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가집 편찬의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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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가집 편찬의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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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歷代歌集編纂意識에 對하야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3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조윤제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5년9월
시작쪽 1쪽 종료쪽 40쪽 전체쪽 40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문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


쪽수▶P1-1시가•희곡•소설은 문학의 3대 부문이라 할 수 있으나, 조선에서는 웬일인지 희곡의 발달은 거의 보잘것없고, 소설 역시 일반 학자들이 그다지 관심을 쏟은 바 되지 못하여 충분한 발달을 성취하지 못하였다 하겠는데, 한갓 시가만은 그래도 각 시대를 통하여 위로는 국왕의 어제를 비롯하여 공경(公卿)‧학자의 상영(觴詠)이 있고 밑으로는 서민, 기녀까지도 읊고 불렀듯이 각 계급을 망라한 뚜렷한 발전을 볼 수 있으니, 실로 시가는 조선문학의 중추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시가의 연구는 문학 연구에 크나큰 기여가 될 것이며, 이들의 편찬의식은 혹은 일반 문학적 의식을 말하는 것이 될지도 모를 것이다.
쪽수▶P1-1詩歌•戱曲•小說은 文學의 三大部門이라 할 수 있으나, 朝鮮에서는 웬일인지 戱曲의 發達은 거의 보잘것없고, 小說 亦是 一般 學者의 그다지 關心한 배 되지 몯하야 充分한 發達을 成就하지 몯하였다 하겠는대, 한갓 詩歌만은 그래도 各 時代를 通하야 우로는 國王의 御製를 비롯하야 公卿‧學者 等의 觴詠이 있고 밑으로는 庶民, 妓女에 이르는 唱吟이 있다싶이 各 階級을 網羅한 뚜렷한 發展을 볼 수 있으니, 實로 詩歌는 朝鮮文學의 中樞的 地位를 가지고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詩歌의 硏究는 文學 研究에 大量的 寄與가 될 것이며, 此의 編纂意識은 或은 一般 文學的 意識을 말하는 것이 될지도 모를 것이다.
쪽수▶P2-1무릇 가집 편찬이란 것은 한 해 한 해 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어떠한 시기를 기다려 그 시대까지 적재된 시가를 총괄하여, 한편으로는 낱낱이 산일(散佚)되어가는 것을 붓잡아 매어두고 다른 편으로는 가인, 학도에 통독의 편익을 주는 사업이 될 것이어서, 말하자면 한 시기적 사업으로 이것의 역대적 편찬의식은 곧 구획된 그 시대, 그 시대인의 문학적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되겠거니와, 오늘날 유전하여 우리 앞에 보이는 가집은 그다지 각 시대를 통하여 볼 만치 많지 못하여, 유감이나 이것을 입체적으로 관찰하기는 다소 곤란한 점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만 역대의 가집 편찬사업에 간소한 사적 고찰을 시도하며, 현금 남은 가집에 대하여 소개를 한 다음에, 평면적으로 그들을 일괄하여 여러 점에 대한 편찬의 의식을 말해볼까 한다.
쪽수▶P2-1大抵 歌集編纂이란 것은 年年이 되는 것이 아니고 一定한 어떠한 時期를 기다려 그 時代까지 積載된 詩歌를 總括하야, 一便으로는 낯낯이 散佚되여가는 것을 붓잡아 매어두고 他便으로는 歌人, 學徒에 通讀의 便益을 주는 事業이 될 것이여서, 말하자면 한 時期的 事業으로 이것의 歷代的 編纂意識은 곳 區劃된 그 時代 그 時代人의 文學的 意識을 보여주는 것이 되겠거니와, 오늘날 遺傳하야 우리 앞에 보이는 歌集은 그다지 各 時代를 通하야 볼 만치 많들 못하야, 遺憾이나 이것을 立體的으로 觀察하기는 多少 困難한 點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만 歷代의 歌集編纂事業에 簡素한 史的 考察을 試하며, 現今 남은 歌集에 對하야 紹介를 한 다음에, 平面的으로 그들을 一括하야 數點에 對한 編纂의 意識을 말해볼가 한다.




































본문2: 2


쪽수▶P2-2원문주1▶먼저 가집 편찬사업을 사적으로 내다보면 그 가장 오랜 것은 아마도 진성왕인물 2년사력(四歷) 888각간인물(角干), 위홍인물(魏弘)과 화상(和尙)대구인물(大矩)가 칙명에 의하여 「삼대목서적」을 찬집(撰集)한 것일 줄 믿는다.[1] 원문주2▶위홍인물대구인물는 그 전기며 가학상 소양을 상세히 고찰할 수 없으나, 대구인물삼국유사서적에 의하면 월명사인물, 융천사인물와 같이 승려로 신라 가학 명가인 듯하니,[2] 그의 찬집인 삼대목서적는 신라 각 시대를 꿰뚫고 각 계급을 가로지르는 훌륭한 경가집(卿歌集)인 것을 짐작할 수 있어 마치 일본 만엽집서적을 상상케 한다. 만엽집서적은 대략 서력 750년 전후에 찬집되었다 하니 그보다는 약 백유여 년 뒤떨어졌다 하지마는 고대에 있어 조선과 일본은 문화사상 늘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겨우 백유여 년을 사이에 두고 한편에는 삼대목서적, 다른 편에는 만엽집서적이 있었다▶P3-1는 것이 우연치 아니하고, 또 그들의 편찬 내용이 과차(過差) 없음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삼대목서적는 오늘에 전해지지를 못하였다.
쪽수▶P2-2원문주1▶먼첨 歌集編纂事業을 史的으로 내다보면 그 가장 오랜 것은 아마도 眞聖王 二年四歷 八八八에 角干魏弘과 和尙大矩가 勅命에 依하야 「三代目」을 撰集한 것일 줄 믿는다.[3] 원문주2▶魏弘과 大矩는 그 傳記며 歌學上 素養을 詳考할 수 없으나, 大矩는 三國遺事에 依하면 月明師, 融天師와 같이 僧侶로 新羅 歌學名家인 듯하니,[4] 그의 撰集인 三代目은 新羅 各 時代를 縱貫하고 各 階級을 橫通한 훌륭한 卿歌集인 것을 짐작할 수 있어 마치 日本 萬葉集을 想像케 한다. 萬葉集은 大約 西歷 七 五十年 前後에 撰集되였다 하니 그보다는 約 百有餘 年 뒤떨어젔다 하지마는 古代에 있어 朝鮮과 日本은 文化史上 늘 많은 類似點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겨우 百有餘 年을 사이에 두고 한편에는 三代目, 딴편에는 萬葉集이 있었다▶P3-1는 것이 偶然치 아니하고, 또 그들의 編纂 內容이 過差없음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이 三代目은 오늘에 傳를 몯하얐다.
쪽수▶P3-2삼대목서적이 찬집된 이후로는 오랫동안 가집편찬에 대한 말은 들리지 않았다. 삼국시대는 물론이요 고려 500년까지도 무사히 지내고, 이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의식이 다시 돌아와 건국 후 얼마 아니 있어 이것의 수집, 편찬에 대한 의론이 조정에서, 일어났으니, 지금 이에 대하여 간단히 그 요령만을 들어보면, 이조는 유교로써 건국의 이상을 세운 만큼 가악에 대하여는 특별한 용의를 한 듯하여 우선 창업 당초 국가 대강의 조직제도가 성립되자 곧 힘을 구악 정리와 신악 수립에 썼으니 아악은 세종인물조에 박연인물이 남양에서 경석(磬石)을 얻고 옹진에서 거서(秬黍)를 구해, 고려 말년 이래 산란하였던 것을 대정리하여 완전한 것을 만들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왕직 아악은 곧 그 당시 정리되어 오늘에 전해온 것이거니와, 아악만이 아니라 또 속악•민가의 및 수집, 정리까지 의견을 가지고 그 실행방법을 논한 것이 있으니 세종인물 12년 2월 상소문에
쪽수▶P3-2三代目이 撰集된 以後로는 오랫동안 歌集編纂에 對한 말은 들리지 않었다. 三國時代는 勿論이요 高麗 五百年까지도 無事히 지내고, 李朝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그 意識이 다시 돌아와 建國 後 얼마 아니 잇어 이것의 蒐集 編纂에 對한 議論이 朝廷에서, 일어났으니, 지금 이에 對하야 簡單히 그 要領만을 들어보면, 李朝는 儒敎로써 建國의 理想을 세웟는 만큼 歌樂에 對하여는 特別한 用意를 한 듯하야 于先 創業當初 國家 大綱의 組織制度가 成立되자 곳 힘을 舊樂整理와 新樂樹立에 썼으니 雅樂은 世宗朝에 朴堧이 南陽에서 磬石을 얻고 甕津에서 秬黍을 求해, 高麗 末年 以來 散亂하였던 것을 大整理하야 完全한 것을 맨들었다. 오늘날 世界的으로 有名하야진 李王職 雅樂은 곳 그 當時 整理되야 오늘에 傳해온 것이거니와, 雅樂만이 아니라 또 俗樂•民歌의 및 蒐集 整理까지 意見을 가지고 그 實行方法을 論한 것이 있으니 世宗 十二年 二月 上疏文에
쪽수▶P3-3

원문주3▶(前略) 此等遺亡諸篇 不可悉記 然, 譜法尙存 其가사舊本 意必有傳寫私藏者焉, 願令中外悉求, 我朝舊時歌典, 如有詳悉舊本, 自告進呈者, 賞之以職則, 舊樂之缺, 庶可塡補矣, 如此然後, 擇其歌曲之詞, 其中君臣道合, 父子恩深, 夫婦節義, 兄弟友愛, 朋友諸信, 賓主同歡, 發於性情之正, 有關於人倫世敎者, 以爲正風, 其男女相悅, 淫遊姦慝, 逞欲無恥, 有愧於綱常者, 以爲變風 云々[5]

