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작품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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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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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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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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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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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던 박동진의 건축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적 성격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이 같은 시대적 한계 및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그가 출판한 글에서도 확인되는데, 실제 디자인에서보다 개혁적 입장이 훨씬 뚜렷하다. 현대건축의 추세가 포함된 동아일보 연재 우리 주택에 대하야(1931.3.14∼4.5; 23일 중 16일)에서도 물론이다. 이 글은 재래 주택의 현황을 건물배치, 평면, 외관 등으로나눠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며 합리적 개선 방안을 논한다. 그 논지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합리화·국제화돼가는 ‘현대건축의 추세’인 셈인데, 1회차 글에서 “현대에 있어서 우리 재래 생활방식의 가치는 거의 0이라고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상당히 과격한 견해를 밝혔다. 이런 개혁적 입장은 같은 해 12월 신동아<sup>新東亞</sup>에 출판한 곡선<sup>曲線</sup>과 건축미<sup>建築美</sup>에서 과학적·경제적 관점에서 필연적이지 않은 곡선을 거부하는 시각으로 나타났고, 10년후에 나온 춘추<sup>春秋</sup>의 북한주택개혁이론<sup>朝鮮住宅改革論</sup>(1941.8)은 우리주택에 대하야 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온돌폐지를 포함해 재래 주택의 완전한 개혁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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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후자는 일제의 식민사관마저도 노출하는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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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현대건축의 흐름을 적극 수용하려는 그의 일관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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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본고의 고찰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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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현대건축의 추세 의 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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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르누보와 제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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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중심으로 도입부를 서술한 후, 당시 건축계에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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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두각을 나타내던 네 개 국가인 네덜란드, 독일, 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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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러시아의 건축 경향에 대해 차례로 정보를 제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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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형식이다. 이번 절에서는 박동진이 이 같은 유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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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운동을 실제 어떻게 서술했는지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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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부: 박동진은 도입부 첫 문장에서 글의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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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밝힌다. “건축에 대한 전문적 방면을 말하려는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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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주택에 대한 그 경향의 진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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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기 위하야 남들의 하는 일과 그 주장을 알 필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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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신건축의 시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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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파리 중심의 ‘아르누보’와 빈 중심의 ‘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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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으로 보고 둘을 비교한다. 그에 따르면 아르누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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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기하학적 형태를 극복했지만 자연을 모사한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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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적 표현의 자유’로 인해 진로가 막혔다. 반면 제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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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비모사적 표현’, ‘직선과 기하학적 구성’ 등으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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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일신했기에 이후의 운동으로 생명을 이어갔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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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술할 국가별 건축운동이 제체션의 흐름 위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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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것이다. 여기서 박동진은 ‘세세숀의 거장’으로 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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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를 거론하며 “예술은 필요 외에 배우(配偶)를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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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다”는 그의 표어를 음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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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和蘭의 新運動’: 박동진이 서술하는 첫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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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다. 그는 근대건축에 대한 이 나라의 ‘명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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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가 예술에 대한 열정에 기인한 것이라 운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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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다소 산만한 문장을 이어가는데, 결국 네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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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신운동의 선봉 베를라헤로 초점을 모았다. 박동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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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고딕식의 외면적 모방’과 ‘장식’ 등을 부정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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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새로운 진로를 개척했다고 본다. 그리고 “건축은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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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구조, 형태 차등에 의한 종합예술이다”라는 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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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축뿐만 아니라 예술 전 영역에 영향을 줬다고 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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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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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편, 글에는 언급이 없었지만 오우트가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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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에크 집합주택(1927) 사진이 도판으로 삽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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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獨逸의 建築趣向’: 독일에 대해서는 일차대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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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대두된 ‘표현파’ 건축을 먼저 길게 설명한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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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은 예술의 주관화에만 집착한 표현파가 구조,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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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와 같은 “건축으로서의 근본을 망각”해 쇠락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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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 그 반동으로 제창된 것이 ‘국제건축’이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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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만 국제건축에 대한 서술은 상대적으로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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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이것이 ‘새로운 본질적 건축정신’의 발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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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모든 작품에 공통적이면서도 각 국민성에도 합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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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구성의지’가 여기 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섹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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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본문에 언급이 없던 한스 샤룬의 슈투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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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트 주택전 소주택(1927) 사진이 도판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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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佛蘭西의 建築向路’: 당대 프랑스 회화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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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로 섹션을 시작한 박동진은 2차원적 회화보다 3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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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적 건축이 ‘더 큰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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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에펠탑의 의의를 잠시 언급한 후, ‘세계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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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의 총아’ 르코르뷔지에의 출현을 내세우며 나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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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모두를 그에게 할애했다. 