두봉에게 편지하여 한글 자모 활자를 받은 뒤, 이를 본떠 독일 국립 인쇄소의 허가로 4호 활자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첫 시험으로 1927년 이광수의 『허생전』 일부를 인쇄하여 동방어학부연감(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에 “Aus dem Leben eines koreanischen Gelehrten원고”(한 조선 지식인의 삶 한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하였다.[31]

런던에서의 유학 생활과 음성학 연구

이극로는 1927년 6월, 고향 친구 신성모를 따라 영국공간 런던공간으로 향한다. 1927년 11월 런던정치경제대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기 청강하였다.[32] 상해에서 친하게 지나던 정환범인물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최린인물, 공탁(공진항)과 교유하였다. 영국에서 이극로는 시오니스트이자 작가였던 이스라엘 코헨인물(Israel Cohen)을 방문하기도 하였다.[33] 또한 이 시기 이극로는 식민지 사람들도 자유롭게 독립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고, 영국의 언론 자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1928년 1월 런던을 떠나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온 이극로는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 음성학 실험실 프란츠 베틀로인물(Franz Wethlo)의 지도로 조선어 음성을 실험하고 연구하였다.[34] 런던에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1928년 5월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여 약 1개월 동안 프랑스 파리대학 음성학연구소 실험실에서 위베르 페르노인물(Hubert Pernot), 체코슬라바키아 출신 에마누엘 슈라메크인물(Emanuel Šrámek)의 요청으로 조선어 음성 실험에 참여한다.[35]
이극로는 파리에 머무르던 시기 파리대학에 재학 중이던 공진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하였다. 공진항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기 이극로는 민족에 남는 일을 무엇인가 하고 싶다고 공진항에게 의논을 해 왔으며 이때 공진항은 한글운동을 독려했다고 한다.[36]

구미 시찰과 전국 일주

파리에서의 연구와 시찰을 마친 후 다시 런던으로 간 이극로는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를 시찰할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떠난다. 맨체스터를 구경하고, 아일랜드 더블린에 도착한 뒤 아일랜드 교육부를 방문한다. 이극로는 아일랜드인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과 간판 등 모든 것이 영어로 표기된 것을 보고, 귀국 후 모국어를 지키는 운동에 한평생을 바치자고 결심한다.[37] 뒤이어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에든버러를 거쳐 런던에 도착하여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38]에서 음성학 권위자 대니얼 존스(Daniel Johns)를 방문하고 조선어 음에 대한 논평을 들었다.[39]
1928년 6월부터는 미국 뉴욕에 도착한 뒤 북미대륙을 횡단하며 대학, 공장, 박물관, 도서관 등을 시찰하고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등에서 현지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글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40] 대표적으로 1928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연설한 강연문을 보면, 이극로는 사전 편찬, 순국문 사용, 가로 쓰기를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41] 또한 뉴욕에서는 한글 타자기를 발명했던 이원익을 수차례 방문하여 한글 자모의 활자와 타자기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뉴욕에서 장덕수를 만나 그에게서 귀국 후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이극로는 조선어 사전을 만들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42] 필라델피아에서는 서재필을, 하와이에서는 이승만을 만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1928년 10월부터 1929년 1월까지 일본 안의 공장과 전문 대학교, 기타 제반 회사의 시설을 시찰했다. 박사직과 민석현을 통하여 사카타니 요시로인물(阪谷芳郎), 아베 미쓰이에인물(阿部充家)를 알게 되어, 이들의 소개로 동경 상공 회의소와 대판 상공 회의소에 가서 소개서를 얻어 일본 안의 각 방면 상공업을 시찰한 것이었다. 1929년 1월 부산공간에 도착한 후 고향에서 잠시 머문 뒤 경성으로 온 이극로는 “조선어 연구기관과 조선어연구자”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같은 해 4월, 조선어연구회단체에 입회하였다. 서울을 시찰한 뒤 이극로는 전 조선 시찰의 8개월 프로그램을 세워 실행한다. 자서전에 따르면 전 조선을 일주할 때 만주의 안동현공간용정시공간를 겸하여 돌게 되었으며, 시찰 프로그램은 실업계, 교육계, 사상계를 중심하고 명승고적을 가미한 것이라고 한다. 공장과 광산, 농장, 어장, 학교, 도서관, 신문사, 사찰 등을 둘러본 이극로는 금강산공간을 마지막 목적지로 하여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다.

조선어학회 활동과 어문 운동

이극로는 언어문제가 곧 민족 문제의 중심이라고 파악하였으며 어문 운동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43] 정인승인물의 회고에 따르면, 학술 활동이 중심이었던 조선어연구회단체가 1929년 4월 이극로의 입회를 계기로 사전 편찬 사업에 착수하면서, 대중적 운동 단체로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한다.[44]
이극로는 조선어사전 편찬에 대한 사회 각계 인사들의 동의를 이끌어 1929년 한글날 기념 축하회사건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단체 발기회를 열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45]1929년 10월 31일에 조선어사전편찬위원 108명[46]의 발기인 중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이 정해졌는데, 이극로는 위원장 겸 편집부 상무를 맡았다.[47]1929년 12월에는 평안남도 강서군공간 출신으로 경성여자사범학교기관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로 있던 김공순인물(金恭淳)과 결혼했다.[48] 1930년 1월, 조선어연구회의 간사에 이극로와 최현배인물가, 간사장에 장지영인물이 선임되었다.[49]이극로는 조선어연구회 간사와 조선어사전편찬회 상무위원을 겸하며 사전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50]
1930년 중국군경이 만주 길림과 돈화 사이 철도 연선 각지에 사는 조선인 동포를 체포하고 총살한 ‘길돈사건사건’이 발생하자, 신간회단체를 중심으로 한 사회단체들은 이극로를 재만 동포 위문사 겸 만주 당국 교섭사로 파견하였다.[51] 이때, 천도교청년당 대표로 김기전인물 또한 동행하였다.[52] 1930년 9월 30일부터 10월 25일까지 이극로는 재만 동포들의 집을 방문하고 중국 동북지역 총사령관 장학량인물장작상인물 등을 만났다.[53]
이극로는 사전 편찬을 위해 철자법·표준어·외래어 관련 어문규정이 정비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54] 이에 따라 1930년 12월에는 이극로 등을 위원으로 한 조선어 철자 통일 위원회단체가 구성되었다.[55] 1931년 1월 이극로는 신명균인물·이윤재인물·최현배·이희승인물 등의 동의를 얻어 조선어연구회라는 명칭을 조선어학회단체로 바꾸었으며,[56] 조선어학회 1대 간사장에 선임되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의 외래어 표기법 문제를 1931년 그해 추진할 사업 중 하나로 선정하고, 간사였던 이극로, 최현배, 장지영이 실행을 담당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후 이들은 각계의 권위자들로 이루어진 ‘외국 어음 표기 문제’를 다룰 협의회를 구성했다.[57] 1932년 1월 이극로는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장지영, 김윤경, 이만규와 함께 기관지를 간행하기로 결정하였으며[58] 그 결과 1932년 5월 기관지 『한글』의 창간호가 발간된다.[59] 1934년 12월 2일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이 마련되었다.[60]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2대~6대 간사(1932~1937), 7대(1937~1938) 간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사전 편찬을 주도하였으며 어문정리 및 사전과 관련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였다.[61]
1935년에는 이인인물, 이윤재 등과 함께 조선어학회의 ‘자매기관’인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을 조직하였다.[62]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은 태국의 실례를 본받아 널리 조선 민중의 관혼상제 등의 비용을 절약시켜서 그 일부로 조선어 도서를 출판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기관으로, 김윤경의 『조선문자급어학사』, 노양근의 『날아 다니는 사람』 등을 출판하였다.[63] 또한 1937년 이극로는 이인, 이우식 등과 함께 학자들의 연구를 지원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양사관’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좌절되었다.[64]
이극로는 대종교와 연계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극로는 대종교 경의원 참사로 활동하면서, 1942년 6월 만주 영안현 대종교총본사에서 출간된 한글 가사집 『한얼노래』에 실린 37곡 중 27곡을 작사하였다.[65] 이극로가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있던 「널리 펴는 말」이라는 글을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무실 이극로의 책상에서 발견하고 이를 조선어학회와 대종교를 탄압하는 계기로 삼으면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사건’과 대종교 탄압 사건인 ‘임오교변사건’이 일어났다.[66] 이에 이극로는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책임자로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된다. 1942년 12월 2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9회의 공판이 이루어졌고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건 관계자 중 가장 높은 형량이었던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67]
해방 이후 1945년 8월 17일 출옥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재건에 착수한다. 1945년 8월 25일 조선어학회는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간사를 선정하고 당면 과업을 결정하였다.[68] 이극로가 간사장에 선출되었고, 간사에 최현배·김병제·이희승·정인승·김윤경이 선임되었으며 당면 과업으로는 국어교원 양성을 위한 국어강습회 개최, 초중등 국어교재 편찬, 『한글』지 속간, 국어사전편찬의 완결 등이 결의되었다.[69] 1945년 9월 조선어학회는 ‘국어 교과서편찬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이극로는 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극로는 여러 글과 강연을 통해 한자 폐지를 주장하였고 [70] 교과서 한글 전용안을 관철시켰으며, 강연회 등을 통해 한글 보급 운동을 전개했다.[71] 또한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위해 1945년 9월 이극로는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72] 1945년 10월 9일에는 한글날 기념식이 거행되었으며 이극로가 작사한 ‘한글노래’가 불렸다.[73] 1945년 11월에는 조선교육심의회 초등교육부 위원에 위촉되어 초등학교 의무제도의 실시를 이끌었다.[74]
이극로는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에 모두 참석하여 좌우 합작을 꾀하였으나 좌절되자 두 모임 모두에서 탈퇴 성명을 발표한다.[75] 1946년 6월 이승만의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설에 대해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같은 달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를 해소하고 조선건민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과 민족의 단합을 강조하였다.[76]
1947년 2월에는 을유문화사에서 자서전 『고투사십년』이 출간되었다. 『고투사십년』은 이극로의 자서전[77]과 자작시 및 노래, ‘조선어학회 사건 함흥지방법원 예심 종결서’ 일부를 번역하고 평한 안석제의 열전과, 유열의 열전 ‘스승님의 걸어오신 길’로 구성되어 있다. 이극로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전 편찬에 관여하였는데, 1947년 10월 9일 『조선말 큰사전』(을유문화사) 제1권의 발간으로 그 결실을 보게 된다.[78] 1947년 11월에는 음성학 연구서인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아문각)이 출간되었다.