쪽수▶P3-3

원문주3▶(前略) 此等遺亡諸篇 不可悉記 然, 譜法尙存 其歌詞舊本 意必有傳寫私藏者焉, 願令中外悉求, 我朝舊時歌典, 如有詳悉舊本, 自告進呈者, 賞之以職則, 舊樂之缺, 庶可塡補矣, 如此然後, 擇其歌曲之詞, 其中君臣道合, 父子恩深, 夫婦節義, 兄弟友愛, 朋友諸信, 賓主同歡, 發於性情之正, 有關於人倫世敎者, 以爲正風, 其男女相悅, 淫遊姦慝, 逞欲無恥, 有愧於綱常者, 以爲變風 云々[6]

쪽수▶P3-4이라 하였다. 즉 고려 이래 조선 가악은 그 가사를 잊어버린 것이 가히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이들 중에는 아직 민간에 전사하여 두었을 자가 있을 것이니 중외에 구하여 이들을 수집하자는 것이다. 이 박연인물의 의견은 채용되었는지 아니 되었는지 조금 알기 어려우나 세종인물 15년 9월의 예조계문에
쪽수▶P3-4이라 하얐다. 即 高麗 以來 朝鮮 歌樂은 그 歌詞를 遺亡한 것이 可히 悉記할 수 없으나 이들 中에는 아직 民間에 傳寫하야 두었을 者가 있을 것이니 中外에 求하야 이들을 蒐集하자는 것이다. 이 朴堧의 意見은 採用되였는지 아니 되였는지 조곰 알기 어려우나 世宗 十五年 九月의 禮曹啓文에
쪽수▶P4-1

원문주4▶我朝開國以來, 禮樂大行, 朝廟雅頌之樂, 已備, 獨民俗歌謠之詞, 無採錄之法, 實爲未便, 自今依古者採詩之法, 令各道州縣, 勿淪詩章俚語, 關係五倫之正, 足爲勸勉者及其間曠夫怨女之謠, 未免變風者, 悉令搜訪, 每年歲, 抄錄上送從之,[7]

쪽수▶P4-1

원문주4▶我朝開國以來, 禮樂大行, 朝廟雅頌之樂, 已備, 獨民俗歌謠之詞, 無採錄之法, 實爲未便, 自今依古者採詩之法, 令各道州縣, 勿淪詩章俚語, 關係五倫之正, 足爲勸勉者及其間曠夫怨女之謠, 未免變風者, 悉令搜訪, 每年歲, 抄錄上送從之,[8]

쪽수▶P4-2라 한 것으로 보면 곧 채용되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그의 의견인 만큼 당시 세인의 주의를 환기한 듯하여 드디어 예조의 상계한 바 되어 국왕의 재가를 얻은 듯하다.
쪽수▶P4-2라 한 것으로 보면 곳 採用되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그의 意見인 만큼 當時 世人의 注意를 喚起한 듯하야 드디여 禮曹의 上啟한 바 되여 國王의 裁可를 얻은 듯하다.
쪽수▶P4-3이 민가 수집은 왕정의 득실과 풍속의 성쇠를 알 수 있다 하여, 지나에서는 일찍부터 시험해 본 것이다. 시경의 정풍은 즉 그리하여 채집된 민속의 시라는 것은 유명한 일이나 조선에서는 어떤지 그러한 계획이 역대에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조에 와서 비로소 이 문제가 일어나 민가 수집의 구체적 사업이 진행된 것은 다소 늦은 감도 있건마는 그래도 괄목할 만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의견을 일으킨 박연인물는 그 근본 사상이 지나 사상의 영향이라 하겠지마는 실로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곳까지를 착목하였다 하겠으니 더욱이 그의 의견 중에는 인륜도덕에 관계한 것뿐 아니라 남녀상열(男女相悅), 부유간특(浮遊姦慝), 영욕무치(逞欲無恥)한 것조차 이를 수집하자는 말이 있는 것은 특히 우리의 주의를 요할 점일 듯하겠다. 그러나 일전 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수집한 민가며 속악은 과연 유종의 미를 얻었으며 또 어떠한 의식 하에 편찬되어 후세에 남겼는지 알 수 없다. 일개인의 일이 아니고 일국가의 일이며 더욱이 국왕의 윤허에 된 사업이니 얼마간이라도 수집은 되었을 것이고, 어떠한 형식으로나마 편찬되었을 것은 의심치 않는 바나, 오늘날 남아 전하는 것이 없고 뿐만 아니라 실록에서도 아직 그 방면의 문헌을 얻지 못하였으니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세종인물 15년 9월 예조계문에
쪽수▶P4-3이 民歌 蒐集은 王政의 得失과 風俗의 隆替를 알 수 있다 하야, 支那에서는 일찍부터 試驗해 본 것이다. 詩經의 正風은 卽 그리하야 採集된 民俗의 詩라는 것은 有名한 일이나 朝鮮서는 어떤지 그러한 計劃이 歷代에 있었다는 말을 듯지 몯하였었는데 李朝에 와서 비로소 이 問題가 일어나 民歌 蒐集의 具體的 事業이 進行된 것은 多少 늦은 感도 있건마는 그래도 括目할 만한 事實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意見을 일으킨 朴堧은 그 根本 思想이 支那 思想의 影響이라 하겠지마는 實로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몯한 곳까지를 着目하였다 하겠으니 더욱이 그의 意見 中에는 人倫道德에 關係한 것뿐 아니라 男女相悅, 浮遊姦慝, 逞欲無恥한 것조차 이를 蒐集하자는 말이 있는 것은 特히 우리의 主意를 要할 點일 듯하겠다. 그러나 일전 計劃을 세워 組織的으로 蒐集한 民歌며 俗樂은 果然 有終의 美를 얻었으며 또 어떠한 意識 下에 編纂되여 後世에 남긴는지 알 수 없다. 一個人의 일이 아니고 一國家의 일이며 더욱이 國王의 允許에 된 事業이니 얼마간이라도 蒐集은 되였을 것이고, 어떠한 形式으로나마 編纂되였을 것은 疑心치 안하는 배나, 오늘날 남아 傳하는 것이 없고 뿐만아니라 實錄에서도 아직 그 方面의 文獻을 얻지 몯하였으니 무어라 말 할 수 없다. 다만 世宗 十五年 九月 禮曹啓文에
쪽수▶P4-4

원문주5▶今慣習鄕樂五十餘聲,[9] 원문주6▶並新羅‧百濟‧高麗時 民間俚語, 猶可想見當時政治得失, 足爲權戒,[10]

쪽수▶P4-4

원문주5▶今慣習鄕樂五十餘聲,[11] 원문주6▶並新羅‧百濟‧高麗時 民間俚語, 猶可想見當時政治得失, 足爲權戒,[12]