먼저 그는 “극단으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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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 건축에까지 변화된” 경향을 르코르뷔지에의 ‘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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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로 연계시킨다. 그리고는 “집은 살기[住居] 위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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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다”라는 말이 함축하는 현대적 시공간 개념 및 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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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비행기 등 기계의 합리성이 ‘새로운 미의 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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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됨으로써 전통양식으로부터 탈피했다고 서술한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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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야말로 프랑스 건축이 “구주제국(歐洲諸國)의 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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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건축을 압도”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도판으로는 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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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뷔지에의 가르셰 주택(1928) 사진이 실렸는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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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마찬가지로 본문에는 언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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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露西亞의 構成主義’: 이 마지막 섹션에서 박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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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쏘베트 연방’을 ‘현대 건축이론의 최첨단적인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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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규정한다. 1917년 사회혁명으로 ‘뿌르조아의 완롱(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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弄)’이었던 예술이 ‘푸로레타리아의 실생활’로 돌아온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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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 ‘엄정한 구성주의’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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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성파의 속성으로 ‘사회성, 산업주의, 예술공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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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 기계화의 물질적 촌요 숭배, 구조욕, 대규모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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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앙’을 거론하며, 이것이 콘크리트·철·유리 같은 재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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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 근거해 기하학적 곡선과 입체로 다룬 대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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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무전탑·작업소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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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필요’, ‘충분’이 있을 뿐”인데, 이로써 “극단으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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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공업의 융합을 실현”하게 됐다는 것이다. 박동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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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파의 ‘구축형성의 진리’와 ‘기능주의’에서 ‘신건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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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 및 ‘예술로서의 건축’의 가능성을 보는데, 이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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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건축’을 그들의 ‘이상(理想)을 향한 진전’으로 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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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맺는다. 구성주의에 대한 서술은 가장 구체적인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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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도판이 삽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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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박동진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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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박동진의 서술을 그대로 따라가며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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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이제 이를 일차적 논평과 함께 종합해보자. 박동진
 +
은 현대건축의 시작을 19세기 말 아르누보와 제체션부
 +
터로 보되, 후자를 긍정하며 이후의 흐름이 거기서 나온
 +
것으로 여긴다. 특히 건축을 포함한 예술에서 ‘필요’의
 +
우선성을 강조한 바그너의 모토가 제시된 것은 근대건
 +
축 초기의 기능주의적 이념이 전제됐다는 점에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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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 제체션 이후의 흐름으로 서술된 네 나라의 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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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중 첫째인 네덜란드의 신운동은 베를라헤 한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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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소개로 귀결됐는데, 장식을 부정하는 대신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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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형태’를 건축의 주요 요인으로 본 점이 상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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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베를라헤의 ‘목적’은 바그너의 ‘필요’와 자연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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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경우 표현파의 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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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비판에 이어 국제건축이 대안처럼 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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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제건축의 핵심 이념에 대한 적확한 서술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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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고 그로피우스 및 바우하우스에 대한 언급이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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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이 발견된다. 네덜란드 섹션이 베를라헤로 모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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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이상으로 프랑스 섹션은 르코르뷔지에에 대한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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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를 이뤘는데,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는 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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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뷔지에의 기계 비유와 합리주의에 대한 설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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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자세함은 그의 영향력에 대한 방증이라 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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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만 한 나라의 건축경향에 대한 서술이 더 포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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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것은, 전술했듯 러시아 섹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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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주의가 대두된 사회적 배경과 결과로서의 건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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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에 더해, 그 전망까지 제시됐기 때문이다. 그가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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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아르누보와 제체션에서 출발해
 +
네덜란드로부터 독일과 프랑스를 거쳐 ‘현대 건축이론의
 +
최첨단적’ 러시아에까지 이르는 ‘현대건축의 추세’는 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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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층적 경향을 보이니, 국가별 병렬적 구성 속에서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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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의 매끈한 내러티브가 내포됐다고도 볼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대한 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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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서술은 너무 개괄적이기도 하고 피상적이어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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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인식이 충분했다고 보기는 아직 어렵다. 각 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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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별로 핵심을 짚기도 했지만 일부만을 파편적으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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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한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예컨대, 1930년대로 접어
 +
든 네덜란드에 대해서라면 이미 연로한 베를라헤(1856
 +
∼1934) 못지않게 그의 후계자들이 로테르담 ‘더 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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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De Stijl)’ 파의 추상적 경향과 암스테르담 ‘벤딩겐
 +
(Wendingen)’ 파의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괄목했던 상
 +
황을 조명했을 법하다. 이 나라의 인상에 대한 낭만적
 +
서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대신 말이다.
 +
11) 독일의
 +
국제건축을 논하며 그로피우스나 바우하우스를 언급하
 +
지 않은 점은 이미 지적한 바인데, 네덜란드의 경우보다
 +
더 뜻밖이라 하겠다. 또한 도판을 삽입하면서도 본문에
 +
실제 디자인 사례가 서술되지 않음으로 인해, 당대 건축
 +
개념의 구체적 적용에 대한 이해를 확인할 수 없음도
 +
아쉽다.
 +
12) 도판은 자체만으로도 신건축 흐름을 보여주
 +
 