북한에서의 활동

이극로는 조선건민회 대표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후 평양에 잔류하였다.[79] 1948년 8월, 이극로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임되었으며[80] 9월에는 제1차 내각 무임소상에 임명되었다.[81]
1948년 10월 2일 개최된 내각 제4차 각의에서는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안에 설치되어 있던 조선어문연구회를 폐지하고 교육성 내에 새로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82] 당시 무임소상이었던 이극로는 이 새로운 조선어문연구회의 책임자로서 북한 언어정책을 총괄하게 된다.[83] 이극로가 위원장을 맡은 조선어문연구회는 ‘조선어 문법의 편수 간행, 조선어 사전의 편찬 간행, 조선 어문 연구 잡지의 발행, 조선 어문 연구 논문집의 간행, 조선 어문에 대한 특별 강연회의 개최’라는 당면 사업 과제를 설정하였다.[84]
1949년 3월 조선어문연구회는 『조선어 연구』를 창간하였다. 창간사에서 이극로는 “우리의 국어 생활이 다시 활발하여지는 이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말과 글에 대한 지도적 역할을 할만한 잡지가 절대로 필요하다”[85]라고 하며 국어교육을 맡은 교육자, 우리말과 글 연구자, 문필 종사자에게 특히 이 잡지가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같은 해 11월 조선어문연구회에서 이극로는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을 펴냈다. 이는 1947년 아문각에서 출간되었던 『實驗圖解朝鮮語音聲學』(1947)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1949년 6월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중앙상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1월 과학원 후보원사에 임명되었다. 1950년에는 「1950년을 맞이하면서」(『조선어연구』 2-1)를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에 입각한 철자법, 문법, 사전을 완성하고 조선 어문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86] 1952년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장,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53년에는 「이·웨·쓰딸린의 로작 『맑쓰주의와 언어학의 제 문제』에 비추어 본 공화국 언어학의 정형과 그 당면 과업」을 『과학원 학보』 2집에 게재하였으며 1954년에는 Новая Корея(새조선) 9호에 러시아어로 이승만의 한글간소화 방안을 비판한 논문을 발표하였다.[87]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1958년 3월 김두봉이 정치에서 완전히 몰락한 뒤 김두봉의 6자모에 대해 비판하는 논문 「소위 <6자모>의 비과학성」을 발표했다.[88] 1957년 8월에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임되었고 12월에는 조국통일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을, 1958년 1월에는 조·소 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을 맡았다. 음성학 연구 또한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는데 1957년 「조선 말 력점 연구」, 1960년 「조선말의 악센트」 등의 성과를 발표하였다.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196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에 선임되었다. 1964년에는 「북청 방언의 조(調) 연구」를 발표하였으며 1966년에는 사회 과학원 출판사에서 『조선어 조 연구』를 간행하였다.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1973년 과학원 및 사회과학원 원사로 임명되었다. 1978년 85세로 타계하여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연구

문법론 연구

이극로의 문법론 연구는 어문 운동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성과는 해방 후 남북한의 국어학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말 임자씨의 토」(1)(2)(3), 「조선어의 시간 표시법」, 「조선어 단어 성립의 분계선」, 「체언에 붙는 접미사 <이>의 본질」 등을 통해 이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말 임자씨의 토」(1)(2)(3)(1935)에서 이극로는 말본(語法)의 터를 닦고자 조선어학회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힘써오다가 철자 통일안에 집중하느라 잠시 멈추게 되었는데, 자신이 지금 쓰는 이 글은 그때 만들어 두었던 것을 닦아서 내어놓는 것이라고 말한다.[89] 이 글에서 이극로는 조선말 토를 처리하는 세 가지 태도가 있음을 지적한다. ‘토를 단어로 보는 사람’, ‘체언 밑에 오는 토만 단어로 보고 용언 아래 오는 토는 어미로 보는 사람’, ‘토를 모두 어미로 보는 사람’이 그 세 가지인데, 고영근에 따르면 이 분류 체계는 해방 후 김민수, 김윤경의 제1유형(분석적 체계), 제2유형(절충적 체계), 제3유형(종합적 체계)로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그 학설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90] 이 글에서 이극로는 체언에 서술격 조사 ‘이(다)’가 붙는 현상과 용언의 어간에 어미 ‘-기’가 붙어 명사로 바뀌는 현상을 상관적인 현상으로 보았다.[91] 이러한 견해는 북한에서 발표한 「체언에 붙는 접미사 <이>의 본질」(1964)에서도 되풀이되어 문화어 ‘바꿈토’의 설정을 합리화한다.[92]
「조선어의 시간 표시법」(1935)에서는 우리말의 시제를 최초로 논문의 형태로 다루었다.[93] 시간을 주관적 시간과 객관적 시간으로 나누었으며, 종결형의 시제와 관형사형의 시제를 달리 파악하였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94]
「조선어 단어 성립의 분계선」(1936)에서는 관형사, 접두사, 합성(복합)명사, 수사, 명수사, 연월일시 표시어, ‘하다’와 ‘되다’가 붙은 단어들을 대상으로 단어 성립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곳에서 논의한 단어 성립 문제가 『큰사전』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95]

음성학과 음운론 연구

독일과 프랑스에서 음성학을 접했던 이극로는 지속적으로 음성학 및 음운론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해방 전의 연구로는 훈민정음과 ‘ㆍ’음가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96] 「훈민정음의 독특한 성음 관찰」(1932)에서는 비교 문자론, 성음 분류법, 후음의 세 주제를 논의 대상으로 다루었으며, 「훈민정음의 “중간 ㅅ” 표기법」(1939)에서는 사이ㅅ을 성문(聲門)을 막는 절음(絶音) 기호로 보고, 사이ㅅ 대신 ‘ㆆ’를 독립적으로 중간에 두고 절음의 표기법을 통일시킬 것을 제안하였다.[97] 「‘ㆍ’의 음가에 대하여」(1937)에서는 문헌과 방언을 바탕으로 아래아의 음가를 추정하여 국제음성기호 ‘ɔ’에 상당(相當)한다고 하였고, 「“ㆍ”의 음가를 밝힘」(1941)에서는 여기에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설명을 추가하였다.[98]
음성학과 음운론에 대한 이극로의 성과가 집성된 『實驗 圖解 朝鮮語 音聲學』(1947)은 한국어 실험음성학의 선구로 평가된다.[99] 책의 머리말에서 이극로는 파리대학 음성학연구소에서 음성 실험을 한 자료(“그 때에 쓰던 나의 인조 구개로써 발음 위치를 확정하는 재료와 또 카이모그라프(寫音機)로 실험한 재료”[100])와, 조선어학회의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에 참여했던 경험이 저술의 바탕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실험도해 조선어음성학』(1947)의 많은 부분은 이미 1930년대에 발표한 논문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책의 전체 목차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一. 實驗 音聲學의 基礎
1. 音聲 實驗의 方法
2. 音聲의 生理
3. 악센트(Accent)
4. 홀소리(母音) 發生의 理
5. 닿소리(子音) 發生의 理
二. 音의 相關性
1. 소리의 이음(連音)
2. 닿소리의 만나 바꾸임
3. 소리의 줄거나 죽어짐
4. 소리의 끊음(絶音)
5. 조선 말 소리의 보기틀
6. 文字와 音聲記號
7. 音의 長短, 單複, 받침법, 口蓋音化

책의 1부 ‘實驗 音聲學의 基礎’는 실험 음성학적 방법을 통해 개별 음에 대한 음성학적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2부 ‘音의 相關性’은 음운 현상과 운소 등에 대해 다룬다.[101] 1부의 2장과 4장에는 각각 「말소리는 어디서 어떠케 나는가」(1932)와 「“‧” 音價를 밝힘」(1941)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102] 2부의 1장부터 4장은 「소리들이 만나면 어찌 되나: 音의 互相關係」(1933)를 그대로 실은 것이며, 5장은 「조선말 소리갈」(1930)의 내용이 일부 수정된 것이고 6장은 「조선말의 홋소리」(1932)에 나오는 ‘조선말소리와 만국표음기호와의 대조’를 확대한 것이다.[103]
아문각에서 발간된 『實驗圖解 朝鮮語 音聲學』(1947)은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이라는 한글 제목으로 1949년 조선 어문 연구회에서 출간된다. 1949년 판의 머리말은 1947년 머리말 내용에 더하여, 책을 쓰는 데 있어 국립 영화 촬영소의 녹음기와 체신성(遞信省)의 오실로그래프 기계를 음성의 실험에 이용하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104] 발음의 입모양 사진에는 국립 예술 극장 예술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우리말 악센트 실험에 있어서는 작곡가 김순남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도 덧붙였다.[105]
북한에서 이극로는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1949) 이후에도 꾸준히 음성학 논문을 발표했는데 「조선 말 력점 연구」(1957), 「조선말의 악센트」(1960), 「북청 방언의 조(調) 연구」(1964), 『조선어 조 연구』(1966) 등이 있다. 이 중 「조선 말 력점 연구」는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 론문집』에 게재된 글로서, 머리말에서 이극로는 이 글이 1952년부터 1957년까지 총 4단계에 걸쳐 조선말의 지방 력점 및 표준 력점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결과라고 하였다.[106] 연구 과정에서 일부 단어들을 키예프와 북경으로 보내어 오실로그래프 등으로 측정해줄 것을 위촉하였고, 음악평론가 박은용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 또한 밝혔다.[107] 이극로의 우리말 악센트(‘력점’)에 대한 이 연구는 실험음성학의 결과를 통해 표준 악센트를 수립하려 한 성과라는 점에서 주목해볼 수 있다.[108] 한편 『조선어 조 연구』(1966)는 과학원 창립 10주년을 기념하여 1962년 제출했던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으로서, 북청 방언의 조를 ‘공통조’와 대비하여 연구한 것이다.[109] 머리말에서 이극로는 “조선어 5대 방언의 조를 비교 연구하여 조선어의 표준조를 세우려는”[110] 의도 하에 이 논문을 집필했다고 하였다.