쪽수▶P5-1라 한 것으로 보면 민가 수집을 실행하기 전에도 향악 50여 성이 편찬 정리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쪽수▶P5-1라 한 것으로 보면 民歌 蒐集을 實行하기 前에도 鄕樂 五十餘聲이 編纂 整理되여 있었는 것만은 事實이다.
쪽수▶P5-2이상 국가 정부의 힘으로 계획된 편찬 사업의 일단을 말하였거니와 이러한 사업은 반드시 정부의 힘을 기다려서야만 될 것이 아니고 문화가 향상한 사회에 있어서는 도리어 개인에 기대될 바 많다 하겠으니, 이조 초기는 아직 문물제도가 정돈되지 못한 때라, 그 확립상 자연히 이것이 정부의 힘으로 실행된 감이 있었으나 이 시기를 지나면 점점 이것은 민간 사업으로 개인에 옮아갔다. 퇴계인물의 서어부가후(書漁父歌後)에
쪽수▶P5-2以上 國家 政府의 힘으로 計劃된 編纂 事業의 一端을 말하였거니와 이러한 事業은 반드시 政府의 힘을 기다려서야만 될 것이 아니고 文化의 向上한 社會에 있어서는 도로혀 個人에 期待될 바이 많다 하겠으니, 李朝 初期는 아직 文物制度가 整頓되지 못한 때라, 그 確立上 自然히 이것이 政府의 힘으로 實行된 感이 있었으나 이 時期를 지나면 漸漸 이것은 民間事業으로 個人에 옮아갔다. 退溪의 書漁父歌後에
쪽수▶P5-4이라 한 것은 당시 민간 가집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라 하겠으나, 지금껏 나의 과문한 바에 의하면 혹은 이것이 민간 편찬의 최초의 가집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박준인물(朴俊)는 경세(頃歲) 운운이라 하였으니 퇴계인물 당시의 사람이었겠지만 그 전기가 상세하지 못하고, 그가 편찬한 가집도 어떠한 이름으로 불렀는가 퇴계인물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이것을 박준가집이라 가칭하여 두고 보면, 이것은 퇴계인물의 소개에 의하여 동방악에 쓰이는 것이면 아악, 속악 할 것 없이 모조리 부집(裒集)한 것인 것을 알겠고, 또 간행까지 되어 세상에 유포되었으며, 그 내용에는 어부사며 이화점 등 여러 곡이 수록되었던 것을 알겠는데, 아우 김태준인물 군은 이것을 악장가사서적와 같은 책으로 보아 원문주8▶악장가사서적 일명 국조사장(國朝詞章)이란 책은 고려, 이조 초기까지에 전해 오는 속악 가곡을 퇴계 이황인물의 당시 사람 박준인물이란 영남 선비가 모은 것이니, (다음에 전기 퇴계인물의 서어부가후 문 인용)이 한 책이 우연히 이왕직도서관기관에 전하여 온 것이 근자에 광포되어 악장가사서적 혹 국조사장이란 명칭으로 전한다”[13]라 하였다. 김 군의 이 설은 근거 있는 설이 아니고 다만 전해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인 것을 나는 잘 아나, 그러나 이것▶P6-1은 설령 허랑지설(虛浪之說)이라 할지언정 일고할 가치가 없지 않을 듯하니 다시 김군의 설에 얼마간 비견으로 보충하여 적어 억측을 더 해 보자.
쪽수▶P5-4이라 한 것은 當時 民間歌集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貴重한 文獻이라 하겠으나, 지금것 나의 寡聞한 바에 依하면 或은 이것이 民間編纂의 最初의 歌集이 아닌가 한다. 그런대 이 朴俊은 頃歲云云이라 하였으니 退溪 當時의 사람이었겠지마는 그 傳記가 詳細를 몯하고, 그가 編纂한 歌集도 어떠한 이름으로 불럿는가 退溪는 말하지 않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것을 朴俊歌集이라 假稱하야 두고 보면, 이것은 退溪의 紹介에 依하야 東方樂에 쓰이는 것이면 雅樂, 俗樂 할 것 없이 모조리 裒集한 것인 것을 알겠고, 또 刊行까지 되여 世上에 流布되였으며, 그 內容에는 漁父詞며 莉花店諸曲이 收載되였든 것을 알겠는데, 雅友 金台俊 君은 이것을 樂章歌詞와 同本視하야 원문주8▶「樂章歌詞 一名國朝詞章」이란 책은 高麗, 李朝 初期까지에 傳해 오는 俗樂歌曲을 退溪 李滉의 當時人 朴俊이란 嶺南 선비가 모흔 것이니, (다음에 前記 退溪의 書漁父歌後 文 引用)이 一本이 偶然히 李王職圖書館에 傳하여 온 것이 近者에 廣布되여 樂章歌詞 或 國朝詞章이란 名稱으로 傳한다」[14]라 하였다. 金君이 이 說은 根據 있는 說이 아니고 다만 傳聞筆錄한 것인 것을 나는 잘 아나, 그러나 이것▶P6-1은 設令 虛浪之說이라 할지언정 一顧할 價値가 없든 안 할 듯하니 다시 金君說에 얼마곰 卑見으로 補筆하야 憶測을 더 하야 보자.
쪽수▶P6-2악장가사서적는 현재 이왕직도서관기관에 비장된 목판본 가집이나 그 체재와 내용에 대하여 한 마디 건네보면 대개 속악가사, 악장, 아악가사, 가사, 4부에 나누어 있어 속악가사에는 종묘 영녕전 영신 이하 수종의 가사가 있고 악장에는 민궁 속악 남공철인물제와 어제 1장이 있으며, 아악가사에는 그 가사 수종이 있는데 이까지는 다 한문 가사로 되어 있다. 그 다음 가사라는 부는 두세 개의 예외는 있으나 대개 조선문 가사로 되였으니 참고로 그 제목만을 들면 여민락(與民樂)한문, 보허자(步虛子)한문, 감군은(感君恩), 정석가(鄭石歌), 청산별곡, 서경별곡, 사모곡, 능엄찬(楞嚴讃)한문에 언토, 영산회상한문, 쌍화점, 이상곡(履霜曲), 가시리, 유림가(儒林歌), 신도가(新都歌), 풍인송(風人松)한문에 언토, 야심사(夜深詞)한문에 언토, 한림별곡, 처용가, 어부가, 만전춘(滿殿春), 화산별곡, 오륜가, 연형제곡(宴兄弟曲), 상대별곡(霜臺別曲) 등으로, 대강 고려에서 이조 초기에 속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체재에 이르러서는 판본이라 하지마는 대단히 난잡하여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를테면 전술한 바와 같이 속악가사, 악장, 아악가사, 가사로 나누어 있으나, 속악가사 부에는 그 제1장 제1행에 속악가사 상(上)이라 하고, 그 다음에 그 하(下)도 없이 최후장 최후행에 가서 속악가사 종(終)이라 하였으며 양면 꺾음에는 속악이라 하였다. 또 악장 부에는 첫 장에 남공철인물제 악장을 필사하여 오려 뭍이고 다음 장에 어제 악장을 역시 필사하였으며 장수는 기입하지 않았으나, 꺾음 상에는 다 악장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아악가사 부는 전부 8장으로 되어 첫 장 제1행에 아악가사라 하고 제7장 최후행에 가사 종(終)이라 하였는데 제8장에 새로 필사 첨부하여 그 최후행에 가서 또 다시 가사 종(終)이라는 글자를 놓았고 장 숫자는 순위가 틀림이 없이 여기 와서 8이라 글자를 찍었다. 뿐만 아니라 꺽음 상에는 다 가상(歌上)이라 하였다. 그리고 가사 부는 어떠냐 하면 첫 행에 가사 상(상)이라 하였지마는 최후행에 가서는 가▶P7-1사 상(上終) 혹 가사 종(終)이라는 문자를 발견할 수 없고 꺾음 상에는 가상(歌上)이라는 문자가 보인다.
쪽수▶P6-2樂章歌詞는 現 李王職圖書館에 備蔵된 木板本 歌集이나 그 體裁와 內容에 對하야 一言건내보면 大概 俗樂歌詞, 樂章, 雅樂歌詞, 歌詞, 四部에 난후어 있어 俗樂歌詞에는 宗廟永寧殿 迎神 以下 數種 歌詞가 있고 樂章에는 悶宮 俗樂 南公轍製와 御製一章이 있으며, 雅樂歌詞에는 그 歌詞數種이 있는데 이까지는 다 漢文 歌詞로 되여있다. 그다음 歌詞라는 部는 二三 例外는 있으나 大概 朝鮮文 歌詞로 되였으니 叅考的으로 그 題目만을 들면 與民樂漢文, 步虛子漢文, 感君恩, 鄭石歌, 青山別曲, 西京別曲, 思母曲, 楞嚴讃漢文에 諺吐, 靈山會相漢文, 雙花店, 履霜曲, 가시리, 儒林歌, 新都歌, 風人松漢文에 諺吐, 夜深詞漢文에 諺吐, 翰林別曲, 處容歌, 漁父歌, 滿殿春, 華山別曲, 五倫歌, 宴兄弟曲, 霜臺別曲 等으로, 大綱 高麗에서 李朝 初期에 屬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대 體裁에 이르러서는 板本이라 하지마는 大端히 亂雜하야 分間할 수 없게 되였다. 일터이면 前述한 바와 같이 俗樂歌詞, 樂章, 雅樂歌詞, 歌詞로 난후어 있으나, 俗樂歌詞部에는 그 第一張 第一行에 俗樂歌詞上이라하고, 그다음에 그 下도 없이 最後張 最後行에 가서 俗樂歌詞終이라 하였으며 兩面꺽음에는 俗樂이라 하였다. 또 樂章部에는 첫 張에 南公轍製樂章을 筆寫하야 오려붓치고 다음 張에 御製樂章을 亦是 筆寫하였으며 張數는 記入하지 않었으나, 꺽음上에는 다 樂章이라는 印字가 보인다. 雅樂 歌詞部는 全部 八張으로 되여 첫 張 第一行에 雅樂歌詞라 하고 第七張 最後行에 歌詞終이라 하였는데 第八張에 새로 筆寫添附하야 그 最後行에 가서 또 다시 歌詞終이라는 印字를 노았고 張數字는 順位가 틀림이 없이 여기와서 八이라 印字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 꺽음上에는 다 歌上이라 하였다. 그리고 歌詞部는 어떠냐 하면 첫 行에 歌詞上이라 하였지마는 最後行에 가서는 歌▶P7-1詞上終 或 歌詞終이라는 文字를 發見할 수 없고 꺽음上에는 歌上이라는 文字가 보인다.