 +
는 역할을 했겠지만 말이다. 사실 박동진은 글 첫머리에
 +
이미 자신이 ‘전문적’ 논의를 의도하지 않음을 전제하긴
 +
했다. 세계건축의 신경향을 보임으로써 자기 주택개량
 +
론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런 소기의 목
 +
적은 달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건축의 추세 만을
 +
떼어놓고 볼 때 자체로서 의의가 큼에도 불구하고 인식
 +
의 시차와 한계가 노출됨은 결국 박동진이 처했던 일제
 +
강점기라는 시대적 제약의 발로라 할 수 있다.
 +
 
 +
박동진의
 +
현대건축의 추세 는 자기 주택개량론을 위한 일간지
 +
연재물의 한 챕터로 삽입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
 +
이 목적이었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약된 지면 내의
 +
개괄적 서술만이 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
바는 1931년의 이 글이 조선 건축계의 서양 근대건축
 +
에 관한 사실상의 첫 텍스트여서 아직 그 지식이 충분
 +
히 구비되지 못한 때 작성됐다는 점일 것이다.
 +
 
 +
이런 맥락과 앞 장의 서술 위에
 +
둘의 인식과 그 의미를 비교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첫째, 두 사람 인식의 공통 바탕을 먼저 보건대, 이들
 +
은 모두 ‘건축’을 ‘예술’로 인식했거나 최소한 ‘예술로서
 +
의 건축’을 서술 대상으로 했다. 그러는 가운데 서양 근
 +
대건축운동의 주류 경향을 적극 긍정한다. 이들에게 주
 +
류는 장식과 주관의 표현성을 극복한 합리주의와 기능
 +
주의였으며, 공통의 좌표는 결국 국제주의였다고 할 수
 +
있다. 한편,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시작을 19세기 말의
 +
아르누보와 제체션에서 보되, 후자의 바그너야말로 이후
 +
건축운동의 출발점이라 인식한 점도 유사하다. 두 사람
 +
공히 ‘예술’이 ‘필요’의 결과라는 바그너의 모토를 핵심
 +
이념으로 인용했다. 다만, 홍윤식은 아르누보와 제체션
 +
의 뿌리를 19세기 중반 영국의 공예운동으로 여기며 이
 +
를 상술함으로써 확장된 인식을 선보였다.
 +
 