논저 목록

이극로의 논저목록은 조준희, 「이극로의 북한 행적과 『이극로 전집』의 과제」(『대종교연구』 3, 2020)의 [부록1 이극로 저작 총목록]과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Ⅰ‧Ⅱ‧Ⅲ‧Ⅳ(소명출판, 2019)에 수록된 글들의 서지정보를 기반으로 하되 인쇄‧출판된 이극로의 논저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이극로 논저 목록
저자명 기사명 단행본
잡지명
권호 출판사 출판
일자
분류
Kolu Li 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한국 내 일본의 유혈 통치) 192310 単行本
Kolu Li Die chinesische Agrarverfassung(중국의 농업 제도) 1924 単行本
Kolu Li 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rungspolitik(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 192403 単行本
Kolu Li Aus dem Leben eines koreanischen Gelehrten(한 조선 지식인의 삶 한 장면) 1927 単行本
Kolu Li Korea und sein Unabhängigkeitskampf gegenden japanischen Imperialismus(한국과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독립투쟁) 192703 単行本
Kolu Li Die Seidenindustrie in China(중국의 생사공업) 192705 単行本
Kolu Li Das unbekannte Korea(미지의 한국) 192803 単行本
리극로 국어가 민족의 생명, 듕요보다 지급문뎨 新韓民報 19280830 雑誌
李克魯 한글整理는 어떻게 할가(十三) 朝鮮日報 19290620 雑誌
李克魯 九萬語彙로 完成된 朝鮮語大辭典 登榟, 개성 리상춘씨의 칠년 로력, 修正만 하여 印刷한다 中外日報 19291115 雑誌
李克魯 朝鮮語辭典과 朝鮮人 別乾坤 4-7 開闢社 192912 雑誌
李克魯 (소년에 대한 바람) 極端으로 하라 新少年 8-1 新少年社 193001 雑誌
李克魯 自作自給의 本義 朝鮮物産奬勵會報 1-2 朝鮮物産奬勵會 193001 雑誌
李克魯 倫敦 言論市場 實際 視察談 東亞日報 19300102 雑誌
李克魯 (新春 멧세이지) 有形財産과 無形財産 別乾坤 5-2 開闢社 193002 雑誌
李克魯 헤매기 쉬운 갈림길 新少年 8-4 新少年社 193004 雑誌
李克魯 (우리가 가질 結婚禮式에 對한 名士의 意見:各界 名士의 意見) 壯嚴한 古典的 儀式 別乾坤 28 開闢社 193005 雑誌
李克魯 自作自給 農民 1-1 朝鮮農民社 193005 雑誌
李克魯 (神域三千里八道名山巡禮) 白頭山 學生 2-7 開闢社 193007 雑誌
李克魯 조선말소리갈(朝鮮語音聲學) 新生 3-9 193009 雑誌
李克魯 生産과 愛用의 調和 朝鮮物産奬勵會報 1-10 朝鮮物産奬勵會 193010 雑誌
李克魯 [설문] (한글硏究家 諸氏의 感想과 提議:사백여든넷재돌을 맞으며) 知識과 物質로 援助하라 東亞日報 19301119 雑誌
李克魯 標準文法과 標準辭典 朝鮮日報 19301119 雑誌
李克魯 滿洲王 張學良氏 會見記 別乾坤 5-11 開闢社 193012 雑誌
李克魯 讀者 여러분께 보내는 名士 諸氏의 年頭感:年賀狀代身으로 原稿着順 別乾坤 36 開闢社 193101 雑誌
李克魯 科學的 管理法과 勞働能率(一) 奬産 2-1 193101 雑誌
李克魯 外來語의 淨化 東亞日報 19310101 雑誌
李克魯 [설문] 學校選擇體驗談 先輩諸氏 東光 18 東光社 193102 雑誌
李克魯 科學的 管理法과 勞働能率(三) 奬産 2-2 193102 雑誌
李克魯 科學的 管理法과 勞働能率(四) 奬産 2-3 193103 雑誌
李克魯 科學的 管理法과 勞働能率(五) 奬産 2-5 193105 雑誌
李克魯 (日集:時人時話) 朝鮮語辭典編纂 新東亞 1 新東亞社 193111 雑誌
李克魯 [설문] 交叉點 三千里 3-11 三千里社 193111 雑誌
李克魯 (風雲 中의 巨物들) 總司令 張學良 會見:一年前의 回想 三千里 3-11 三千里社 193111 雑誌
李克魯 本社에 感謝, 班員을 激勵, 意味深長한- 來賓 三氏의 祝辭 朝鮮日報 19311214 雑誌
李克魯 [설문] 佛敎에 對한 希望 佛敎 91 193201 雑誌
李克魯 世界各國의 新年行事:땐쓰로 밤새는 獨逸 대야 뚜드리는 英國 新東亞 2-1 新東亞社 193201 雑誌
李克魯 조선말의 사투리 東光 29 東光社 193201 雑誌
李克魯 各方面 男女人士 諸氏의 新春抱負와 計劃과 感想:비는 말슴 中央日報 19320101 雑誌
李克魯 [설문] 小作制度改善에 對한 諸氏의 意見!! 農民 3-3 朝鮮農民社 193203 雑誌
李克魯 [설문] (朝鮮人의 經濟的 活路) 一鬪一得主義로 不斷努力 農業을 爲主로 商工業을 倂進 東光 31 東光社 193203 雑誌
李克魯 (한글綴字에 대한 新異論 檢討) 後日에 嚴正批判 東光 32 東光社 193204 雑誌
李克魯 朝鮮硏武舘歌 朝鮮日報 19320427 雑誌
李克魯 朝鮮語辭典編纂에 對하야 한글 1-1(1호) 朝鮮語學會 193205 雑誌
李克魯 말소리는 어디서 어떠케 나는가 한글 1-2(2호) 朝鮮語學會 193206 雑誌
李克魯 [설문] (歡樂境인 카페-와 카페-出入의 學生問題) 學生들의 「카페-」 出入을 社會的 制裁로 斷絶케 實生活 3-7 奬産社 193207 雑誌
李克魯 中國은 表意文字에서 表音文字로 한글 1-3(3호) 朝鮮語學會 193207 雑誌
李克魯 조선말의 홋소리(朝鮮語의 單音) 한글 1-4(4호) 朝鮮語學會 193209 雑誌
李克魯 訓民正音의 獨特한 聲音 觀察 한글 1-5(5호) 朝鮮語學會 193210 雑誌
李克魯 質疑應答 한글 1-5(5호) 朝鮮語學會 193210 雑誌
李克魯 [설문] 1932年 紀念塔 第一線 2-11 개벽사 193212 雑誌
李克魯 內容發表는 保留, 신중한 태도로 하겟다는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談 朝鮮日報 19321224 雑誌
李克魯 [설문] 잊을 수 없는 어머니 말씀 新家庭 1 新東亞社 193301 雑誌
李克魯 最終的 一致는 무엇보다 깃분 일 朝鮮日報 19330106 雑誌
李克魯 [설문] (새 철자법 사용에 대한 각게 인사의 감상과 히망) 철자법 채용엔 물론 찬성입니다 東亞日報 19330406 雑誌
李克魯 朝鮮民族과 한글 農民 4-6 朝鮮農民社 193306 雑誌
李克魯 千年古土를 固守함에 意義가 잇다 農民 4-7 朝鮮農民社 193307 雑誌
李克魯 소리들이 만나면 어찌 되나:音의 互相關係 한글 1-9(9호) 朝鮮語學會 193308 雑誌
李克魯 『한글』使用의 正確은 民族的 重大責任, 文筆從仕者 講習會을 大大的 計劃 朝鮮日報 19331028 雑誌
李克魯 [설문] 朝鮮兒童敎育을 어느 方面으로?-어느 學校를 選擇하리까:自己生活에 適應하도록 新東亞 4-2 新東亞社 193402 雑誌
李克魯 [설문] 朝鮮女子敎育은 어디로 가야할가?:才質如何를 따라 新家庭 新東亞社 193404 雑誌
李克魯 朝鮮語辭典編纂에 對하여 學燈 5 漢城圖書株式會社 193405 雑誌
이극로 [설문] (社會人이 본 朝鮮言論界) 朝鮮新聞雜誌 長點短點 新東亞 4-5 新東亞社 193405 雑誌
李克魯 [설문] (迷信打破策具體案) 몬저 民智를 열어야 新東亞 4-6 新東亞社 193406 雑誌
李克魯 二講:조선말소리(朝鮮語聲音) 한글 2-5(15호) 朝鮮語學會 193408 雑誌
이극로 [설문] 修學旅行에 對한 諸氏의 意見:매우 좋은 일이다 新東亞 4-8 新東亞社 193408 雑誌
李克魯 白頭山 곰 산양 新東亞 4-10 新東亞社 193410 雑誌
李克魯 (한글날 第四百八十八回) 한글綴字法統一案 普及에 對하야 東亞日報 19341028 雑誌
李克魯 地球는 人類文化의 公園 新東亞 4-11 新東亞社 193411 雑誌
李克魯 한글마춤법통일안解說:第五章·第六章·第七章·附錄 한글 2-8(18호) 朝鮮語學會 193411 雑誌
李克魯 [설문] 送舊迎新의 感懷 新東亞 5-1 新東亞社 193501 雑誌
李克魯 한글運動 新東亞 5-1 新東亞社 193501 雑誌
李克魯 조선말 임자씨의 토(1) 한글 3-1(20호) 朝鮮語學會 193501 雑誌
李克魯 新春移動座談會 우리의 病根打診(二):安逸病 東亞日報 19350103 雑誌
李克魯 [설문] 家庭으로부터 出發할 우리의 新生活運動(其三) : 일생 一차의 경사 형편대로 질길 것 東亞日報 19350103 雑誌
李克魯 조선말 임자씨의 토(2) 한글 3-2(21호) 朝鮮語學會 193502 雑誌
李克魯 絶對로 必要한 것 新家庭 3-3 新東亞社 193503 雑誌
李克魯 朴勝彬氏에게, 合作交涉의 顚末 한글 3-3(22호) 朝鮮語學會 193503 雑誌
李克魯 獨逸學生 氣質 新東亞 5-4 新東亞社 193504 雑誌
李克魯 조선말 임자씨의 토(3) 한글 3-4(23호) 朝鮮語學會 193504 雑誌
李克魯 獨逸女子의 氣質 新東亞 5-5 新東亞社 193505 雑誌
李克魯 [설문] 諸氏冒險談 新東亞 5-7 新東亞社 193507 雑誌
李克魯 (本社 新社屋 落成式과 各界祝辭) 過去蓄積된 經驗의 産物 朝鮮日報 19350706 雑誌
李克魯 [設問] 社會科學振興에 對한 諸大家의 高見 朝鮮日報 19350708 雑誌
이극로 조선어학회의 발전 한글 3-6(25호) 朝鮮語學會 193508 雑誌
李克魯 外來語 表記法에 對하야:六月 二十九日 朝鮮音聲學會 講演 要旨 한글 3-6(25호) 朝鮮語學會 193508 雑誌
李克魯 채케리크에서 한여름 新東亞 5-8 新東亞社 193508 雑誌
李克魯 [설문] 내가 좋아하는 山水 新東亞 5-8 新東亞社 193508 雑誌
李克魯 西伯利亞와 美國의火山坑 新人文學 2-6 靑鳥社 193508 雑誌
이극로 아메리카 紅人種村을 찾아서 新家庭 3-9 新東亞社 193509 雑誌
李克魯 [설문] 我觀 「蔣介石, 간듸, 트로츠키」 三千里 7-8 三千里社 193509 雑誌
李克魯 短彩錄 三千里 7-9 三千里社 193510 雑誌
李克魯 共學制度가 實施되면 朝鮮말은 업서진다 朝鮮日報 19351009 雑誌
李克魯 한글 바루 쓰고 바루 읽는 법(一) 朝鮮中央日報 19351011 雑誌
李克魯 한글 바루 쓰고 바루 읽는 법(二) 朝鮮中央日報 19351012 雑誌
李克魯 한글 바루 쓰고 바루 읽는 법(三) 朝鮮中央日報 19351013 雑誌
李克魯 한글 바루 쓰고 바루 읽는 법(四) 朝鮮中央日報 19351015 雑誌
李克魯 한글 바루 쓰고 바루 읽는 법(五) 朝鮮中央日報 19351016 雑誌
李克魯 한글 바루 쓰고 바루 읽는 법(完) 朝鮮中央日報 19351017 雑誌
李克魯 朝鮮語文整理運動의 今後 朝鮮日報 19351028 雑誌
李克魯 朝鮮語의 時間 表示法 한글 3-9(28호) 朝鮮語學會 193511 雑誌
李克魯 (十二月의 追憶) 伯林의 除夜 四海公論 8 四海公論社 193512 雑誌