쪽수▶P7-2이와 같이 악장가사서적는 그 체재가 대단히 난잡하고 판의 모양도 오랜 것 같이는 보이지 않으나 그러나 이것은 박준인물가집인 듯이 보이는 점이 다분히 있는 듯하다. 즉 첫째로 박준인물가집은 혹아혹속(或雅或俗) 미불부집(靡不裒集)이라 하였었는데 과연 여기는 미불부집(靡不裒集)이라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나 아악, 속악의 중요한 것은 포함되어 있고 또 이에 수록된 가사는 모다 중종인물 이전에 속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의를 가장 많이 끄는 것은 본서 수록의 어부사와 농암인물 모은 어부사가 다르다는 것이니, 원문주9▶원래 농암인물(聾岩)은 박준인물가집에서 어부사을 얻어 말에 불륜한 것이며 혹 중첩된 것이며 또 전사 시의 잘못 지어진 듯한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옛글의 본의에 인하여 덜고 더함을 가하여 12장을 9장에 산개(刪改)하였다.[15] 그런데 본서의 어부사는 농암인물이 아직 찬정(纂定)하지 않은 12장의 어부사 그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쪽수▶P7-2이와 같이 樂章歌詞는 그 體裁가 大端히 亂雜하고 板模도 오랜 것 같이는 보이지 않으나 그러나 이것은 朴俊歌集인 듯이 보이는 點이 多分 있는 듯하다. 卽 첫째로 朴俊歌集은 或雅或俗 靡不裒集이라 하였었는데 果然 여기는 靡不裒集이라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나 雅樂, 俗樂의 重要한 것은 包收되여있고 또 이에 收載된 歌詞는 모다 中宗 以前에 屬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注意를 가장 많이 끄는 것은 本書收錄의 漁父詞와 聾岩改纂의 漁父詞와 틀린다는 것이니, 원문주9▶元來 聾岩은 朴俊歌集에서 漁父詞을 얻어 말에 不倫한 것이며 或 重疊된 것이며 또 傳寫 時의 訛作인 듯한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舊文 本意에 因하야 增損을 加하야 十二章을 九章에 刪改하였다.[16] 그런데 本書의 漁父詞는 聾岩이 아직 纂定하지 않은 十二章의 漁父詞 그 模樣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쪽수▶P7-3그러면 악장가사서적는 그 판이 난잡하고 고색이 없어 박준인물의 간행본이라까지는 말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음미하여 보면 박준인물가집과 유사한 점이 적지 않으나 처음의 억측은 공연히 아무 이유 업는 억측이라 할 수는 없을 듯하다, 혹은 좀 더 용단을 낸다면 악장가사서적박준인물가집은 동일한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를 것이고 그러한 용단을 과연 용서할 수 있다 한다면 악장가사서적는 민간 가집의 교시가 될 것이다. 또 설령 악장가사서적박준인물가집이 아니라 한다손 치고도 그 내용으로 보아 현존 가집 중의 최고(最古)라 하여도 과오는 없을 것이다.
쪽수▶P7-3그러면 樂章歌詞는 그 板이 亂雜하고 古色이 없어 朴俊의 刊行本이라까지는 말하기 어렵다 하드라도 그 內容을 吟味하여 보면 朴俊歌集과 類似한 點이 不少하나 처음의 憶測은 空然히 無斷한 憶測이라 할 수는 없을 듯하다, 或은 좀 더 勇斷을 낸다면 樂章歌詞와 朴俊歌集은 同一한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를 것이고 그러한 勇斷이 果然 容恕할 수 있다 한다면 樂章歌詞는 民間歌集의 矯矢가 될 것이다. 또 設令 樂章歌詞가 朴俊歌集이 아니라 한다손 치고도 그 內容으로 보아 現存 歌集 中의 最古라 하여도 過誤는 없을 것이다.
쪽수▶P7-4그러나 악장가사서적는 민간 가집이라 하지마는 그 내용은 민간에서 직접 불리는 민간적 가사라 하기보다 차라리 궁중 가악에 쓰이는 것이 대부분이라 하겠다. 사실 또 이조에 있어서 시가의 발달을 보면 그 초기에는 구악 정리가 대부분의 사업이오 창작 방면에는 있다 하여도 창업의 송영(頌詠)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연산조 이후가 되어 가사문학▶P8-1이 대두하고, 임진란이 그치고는 시조문학이 특히 왕성하야 시가문학의 본격적 발전을 보았으나 가집의 출현은 일상 그러한 융성기의 후막에 보이는 것이니 때로 말하면 숙종인물 이후 영조인물정조인물 시대에 가장 많이 나타났다. 나는 이 시대를 시가사상에 있어 시가찬집 시대라고까지 부르고자 하나, 이 시대에 나온 가집 중 중요한 것을 들면 청구영언서적, 해동가요서적, 고금가곡서적 등이 다 그것이니 다음에 이들 가집에 대하여 간단한 해설을 하겠다.
쪽수▶P7-4그러나 樂章歌詞는 民間歌集이라 하지마는 그 內容은 民間에서 直接 불리는 民間的 歌詞라 하기보다 차라리 宮中歌樂에 쓰이는 것이 大部分이라 하겠다. 事實 또 李朝에 있어서 詩歌의 發達을 보면 그 初期에는 舊樂整理가 大部分의 事業이오 創作方面에는 있다 하여도 創業의 頌詠쯤이 있을 程度이었었다. 그러다가 燕山朝 以後가 되여 歌詞文學▶P8-1이 擡頭하고, 壬辰亂이 그치고는 時調文學이 特히 旺盛하야 詩歌文學의 本格的 發展을 보았으나 歌集의 出現은 日常 그러한 隆盛期의 後幕에 보이는 것이니 때로 말하면 肅宗 以後 英祖•正祖 時代에 가장 많이 나타났다. 나는 이 時代를 詩歌史上에 있어 詩歌撰集 時代라고까지 부르고자 하나, 이 時代의 所產 歌集 中 重要한 것을 들면 靑丘永言, 海東歌謠, 今古歌曲 等이 다 그것이니 다음에 이들 歌集에 對하야 簡單한 解說을 하겠다.
쪽수▶P8-2청구영언서적김천택인물 편이다. 김천택인물은 자는 백함(伯涵), 호는 남파(南坡)라 한 영조인물조 가객이요 또 명창이었다. 그의 전기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세 가객 김수장인물와 동년배로 경정산(敬亭山) 가단을 이루었고 완암 정래교인물(자 윤경)와도 交分이 좋은 듯하야 정윤경인물은 특히 그의 가집을 위하여 서문을 썼었다. 본서는 그가 고금 가곡의 수집 벽을 가지고 주워 모아 각각 곡조에 의해 분류, 편찬한 시조 중심의 가집인데 수록된 노래 수는 권말 가사 17수를 합하여 다 합쳐 실로 1015수에 달하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작자만도 140명 가까이 포함하였다. 원문주10▶편찬연대는 명시한 것이 없으나 그 서문에 “歲戊申春玄窩鄭潤卿序”라 하고 발문에 “丁未季夏下浣磨嶽老樵題”라 한 것으로 보아 대략 영조인물 3, 4년인 듯하다.[17] 아마 수록한 노래 수가 많기로는 현재 전하는 가집 중 이에 넘을 자가 없을 듯하다.
쪽수▶P8-2靑丘永言은 金天澤 編이다. 金天澤은 字는 伯涵, 號는 南坡라 한 英祖朝 歌客이요 또 名唱이었다. 그의 傳記는 未詳하나 當世 歌客 金壽長과 同年輩로 敬亭山 歌壇을 이루었고 浣岩鄭來僑(字潤卿)와도 交分이 좋은 듯하야 鄭潤卿은 特히 그의 歌集을 爲하야 序文을 썼었다. 本書는 그가 古今歌曲의 裒集癖을 가지고 주어모아 各各 曲調에 依하야 分類 編纂한 時調 中心의 歌集인대 收錄된 歌數는 卷末 歌詞 十七首를 合하야 通計 實로 一千十五首에 達하고, 知名 作者만도 百四十名 가까이 包含하였다. 원문주10▶編纂年代는 明示한 것이 없으나 그 序文에 「歲戊申春玄窩鄭潤卿序」라 하고 跋文에 「丁未季夏下浣磨嶽老樵題」라 한 것으로 보아 大約 英祖 三, 四年인 듯하다.[18] 아마 所收歌數의 많기로는 現在 傳하는 歌集 中 이에 넘을 者가 없을 듯하다.
쪽수▶P8-3청구영언서적이 나온 35년 후 즉 영조인물 39년에 또 김수장인물에 의하여 해동가요서적가 편찬되었다. 본서는 청구영언서적이 곡조로 분류 편찬된 데 대하여 작가 기준으로 분류, 편찬하였다. 수록된 노래 수는 무명씨 작 115수를 합하면 883수인대 그중에는 편자 자작이 117수가 있다. 편자 김수장인물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천택인물의 친한 친구로서 그의 후배인 듯한데, 자는 자평(子平), 스스로 호를 붙여 노가재(老歌齋)라 하였다. 경성 화개동에 주택을 두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으며 당시 가객들과 교유하여 자신이 그 지도의 자리에 있었던 듯하나, 본서를 편찬한 것은 그의 만년 74세 때였다. 넓게 관▶P9-1계문헌까지를 수집하여 작자 작품에 후서를 붙여 두는 실로 신중한 태도로 편찬을 하였으나, 원문주11▶편찬한 후에도 수정, 증보하기를 게을리 아니 해서 영조인물 45년 즉 그의 80세 되던 해에는 후배 김우규인물 이하 9인의 작 67수를 더하여 개정서를 내었다.[19] 김천택인물, 김수장인물은 모두 당시 동가자(洞歌者)로서 일세를 풍미한 듯하나 또 두 사람이 각각 가집의 편찬을 했다는 것은 크게 주목할 점이 될 듯하다.