 +
둘째, ‘국가’에 따라 병렬 구성된 박동진의 텍스트는
 +
‘운동’의 흐름에 따른 홍윤식의 텍스트보다 서사 구조가
 +
훨씬 단편적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름의 내적 흐름을
 +
찾아낼 수 있다. 이를 부각시키자면, 표현파의 ‘주관’을
 +
떠난 ‘공통’의 국제건축에 이어 르코르뷔지에의 ‘합리주
 +
의’가 ‘새로운 미의 규범’으로 세계를 풍미했고, 러시아
 +
구성파가 예술과 이론을 극단적으로 융합해 ‘건축이론의
 +
최첨단’을 달렸다는 구도다. 반면 홍윤식은 구성파를 표
 +
현파보다도 더 평가절하 하면서 르코르뷔지에와 그로피
 +
우스를 양대 건축가로 본다. 그러면서도 전자의 형식주
 +
의적 측면 등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내세우는 한편으로,
 +
후자의 국제건축이야말로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종합이
 +
자 귀결이라는 인식을 나타냈다. 박동진의 텍스트에서
 +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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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볼 때 박동진의
 +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은 아무래도 아직 파편적이고
 +
피상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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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전체를 종합컨대, 두 사람의 서술은 1931년
 +
과 1937년 당시의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대한 인식을 보
 +
여준 조선 건축계의 드문 자료라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
 +
로 의미가 크다. 더구나 각각은 당대 조선의 건축계와
 +
대중에 나름의 신선한 지식을 제공했다고 판단되는데,
 +
이로써 두 사람은 최신 건축과 관련한 조선인 전문가로
 +
각인됐을 것이다. 글의 의도처럼 박동진이 자기 주택개
 +
량론을 뒷받침하고, 홍윤식이 세계 건축예술의 동향을
 +
바탕으로 경성의 신건축을 이해할 발판을 마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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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다. 하지만 더 큰 의의는 전술했던 둘 사이 6년여
 +
간 근대건축에 대한 인식의 진전에 있고, 이것이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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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 조선 건축계의 인식을 대변한다는 사실이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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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는 일제강점기 전체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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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의 현대건축의 추세 (1931.3)와 홍윤식의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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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건축예술사상의 동향 (1937.9)은 1930년대 조선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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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에서 나온,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관한 한국 최초의
 +
역사서술적 성격의 글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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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8일 (금) 12:18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박성현(GNU2025))이 작성했습니다.




박동진(朴東鎭)
출처 :
 
한글명 박동진 한자명 朴東鎭 영문명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899년 몰년 1981년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 전공 건축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한국의 대표적 1세대 건축가 중 한 명이다.[1] 석조건축 혹은 고딕부흥식의 어휘를 자기 브랜드로 나타냈으며, 기능주의 건축을 추구했다.[2] 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던 박동진의 건축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적 성격이 특징적이다.[3]


생애


출생 및 교육

평안북도 정주 출생이다.[4] 1915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에 입학하였으나, 재학 중 3·1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재입학하여 1924년에 졸업하였다.[5] 졸업 후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수(建築技手)로 들어가 많은 업무를 담당하여 기량을 닦았으며, 1936년 기사(技師)로 승진하였다.[6] 이곳에서 그는 대전지방법원 등 몇몇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전하지만 그의 역할을 논하기에는 한계가 크다.[7] 이 기간 그에게 더 중요한 프로젝트는 보성전문 학교 본관(1933∼34)과 도서관(1935∼37)으로 대표되는 여러 개인 작업이었다.[8]


조선총독부 시절

조선총독부에서 15년을 근무하며 근대적 건축술을 익혔다.[9] 관직에 있을 때인 1932년경부터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본관과 도서관의 설계를 시작으로 많은 교육시설을 설계하였는데, 이때의 대표작으로는 조선일보사옥(1933∼1934)·아서원(1934)·오산중학교(1935∼1936)·중앙중학교(1936∼1937)·명신중학교(1937∼1939)·대전지방법원(1939) 등이 있다.[10]


조선총독부 사임 후

1940년 총독부 사임 후 태평건물주식회사, 박동진건축연구소, 기신건축연구소를 설립해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명륜동 자택(1943), 영락교회(1946∼50), 남대문교회(1955∼69) 등에 석조건축 혹은 고딕부흥식의 어휘를 자기 브랜드로 나타냈다.[11] 하지만 이런 중에도 그는 조선일보사(1934∼35), 고려대학교 여학생회관(1959) 등을 통해 근대 기능주의로의 전이를 시사했고, 고려대학교 과학관(1959∼60)과 이공대학 본관(1957∼64) 등에서 전형적 기능주의 건축을 보여줬다.[12]


