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봉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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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봉(金枓奉)
출처 :
 
한글명 김두봉 한자명 金枓奉 영문명 Kim Du Bong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889년 몰년 1960년 출신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전공 국어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공산주의에 뿌리를 두고 활동한 독립운동가. 언론인, 한글학자로 활동했으며 독립 후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김일성 종합대학기관의 초대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권력투쟁에 패배하여 숙청당했다.


생애

서울로 상경하다

1889년 2월 16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동부리 87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 대한 거부감과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일본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를 거부하였다. 학교를 가지 않은 그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한학[1]과 한문을 배웠다. 그렇게 자란 김두봉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학문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했고, 1908년 단신으로 상경하여 기호학교기관[2]에 입학하고 이후 배재학당기관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1913년 대동청년단기관이 일본 경찰에 적발되면서 배재학당을 중퇴하고, 이후 주시경인물의 수제자로서 말모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한글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가던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기관, 중앙고등보통학교기관 등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다.


상해로의 망명

교사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919년 3.1운동사건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 일본 경찰을 피해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기관에 잠시 몸담아 활동하면서 상하이 인성학교[3]에서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1935년 김원봉인물과 함께 한국민족혁명당기관을 창당하였고 중국 국민당, 공산당 모두와 연대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1942년 4월 연안으로 이동하여 조선독립동맹기관을 결성하였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기관를 개편하여 조선의용군기관을 조직하였다.


국내로의 복귀

광복 후 김두봉은 평양으로 복귀했다. 1946년 2월 조선신민당기관을 결성하였고,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김일성과 함께 남북협상사건에 참여하였지만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북한 정권에 남았다. 북한 내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 의장,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연안파의 수장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북한에서의 말년

연안파 수장이었던 김두봉은 8월 종파사건사건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어야했다. 8월 종파사건 이후 김두봉은 반혁명종파분자로 몰려 1958년 3월 조선노동당에서 제명되어 숙청되었다. 항일 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진 않았지만, 지방의 협동농장으로 추방당해 노역에 종사하며 씁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연구

주시경의 수제자로서 국어사전 말모이서적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한글학자로서 연구를 계속하여 조선말본서적, 깁더조선말본서적 등을 펴냈다.


저서 목록

연번 저서명 간행연월일
A001 조선말본 1916
A002 깁더조선말본 1934. 2. 10

데이터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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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부산역사문화대전

주석


  1. 조선시대 역학 중 하나인 중국어
  2. 현 중앙고등학교의 전신
  3. 1917년 상해에서 설립되었던 초등과정의 학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