쪽수▶P8-3靑丘永言이 나온 三十五年 後 卽 英祖 三十九年에 또 金壽長에 依하야 海東歌謠가 編纂되였다. 本書는 靑丘永言이 曲調로 分類 編纂된 데 對하야 作家 標準으로 分類 編纂하얐다. 所收歌數는 無名氏 作 三百十五首를 合하면 八百八十三首인대 그中에는 編者 自作이 百十七首가 있다. 編者 金壽長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金天澤의 好友로서 그의 後輩인 듯한데, 字는 子平, 自號하야 老歌齋라 하였다. 京城 花開洞에 住宅을 두고, 노래를 부르고 詩를 읊으며 當時 歌客들과 交遊하야 自身이 그 指導의 자리에 있었는 듯하나, 本書를 編纂한 것은 그의 晚年 七十四歲 時였었다. 넓이 關▶P9-1係文獻까지를 蒐集하야 作者 作品에 後序를 부처두는 實로 愼重한 態度로 編纂을 하였으나, 원문주11▶編纂한 後에도 修正, 增補하기를 겨을리 아니하야 英祖 四十五年 即 그의 八十歲 되든 해에는 後輩 金友奎 以下 九人의 作 六十七首를 더하야 改正書를 내었다.[20] 金天澤, 金壽長은 모다 當世 洞歌者로서 一世를 風靡한 듯하나 또 兩人에 各各 歌集의 編纂이 있었다는 것은 크게 注目할 點이 될 듯하다.
쪽수▶P9-2고금가곡서적전간공작인물(前間恭作) 씨의 고증에 의하면 해동가요서적가 편찬되던 다음 해 즉 영조인물 40년에 송계연월옹인물(松桂煙月翁)에 의하여 편찬한 것인 듯하다. 원본은 천견윤태낭인물(淺見倫太郎) 씨의 소장으로 나는 직접 원본에 접견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 복사본을 읽었을 따름이나, 이에 의하면 처음에 지나의 사부가곡 14수가 있고 그 다음에 어부사 9장, 감군은 4장, 상저가(相杵歌),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가(將進酒歌), 강촌별곡, 규원가, 춘면곡 등이 있고, 단가는 맨 뒤에 수록되어, 그 내용으로 분류되어 있다. 모든 노래 수는 장, 단가 합하여 296수에 미쳤다. 내용을 검찰하건대 다른 가집과 별다른 것은 없는 듯하나, 한갓 그 분류법이 인륜, 권계, 송축, 정조 등 오로지 그 내용에 의한 것이 뒤에 말할 동가선서적와 아울러 주목할 것이 되겠다.
쪽수▶P9-2古今歌曲은 前間恭作 氏의 考證에 依하면 海東歌謠가 編纂되든 다음 해 卽 英祖 四十年에 松桂煙月翁에 依하야 編纂한 것인 듯하다. 原本은 淺見倫太郎 氏의 所藏으로 나는 直接 原本에 接見할 機會를 얻지 몯하고 그 複本을 읽었을 따름이나, 이에 依하면 처음에 支那의 辭賦歌曲 十四首가 있고 그다음에 漁父辭 九章, 感君恩 四章, 相杵歌, 關東別曲, 思美人曲, 續思美人曲, 星山別曲, 將進酒歌, 江村別曲, 閨怨歌, 春眠曲 等이 있고, 短歌는 맨뒤에 錄載되여, 그 內容으로 分類되어 있다. 全 歌數 長短歌 合하야 二百九十六首에 미첫다. 內容을 檢察하건대 다른 歌集과 別다른 것은 없는 듯하나, 한갓 그 分類法이 人倫, 權戒, 頌祝, 貞操 等 오로지 그 內容에 依한 것이 뒤에 말할 東歌選과 아울러 注目할 것이 되겠다.
쪽수▶P9-3이상 청구영언서적, 해동가요서적, 고금가곡서적영조인물 문화를 천양(闡揚)할 3가집이라 하겠으나, 이밖에 연대는 알기 어렵지마는 역시 이 시대의 편찬인 듯한 가집에 동가선서적을 뺄 수 없다. 본서는 책 이름과 같이 조선가곡 중 유명한 것만을 뽑아 편찬한 것인데 총 노래 수는 235수라는 작은 가집이다. 대강 지명(知名)작가, 무명작가, 양부에 나누어 있으나, 처음에는 평조(平調), 우조(羽調), 계면조(界面調)와 중대엽(中大葉), 북전(北殿), 수대엽(數大葉)의 설명을 마치고 각 곡의 시례로 초중대엽(初中大葉), 이중대엽(二中大葉), 초수대엽(初數大葉), 이수대엽(二數大葉) 순서에 시대, 인명의 구별이 없이 몇 수 들었다. 그리고 매 수 끝에는 유의(遺意), 탄(嘆), 충(忠), 회고(懷古), 은일(隱逸), 사(思) 등 목을 달아 그 내용▶P10-1을 지적한 것도 재미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본서를 구태여 여기 가지고 온 것은 그 내용을 검찰할 때 지명 작가는 최고 을파소인물, 성충인물에서 시작하여 이정보인물에 미쳤다는 것이다. 이정보인물영조인물조 대제학이고 또 시조 작가거니와 그의 후라 할지라도 김천택인물, 김수장인물와 같은 가객이 있었건마는 한마디 소개도 없이 이정보인물로 끝맺은 것은 혹은 본서가 해동가요서적 등보다 일찍이면 일찍이었지 늦지 않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면 또 영정 시대를 지나면 시가계는 대단히 부진하여 들 만한 작가도 나지 않았으니까 이정보인물 이후의 작가를 들지 못하고 김천택인물, 김수장인물 등은 사회적 지위라던지 그 작품이 족히 취할 거리가 되지 못하여 후세의 편이면서도 올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의문을 부치면 얼마라도 부칠 수 있으나 편의상 여기 합하여 그 소개를 하여 두겠다.
쪽수▶P9-3以上 靑丘永言, 海東歌謠, 古今歌曲은 英祖 文化를 闡揚할 三歌集이라 하겠으나, 이밖에 年代는 未詳하지마는 亦是 이 時代의 編纂인 듯한 歌集에 東歌選을 뺄 수 없다. 本書는 書名과 같이 朝鮮歌曲 中 有名한 것만을 擇出 編纂한 것인데 總歌數 二百三十五首라는 小歌集이다. 大綱 知名作家, 無名作家, 兩部에 난후어 있으나, 처음에는 平調, 羽調, 界面調와 中大葉, 北殿, 數大葉의 說明을 마추고 各 曲의 實例로 初中大葉, 二中大葉, 初數大葉 二數大葉 順序에 時代, 人名의 區別이 없이 몇 首 들었다. 그리고 每首 끝에는 遺意 嘆, 忠, 懷古, 隱逸, 思 等 目을 달아 그 內容▶P10-1을 指摘한 것도 滋味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本書를 구타여 여기 가지고 온 것은 그 內容을 檢察할 때 知名作家는 最古 乙巴素, 成忠에 始作하야 李鼎輔에 미첫다는 것이다. 李鼎輔는 英祖朝 大提學이고 또 時調 作家이거니와 그의 後라 할지라도 金天澤, 金壽長과 같은 歌客이 있었건마는 한말 紹介도 없이 李鼎輔로 끝매진 것은 或은 本書가 海東歌謠 等보다 일즉었으면 일즉었지 늦지 안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反面 또 英正 時代를 지내면 詩歌界는 大段히 不振하야 들 만한 作家도 나지 안했으니까 李鼎輔 以後의 作家를 드지 못하고 金天澤, 金壽長 等은 社會的 地位라던지 그 作品이 足히 取할 거리가 되지 못하야 後世의 編이면서도 올리지 안하였는지도 모르겠다. 要컨댄 疑問을 부치면 얼마라도 부칠 수 있으나 便宜上 여기 合하야 그 紹介를 하여 두겠다.
쪽수▶P10-2다음 대강 영조인물어세를 지내면 시가계는 대체로 부진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앞의 삼가집은 마치 종전의 시가를 여기 와서 총 청산하여 버린 느낌이 있고, 이후의 시가계는 단순히 그를 반복, 활용한 데 지나지 못한 듯이 보이나 이러한 데에 가집은 자연 실제 창곡을 위하여 편찬될 것이다. 청구영언서적이라던지 해동가요서적 따위를 보면 눈에 따라서는 역시 그렇게도 생각되지 않지도 안 하지마는 그래도 해동가요서적 같은 것은 널리 문헌을 부집, 참고하여 편찬한 문헌적 가집의 지위를 잃지 않는데 이 뒤에 나타난 남훈태평가서적는 그러한 의식이 없이 다만 창곡가의 텍스트가 될 따름이었었다.
쪽수▶P10-2다음 大綱 英祖御世를 지내면 詩歌界는 大體로 不振한 狀態가 繼續되였다. 앞의 三歌集은 마치 從前의 詩歌를 여기 와서 總淸算하야 버린 느낌이 잇고, 以後의 詩歌界는 單純히 그를 反覆 活用한 데 지나지 몯한 듯이 보이나 이러한 데에 歌集은 自然 實際 唱曲을 爲하야 編纂될 것이다. 靑丘永言이라던지 海東歌謠 따위를 보면 눈에 딸아서는 亦是 그러케도 생각되지 않지도 안 하지마는 그래도 海東歌謠 같은 것은 널리 文獻을 裒集 叅考하야 編纂한 文獻的 歌集의 地位를 잃지 않는데 이 뒤에 나타난 南薰太平歌는 그러한 意識이 없이 다만 唱曲家의 텍스트가 될 따름이었었다.
쪽수▶P10-3남훈태평가서적는 편자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계해년에 경성 석동에서 간행되었다. 순조선문으로 되어 한 자의 한자가 섞이지 않았고 단가 시조에 있어서는 종장 제4구를 추락한 것은 오언(謷言)을 요할 것 없이 실제 노래로 부르는 그대로를 적은 것이 되겠는데, 전체를 시조, 잡가, 가사에 나누어, 시조는 곡조에 의하여 224수를 분류, 수록하였고, 잡가는 소춘향가, 매화가, 백구사 등 3수, 가사는 춘면곡, 상사별곡, 처사가, 어부사 등 4수를 수록하였다. 그런데 앞에 말한 판각연▶P11-1대인 계해는 기실 어느 계해인지 확실을 못 하였다. 원문주12▶연표에서 최근의 계해를 찾으면 순종인물 3년, 철종인물 14년이 있거니와 용어법, 용자법이며 판이 조금도 고색이 없을 뿐 아니라, 편찬되어서 판본으로 될 때까지는 얼마 동안 사본으로 전하여 왔을 것을 상상하여야 될 것이니, 비교적 근대에 속한 철종인물 13년의 계해년일지도 모를 것이다.[21]