광복 후

광복 후 1950년 태평건물주식회사 사장직을 사임하고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 청구대학 건축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53년 박동진건축연구소를 개설하였다.[13] 1960년 기신건축연구소(紀新建築硏究所)로 발전시켜 계속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미국건축가협회의 초청으로 1964년 4월부터 1년간 미국 및 유럽의 건축계를 시찰하고 돌아왔다.[14]





연구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던 박동진의 건축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적 성격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이 같은 시대적 한계 및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그가 출판한 글에서도 확인되는데, 실제 디자인에서보다 개혁적 입장이 훨씬 뚜렷하다. 현대건축의 추세가 포함된 동아일보 연재 우리 주택에 대하야(1931.3.14∼4.5; 23일 중 16일)에서도 물론이다. 이 글은 재래 주택의 현황을 건물배치, 평면, 외관 등으로나눠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며 합리적 개선 방안을 논한다. 그 논지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합리화·국제화돼가는 ‘현대건축의 추세’인 셈인데, 1회차 글에서 “현대에 있어서 우리 재래 생활방식의 가치는 거의 0이라고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상당히 과격한 견해를 밝혔다. 이런 개혁적 입장은 같은 해 12월 신동아新東亞에 출판한 곡선曲線과 건축미建築美에서 과학적·경제적 관점에서 필연적이지 않은 곡선을 거부하는 시각으로 나타났고, 10년후에 나온 춘추春秋의 북한주택개혁이론朝鮮住宅改革論(1941.8)은 우리주택에 대하야 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온돌폐지를 포함해 재래 주택의 완전한 개혁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갔다.

8) 후자는 일제의 식민사관마저도 노출하는 한편 으로, 현대건축의 흐름을 적극 수용하려는 그의 일관된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본고의 고찰 대상 인 현대건축의 추세 의 바탕이다.


9) 아르누보와 제체션 을 중심으로 도입부를 서술한 후, 당시 건축계에서 가 장 두각을 나타내던 네 개 국가인 네덜란드, 독일, 프랑 스, 러시아의 건축 경향에 대해 차례로 정보를 제공하 는 형식이다. 이번 절에서는 박동진이 이 같은 유럽의 근대건축운동을 실제 어떻게 서술했는지 따라가 보자.


(1) 도입부: 박동진은 도입부 첫 문장에서 글의 의도 를 밝힌다. “건축에 대한 전문적 방면을 말하려는 목적” 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주택에 대한 그 경향의 진로를 정하기 위하야 남들의 하는 일과 그 주장을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신건축의 시작을 19세기 말 파리 중심의 ‘아르누보’와 빈 중심의 ‘세세 숀’으로 보고 둘을 비교한다. 그에 따르면 아르누보는 이전의 기하학적 형태를 극복했지만 자연을 모사한 ‘곡 선적 표현의 자유’로 인해 진로가 막혔다. 반면 제체션 은 ‘비모사적 표현’, ‘직선과 기하학적 구성’ 등으로 예 술을 일신했기에 이후의 운동으로 생명을 이어갔다. 즉, 후술할 국가별 건축운동이 제체션의 흐름 위에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박동진은 ‘세세숀의 거장’으로 오토 바그너를 거론하며 “예술은 필요 외에 배우(配偶)를 모 른다”는 그의 표어를 음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2) ‘和蘭의 新運動’: 박동진이 서술하는 첫 나라는 네덜란드다. 그는 근대건축에 대한 이 나라의 ‘명성과 가치’가 예술에 대한 열정에 기인한 것이라 운을 뗀다. 그리고는 다소 산만한 문장을 이어가는데, 결국 네덜란 드 신운동의 선봉 베를라헤로 초점을 모았다. 박동진은 그가 ‘고딕식의 외면적 모방’과 ‘장식’ 등을 부정함으로 써 새로운 진로를 개척했다고 본다. 그리고 “건축은 목 적, 구조, 형태 차등에 의한 종합예술이다”라는 그의 말 이 건축뿐만 아니라 예술 전 영역에 영향을 줬다고 긍 정한다. 10) 한편, 글에는 언급이 없었지만 오우트가 설계 한 호에크 집합주택(1927) 사진이 도판으로 삽입됐다.

