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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22일 (수) 17: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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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송무역소고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麗宋貿易小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7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7년7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44쪽 전체쪽 044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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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1過去 우리와 中國과의 貿易에 있어 대개 貢物이라는 名稱으로 (中國과의)物貨를 交通하는 所謂 朝貢貿易과 兩國 商民에 依하야 行하는 所謂 互市의 두 가지 形式을 보게 되였음은 吾人의 이미 認知하는 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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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2高麗의 宋에 對한 朝貢外交에 나아가 살펴보면 그 本質을 더욱 明確히 看取할 수가 있는 것이니 高麗史入卷 文宗 十二年 八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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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3

王 欲於耽羅及靈岩 伐材造大船 將通於宋 內史門下省上言 國家結妤北朝○北嘲는 遼를 가르침 邊無警急 民樂其生 以此保邦 上策也(中略)况我國 文物禮樂 興行己久 商舶絡繹 珍寶日至 其於中國 實無所資(○○○○○○○○○○○○○○○○○○○○○○○○○○○) 如非永絕契丹 不宜通使宋朝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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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2-4라 하였다. 當時 麗宋 兩國 사이에 지금 熱河地方을 中心으로 하야 이러난 遼(契丹)는 東으로 高麗, 南으로 宋을 壓迫하야 東亞國際關係는 매우 微妙하게 되였다. 원문주1▶그리하야 高麗에서는 그의 地理上 關係로 이미 成宗 時代부터 和遼踈宋策에 기우러지게 되였던 것이니[1] 그러므로 文宗 時代에 이르러도 宋에 對한 高麗의 態度가 이와 같이 消極的이었던 것은 그러한 政治的 意味도 많이 加味된 것으로 믿거니와 內史門下省의 通宋 反對 理由로서 特히 우리나라의 文物이 일직부터 發達하여오고 珍寶財貨를 실은 商舶이 날로 이르므로 朝貢手段에 依한 中國文物 輸入의 必要가 없다는 것이 主 要한 條件으로 되여있는 것이다. 이 記事로 보아도 高麗의 宋에 對한 朝貢外交의 本面目이 那邊에 있었으며 또한 그것에 對한 高麗人의 觀念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高麗의 朝貢外交에 對하야 宋人도 또한 그와 같이 觀念하고 있던 것이니 文獻通考卷三百二十五, 四 商考 高句麗條 附叙 高麗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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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1

按高麗之臣事中朝也 蓋欲慕華風而利歲賜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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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2라 한 것은 어느 程度까지의 實情을 把掘한 見解라고 할 것이며 그리고 實際에 있어서 宋廷에서는 高麗의 貢物을 商品과 같이 看做하였던 것이니 宋史卷四百八十七 高麗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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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3

前此 貢物至 輒下有司估直(○○) 償以萬縑 至是○宋 神宗 元豊 二年 命勿復估 以萬縑爲定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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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4라 하였다. 宋 神宗 元豊 二年까지는 高麗의 貢物을 打價하야 대개 絹繪萬鎌을 代償으로 보내던 것이 例이었으나 元豊 二年부터는 打價의 煩瑣함을 避하려 함이었든지 高麗 貢物의 代償은 統括的 數値로 萬鎌으로써 그 額數를 定하여버린 것이니 이것은 實際的 國際貿易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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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5다음 互市 即 兩國 商民에 依한 貿易에 있어서는 元來 兩國 內의 經濟發展에 依한 物的 欲求에 基因하야 促致된 것으로서 貿易發展史上으로 보아 이와 같은 民間貿易은 所謂 朝貢貿易에 比하야 自然發達의 途程을 밟어온 것이다. 원문주2▶그리하야 古來로 兩國 사이의 民間貿易에 있어서 가장 旺盛하던 때를 추워보면 대개 二大 時期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니 하나는 新羅末葉에 淸海鎭의 張保皐를 中心으로 한 新羅人의 海外 發展期며[2] 또 하나는 本稍에서 論하려는 高麗時代의 朝貢貿易과 幷行하던 宋商의 活動期라고 믿는다.

































본문2: 송조의 무역 정책과 여송 무역의 정치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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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 여송 상인의 활동 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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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무역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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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무역품의 종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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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6: 여송의 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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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7: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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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1. 高麗史 卷三 成宗 十三年 六月條에 「遣元郁如宋乞師 以報前年之役(○成宗 十二年 契丹蕭遜寧侵入) 宋以北鄙甫寧 不宜輕動 但優禮遺還 自是 與宋絕云」
  2. 本 學報 第一, 二卷 所載 拙槁 「羅末海上 發展에 就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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