李克魯 朝鮮語文整理運動의 今後 한글 3-10(29호) 朝鮮語學會 193512 雑誌
李克魯 獨逸留學篇:海外留學 印象記 學燈 21 漢城圖書株式會社 193512 雑誌
李克魯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의 抱負 四海公論 2-1 四海公論社 193601 雑誌
李克魯 (나의 스승:各界 諸氏의 스승 禮讚記) 剛毅의 人, 尹檀崖 先生 朝光 2-1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1 雑誌
李克魯 朝鮮語文整理運動의 今後計劃 新東亞 6-1 新東亞社 193601 雑誌
李克魯 海外로 留學하고 싶은 분에게 學燈 22 漢城圖書株式會社 193601 雑誌
李克魯 한글 發達에 對한 回顧와 및 新展望:確乎한 그의 進展을 必期함(上) 朝鮮中央日報 19360101 雑誌
李克魯 (異域에서 새해 맞든 느김) 獨逸의 新年 高麗時報 19360101 雑誌
李克魯 한글 發達에 對한 回顧와 및 新展望:確乎한 그의 進展을 必期함(下) 朝鮮中央日報 19360104 雑誌
李克魯 (紙面 拡張에 対한 各界 讚辞) 刮目할 躍進 朝鮮日報 19360109 雑誌
李克魯 伯林의 大學과 獨逸文化 四海公論 2-2 四海公論社 193602 雑誌
李克魯 辭典 編纂이 웨 어려운가? 한글 4-2(31호) 朝鮮語學會 193602 雑誌
李克魯 (第三回 全朝鮮 男女專門學校 卒業生 大懇親會) 祝辭 東亞日報 19360216 雑誌
李克魯 나의 大學卒業時代의 追憶 學燈 23 漢城圖書株式會社 193603 雑誌
李克魯 朝鮮을 떠나 다시 朝鮮으로:家政形便과 朝鮮內의 敎育과 西間島行 朝光 3-2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3 雑誌
李克魯 (내가 가진 貴重品) 鳥神人首의 磁器 朝光 2-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3 雑誌
李克魯 한글 所感 中央 4-3 朝鮮中央日報社 193603 雑誌
李克魯 西伯利亞에서 머슴사리:滿洲와 西比利亞에서 放浪生活하던 때와 그 뒤 朝光 2-4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4 雑誌
李克魯 나의 警句 朝光 2-4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4 雑誌
李克魯 西間島 時代의 申采浩先生 朝光 2-4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4 雑誌
李克魯 [설문] 學生들은 어떠한 書籍과 雜志가 必要한가? 新東亞 6-4 新東亞社 193604 雑誌
李克魯 訓民正音과 龍飛御天歌 新東亞 6-4 新東亞社 193604 雑誌
李克魯 海外留學案內 : 獨逸篇 四海公論 2-4 四海公論社 193604 雑誌
李克魯 朝鮮語文整理運動의 現狀 四海公論 2-5 四海公論社 193605 雑誌
李克魯 中國上海의 大學生活:中國上海에서 留學하던 때와 그 뒤 朝光 2-5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5 雑誌
李克魯 獨逸 伯林에서 留學하던 때와 그 뒤:二十萬里 周遊記 朝光 2-6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6 雑誌
李克魯 [설문] (어린이 相互間에 敬語를 쓸가) 너무 形式的이 된다 朝光 2-6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6 雑誌
李克魯 [설문] 戀愛·結婚·新婚 新東亞 6-7 新東亞社 193607 雑誌
李克魯 英國 倫敦에서 留學하던 때와 그 뒤:水陸 二十萬里周遊記 朝光 2-7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7 雑誌
이극로 白頭山印象 女性 1-4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7 雑誌
李克魯 課外講義(一) 한글通俗講座 ※원본 유실 朝鮮中央日報 19360701 雑誌
李克魯 課外講義(二) 한글通俗講座 朝鮮中央日報 19360702 雑誌
李克魯 課外講義(三) 한글通俗講座 朝鮮中央日報 19360704 雑誌
李克魯 課外講義(四) 한글通俗講座 朝鮮中央日報 19360705 雑誌
李克魯 課外講義(五) 한글通俗講座 朝鮮中央日報 19360709 雑誌
李克魯 仁川 海水浴行 朝鮮日報 19360731 雑誌
李克魯 歸國途中에 米國視察하던 때와 그 뒤:水陸 二十萬里周遊記 朝光 2-8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8 雑誌
李克魯 [설문] 잊이 못할 그 山과 그 江 朝光 2-8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08 雑誌
李克魯 [설문] 知名人士의 避暑플랜 新東亞 6-8 新東亞社 193608 雑誌
이극로 잘 때에는 전등을 끄라 新東亞 6-8 新東亞社 193608 雑誌
李克魯 伯林大學 鐵門 新人文學 3-3 靑鳥社 193608 雑誌
李克魯 外國大學生活座談會 新人文學 3-3 靑鳥社 193608 雑誌
李克魯 朝鮮語 單語 成立의 分界線 한글 4-7(36호) 朝鮮語學會 193608 雑誌
李克魯 歐美留學時代의 回顧 우라키(The Rocky) 7 우라키社 193609 雑誌
李克魯 [설문] 가을의 探勝處 朝光 2-10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10 雑誌
李克魯 “文筆方面에서 먼저 活用하기를”, 大任을 完成한 後에 李克魯氏 談 朝鮮日報 19361029 雑誌
李克魯 한글 統一運動의 社會的 意義 朝光 2-11 朝鮮日報社出版部 193611 雑誌
李克魯 (한글記念四百九十週年) 標準語 發表에 際하야 朝鮮日報 19361101 雑誌
李克魯 標準語 發表에 際하여 한글 4-12(40호) 朝鮮語學會 193612 雑誌
李克魯 혼례식은 구식, 다시 차질 민요와 가사, 버릴 것은 경제적 페해 잇는 것 朝鮮日報 19370104 雑誌
李克魯 그들의 靑年學徒時代(13):憤然, 호밋자루를 投擲, 漢陽千里를 徒步로!, 世界大戰을 上海서 격고 同濟大學도쪼겨나, 千辛萬苦로 目的地 伯林大學에, 李克魯氏 朝鮮日報 19370116 雑誌
李克魯 文化問答 朝光 3-2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2 雑誌
李克魯 趣味問答 朝光 3-2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2 雑誌
李克魯 渡世問答 朝光 3-2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2 雑誌
李克魯 生活問答 朝光 3-2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2 雑誌
李克魯 유모아問答 朝光 3-2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2 雑誌
李克魯 心境設問 朝光 3-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3 雑誌
李克魯 유모어設問 朝光 3-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3 雑誌
李克魯 讀書設問 朝光 3-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3 雑誌
李克魯 人生設問 朝光 3-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3 雑誌
李克魯 空想設問 朝光 3-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3 雑誌
李克魯 生活設問 朝光 3-4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4 雑誌
李克魯 演藝設問 朝光 3-4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4 雑誌
李克魯 유모-어設問 朝光 3-4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4 雑誌
李克魯 旅行設問 朝光 3-4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4 雑誌
李克魯 愛情設問 朝光 3-4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4 雑誌
李克魯 [설문] (종아리 맞은 이야기) 문쥐노름한다고 少年 1-1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4 雑誌
李克魯 (本社社屋新築落成及創刊滿四週年記念-各界名士의 祝辭) 높은 새집 빛이로다 高麗時報 19370401 雑誌
李克魯 鄕愁設問 朝光 3-5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5 雑誌
李克魯 日記設問 朝光 3-5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5 雑誌
李克魯 유모어設問 朝光 3-5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5 雑誌
李克魯 外國辭典 못지 안케 內容의 充實을……,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談 朝鮮日報 19370502 雑誌
李克魯 言語의 起源說 한글 5-6(46호) 朝鮮語學會 193706 雑誌
李克魯 標準語와 辭典 한글 5-7(47호) 朝鮮語學會 193707 雑誌
李克魯 (그 山 그 바다(十一)) 幅五十里 長千餘里 米南方의 地下金剛, 九死에서 一生을 얻은 奇蹟 東亞日報 19370718 雑誌
李克魯 (名士들의 感化集) 死線突破의 最後一線:感激된 그瞬間의 追憶 朝光 2-8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8 雑誌
李克魯 (이긴 이야기) 빈주먹 하나로 도적을 쫓아 少年 1-6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9 雑誌
李克魯 제자리 少年 1-6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09 雑誌
李克魯 ‘·’의 음가에 대하여 한글 5-8(48호) 朝鮮語學會 193709 雑誌
李克魯 (讀書餘響:新秋燈下에 읽히고 싶은 書籍) 龍歌와 松江歌辭 東亞日報 19370904 雑誌
李克魯 馬賊에게 死刑宣告를 當한 瞬間:白頭山에서 산양하다 부뜰리어 朝光 3-10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10 雑誌
李克魯 짓말(態語)에 대하여 한글 5-10(50호) 朝鮮語學會 193711 雑誌
李克魯 머리말 學海 創刊號 學海社 193712 雑誌
李克魯 (나의 一年總決算) 나는 언제나 成功뿐 朝光 3-12 朝鮮日報社出版部 193712 雑誌