쪽수▶P10-3南薰太平歌는 編者가 未詳하오나 癸亥年에 京城 石洞에서 刊行되였다. 純朝鮮文으로 되여 一字의 漢字가 섞이지 않었고 短歌 時調에 있어서는 終章 第四句를 墜落한 것은 謷言을 要할 것 없이 實際 노래로 부르는 그대로를 적은 것이 되겠는대, 全體를 時調, 雜歌, 歌詞에 난후어, 時調는 曲調에 依하야 二百二十四首를 分類 收錄하얐고, 雜歌는 소춘향가, 매화가, 백구사 等 三首, 歌詞는 춘면곡, 상사별곡, 처사가, 어부사 등 四首를 收載하얐다. 그런대 앞에 말한 板刻年▶P11-1代인 癸亥는 其實 어느 癸亥인지 確實을 몯 하였다. 원문주12▶年表에서 最近의 癸亥를 찾으면 純宗 三年, 哲宗 十四年이 있거니와 用語法, 用字法이며 板이 조곰도 古色이 없을 뿐 아니라, 編纂되여서 板本으로 될 때까지는 얼마 동안 寫本으로 傳하여 왓을 것을 想像하여야 될 것이니, 比較的 近代에 屬한 哲宗 十四年의 癸亥年일지도 모를 것이다.[22]
쪽수▶P11-2요컨대 영조인물조 이후에서 철종인물, 고종인물조에 이르는 연간에 이러한 가집이 이것만이 아니었을 것이나 이것은 물론 시가계의 한 침체 기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침체기는 시가계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고종인물조에 와서 박효관인물의 승평계(昇平稧)를 중심으로 하여 다시 시가계에는 서광이 비쳤으니, 박효관인물의 열성 있는 지도와 그 문하에 모여드는 가객들의 활기 있는 활동은 거듭 영조인물조 경정산 가단을 출현시켰다. 그러나 때는 오랫동안의 침체하였던 뒤나, 무근의 잡요가 세상에 유행하였고 유포되어 있는 가집이란 것은 있던 것들의 제차며 명목이 없어져 보는 자에게 불편이 적지 않았으니 그들에게는 자연히 일세를 지도할 가치 있는 가집의 편찬이 필요해젔다. 그리하여 나타난 것이 곳 가곡원류서적다.
쪽수▶P11-2要컨댄 英祖朝 以後에서 哲宗, 高宗朝에 이르는 年間에 이러한 歌集이 이것만이 아니었을 것이나 이것은 勿論 詩歌界의 한 沈滯氣分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沈滯期는 詩歌界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었다. 高宗朝에 와서 朴孝寬의 昇平稧를 中心으로 하야 다시 詩歌界에는 曙光이 비첫으니, 朴孝寬의 熱誠 있는 指導와 그 門下에 모여드는 歌客들의 活氣 있는 活動은 돕거 英祖朝 敬亭山 歌壇을 出現식혓다. 그러나 때는 오랫동안의 沈滯하였던 뒤나, 無根의 雜謠가 世上에 流行하였고 流布되여 있는 歌集이란 것은 第次며 名目이 없어저 보는 者에게 不便이 적지 않었으니 그들에게는 自然히 一世를 指導할 價値있는 歌集의 編纂이 必要하여젔다. 그리하야 나타난 것이 곳 歌曲源流다.
쪽수▶P11-3가곡원류서적청구영언서적, 해동가요서적와 합하여 조선의 3대가집이라 일러오는데 가장 널리 세상에 유포되어 있고 또 이본도 많이 있기로 유명하다. 규장각기관본, 이왕직도서관기관본, 최남선인물 씨 소장본, 이왕직아악부기관본, 總督府圖書館기관본이 다 그 이본이라 할 수 있으나 이들은 각각 조금씩 차이가 있고, 그중에 규장각기관본에는 편자의 발문이 있고 이왕직도서관기관본에는 안민영인물의 서문이 있는 것은 특히 귀한 것이라 하겠다. 전체 노래 수는 대강 800여 수인데 이를 곡조에 의하여 편찬하였으며 원문주13▶끝에는 따로 여창가취(女唱歌聚)[23](아악부본에는 여창질(女唱秩)라 하여 170여 수를 별도로 수록하였다. 편찬연대는 안민영인물 서에 “丙子榴夏節周翁安玟英字聖武序”라 하였으니 고종인물 13년인 듯하다. 그리고 다음 편자에 대하여 일언하면 이것은 한 사람의 손에 편찬된 것이 아니고 승평계 중에서 박효관인물의 문인들이 서로 모이여 수집, 편찬한 것인 듯하다. 따라서 이 편찬사업▶P12-1에 늘 지도적 책임에 있는 이는 물론 박 씨 자신이거니와 박효관인물은 자를 경화(景華)라 하고 호를 운안(雲岸)이라 하였다. 대원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호는 실상 대원군이 내린 것이라 하나, 평생에 선가(善歌)하여 수류화개지야(水流花開之夜)나 월랑풍청지진(月朗風淸之辰)에는 유량(瀏亮)한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와 가는 구름을 멈추니 옛날 귀년선재(龜年善才)라도 가히 미칠 수 없었다. 원문주14▶그러므로 풍류재자(風流才子)며 야유사녀(冶遊士女)가 추앙하지 않는 이가 없어 다 자와 호를 부르지 않고 박선생이라 불렀으며 유일풍소객(遺逸風騷客)이 모여 승평계를 모으니 선생은 곧 그 계의 주맹이 되었다 한다.[24] 그리하여 그를 중심으로 지우문인이 운집하니 본서의 편찬에 많이 힘쓸 안민영인물자성무, 호 주옹 같은 이도 다 그중 한 사람이다.
쪽수▶P11-3歌曲源流는 靑丘永言, 海東歌謠와 合하야 朝鮮의 三大歌集이라 일러오는대 가장 널리 世上에 流布되여 있고 또 異本도 많이 있기로 有名하다. 奎章閣本, 李王職圖書館本, 崔南善氏本, 李王職雅樂部本, 總督府圖書館本이 다 그 異本이라 할 수 있으나 이들은 各各 조곰式 差異가 있고, 그中에 奎章閣本에는 編者의 跋文이 있고 李王職圖書館本에는 安玟英의 序文이 있는 것은 特히 貴貴한 것이라 하겠다. 全體 歌數는 大綱 八百餘 首인대 이를 曲調에 依하야 編纂하였으며 원문주13▶끝에는 따루 女唱歌聚[25](雅樂部本에는 女唱秩)라 하야 一百七十餘 首를 別錄하였다. 編纂年代는 安玟英 序에 「丙子榴夏節周翁安玟英字聖武序」라 하였으니 高宗 十三年인 듯하다. 그리고 다음 編者에 對하야 一言하면 이것은 한 사람의 손에 編纂된 것이 아니고 昇平稧 中에서 朴孝寬의 門人들이 서로 모이여 蒐集 編纂한 것인 듯하다. 따라서 이 編纂事業▶P12-1에 늘 指導的 責任에 있는 이는 勿論 朴氏 自身이거니와 朴孝寬은 字를 景華라 하고 號를 雲岸이라 하였다. 大院君의 特別한 寵愛를 받어 號는 實相 大院君의 所賜한 것이라 하나, 平生에 善歌하야 水流花開之夜이나 月朗風淸之辰에는 瀏亮한 喉聲이 제절로 흘러나와 가는 구름을 멈추니 녯날 龜年善才라도 可히 미칠 수 없었다. 원문주14▶그러므로 風流才子며 冶遊士女가 推重치 않이가 없어 다 字와 號를 부르지 않고 朴先生이라 불렀으며 遺逸風騷客이 모이여 昇平稧를 모으니 先生는 곳 그 楔의 主盟이 되였다 한다.[26] 그리하야 그를 中心으로 知友門人이 雲集하니 本書의 編纂에 많이 힘쓸 安玟英字聖武號周翁 같은 이도 다 그中의 一人이다.
쪽수▶P12-2이상 대강 위로는 삼대목서적에서부터 밑으로는 가곡원류서적에 이르는 역대의 가집과 그 편찬 사업을 간단이 일고하였다. 이 밖에도 아직 들지 못한 편자 미상의 수종 가사집과 가사 6종(천견윤태낭인물 씨 소장)이며 또 객악보서적(정학모인물 씨 소장)와 고금기사서적(최남선인물 씨 소장)가 있고 갱신 이후에는 활자를 이용하여 상품적으로 편찬한 많은 가곡집이 있지마는 일체 그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상 말해온 바로써 여기 총괄하야 생각해 보면 조선에 있어서 가집 편찬 사업이 일어난 것은 벌서 천수백 년 전 일이지마는 그 후 그 사업이 중단되고, 이조에 들어와서 다시 부흥하였으나 처음에는 단순히 국가사업이더니 차차 개인사업으로 옮아감에 따라 악장 중심에서 일반 시가 중심으로 나아가고, 시가의 쇠퇴기에는 일종 창곡본으로 진출하여 하마터면 가집의 문헌성이 대부분 상실할까 하였더니, 말기에 와서 다시 가집 본래의 정신을 깨달았다. 그리고 역대 가집에 취록하여 온 시가의 종류로 말하면 처음에는 장가만이었으나 나중에는 대부분이 단가였다. 또 가집 편찬인을 내다보면 개인 편찬 시대에 와서는 모두 그들이 속하고 있는 계급이 비교적 당시 사람의 숭경을 받지 못했던 듯하다. 즉 조선에 있어서 역대 가집의 편찬인은 양반 계급의 인물이 아니고 평민 계급▶P13-1의 인물이었음이 주의된다. 따라서 그들의 편찬의식도 일층 우리의 주의를 끈다 하겠다.
쪽수▶P12-2以上 大綱 우로는 三代目에서부터 밑으로는 歌曲源流에 이르는 歷代의 歌集과 그 編纂事業을 簡單이 一顧하였다. 이 밖에도 아직 드지 몯한 編者 未詳의 數種 歌詞集과 歌詞 六種(淺見淺太郎氏藏)이며 또 客樂譜(鄭鶴謨氏藏)와 古今 奇詞(崔南善氏藏)가 있고 更新 以後에는 活字를 利用하야 商品的으로 編纂한 많은 歌曲集이 있지마는 一切 그들에 對하여는 言及하지 않었다. 그러면 以上 말해온 바로써 여기 總括하야 生覺해 보면 朝鮮에 있어서 歌集編纂事業이 일어난 것은 벌서 千數百 年 前 일이지마는 그 後 그 事業이 中斷하야지고, 李朝에 들어와서 다시 復興하였으나 처음에는 單純히 國家事業이더니 차차 個人事業으로 옮아감에 딸아 樂章 中心에서 一般 詩歌 中心으로 나아가고, 詩歌의 衰退期에는 一種 唱曲 本으로 進出하야 하마트면 歌集의 文獻性이 大部分 喪失할가 하였더니, 末期에 와서 다시 歌集 本來의 精神을 깨달았다. 그리고 歷代 歌集에 取錄하여 온 詩歌의 種類로 말하면 처음에는 長歌만이었으나 나중에는 大部分이 短歌이었었다. 또 歌集 編纂人을 내다보면 個人 編纂 時代에 와서는 皆是 그들의 屬하고 있는 階級이 比較的 當時 사람의 崇敬의 的이 되지 몯하였는 듯하다. 卽 朝鮮에 있어서 歷代 歌集의 編纂人은 兩班 階級엣 人物이 아니고 平民 階級▶P13-1엣 人物이었음이 主意된다. 딸아서 그들의 編纂意識도 一層 우리의 注意을 끈다 하겠다.




