(3) ‘獨逸의 建築趣向’: 독일에 대해서는 일차대전 이 후 대두된 ‘표현파’ 건축을 먼저 길게 설명한다. 그러나 박동진은 예술의 주관화에만 집착한 표현파가 구조, 재 료와 같은 “건축으로서의 근본을 망각”해 쇠락했다고 본다. 그 반동으로 제창된 것이 ‘국제건축’이라는 것이 다. 하지만 국제건축에 대한 서술은 상대적으로 짧다. 요약하자면, 이것이 ‘새로운 본질적 건축정신’의 발로이 며, 모든 작품에 공통적이면서도 각 국민성에도 합치하 는 ‘구성의지’가 여기 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섹션과 마찬가지로 본문에 언급이 없던 한스 샤룬의 슈투트가 르트 주택전 소주택(1927) 사진이 도판으로 들어갔다.

(4) ‘佛蘭西의 建築向路’: 당대 프랑스 회화에 대한 서술로 섹션을 시작한 박동진은 2차원적 회화보다 3차 원적 건축이 ‘더 큰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말한 다. 그리고 에펠탑의 의의를 잠시 언급한 후, ‘세계 건 축계의 총아’ 르코르뷔지에의 출현을 내세우며 나머지 지면 모두를 그에게 할애했다. 먼저 그는 “극단으로 무 장식 건축에까지 변화된” 경향을 르코르뷔지에의 ‘합리 주의’로 연계시킨다. 그리고는 “집은 살기[住居] 위한 기 계다”라는 말이 함축하는 현대적 시공간 개념 및 기선· 자동차·비행기 등 기계의 합리성이 ‘새로운 미의 규범’ 이 됨으로써 전통양식으로부터 탈피했다고 서술한다. 이 것이야말로 프랑스 건축이 “구주제국(歐洲諸國)의 재래 의 건축을 압도”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도판으로는 르코 르뷔지에의 가르셰 주택(1928) 사진이 실렸는데, 앞에서 와 마찬가지로 본문에는 언급이 없었다.

(5) ‘露西亞의 構成主義’: 이 마지막 섹션에서 박동진 은 ‘쏘베트 연방’을 ‘현대 건축이론의 최첨단적인 나라’ 로 규정한다. 1917년 사회혁명으로 ‘뿌르조아의 완롱(玩 弄)’이었던 예술이 ‘푸로레타리아의 실생활’로 돌아온 이 래, ‘엄정한 구성주의’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구성파의 속성으로 ‘사회성, 산업주의, 예술공업의 융합, 기계화의 물질적 촌요 숭배, 구조욕, 대규모에의 갈앙’을 거론하며, 이것이 콘크리트·철·유리 같은 재료를 물리학에 근거해 기하학적 곡선과 입체로 다룬 대규모 극장·무전탑·작업소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오 직 ‘필요’, ‘충분’이 있을 뿐”인데, 이로써 “극단으로 예 술과 공업의 융합을 실현”하게 됐다는 것이다. 박동진은 구성파의 ‘구축형성의 진리’와 ‘기능주의’에서 ‘신건축양 식’ 및 ‘예술로서의 건축’의 가능성을 보는데, 이 ‘의식 적 건축’을 그들의 ‘이상(理想)을 향한 진전’으로 여기며 글을 맺는다. 구성주의에 대한 서술은 가장 구체적인 대 신, 도판이 삽입되지 않았다.

2-3. 박동진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지금까지 박동진의 서술을 그대로 따라가며 요약했다 면, 이제 이를 일차적 논평과 함께 종합해보자. 박동진 은 현대건축의 시작을 19세기 말 아르누보와 제체션부 터로 보되, 후자를 긍정하며 이후의 흐름이 거기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특히 건축을 포함한 예술에서 ‘필요’의 우선성을 강조한 바그너의 모토가 제시된 것은 근대건 축 초기의 기능주의적 이념이 전제됐다는 점에서 의미 가 있다. 제체션 이후의 흐름으로 서술된 네 나라의 건