李克魯 動物界의 言語現象 한글 5-11(51호) 朝鮮語學會 193712 雑誌
李克魯 조선말의 사투리 學海 創刊號 學海社 193712 雑誌
李克魯 語學的으로 본 「林巨正」은 朝鮮語鑛區의 노다지 朝鮮日報 19371208 雑誌
李克魯 [설문] 나의 十年計劃 朝光 4-1 朝鮮日報社出版部 193801 雑誌
李克魯 (生活의 文化化, 科學化, 經濟化) 舊慣陋習打破:社會各界人士의 高見 東亞日報 19380101 雑誌
李克魯 完成途程의 朝鮮語辭典(上) 東亞日報 19380103 雑誌
李克魯 舊慣陋習打破(中):各界人士의 高見 東亞日報 19380104 雑誌
李克魯 完成途程의 朝鮮語辭典 東亞日報 19380104 雑誌
李克魯 朝鮮語技術問題座談会 朝鮮日報 19380104 雑誌
李克魯 舊慣陋習打破(下):各界人士의 高見 東亞日報 19380106 雑誌
李克魯 千이란 數字는 意義가 深重 朝鮮日報 19380125 雑誌
李克魯 [설문] (꿈의 巡禮) 아부지 棺 앞에서, 그러나 깨어보니 一場春夢 朝光 4-2 朝鮮日報社出版部 193802 雑誌
李克魯 家庭으로 드러가는 女性들에게 女性 3-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803 雑誌
李克魯 資源으로 開發되는 金剛山:金剛山을 資源으로 開發해도 좋은가 朝光 4-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803 雑誌
李克魯 最後의 五分間:내빼는 자전거 少年 2-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803 雑誌
李克魯 (나의 困境時代의 안해를 말함) 金비녀 金반지가 流質이 돼도 女性 3-4 朝鮮日報社出版部 193804 雑誌
李克魯 한글 바루 아는 법 批判 6-5 批判社 193805 雑誌
李克魯 新刊評:李熙昇 近著 『歷代朝鮮文學精華』 朝鮮日報 19380505 雑誌
李克魯 (越圈批判(3)) 朝鮮의 文學者일진댄 朝鮮말을 알라 東亞日報 19380524 雑誌
李克魯 設問 朝光 4-6 朝鮮日報社出版部 193806 雑誌
李克魯 (나 사는 곳) 꽃농사를 짓는 북바위 동네 少年 2-6 朝鮮日報社出版部 193806 雑誌
李克魯 한글 바루 아는 법(二) 批判 6-6 批判社 193806 雑誌
李克魯 辭典 註解難 한글 6-7(58호) 朝鮮語學會 193807 雑誌
李克魯 바른 글과 바른 말을 쓰라 四海公論 4-7 四海公論社 193807 雑誌
李克魯 한글 바루 아는 법(三) 批判 6-7 批判社 193807 雑誌
李克魯 講演(廿六日後八○○):씨름이야기 每日新報 19380726 雑誌
李克魯 (歐米航路의 로맨쓰) 印度洋上의 喜悲劇 朝光 4-8 朝鮮日報社出版部 193808 雑誌
李克魯 한글 바루 아는 법(完):第三章 받침 알아보는 法과 새받침 一覽 批判 6-8 批判社 193808 雑誌
李克魯 라디오 JODK 講演 十五日 後八, ○○:社會生活과 公德 朝鮮日報 19380816 雑誌
李克魯 라디오 JODK 趣味講演(三十日 後八時):朝鮮各道 風習이야기 朝鮮日報 19380830 雑誌
李克魯 (一家言) 씨름의 体育的 價値 四海公論 4-9 四海公論社 193809 雑誌
李克魯 語文整理와 出版業 博文 1 博文書館 193810 雑誌
李克魯 나의 履歷書:半生記 朝光 4-10 朝鮮日報社出版部 193810 雑誌
李克魯 世界的 人物 會見記:世界 各國의 諸偉人의 面影 朝光 4-11 朝鮮日報社出版部 193811 雑誌
李克魯 “訓民正音의”, “中間 ㅅ”, “表記法” 한글 6-10(61호) 朝鮮語學會 193811 雑誌
李克魯 (紙齡百號突破에 際하여 各界名士의 祝辭) 날래게 달리시라 高麗時報 19381101 雑誌
이극로 머리말(노양근, 『날아 다니는 사람들』) 날아다니는 사람들 朝鮮紀念圖書出版舘 19381120 単行本
李克魯 (戰勝軍隊의 凱旋紀念) 伯林의 凱旋柱 三千里 10-12 三千里社 193812 雑誌
李克魯 (내가 맛나본 外國女子:世界女性의 氣質) 일 잘하고 검박한 獨逸女子 女性 4-1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1 雑誌
李克魯 言語의 形態的 分類 한글 7-1(63호) 朝鮮語學會 193901 雑誌
李克魯 新年의 願望 高麗時報 19390101 雑誌
李克魯 (戰時生活現地体驗記:世界大戰 當時를 回顧코) 獨國民의 忍耐性 朝鮮日報 19390101 雑誌
李克魯 (朝鮮固有運動競技의 現代化·大衆化:各界 人士의 提言(2)) 音樂의 協調가 必要 東亞日報 19390103 雑誌
李克魯 地下의 周時經氏 기뻐하겟지요:朝鮮語學會 李克魯氏 談 朝鮮日報 19390118 雑誌
李克魯 한글은 한 時間에 朝光 5-2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2 雑誌
李克魯 나의 趣味·娛樂 淨化策(四) 東亞日報 19390202 雑誌
李克魯 [설문] 名士漫問漫答 朝光 5-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3 雑誌
李克魯 (나의 苦學時代) 인단장수·머슴살이 少年 3-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3 雑誌
李克魯 (一生에 잊지 못하는 感激의 이야기) 金剛勝景의 土窟 女性 4-3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3 雑誌
李克魯 (아까운 동무들 어쩌다 그렇게 되었나?) 엿장수가 되고 농부가 되고 少年 3-4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4 雑誌
李克魯 [설문] 名士漫問漫答 朝光 5-5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5 雑誌
李克魯 飮食道德 博文 7 博文書館 193905 雑誌
李克魯 (시방 생각해도 미안한 일) 때린 아이 집에 불을 놓으려고 少年 3-5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5 雑誌
李克魯 (나의 主張) 행복된 가정 家庭之友 20 朝鮮金融聯合會 193905 雑誌
李克魯 (中等學校 入學難과 그 對策) 根本策과 臨時策 朝光 5-6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6 雑誌
李克魯 誓約文을 交換하던 날 朝光 5-7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7 雑誌
李克魯 (나는 무엇이 되려고 했나) 放浪客 朝光 5-8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8 雑誌
李克魯 여름의 나라 『하와이』(上) 每日新報 19390818 雑誌
李克魯 여름의 나라 『하와이』(中) 每日新報 19390819 雑誌
李克魯 여름의 나라 『하와이』(下) 每日新報 19390820 雑誌
李克魯 (座談會) 朝鮮飮食에 對하야 女性 4-9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09 雑誌
李克魯 (大戰의 敎訓) 敗戰에 慟哭도 一瞬, 强國 獨逸을 再建 朝鮮日報 19390912 雑誌
李克魯 良書告知板 朝鮮日報 19390926 雑誌
李克魯 [설문] 葉書回答:近日の感激 家庭之友 25 朝鮮金融聯合會 193910 雑誌
李克魯 [설문] (各界人士들의 賢答:나의 生活哲學) 學術硏究機關 東亞日報 19391126 雑誌
李克魯 倫敦있는 申性模兄에게 朝鮮名士書翰大集 明星出版社 1940 単行本
이극로 [設問] 學界振興妙策을 듯는다 朝鮮日報 19400103 雑誌
李克魯 학생에게 조흔 숙소를 주자! 학생과 숙소문제 좌담회 東亞日報 19400104 雑誌
李克魯 (年頭頌) 緊張한 生活 東亞日報 19400105 雑誌
李克魯 우리 家庭 카-드 三千里 12-3 三千里社 194003 雑誌
李克魯 (朝鮮語辭典 完成段階에! 一部, 出版許可申請) “하루라도 빨리”, 語學會 李克魯氏 談 朝鮮日報 19400308 雑誌
李克魯 나의 二十歲 靑年時代(二) 西間道에서 赤手로! 上海가서 大學에 入學, 三錢짜리 勞働宿泊所의 身勢로, 스믈時節을 말하는 李克魯氏 東亞日報 19400403 雑誌
李克魯 라디오 JODK 講演:敎育과 人格(十五日 午後七時半) 朝鮮日報 19400514 雑誌
李克魯 大方의 批判을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談 朝鮮日報 19400608 雑誌
李克魯 [설문] 世界大戰은 어떻게 되나:名家諸氏의 興味있는 諸觀測 三千里 12-7 三千里社 194007 雑誌
李克魯 斷想 博文 19 博文書館 194007 雑誌
李克魯 文化の自由性 モダン日本 11-9 モダン日本社 194008 雑誌
李克魯 (朝鮮學界總動員 夏期特別論文(16)) 한글發達史 朝鮮日報 19400803 雑誌
李克魯 (新世紀에 보내는 말) 일하면 기쁨이 있다 新世紀 2-4 新世紀社 194009 雑誌
李克魯 [설문] 我觀『近衛首相』 三千里 12-8 三千里社 194009 雑誌
李克魯 [설문] 我觀『히틀러總統』 三千里 12-8 三千里社 194009 雑誌
李克魯 奢侈品禁止令과 時局下生活刷新:名士의 葉書回答 家庭之友 20 朝鮮金融聯合會 194009 雑誌
李克魯 日本の新體制に半島は何を希望するか[ハガキ囘答]:三つのこと 綠旗 5-10 194010 雑誌
李克魯 京城改造案 三千里 12-9 三千里社 194010 雑誌
李克魯 핀란드 말의 音韻과 名詞의 格 한글 8-7(80호) 朝鮮語學會 194010 雑誌
고루 外來語 表記 統一難 한글 8-7(80호) 朝鮮語學會 194010 雑誌
李克魯 公衆道德 文章 3-1 文章社 194101 雑誌
李克魯 “·”音價를 밝힘 한글 9-1(83호) 朝鮮語學會 194101 雑誌
李克魯 交通道德 高麗時報 19410101 雑誌
李克魯 (卒業生에게 붙이는 말) 굳건한 信念을 가지도록 합시다 朝光 7-3 朝鮮日報社出版部 194103 雑誌
李克魯 說問 朝光 7-4 朝鮮日報社出版部 194104 雑誌
李克魯 (鄕土藝術과 農村娛樂의 振興策) 씨름은 體育的 藝術 三千里 13-4 三千里社 194104 雑誌
李克魯 善惡의 觀念 家庭之友 43 朝鮮日報社出版部 194105 雑誌
李克魯 善惡의 觀念 半島の光 43 194105 雑誌
李克魯 (獨逸과 獨逸精神 獨逸留學生座談會(十四)) 積極 外交에 進出, 大學에 外交硏究會 設置 每日新報 19410516 雑誌
李克魯 내가 밤을 새고 읽은 책:솜바르트 저 現代資本主義 春秋 2-5 朝鮮春秋社 194106 雑誌
李克魯 한얼노래 大倧敎報 32卷 4之3‧4 大倧敎總本司 19410705 雑誌
李克魯 祝辭 大倧敎報 32卷 4之3‧4 大倧敎總本司 19410705 雑誌
李克魯 朝鮮住宅問題座談 春秋 2-7 朝鮮春秋社 194108 雑誌
李克魯 (잊지 못할 나의 恩師記) 回甲 지나서 「愛의 巢」를 이룬 世界的 學者 솜바르트 博士 三千里 13-9 三千里社 194109 雑誌
李克魯 (勤勞精神의 源泉을 차저서) 勤勞가 國民道德 배울만한 獨逸國民의 勤勞精神 每日新報 19410924 雑誌
李克魯 나의 資源愛護 每日新報 194118 雑誌