본문3: 3


쪽수▶P13-2그러면 지금부터 본론에 들어가 그들 가집 편찬의식에 대하여 말해보자. 편찬의식이라 할지라도 이를 크게 말하면 거의 시가 전반에 미치는 것이 되어 도저히 이 즉론에 있어서는 수합할 수 없으니 여기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문제를 좁혀서 직접 가집에 관계되는 한에서 가체, 분류, 작가, 원작, 분절, 편자 및 서발 등 6항에 나누어 말해 볼까 한다.
쪽수▶P13-2그러면 지금부터 本論에 들어가 그들 歌集編纂意識에 對하야 말해보자. 編纂意識이라 할지라도 이를 크게 말하면 거의 詩歌 全般에 미치는 것이 되여 到底히 이 卽論에 있어서는 收合할 수 없으니 여기서는 될 수 있는 대로 問題를 좁히서 直接 歌集에 關係되는 限에서 歌體, 分類, 作家, 原作, 分節, 編者 及 序跋 等 六項에 난후이 말해 볼가 한다.





































































































본문3-1: 3-1


쪽수▶P13-3시가는 그를 내용으로 분류하는 이외에 형식으로 분류하여 장가, 단가로 나눌 수 있고, 또 장가와 단가는 각기 특질에 의하여 기종에 구별할 수 있거니와 고래로 가집 편찬자는 이것을 어떻게 의식하고 있었던가. 우리는 가집을 열람할 때 장가가 있으면 단가가 있음을 보고, 고가가 있으면 신가가 있음을 볼 뿐 아니라 악장이 있으면 또 속가가 있는 것을 보듯이 모든 가체를 가집 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으나, 대강 그 가집의 내용 성질로서 구분하여 보면 장가 본의의 가집과 단가 본의의 가집 2종으로 할 수 있는데, 악장가사서적며 가사집 등은 다 前者에 屬하는 것이고 청구영언서적, 해동가요서적 등 3대가집과 객악보서적, 동가선서적, 남훈태평가서적 등은 다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장가로 편록되었지만 후자에 있어서는 반드시 단가만으로 된 것이 적고 보통은 단, 장가가 한 책에 혼재해 있음을 본다. 그러면 이야기는 주로 이 방면에 경주하게 되겠으나, 그 앞에 장가를 본의로 한 가집에 대하여 간단히 말해치우자면 가▶P14-1사집 종류는 모두 가사만으로 되였고, 악장가사서적는 그중에 사모곡과 신도가와 같은 비교적 단형을 수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큰 변화를 볼 수 없이 장가집 본의 체재를 잃지 않았다.
쪽수▶P13-3詩歌는 그를 內容으로 分類하는 以外에 形式으로 分類하야 長歌, 短歌로 난훌 수 있고, 또 長歌와 短歌는 各其 特質에 依하야 幾種에 區別할 수 있거니와 古來로 歌集編纂者는 이것을 如何히 意識하고 있었던가. 우리는 歌集을 閱覽할 때 長歌가 있으면 短歌가 있음을 보고, 古歌가 있으면 新歌가 있음을 볼 뿐 아니라 樂章이 있으면 또 俗家가 있는 것을 보듯이 모든 歌體를 歌集 中에서 容易히 發見할 수 있으나, 大綱 그 歌集의 內容 性質로서 區分하야 보면 長歌 本意의 歌集과 短歌 本意의 歌集 二種으로 할 수 있는대, 樂章歌詞며 歌詞集 等은 다 前者에 屬하는 것이고 靑丘永言, 海東歌謠 等 三大歌集과 客樂譜, 東歌選, 南薰太平歌 等은 다 後者에 屬하는 것이다. 그러나 前者에 있어서는 大部分이 長歌로 編錄되였지마는 後者에 있어서는 번드시 短歌만으로 된 것이 적고 普通는 短長歌가 一册에 混在하야 있음을 본다. 그러면 이야기는 主로 이 方面에 傾注하게 되겠으나, 그 앞에 長歌를 本意로 한 歌集에 對하야 簡單히 말해치우자면 歌▶P14-1詞集 種類는 모다 歌詞만으로 되였고, 樂章歌詞는 그中에 思母曲과 新都歌와 같은 比較的 短型을 收拾한 것이 있다 하드라도 큰 變化를 볼 수 없이 長歌集 本의 體裁를 잃지 않었다.
쪽수▶P14-2그런데 단가를 본의로 한 가집이 되면 그와 같이 단순하지 않고 약간 복잡한 듯이 보이니 우선 이것을 청구영언서적에서 예를 들어 보면 처음에는 단가로부터 시작하여 주로 시조집의 취의를 잃지 않았으나 끝에 장진주, 상사곡, 춘면곡, 권주가, 백구사, 군악, 친등가, 양양가, 귀거래, 어부사, 환산별곡, 처사가, 낙빈가, 강촌별곡, 관동별곡, 황계가, 매화가 등 장가를 붙였고, 남훈태평가서적 역시 이와 같이 잡가편(쇼춘향가, ᄆᆡ화가, ᄇᆡᆨ구사 등), 가사편(츈면곡, 상사별곡, 쳐사가, 어부사 종)을 끝에 붙였으며, 고금가곡서적은 단가 앞에 어부사, 감군사, 상저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 강촌별곡, 규원가, 춘면곡 등을 재록하였다. 이것들은 특별한 것으로 부록적 취급을 한다 하고도, 전반에 뻗쳐서 아직 장단이 서로 섞여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거의 일반적 경향이니 일일이 책 이름을 들어 도리어 번잡케 할 필요가 없으나 한두 가지 그 예를 들어 본다면 해동가요서적는 작가 본의에 편찬되어 비교적 가체에도 주의하여 같은 사람의 작이 짧은 것을 먼저하고 긴 것을 뒤에 돌리는 태도를 취하였으나 권말이 되면 다소 그 의식이 불분명해져서
쪽수▶P14-2그런데 短歌를 本意로 한 歌集이 되면 그와 같이 單純하지 않고 若干 複雜한 듯이 보이니 于先 이것을 靑丘永言에서 例를 들어 보면 처음에는 短歌로부터 始作하야 主로 時調集의 趣意를 잃지 않었으나 끝에 將進酒, 相思曲, 春眠曲, 勸酒歌, 白鷗詞, 軍樂, 親燈歌, 襄陽歌, 歸去來, 漁父詞, 還山別曲, 處士歌, 樂貧歌, 江村別曲, 關東別曲, 黃鷄歌, 梅花歌 等 長歌를 부첬고, 南薰太平歌 亦是 이와 같이 雜歌編(쇼춘향가, ᄆᆡ화가, ᄇᆡᆨ구사 等), 歌詞篇(츈면곡, 상사별곡, 쳐사가, 어부사 種)을 附末하였으며, 古今歌曲은 短歌 앞에 漁父詞, 感君思, 相杵歌, 關東別曲, 思美人曲, 續思美人曲, 星山別曲, 將進酒辭, 江村別曲, 閨怨歌, 春眠曲 等을 載錄하였다. 이것들은 特別한 것으로 附錄的 取扱을 한다 하고도, 全般에 亙하야 아직 長短이 서로 混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거의 一般的 傾向이니 一々히 書名을 들어 도로혀 煩雜케 할 必要가 없으나 一二 그 例를 들어 본다면 海東歌謠는 作家 本意에 編纂되여 比較的 歌體에도 注意하야 同人 作이 짧은 것을 먼저하고 긴 것을 뒤에 돌리는 態度를 取하였으나 卷末이 되면 多小 그 意識이 不分明하야저서
쪽수▶P14-3

陽春이 布德하니 萬物이 生光輝라 우리 聖主는 萬壽無疆하사 億兆ㅣ 願戴已하고 群賢은 忠孝하야 愛民至治하고 老少에 벗님네 無故無恚커늘 名妓歌作 期會하야 細樂을 前導하고 水陸珍味 五六駄에 金剛山 도라들어 絶代名勝 求景하고 醉한 잠에 ᄭᅮᆷ을 ᄭᅮ니 ᄭᅮᆷ에 한 늙은 즁이 邀我引導하야 吳楚東南景과 濟州九点烟을 歷歷히 盤廻하며 其間에 英雄豪傑들의 자최를 무를 쩍에 夕鍾聲에 깨어나고 朝飯을 재촉하야 望月懷陵으로 正菴齋室 霽月光風水 洛▶P15-1山寺 玉流川에 塵纓을 씨슨 後에 文殊菴 中興寺에 軟泡杯酒하고 晴日에 登臨白雲峯하니 咫尺天門을 手可摩1라 萬里江山 遠近風景이 眼底에 森羅하야 丈夫의 胸襟에 雲夢을 삼컷는듯 브른ᄇᆡ 니리오니 簫皷는 喧天하야 洞壑이 울히는듯 山映樓 올라안자 花煎에 点心하고 伽倻ㄱ고 검은고에 가즌 稽笛 섯겻는듸 男歌女唱으로 終日토록 노니다가 扶旺寺 긴 洞口에 軍歌으로 드러간 이 左右에 섯는 將丞 分明이 반기는 듯 往來 遊客들은 못내부러 하돗드라 암아도 壽城春臺에 太平閑民은 우리론가 하노라

쪽수▶P14-3

陽春이 布德하니 萬物이 生光輝라 우리 聖主는 萬壽無疆하사 億兆ㅣ 願戴已하고 群賢은 忠孝하야 愛民至治하고 老少에 벗님네 無故無恚커늘 名妓歌作 期會하야 細樂을 前導하고 水陸珍味 五六駄에 金剛山 도라들어 絶代名勝 求景하고 醉한 잠에 ᄭᅮᆷ을 ᄭᅮ니 ᄭᅮᆷ에 한 늙은 즁이 邀我引導하야 吳楚東南景과 濟州九点烟을 歷歷히 盤廻하며 其間에 英雄豪傑들의 자최를 무를 쩍에 夕鍾聲에 깨어나고 朝飯을 재촉하야 望月懷陵으로 正菴齋室 霽月光風水 洛▶P15-1山寺 玉流川에 塵纓을 씨슨 後에 文殊菴 中興寺에 軟泡杯酒하고 晴日에 登臨白雲峯하니 咫尺天門을 手可摩1라 萬里江山 遠近風景이 眼底에 森羅하야 丈夫의 胸襟에 雲夢을 삼컷는듯 브른ᄇᆡ 니리오니 簫皷는 喧天하야 洞壑이 울히는듯 山映樓 올라안자 花煎에 点心하고 伽倻ㄱ고 검은고에 가즌 稽笛 섯겻는듸 男歌女唱으로 終日토록 노니다가 扶旺寺 긴 洞口에 軍歌으로 드러간 이 左右에 섯는 將丞 分明이 반기는 듯 往來 遊客들은 못내부러 하돗드라 암아도 壽城春臺에 太平閑民은 우리론가 하노라