축 중 첫째인 네덜란드의 신운동은 베를라헤 한 사람에 대한 소개로 귀결됐는데, 장식을 부정하는 대신 ‘목적, 구조, 형태’를 건축의 주요 요인으로 본 점이 상찬됐다. 여기서 베를라헤의 ‘목적’은 바그너의 ‘필요’와 자연스럽 게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경우 표현파의 주관 성에 대한 비판에 이어 국제건축이 대안처럼 제시됐다. 그러나 국제건축의 핵심 이념에 대한 적확한 서술이 부 재하고 그로피우스 및 바우하우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이 발견된다. 네덜란드 섹션이 베를라헤로 모아진 것 이상으로 프랑스 섹션은 르코르뷔지에에 대한 서술 이 주를 이뤘는데,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는 말 등 르코르뷔지에의 기계 비유와 합리주의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자세함은 그의 영향력에 대한 방증이라 할 것이 다. 하지만 한 나라의 건축경향에 대한 서술이 더 포괄 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것은, 전술했듯 러시아 섹션이다. 구성주의가 대두된 사회적 배경과 결과로서의 건축적 특성에 더해, 그 전망까지 제시됐기 때문이다. 그가 의 도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아르누보와 제체션에서 출발해 네덜란드로부터 독일과 프랑스를 거쳐 ‘현대 건축이론의 최첨단적’ 러시아에까지 이르는 ‘현대건축의 추세’는 꽤 점층적 경향을 보이니, 국가별 병렬적 구성 속에서도 나 름의 매끈한 내러티브가 내포됐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대한 박동 진의 서술은 너무 개괄적이기도 하고 피상적이어서 이 에 대한 인식이 충분했다고 보기는 아직 어렵다. 각 섹 션별로 핵심을 짚기도 했지만 일부만을 파편적으로 부 각한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예컨대, 1930년대로 접어 든 네덜란드에 대해서라면 이미 연로한 베를라헤(1856 ∼1934) 못지않게 그의 후계자들이 로테르담 ‘더 스테 일(De Stijl)’ 파의 추상적 경향과 암스테르담 ‘벤딩겐 (Wendingen)’ 파의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괄목했던 상 황을 조명했을 법하다. 이 나라의 인상에 대한 낭만적 서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대신 말이다. 11) 독일의 국제건축을 논하며 그로피우스나 바우하우스를 언급하 지 않은 점은 이미 지적한 바인데, 네덜란드의 경우보다 더 뜻밖이라 하겠다. 또한 도판을 삽입하면서도 본문에 실제 디자인 사례가 서술되지 않음으로 인해, 당대 건축 개념의 구체적 적용에 대한 이해를 확인할 수 없음도 아쉽다. 12) 도판은 자체만으로도 신건축 흐름을 보여주

는 역할을 했겠지만 말이다. 사실 박동진은 글 첫머리에 이미 자신이 ‘전문적’ 논의를 의도하지 않음을 전제하긴 했다. 세계건축의 신경향을 보임으로써 자기 주택개량 론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런 소기의 목 적은 달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건축의 추세 만을 떼어놓고 볼 때 자체로서 의의가 큼에도 불구하고 인식 의 시차와 한계가 노출됨은 결국 박동진이 처했던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제약의 발로라 할 수 있다.

박동진의 현대건축의 추세 는 자기 주택개량론을 위한 일간지 연재물의 한 챕터로 삽입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 이 목적이었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약된 지면 내의 개괄적 서술만이 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바는 1931년의 이 글이 조선 건축계의 서양 근대건축 에 관한 사실상의 첫 텍스트여서 아직 그 지식이 충분 히 구비되지 못한 때 작성됐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맥락과 앞 장의 서술 위에 둘의 인식과 그 의미를 비교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두 사람 인식의 공통 바탕을 먼저 보건대, 이들 은 모두 ‘건축’을 ‘예술’로 인식했거나 최소한 ‘예술로서 의 건축’을 서술 대상으로 했다. 그러는 가운데 서양 근 대건축운동의 주류 경향을 적극 긍정한다. 이들에게 주 류는 장식과 주관의 표현성을 극복한 합리주의와 기능 주의였으며, 공통의 좌표는 결국 국제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시작을 19세기 말의 아르누보와 제체션에서 보되, 후자의 바그너야말로 이후 건축운동의 출발점이라 인식한 점도 유사하다. 두 사람 공히 ‘예술’이 ‘필요’의 결과라는 바그너의 모토를 핵심 이념으로 인용했다. 다만, 홍윤식은 아르누보와 제체션 의 뿌리를 19세기 중반 영국의 공예운동으로 여기며 이 를 상술함으로써 확장된 인식을 선보였다.