李克魯 (結婚을 勸하는 書(上)) 독신은 국책위반:국가의 번영을 위하야 적령기를 노치지 말자 每日新報 19411022 雑誌
李克魯 한얼노래(神歌) 滿洲國:大倧敎總本司 19420610 単行本
李克魯 葉書通信:設=問 1, 올 여름에 가시고 싶은 곳 2, 올여름에 하시고 싶은 일 新時代 2-7 194207 雑誌
李克魯 널리 펴는 말 大倧敎報 37卷 4之3 大倧敎總本司 1945 雑誌
李克魯 (本紙 創刊과 各界의 聲援) 公正한 言論 期待 自由新聞 19451006 雑誌
李克魯 (새 朝鮮 當面의 重大課題:偉大한 建國은 敎育에서) 言語 나 敎育 업다, 兒童에겐 國語부터:初等部=李克魯氏 談 自由新聞 19451011 雑誌
李克魯 朝鮮語學會의 任務 民衆朝鮮 創刊號 194511 雑誌
李克魯 한글노래 朝鮮週報 4 朝鮮週報社 194511 雑誌
李克魯 한글에 바친 一生-桓山, 曉蒼을 悼함 朝鮮週報 4 朝鮮週報社 194511 雑誌
李克魯 建國과 文化提言:朝鮮文化와 한글(上) 中央新聞 19451101 雑誌
李克魯 今後의 義務敎育:朝鮮文化와 한글(下) 中央新聞 19451102 雑誌
李克魯 쓰는 것과 呼稱을 統一, 二重式 서울市名의 矛盾 업세라:朝鮮語學會 李克魯氏 談 自由新聞 19451118 雑誌
李克魯 金九主席에 보내는 賀辭 新朝鮮報 19451126 雑誌
李克魯 (本誌 創刊과 各界의 激勵) 民族의 伴侶가 되라 民聲 1-1 高麗文化社(698면에서 사 자 고침) 194512 雑誌
李克魯 (여성에게 보내는 말) 어머니의 責務 女性文化 創刊號 女性文化社 194512 雑誌
李克魯 한글노래 女性文化 創刊號 女性文化社 194512 雑誌
李克魯 한글 紀念日과 한글노래 白民 創刊號 白民文化社 194512 雑誌
李克魯 [설문] 그날의 表情 民聲 1-1 高麗文化社(507면에서 사 자 고침) 194512 雑誌
李克魯 漢陽의 가을 解放記念詩集 中央文化協會 19451212 雑誌
李克魯 漢字廢止의 贊否(三):새문화 건설은 漢字廢止로부터 新朝鮮報 19451224 雑誌
李克魯 國民大會와 無關, 李克魯博士 聲明 自由新聞 19451227 雑誌
李克魯 信託主張國은 우리의 唯一敵 東亞日報 19451228 雑誌
李克魯 (죽엄으로 信託統治에 抗拒하자:各界人士들의 抗議) 다만 血戰主義로. 손을 맞잡고 民族統一, 李克魯氏 談 朝鮮日報 19451229 雑誌
李克魯 獄中吟:咸興監獄에서 開闢 73(復刊 新年號) 開闢社 194601 雑誌
李克魯 (信託統治反對特輯) 4千年의 歷史가 있다 大潮 創刊號 大潮社 194601 雑誌
李克魯 藝術과 道德 女性公論 創刊號 女性公論社 194601 雑誌
李克魯 [설문] 民衆의 소리를 들으라! 獨立 아니어든 죽음으로, 피로써 擊碎 民聲 2-2 高麗文化社 194601 雑誌
李克魯 士道三素 나의 抱負와 希望:名士名位의 말슴 新生活協會出版部 19460101 単行本
李克魯 敎育의 機會均等要求, 民族의 한 權利다 自由新聞 19460101 雑誌
李克魯 三千萬 朝鮮同胞 關心의 標的, 美蘇共同委員會 昨日 開會:朝鮮은 朝鮮人의 손으로, 모든 것을 一任하라 自由新聞 19460117 雑誌
李克魯 國家‧民族‧生活‧言語 生活文化 2 生活文化社 194602 雑誌
李克魯 (새朝鮮의 문화는 어떠케:獨自的의 「얼」을 찻자) 國民의 質的向上:國語, 李克魯氏 談 朝鮮日報 19460218 雑誌
李克魯 朝鮮語學會서 非常國民會議 脫退 서울신문 19460219 雑誌
李克魯 (三一運動의 追憶) 上海에서 留學生總務로 朝光 12-1 朝鮮日報社出版部 194603 雑誌
이극노 한짜 페지에 대하여 한글문화 創刊號 한글문화보급회 194603 雑誌
이극노 한글노래 한글문화 創刊號 한글문화보급회 194603 雑誌
이극로 한글날을 맞으며 한글 11-1(통권 94) 한글社 194604 雑誌
李克魯 (庭訓巡禮) 우리 집의 庭訓,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宅 保育 創刊號 朝鮮保育社 194604 雑誌
고루 머리ㅅ말 한글 11-1(94호) 한글社 194604 雑誌
李克魯 (祝辭) 婦人의 燈臺가 되라 婦人 創刊號 194604 雑誌
李克魯 에스페란토와 民族語 한글 11-2(95호) 한글社 194605 雑誌
이극로 한얼의 첫걸음을 축복하며 한얼 創刊號 한얼몯음 194605 雑誌
李克魯 한글노래 臨時中等音樂敎本 中等音樂敎科書編纂委員會 19460501 雑誌
李克魯 [다시 찾은 우리 새명졀 어린이 날-새날의 임자 어린이를 씩씩히 키우자] 純眞과 自然性과 聰明, 훌륭한 朝鮮少年少女 素質 알라, 自由新聞 19460505 雑誌
李克魯 卑俗한 洋風逐出,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談 中外新報 19460524 雑誌
李克魯 表面化한 單獨政府說, 李承晩博士 演說 反響:도리혀 統一에 支障 잇다 自由新聞 19460606 雑誌
李克魯 文化統一에 支障,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談 現代日報 19460607 雑誌
李克魯 南朝鮮政府問題 李承晩博士도 또다시 言及:三千里統 一이 唯一 希望 서울신문 19460608 雑誌
李克魯 (美蘇 援助 업시 獨立 不能, 兩國 輿論 能動的으로 誘導하자) 續開될 줄 민는다,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釜山新聞 19460615 雑誌
李克魯 全的 廢止 要望 朝鮮健民會 李克魯氏談 中外新報 19460619 雑誌
李克魯 無限한 實力의 培養 國學 創刊號 國學專門學校 學生會編輯部 19460630 雑誌
李克魯 專門學校의 國語 入學試驗에 對하여 한글 11-3(96호) 한글社 194607 雑誌
李克魯 그들만의 것, 朝鮮健民會 李克魯氏 談 中央新聞 19460701 雑誌
李克魯 民主主義 精神에 矛盾, 朝鮮語學會長 李克魯氏 談 獨立新報 19460716 雑誌
李克魯 歷史的 事實로 보아 自主獨立할 能力잇다,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聲名 東光新聞 19460716 雑誌
李克魯 [설문] (먼저 政府를 세우자, 비록 記念塔이 億千이라도 無用) [問] 八·一五記念行事에 擧族的으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東亞日報 19460730 雑誌
李克魯 大倧敎報의 續刊에 對하야 敎報 記念號 大倧敎總本司 19460825 雑誌
李克魯 (開學期를 압두고 浮浸하는 國大案) 人民의 反對, 李克魯氏 談 現代日報 19460831 雑誌
李克魯 左右合作原則批判…諸氏:設問 民聲 2-10 高麗文化社 194609 雑誌
李克魯 [설문] 左右合作은 可能한가? 新世代 1-4 서울타임스社出版局 194609 雑誌
李克魯 前進하는 民族 中外情報 創刊號 中外情報社 194609 雑誌
李克魯 民族 將來를 爲하야 新生 4 新生社 194610 雑誌
李克魯 이미 세상을 떠난 朝鮮語學者들 京鄕新聞 194619 雑誌
李克魯 朝鮮語學會의 苦鬪史 自由新聞 194619 雑誌
李克魯 한글 頒布 五百周年 記念日을 마즈며 學生新聞 194619 雑誌
李克魯 마리산에 올라서 한글 11-5(98호) 한글社 194611 雑誌
李克魯 設問 一, 米蘇共委는 언제쯤 열리겟습니까 二, 共委가 續開된다면 그 成果가 어찌되겟습니까(成? 不成? 그理由), 三, 米蘇 兩代表者에게 주고 시프신 말슴(現在又는 續開 假定 當時) 新天地 1-11 194611 雑誌
李克魯 白頭山(1915.7) 詩歌集 아름다운江山 신흥국어연구소 194612 単行本
李克魯 三頭政治論 民聲 2-13 高麗文化社(여기도 사 바꿈) 19461201 雑誌
李克魯 美蘇共委 促開와 나의 提言(五) 急務는 障壁撤廢, 民族叛逆者排除도 絶對條件 獨立新報 19461210 雑誌
李克魯 (要路者에게 보내는 忠告의 말슴) 政治道德 높이고 三頭政治로 臨政 세우라:朝鮮健民會 李克魯氏 談 京鄕新聞 19461224 雑誌
李克魯 祝辭 兒童敎育 1 兒童敎育硏究會 194701 雑誌
李克魯 (民族的 大反省과 奮鬪) 爲公忘私로서 經國의 道를 踐實, 李克魯氏 談 漢城日報 19470101 雑誌
李克魯 設問 京鄕新聞 19470101 雑誌
李克魯 苦鬪四十年 乙酉文化社 19470201 単行本
이극노 어문운동의 회고 한글문화 창간호 한글문화보급회 194704 雑誌
李克魯 揮毫 東亞情報 創刊號 194704 雑誌
李克魯 漢字 廢止의 可否 朝鮮日報 19470402 雑誌
李克魯 航海大王 「申性模」 京鄕新聞 19470403 雑誌
李克魯 革命愛國鬪士 賤待는 憂慮事:健民會 李克魯氏 談 自由新聞 19470405 雑誌
李克魯 民族將來를 憂慮, 李克魯氏 談 獨立新報 19470405 雑誌
李克魯 『人道와 正義를 確信』, 金元鳳氏 等 軍裁에 李克魯氏 談 民報 19470405 雑誌
李克魯 非公開裁判은 不當, 朝鮮健民會 李克魯氏 談 獨立新報 19470417 雑誌
李克魯 [설문] 共委續開와 左右輿論 民聲 3-4 高麗文化社 194705 雑誌
李克魯 美蘇公約을 實踐, 美쏘共委 促成, 李克魯 談 中央新聞 19470515 雑誌
이극로 언어의 기원 중등국어교본 하:5·6학년 소용 군정청학무국 19470517 単行本
李克魯 故 李允宰氏 長男 等 極刑求刑, 李克로博士 特別辯論 家政新聞 19470612 雑誌
이극노 머리말(김종식, 『時調讀本』) 時調讀本 ㈜同心社 19470625 単行本
李克魯 反託 除外는 當然, 健民會 李克魯氏 談 獨立新報 19470708 雑誌
李克魯 反託鬪委系列 除外, 健民會 李克魯氏 談 朝鮮中央日報 19470708 雑誌
李克魯 合委와 共協意見, 團體整理當然, 共協主席 李克魯博士 談 朝鮮中央日報 19470719 雑誌
이극노 머리말(유열, 『원본 훈민정음 풀이』) 원본 훈민정음 풀이 조선어학회 19470815 単行本
李克魯 單政은 亡國을 意味, 美蘇共委는 期必코 成功, 愛國者投獄·親日派執權은 곧 顚覆, 來釜한 李克魯氏 記者에 所信披瀝 釜山新聞 19470819 雑誌
이극노 힘을 부림 새동무 9 194709 雑誌
李克魯 朝鮮國民運動의 理念과 靑年運動의 指針(一) 健民主義 東光 42 東光社 194709 雑誌
李克魯 共同宣言書:民族獨立의 絶對的 使命에 小異를 버리고 大同을 約束 漢城日報 19470909 雑誌
李克魯 民聯 發足에 關하야, 宣傳局長 李克魯氏 談 朝鮮中央日報 19471016 雑誌
李克魯 (祖國의 運命은 어데로, 朝鮮問題의 兩個提案, 各界輿論은 이렇다) 南北會合同時 撤兵하라, 民聯 李克魯氏 朝鮮中央日報 19471021 雑誌
李克魯 兩軍 撤兵은 當然 우리끼리 南北會議, 民聯準委 宣傳局長 談 朝鮮中央日報 19471023 雑誌
李克魯 兩軍撤兵을 要求, 單政前提의 總選擧는 反對, 民聯 李克魯氏 談 獨立新報 19471030 雑誌
李克魯 軍政의 延長建議는 浪說, 民聯 李克魯氏 談話 民主衆報 19471030 雑誌
李克魯 軍政延長建議, 虛說에 不過하다, 李克魯博士 談 釜山新聞 19471030 雑誌
李克魯 統一 願하는 政黨과 協力, 民聯 宣傳局長 記者團會見 談 釜山新聞 19471031 雑誌
李克魯 敎育朝鮮建設論 신교육건설(新敎育建設) 1-2 學生社 194711 雑誌