둘째, ‘국가’에 따라 병렬 구성된 박동진의 텍스트는 ‘운동’의 흐름에 따른 홍윤식의 텍스트보다 서사 구조가 훨씬 단편적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름의 내적 흐름을 찾아낼 수 있다. 이를 부각시키자면, 표현파의 ‘주관’을 떠난 ‘공통’의 국제건축에 이어 르코르뷔지에의 ‘합리주 의’가 ‘새로운 미의 규범’으로 세계를 풍미했고, 러시아 구성파가 예술과 이론을 극단적으로 융합해 ‘건축이론의 최첨단’을 달렸다는 구도다. 반면 홍윤식은 구성파를 표 현파보다도 더 평가절하 하면서 르코르뷔지에와 그로피 우스를 양대 건축가로 본다. 그러면서도 전자의 형식주 의적 측면 등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내세우는 한편으로, 후자의 국제건축이야말로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종합이 자 귀결이라는 인식을 나타냈다. 박동진의 텍스트에서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볼 때 박동진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은 아무래도 아직 파편적이고 피상적이다.

다섯째, 전체를 종합컨대, 두 사람의 서술은 1931년 과 1937년 당시의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대한 인식을 보 여준 조선 건축계의 드문 자료라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 로 의미가 크다. 더구나 각각은 당대 조선의 건축계와 대중에 나름의 신선한 지식을 제공했다고 판단되는데, 이로써 두 사람은 최신 건축과 관련한 조선인 전문가로 각인됐을 것이다. 글의 의도처럼 박동진이 자기 주택개 량론을 뒷받침하고, 홍윤식이 세계 건축예술의 동향을 바탕으로 경성의 신건축을 이해할 발판을 마련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더 큰 의의는 전술했던 둘 사이 6년여 간 근대건축에 대한 인식의 진전에 있고, 이것이 1930 년대 조선 건축계의 인식을 대변한다는 사실이다. 그리 고 이는 일제강점기 전체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박동진의 현대건축의 추세 (1931.3)와 홍윤식의 근 대건축예술사상의 동향 (1937.9)은 1930년대 조선의 건 축계에서 나온,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관한 한국 최초의

역사서술적 성격의 글로 판단된다.


건축관


작품리스트

작품 연도
보성전문학교 본관 (현 고려대 본관)普成全文學校本館(現 高麗大本館)[15] 1933~34년
조선일보사 사옥 (없음, 코리아나 호텔 자리)朝鮮日 報社社屋(無, 코리아나 호텔 자리)[16] 1934~35년
아서원 (현 없음)雅敘園(現無)[17] 1934년
보성전문학교 도서관普成全文學校圖書館[18] 1935~37년
오산중학교 본관 (평북 정주)五山中學校本館(平北定州)[19] 1935년
오산중학교 대강당五山中學校大講堂[20] 1936년
오산중학교 과학관五山中學校科學館[21] 1936년
중앙중학교 본관中央中學校本館[22] 1936년
중앙중학교 대강당中央中學校大講堂[23] 1937년
명신중학교 본관 (재령)明新中學校教本館(載寧)[24] 1937년
명신중학교 대강당明新中學校大講堂[25] 1938년
명신중학교 기숙사明新中學校寄宿舎[26] 1939년
대전지방법원 청사大田地方法院廳舍[27] 1939년
평안공업학교 본관 (2층)平安工業學校本館[28] 1940년
보성중학교 별관 교실普成中學校別館教室[29] 1940년
평안공업학교 대강당平安工業學校大講堂[30] 1941년
경방 남천 공장 (남천)京紡南川工場(南川)[31] 1942년
이성봉 소아과 의원李聖鳳小兒科醫院[32] 1942년
백인제 외과 수술실白麟濟外手術室[33] 1944년
영락교회榮樂教會[34] 1948년
남대문교회南大門教會[35] 1954년
고려대학교 준공 건물高麗大學校早今建物[36] 1955~65년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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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2.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4.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5.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6.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7.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8.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9.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10.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11.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12.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13.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15.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16.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17.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18.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19.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0.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1.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2.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3.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4.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5.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6.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7.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8.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29.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0.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1.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2.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3.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4.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5.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
  36.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p.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