李克魯 듼 長官 歡迎談話:愛國者 登用하라, 民聯 李克魯博士 釜山新聞 19471104 雑誌
李克魯 時局과 나의 提案, 撤兵期日 明示한 印度 提案을 歡迎, 健民會 委員長 李克魯 朝鮮中央日報 19471105 雑誌
李克魯 實驗圖解 朝鮮語音聲學 雅文閣 19471115 単行本
李克魯 UN決定檢討는 當然, 民聯宣傳局長 李克魯氏 談 朝鮮中央日報 19471121 雑誌
李克魯 南北統一 不可能이라 假測키 싫다, 民聯 李克魯氏 談 독립신문 19471127 雑誌
李克魯 約憲保留에 贊意, 民聯 宣傳局長 談 朝鮮中央日報 19471127 雑誌
李克魯 單政陰謀粉碎하자, 當面問題 民聯 宣傳局長 談 獨立新報 19471204 雑誌
李克魯 UN決議協調, 民聯 宣傳局 談 中央新聞 19471204 雑誌
李克魯 統一政府樹立 主張, 民聯 談話 朝鮮中央日報 19471204 雑誌
李克魯 (韓國民主黨 政治部長 張德秀氏 怪漢에 被殺, 首都廳서犯人嚴探中) 民聯 李克魯氏 談 東亞日報 19471204 雑誌
李克魯 南北統一을 積極的 推進, 民聯 宣傳局長 談 民主衆報 19471212 雑誌
이극로 머리말(古文新釋에 대한 머리말) 古文新釋 (株式會社)東邦文化社 19471230 雑誌
李克魯 (送舊迎新의 辞(下)) 混亂의 敎訓 自由新聞 19471231 雑誌
李克魯 民聯의 新路線, 李克魯 代辨人 談 大韓日報 19480104 雑誌
李克魯 (UN委員団을 마지면서 그들에 보내는 朝鮮人民의 소리) 現狀調査에 不過, 民聯 李克魯 博士 朝鮮中央日報 19480110 雑誌
李克魯 統一없이는 獨立없다, 民族自主聯盟 談話를 發表 獨立新報 19480122 雑誌
李克魯 事大思想 버리고 統一戰線 배풀자, 民聯 宣傳局長 談話 釜山新聞 19480124 雑誌
이극노 丁亥 除夕詩 한글 13-1(103호) 한글사 194802 雑誌
동정 [新刊評] 읽고 느낌 한글 13-1(103호) 한글사 194802 雑誌
李克魯 朝鮮語 敎育 廢止에 대한 감상 한글 13-1(103호) 한글사 194802 雑誌
李克魯 外軍駐屯不願, 健民會委員長 談 釜山新聞 19480220 雑誌
李克魯 設問 民主朝鮮 4 中央廳公報部輿論局 政治敎育課 194803 雑誌
李克魯 (三一節에 생각나는 愛國者들) 義兵의 李大將 正義感과 血鬪精神 李克魯氏 談 自由新聞 19480301 雑誌
李克魯 恨嘆調와 打罵의 말,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談 獨立新報 19480311 雑誌
李克魯 (金九主席召喚과 輿論!) 미들 수 업다, 李克魯氏 談 平和日報 19480312 雑誌
李克魯 南北統一政府 위해 온 겨레가 밀고 나가자, 朝鮮語學會 理事·健民會 々長 李克魯博士 談 獨立新報 19480331 雑誌
李克魯 南北會談推進, 健民會서 决議 朝鮮日報 19480402 雑誌
李克魯 同族相殘招來, 寒心할 일이다, 李克魯氏 談 獨立新報 19480417 雑誌
李克魯 日本 再建과 民族의 進路 朝鮮中央日報 19480418 雑誌
李克魯 南北會談 成功을 確信, 李克魯氏 北行에 앞서 談話 新民日報 19480423 雑誌
李克魯 金九氏 等 主席團에, 南北連席會議에 李克魯氏 祝辭 漢城日報 19480425 雑誌
李克魯 李克魯氏 祝辭 朝鮮中央日報 19480425 雑誌
李克魯 自主統一에 邁進, 朝鮮民族의 政治理念確固, 李克魯氏 熱叫 獨立新報 19480425 雑誌
李克魯 美蘇兩軍即時撤兵과 單選反對問題俎上에 南北愛國者鳩首討論:南北共同會談 第三日 釜山新聞 19480425 雑誌
李克魯 朝鮮 民族性과 民主政治 開闢 78 開闢社 194805 雑誌
李克魯 나의 獄中回想記 刑政 2-2 (財)治刑協會 194805 雑誌
李克魯 世界에 자랑할 軍隊! 民族의 앞날을 保障, 南朝鮮要人들, 人民軍을 激讃-李克魯氏 新民日報 19480505 雑誌
李克魯 머리말(『世界偉人 世界富豪 成功實記』) 世界偉人 世界富豪 成功實記 모던出版社 19480630 単行本
李克魯 國語學論叢 正音社 19481130 単行本
이극로 自主獨立을 위하여 분투하자 雄辯學과 演說式辭指針 硏學社 19490320 単行本
李克魯 朝鮮健民會의 理念 雄辯學과 演說式辭指針 硏學社 19490320 単行本
리극로 창간사 조선어 연구 창간호 조선 어문 연구회 19490331 雑誌
고루 한글노래 東光新聞 19491009 雑誌
리극로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 조선 어문 연구회 19491125 単行本
리극로 1950년을 맞이하면서 조선어 연구 2-1 조선 어문 연구회 19500225 雑誌
리극로 토론 로동신문 19500306 雑誌
리극로 매국노들은 또다시 흉계를 꾸미고있다! 로동신문 19500426 雑誌
리극로 중국의 "새글자운동" 조선어 연구 2-2 조선 어문 연구회 19500515 雑誌
리극로 도살자 리승만도당은 피의대가를 갚아야한다!-김삼룡 리주하 량선생 체포에 항의하여 로동신문 19500526 雑誌
리극로 제二차망국선거의 시도를 걸음마다 폭로하며 온갖 수단방법을 다하여 그것을 철저히 파탄시키자 로동신문 19500528 雑誌
리극로 민족적 량심있는 인사들이라면 모두다 평화적 조국통일의 편에 가담하여 일어서라! 로동신문 19500605 雑誌
리극로 六월十九일에 소집되는 남조선 「국회」에서 조국전선의 평화적통일추진제의가 상정채택되여야한다 로동신문 19500614 雑誌
리극로 아직까지 원쑤의 편에남아있는자들이여 시기를 놓치지말고 인민의편으로 넘어오라! 로동신문 19500722 雑誌
리극로 (안보리사회에서의 조선문제에 대한 쏘련제안을 열렬히 지지한다) 쏘련대표의 제안을 즉시 채택하라 로동신문 19500901 雑誌
리극로 조선전쟁의 정전 및 화평담판 교섭에 대한 각계의 반향 민주조선 19510711 雑誌
리극로 조선 인민은 위대한 중국 인민의 피의 원조를 잊을 수 없다 로동신문 19520623 雑誌
리극로 온 세계 평화애호 인민들의 미제 교형리에 대한 격분의 목소리 로동신문 19520718 雑誌
리극로 이·웨·쓰딸린의 로작 ≪맑쓰주의와 언어학의 제 문제≫에 비추어 본 공화국 언어학의 정형과 그 당면 과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학보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312 雑誌
리극로 조선 인민의 문자-훈민정음 창제 五一○주년을 맞이하여 민주조선 19540115 雑誌
리극로 제네바 회의에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 대표단이 제출한 조선 문제의 평화적 조정에 대한 방안을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 대회에서 한 연설들-조선 건민회대표 민주조선 19540506 雑誌
리극로 평화적 조국 통일을 위한 우리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민주조선 19540716 雑誌
리극로 조선어 연구의 탁월한 선각자인 주시경 서거 四○주년 민주조선 19540728 雑誌
ЛиГыкно ВАРВАРСКОЕ НАСИЛИЕ НАД ЯЗЫКОМ(미개한 언어 폭력) Новая Корея(새조선) 9 Пхеньян : издательство Новая Корея 195409 雑誌
리극로 「유·엔 한국 통일 부흥 위원단」은 즉시 해체되여야 한다 민주조선 19541208 雑誌
리극로 평화적 조국 통일달성은 조선 인민의 숙망 로동신문 19551115 雑誌
리극로 최고 인민 회의 상임 위원회 리 극로 부위원장 일본 국회 의원단을 위하여 환영연 배설 로동신문 19561014 雑誌
리극로 조선 문’자의 창조적 계승 발전을 위하여 조선어문 1957.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언어문학 연구소 195701 雑誌
리극로 조선 말 력점 연구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 론문집 과학원 출판사 195711 単行本
ЛиГыкно ЛиГыкно Хунмин деным-наша гордость(훈민정음-우리의 자부심) Новости Кореи(조선의 소식) 4(※미확인) 195802 雑誌
리극로 소위 《6자모》의 비과학성 조선어문 1958-4 과학원 언어 문학 연구소 195806 雑誌
리극로 조선어 어음 괘도 해설서 교육도서출판사 1959 単行本
리극로 조선말의 악센트 말과 글 1960-8 과학원 출판사 196008 雑誌
리극로 그날은 다가 오고 있다 천리마 1961-9 196109 雑誌
리극로 천만 번 죽여도 죄가 남을 놈들! 문학신문 19620918 雑誌
리극로 북청방언의 조(調) 연구 조선어학 1963-3 과학원 언어 문학 연구소 196308 雑誌
리극로 체언에 붙는 접미사 《이》의 본질 - 용언형 접사설을 다시 제기함 조선어학 1964-3 사회 과학원 출판사 196405 雑誌
리극로 일기와 수양 새세대 1964-10 196410 雑誌
리극로 일제에게 또다시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제2의 <을사오적> 박정희 도당을 타도하라 로동신문 (※미확인) 1965? 雑誌
리극로 백두산에 올라서 조선문학 1965-8 196508 雑誌
리극로 존경하는 벗 신채호를 회상하여 문학신문 19660222 雑誌
후보 원사 리 극로 저 조선어 조 연구 사회 과학원 출판사 19660305 単行本
리극로 남조선에서 미일 침략자들을 몰아 내고 박 정희 매국도당의 파쑈 테로 통치를 분쇄하며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촉진하기 위하여 더욱 완강히 투쟁하자! 로동신문 19660610 雑誌
리극로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 문학신문 19660617 雑誌
리극로 잊을수 없는 스승 로동신문 19661221 雑誌
리극로 남북련석회의때를 회고하여 인민들속에서 6 조선로동당출판사 19671230 単行本
리극로 일본 사또반동정부의 《외국인학교제도법안》 조작책동을 분쇄하자 로동신문 19680308 雑誌
리극로 진실을 외곡하여 제놈들의 추악한 정치적목적을 달성하려는 미제와 박정희파쑈악당의 범죄적인 《반공》소동을 치솟는 민족적분노로 규탄한다 로동신문 19700313 雑誌
李克魯 南北連席会議の時を回顧して 統一評論 143 197704 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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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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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452012_28802.html https://kbdb.info/



주석


  1. 이극로의 생애 중 <출생과 성장>부터 <구미 시찰과 전국 일주>까지는 이극로의 자서전 『고투사십년』(을유문화사, 1947)의 「수륙 이십만리 주유기」를 기본 자료로 참고하였다. 해당 부분에서 인용 표시가 없는 문장은 「수륙 이십만리 주유기」(『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에서 가져온 정보임을 밝혀둔다.
  2.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34쪽(Kolu Li, “Lebenslauf”).
  3. 차민기, 「고루 이극로 박사의 삶」, 『지역문학연구』 2, 1998, 9쪽. 이는 이종무의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종무는 이극로의 맏형 이상로(李祥魯)의 장손이며 배제학교 재학 당시 이극로의 집에서 수년 간 기거하였다고 한다. 차민기, 같은 책, 10쪽.
  4.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1912년 4월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정황상 1911년으로 추정된다는 지적도 있다. 차민기, 「고루 이극로 박사의 삶 연구」,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96쪽.
  5.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284쪽.
  6. 이극로가 진학할 당시의 교명은 ‘사립동제의공전문학교(私立同济医工专门学校)’였으며 이 학교는 독일 의사 에리히 파울룬(Erich Paulun)이 1907년 설립‧경영한 학교이다.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67쪽.
  7. 이극로, 「(三一運動의 追憶) 上海에서 留學生總務로」, 『朝光』 12-1, 1946.3.
  8.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68-69쪽.
  9.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28쪽.
  10.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가 말하고 있는 ‘서양어’란 독일어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시기 이극로는 중국어와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였고 영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했다.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330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75-76쪽.
  11. 1945년까지 독일령 ‘슈테틴’이었으며 현재는 폴란드령 ‘슈체친’으로 부른다.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1쪽.
  12. 이극로, 「中國上海의 大學生活:中國上海에서 留學하던 때와 그 뒤」, 『朝光』 2-5, 1936.5, 148쪽.
  13. 이극로, 「中國上海의 大學生活:中國上海에서 留學하던 때와 그 뒤」, 『朝光』 2-5, 1936.5, 148쪽.
  14.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白林大學”(베를린대학)이라고 지칭한다. 이극로가 입학할 당시 교명은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Friedrich-Wilhelms-Universität, 현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였다.
  15.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289쪽(Kolu Li, “Lebenslauf”);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60쪽.
  16.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8쪽.
  17. 이극로, 「朝鮮語辭典과 朝鮮人」, 『別乾坤』 4-7, 1929.12; 「玉에서틔골르기 縷心刻骨半生獻身, 한글標準語査定에는 으뜸되는殊勳者 朝鮮語辭典編纂에血汗勞心: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조선일보』, 1937.1.1;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0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8-89쪽.
  18. 홍선표, 「1920년대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7, 2006, 446-447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0쪽.
  19.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8-154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쪽.
  20.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8-154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쪽.
  21.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9쪽, 151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473쪽.
  22.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66-196쪽;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한국인물사연구회, 2006, 338-34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4쪽.
  23.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한국인물사연구회, 2006, 341쪽(Kolu Li, 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
  24. 이극로가 ‘세계약소대회’라고 회고하는 이 대회는 반제국침략주의대연맹이 개최한 ‘Kongresses gegen Koloniale unterdrückung und Imperialismus’(영문 공식 명칭은 International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 국제 반식민압제·제국주의 대회)이다. 이극로, 조준희 옮김, 『고투사십년』, 아라, 2014, 151쪽.
  25.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81쪽.
  26. 이정은,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1999, 237쪽; 정규화, 『이미륵 박사 찾아 40년』, 범우, 2012, 71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에서 재인용.
  27. 이정은,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1999, 237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
  28.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
  29.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10-12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6-477쪽.
  30.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2006, 344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76쪽.
  31.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2006, 335쪽; 이극로, 조준희 옮김, 『고투사십년』, 아라, 2014, 82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47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68쪽(Li Kolu, “Aus dem Leben eines koreanischen Gelehrten,” 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 Jg.30, Berlin : Ostasiatische Studien, 1927, pp. 99-110.).
  32.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倫敦大學 政治經濟學部”라고 지칭한다.
  33.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83-484쪽.
  34.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10쪽, 307쪽.
  35.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11쪽. 1928년 5월 15일에 육성으로 녹음한 레코드(석지훈 발굴)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홈페이지에 남아 있다.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129253m.media,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129253m/f2.media,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1292527.media에서 청취 가능하며 이는 각각 Alphabet et sons du coréen (1), Sons du coréen (2), L'homme est dieu : extrait de Thyon-to-kyo-ri(조선 글씨와 조선 말소리(1), 조선 말소리(2), 인내천: 천도교리 발췌)이다. http://egloos.zum.com/veritasest/v/1964446; 조준희, 「고투 13년 : 『이극로 전집』 집필 회고와 유럽 정보」, 『근대서지』 20, 2019, 133-134쪽; 양효경, <"조선 글씨는 28자 올시다"…최초 한글 음성 자료>, MBC 뉴스 데스크, 2019.8.15. https://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452012_28802.html
  36. 공진항, 「잊지 못할 일 생각나는 사람들」, 『이상향을 찾아서』, 탁암공진항희수기념문집간행위원회, 1970, 603-604쪽.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296쪽에서 재인용.
  37.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8,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401-402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14-115쪽.
  38.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倫敦大學”이라고 지칭한다.
  39.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16쪽.
  40.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20-132쪽.
  41. 박용규, 「자료소개 : 국어가 민족의 생명, 가장 시급한 문제(이극로 박사의 국문 강연문, 『신한민보』, 1928.8.30.)」, 『형태론』 13-1, 2011, 165-169쪽.
  42. 「玉에서틔골르기 縷心刻骨半生獻身, 한글標準語査定에는 으뜸되는殊勳者 朝鮮語辭典編纂에血汗勞心: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조선일보』, 1937.1.1.
  43. 이극로, 「조선어 학회와 나의 반생」,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63쪽.
  44. 한말연구학회 편, 『건재 정인승 전집 6 국어운동사』, 도서출판 박이정, 1997, 106-107쪽. 정재환,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1945~1957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274쪽에서 재인용.
  45.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88-89쪽.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는 1931년 1월 6일 위원회를 열어, 회장으로 이우식을 추대하고 위원을 확대하면서 편찬 사무를 실질적으로 개시하게 된다. 리의도, 같은 책, 151-152쪽.
  46. 동아일보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의 숫자를 108인으로 보도하였는데 나열한 명단은 107명이었다. 한글학회, 『한글학회 100년사』, 한글학회, 2009, 528쪽.
  47. 정재환,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1945~1957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275쪽.
  48. 이극로, 「서약문을 교환하던 날」, 『조광』 5-7, 1939.7, 231-234쪽;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178-180쪽.
  49.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78쪽.
  50. 어휘의 수집‧풀이와 편집에 관한 일은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맡고, 표준어의 조사‧선정과 철자법의 통일에 관한 일은 조선어연구회에서 맡기로 1930년 1월 6일 결정되었다. 1936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업무를 조선어학회가 넘겨받아, 사전 편찬 사업의 주체가 조선어학회로 일원화되었다.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135쪽, 152쪽.
  51. 이극로, 「길돈사건 진상 조사와 재만 동포 위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54쪽.
  52. 이극로, 「길돈사건 진상 조사와 재만 동포 위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58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55쪽.
  53. 이극로, 「길돈사건 진상 조사와 재만 동포 위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54-62쪽.
  54.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금후」, 『한글』 3-10, 1935.12; 이극로, 「한글 발달에 대한 회고와 및 신전망」, 『조선중앙일보』, 1936.1.1.-1.4;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금후계획」, 『신동아』 6-1, 1936.1;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현상」, 『사해공론』 2-5, 1936.5; 이극로, 「조선어 학회와 나의 반생」, 『고투사십년』, 1947, 63-64쪽.
  55.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137쪽.
  56. 김윤경은 이극로가 개명하기를 주장하였다고 밝혔다. 김윤경, 「조선어학회 수난기」, 『한글』 11-1, 1946.4, 59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91쪽에서 재인용.
  57.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142쪽.
  58. 안석제 역, 「조선어학회 사건 함흥지방법원 예심 종결서 일부」,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76쪽.
  59. 『한글』은 1927년 2월부터 1928년 10월까지 ‘동인지’로 발간되었으며, 1932년 1월 9일 조선어학회는 ‘기관지’의 제호로 ‘한글’을 그대로 쓰기로 결정한다.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127쪽.
  60. 정재환,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1945~1957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276쪽.
  61. 이극로, 「조선어사전과 조선인」, 『별건곤』 4-7, 1929.12; 이극로, 「한글운동」, 『신동아』 5-1, 1935.1;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금후」, 『한글』 3-10, 1935.12; 이극로, 「한글 발달에 대한 회고와 및 신전망」, 『조선중앙일보』, 1936.1.1.-1.4;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금후계획」, 『신동아』 6-1, 1936.1;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현상」, 『사해공론』 2-5, 1936.5; 이극로, 「어문정리와 출판업」, 『박문』 1, 1938.10 등.
  62. 홍종욱, 「이인(李仁)이 회고한 해방 전야」, 『애산학보』 44, 2017, 231쪽.
  63. 안석제 역, 「조선어학회 사건 함흥지방법원 예심 종결서 일부」,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78-79쪽.
  64. 홍종욱, 「이인(李仁)이 회고한 해방 전야」, 『애산학보』 44, 2017, 234-238쪽. 이인은 일본의 방해로 계획이 좌절되었다고 회고하였고, 조선어학회 사건 예심종결결정문에 따르면 이우식이 자금을 제공하기 곤란해졌기 때문에 계획이 좌절되었다고 한다. 홍종욱, 같은 글, 237쪽.
  65.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20쪽; 한정호, 「이극로의 ‘고투 40년’ 문학살이 연구 : 시가 작품을 중심으로」, 『영주어문』 30, 2015, 149쪽;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299쪽.
  66.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20-21쪽; 조준희, 「이극로의 「미지의 한국」과 「널리 펴는 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8, 2016, 376-379쪽.
  67. 안석제 역, 「조선어학회 사건 함흥지방법원 예심 종결서 일부」,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81쪽.
  68. 박용규, 「해방 후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위상」, 『동양학』 45, 2009, 141-142쪽.
  69. 『한글』 11-1, 1946.4, 62-63쪽. 박용규, 「해방 후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위상」, 『동양학』 45, 2009, 141쪽에서 재인용.
  70. 이극로, 「조선문화와 한글」, 『중앙신문』, 1945.11.1; 이극로, 「한자폐지에 대하여」, 『한글문화』 창간호, 1946.3; 「한자폐지의 가부」, 『조선일보』, 1947.4.2; 『동아일보』, 1945.12.17; 『자유신문』, 1945.12.22. 박용규, 「해방 후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위상」, 『동양학』 45, 2009, 147-151쪽에서 재인용.
  71. 한글문화보급회, 『한글문화』 창간호, 1946.3, 10쪽; 이응호, 『미 군정기의 한글운동사』, 성청사, 1974, 208쪽. 정재환, 『한글의 시대를 열다 : 해방 후 한글학회 활동 연구』, 경인문화사, 2013, 43쪽에서 재인용.
  72. 유열, 「스승님의 걸어오신 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86쪽;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202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85쪽.
  73. 『한글』 1946.4, 66쪽; 이극로, 「한글 기념일과 한글노래- 한글을 배워서 건국에 헌신하자」, 『백민』 창간호, 백민문화사, 1945.12, 30쪽. 박용규, 「해방 후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위상」, 『동양학』 45, 2009, 145쪽에서 재인용.
  74. 유열, 「스승님의 걸어오신 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88쪽; 박용규, 「해방 후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위상」, 『동양학』 45, 2009, 144쪽; 「연보」,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209쪽.
  75. 유열, 「스승님의 걸어오신 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87-88쪽.
  76. 조선건민회. 「성명서」, 1946.6.20;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236쪽.
  77. ‘머리 말’, ‘수륙 이십만리 주유기’, ‘길돈사건 진상 조사와 재만 동포 위문’, ‘조선어 학회와 나의 반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78. 1957년 전 6권으로 완간된다.
  79. 이극로가 북한에 잔류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제출되었다. 박지홍의 증언에 따르면 이극로는 북에 와서 사전을 편찬해달라는 김두봉의 편지를 받은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고 한다. 정재환,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1945~1957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37-39쪽.
  80. 이극로는 이후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기, 제4기 대의원을 역임하였다.
  81. 이극로의 생애 중 <북한에서의 활동>은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Ⅳ 북한 편』, 소명출판, 2019, 311쪽의 연표를 기본 자료로 참고하였다.
  82. 고영근, 『통일시대의 어문문제』, 길벗, 1994, 95쪽; 이준식, 「지식인의 월북과 남북 국어학계의 재편 : 언어정책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168, 2014, 15-16쪽.
  83. 이준식, 「지식인의 월북과 남북 국어학계의 재편 : 언어정책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168, 2014, 16쪽.
  84. 이준식, 「지식인의 월북과 남북 국어학계의 재편 : 언어정책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168, 2014, 16쪽.
  85. 리극로, 「창간사」, 『조선어 연구』 창간호, 1949.3, 3쪽.
  86.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Ⅳ 북한 편』, 소명출판, 2019, 287쪽;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43쪽.
  87.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Ⅳ 북한 편』, 소명출판, 2019, 288쪽;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44쪽.
  88.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Ⅳ 북한 편』, 소명출판, 2019, 286쪽.
  89. 이극로, 「조선말 임자씨의 토(一)」, 『한글』 3-1, 1935.1, 156쪽.
  90.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4쪽.
  91. 고영근, 『역대한국문법의 통합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113쪽;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5쪽.
  92.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51쪽;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5쪽.
  93.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7쪽.
  94.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7쪽.
  95.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4쪽.
  96.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75쪽.
  97. 조남호, 「이극로의 학문세계」,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162-163쪽;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76쪽. 이극로의 견해는 대체로 조선어학회와 일치하였지만, 이러한 주장은 조선어학회의 공식적 견해로 수용되지 못했다. 조남호, 같은 글, 163쪽.
  98. 조남호, 「이극로의 학문세계」,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159쪽;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76-277쪽.
  99. 이상억, 「이극로(1947), 『실험도해 조선어음성학』」 『주시경학보』 3, 1989; 서민정, 「주변부 국어학의 재발견을 위한 이극로 연구 – 국가어로서 ‘국어’ 형성에서 역할을 중심으로」, 『우리말연구』 25, 2009;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100. 이극로, 「머리말」, 『實驗 圖解 朝鮮語 音聲學』, 아문각, 1947.
  101. 이진호, 『국어 음운 교육 변천사』, 도서출판 박이정, 2009, 134쪽.
  102. 조남호, 「이극로의 학문세계」,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149쪽.
  103.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79쪽.
  104. 리극로, 「머리말」, 『실험 도해 조선어 음성학』, 조선 어문 연구회, 1949.
  105. 리극로, 「머리말」, 『실험 도해 조선어 음성학』, 조선 어문 연구회, 1949.
  106. 리극로, 「머리말」,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 론문집』, 과학원출판사, 1957.
  107. 리극로, 「머리말」, 『과학원 창립 5주년 기념 론문집』, 과학원출판사, 1957.
  108. 고영근,「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48쪽.
  109. 리극로, 「머리말」, 『조선어 조연구』, 사회 과학원 출판사, 1966.
  110. 리극로, 「머리말」, 『조선어 조연구』, 사회 과학원 출판사,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