쪽수▶P15-2와 같은 장가 12구 단가 사이에 섞여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만한 것은 해동가요서적에 있어서는 한 예외로 보겠지만 청구영언서적이라던지 가곡원류서적 같은 데는 더욱 그 태도가 몽롱하였다.
쪽수▶P15-2와 같은 長가 十二句 短歌 사이에 混入하야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만한 것은 海東歌謠에 있어서는 한 例外로 보겠지마는 靑丘永言이라던지 歌曲源流 같은 데는 더욱 그 態度가 朦朧하였다.
쪽수▶P15-3그러면 역대 가집 편찬자는 가체에 대하여 전혀 의식이 없었던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던 듯하다. 앞에서 말한 것은 일부분적 결점을 지적한 것이고 전체의 주의로서는 그래도 어떤 의식이 움직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해동가요서적는 벌서 말하였거니와 고금가곡서적도 장가, 단가를 확실히 구분하였을 뿐 아니라 단가편에 있어서도 대강 짧은 것은 긴 것보다 먼저 배열하기를 추단하지 않았고 기타 다른 가집들도 될 수 있는 대로 그 정신을 잃지 않으려 한 것이 보인다. 즉 여창유취서적에 있어도 대체에 있어 그 주의를 답습하였고, 남훈태평가서적도 그렇게 혼란하지는 않았다. 다만 부분적으로라도 그만한 정돈되지 못한 점이 있었다는 것을 뒤에서도 말할 바와 같이 역대의 가집이 대개 곡조와 작가와 및 그 내용에 분류, 편찬된 관계상 자연히 그 가체는 어느 정도까지 희생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말하자면 가체에 대한 의식이 편찬상에 충분치 못한 탓이라고는 할 수 있다. 만일 그 의식이 분명하였더라면 설령 곡조, 작가, 내용에 분류, 편찬된다 할지라도 좀 더 가체에 용의할 수가 있었을 것이고, 또는 오로지 가체에 의한 분류, 편찬도 있었을 법도 하다. 요컨대 문▶P16-1제는 의식 유무에 있다 하겠으나, 사실 또 가집을 역람하려면 대부분이 실제 창곡에 주력을 두었다고도 할 수 있으니, 실제 창곡에 있어서는 혹은 가체 같은 데에 용의하지 않아도 좋았을지 모른다. 그리해서 이것은 그다지 중시되지 못하고 다만 여력으로서 정리, 가공되지 않았는가 하니, 의식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는 아마도 그 의식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안 할 수 없을 듯하다.
쪽수▶P15-3그러면 歷代 歌集 編纂者는 歌體에 對하야 全然 意識이 없었던가 하면 그러치는 않었는 듯하다. 앞에서 말한 것은 一部分的 缺点을 指摘한 것이고 全體의 主義로서는 그래도 어떤 意識이 움죽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海東歌謠는 벌서 말하였거니와 古今歌曲도 長歌, 短歌를 確分하였을 뿐 아니라 短歌篇에 있어서도 大綱 짧은 것은 긴 것보다 먼저 排列하기를 抽斷하지 않았고 其他 다른 歌集들도 될 수 있는 대로 그 精神을 잃지 않을랴 한 것이 보인다. 即 女唱類聚에 있어도 大體에 있어 그 主義을 踏襲하였고, 南薰太平歌도 그러케 混亂하지는 않았다. 다만 部分的으로라도 그만한 不整頓이 있었다는 것을 뒤에서도 말할 바와 같이 歷代의 歌集이 大概 曲調와 作家와 및 그 內容에 分類 編纂된 關係上 自然히 그 歌體는 어느 程度까지 犧牲되지 않을 수 없었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말하자면 歌體에 對한 意識이 編纂上에 充分치 몯한 탓이라고는 할 수 있다. 萬一 그 意識이 分明하였드라면 設令 曲調, 作家, 內容에 分類 編纂된다 할지라도 좀 더 歌體에 用意할 수가 있었을 것이고, 또는 오로지 歌體에 依한 分類 編纂도 있었을 法도 하다. 要컨댄 問▶P16-1題는 意識 有無에 있다 하겠으나, 事實 또 歌集을 歷覽하랴면 大部分이 實際 唱曲에 主力을 두었다고도 할 수 있으니, 實際 唱曲에 있어서는 或은 歌體 같은 데에 用意하지 않어도 좋았을지 모른다. 그리하야 이것은 그다지 重視되지 몯하고 다만 餘力으로서 整理 加工되지 않었는가 하니, 意識이 있었는 것은 否認할 수 없으나 嚴密한 意味에 있어서는 아마도 그 意識이 充分하지 몯하였다 안 할 수 없을 듯하다.
































본문3-2: 3-2


쪽수▶P16-2분류는 가집 편찬사업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또 편찬자에 의하여 몇 가지로라도 분류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으나 역대 우리의 가집 편찬자는 대강 곡조, 작가, 내용 3종에 분류, 편찬하여 왔다. 그중에도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것은 곡조 분류법이니, 청구영언서적, 가곡원류서적, 객악보서적, 남훈태평가서적, 여창유취서적 등은 다 그것이고, 그 다음 취한 분류법은 작가에 의한 것인데, 해동가요서적, 동가선서적 등이 그것이며 내용 분류법을 취한 것은 비교적 적어 고금가곡서적에, 약간 그 색채를 가미한 동가선서적가 있을 뿐인 듯하다. 그러면 이로ㅆㅓ도 벌서 어느 정도까지 가집에 대한 편찬자의 의식 전체는 엿보일 바와 같이 실로 그들은 작가보다도 내용보다도 더 곡조에 편중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 없이 창곡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이거니와 먼저 가곡원류서적에서 그 분류된 내용을 열거하여 보면
쪽수▶P16-2分類는 歌集 編纂事業에 가장 重要한 問題이고 또 編纂者에 依하야 몇 가지로라도 分類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으나 歷代 우리의 歌集 編纂者는 大綱 曲調, 作家, 內容 三種에 分類 編纂하야 왔다. 그中에도 가장 普遍的으로 쓰이온 것은 曲調 分類法이니, 靑丘永言, 歌曲源流, 客樂譜, 南薰太平歌, 女唱類聚 等은 다 그것이고, 그다음 取한 分類法은 作家에 依한 것인대, 海東歌謠, 東歌選 等이 그것이며 內容 分類法을 取한 것은 比較的 적어 古今歌曲에, 若干 그 色彩를 加味한 東歌選이 있을 뿐인 듯하다. 그러면 일로서도 벌서 어느 程度까지 歌集에 對한 編纂者의 意識 全體는 엿보일 바와 같이 實로 그들은 作家보다도 內容보다도 더 曲調에 偏重하였든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 없이 唱曲을 重要視하였기 때문이거니와 먼첨 歌曲源流에서 그 分類된 內容을 列擧하야 보면
쪽수▶P16-3우조중대엽
장대엽(이중대엽)…………필자 주우조이중대엽?
삼중대엽…………필자 주우조삼중대엽?
계면위초중대엽
▶P17-1이중대엽…………필자 주계면조이중대엽?
삼중대엽…………필자 주계면조삼중대엽?
후정화

이후정화
우조초수대엽
이수대엽…………필자 주우조이수대엽?
중거…………필자 주우조중거이수대엽?
평거…………필자 주우조평거이수대엽?
두거…………필자 주우조두거이수대엽?
우조삼수대엽
소용
계면조초수대엽
이수대엽…………필자 주계면조이수대엽?
중거…………필자 주계면조중거이수대엽?
평거…………필자 주계면조평거이수대엽?
▶P18-1두거…………필자 주계면조두거이수대엽?
삼수대엽…………필자 주계면조삼수대엽?
만횡

우락…………필자 주우조악시조?
엇락…………필자 주엇락시조?
편락…………필자 주편락시조?
계락…………필자 주계면조악시조
편수대엽
엇편
쪽수▶P16-3羽調中大葉
長大葉(二中大葉)…………筆者註羽調二中大葉?
三中大葉…………筆者註羽調三中大葉?
界面謂初中大葉
▶P17-1二中大葉…………筆者註界面調二中大葉?
三中大葉…………筆者註界面調三中大葉?
後庭花

二後庭花
羽調初數大葉
二數大葉…………筆者註羽調二數大葉?
中擧…………筆者註羽調中擧二數大葉?
平擧…………筆者註羽調平擧二數大葉?
頭擧…………筆者註羽調頭擧二數大葉?
羽調三數大葉
搔聳
界面調初數大葉
二數大葉…………筆者註界面調二數大葉?
中擧…………筆者註界面調中擧二數大葉?
平擧…………筆者註界面調平擧二數大葉?
▶P18-1頭擧…………筆者註界面調頭擧二數大葉?
三數大葉…………筆者註界面調三數大葉?
蔓橫

羽樂…………筆者註羽調樂時調?
旕樂…………筆者註旕樂時調?
編樂…………筆者註編樂時調?
界樂…………筆者註界面調樂時調
編數大葉
旕編
쪽수▶P18-230목으로 나누어 있다. 청구영언서적의 분류 항목도 원체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지마는 후정화, 대, 이후정화며 중, 평, 두거가 계면이수대엽, 롱, 우락시조, 계락시조, 편락대엽 등의 중첩이 있는 듯하다. 남훈태평가서적는 그 분류법이 훨씬 간단하여 권두에 낙시뇨, 롱, 편, 송, 소용, 우됴, 후정화, 계면, 만수대엽, 원사쳥, 잡가, 가사 등 12항목을 내세우고 본문에 들어가서는 처음에 낙시됴, 끝에 잡가, 가사의 항목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아마 낚시료, 롱, 편, 계면 등은 곡조상의 구별이고 내용 그것에 있어서는 한 수를 가지고 어느 곡조로라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인 듯하다.
쪽수▶P18-2三十目으로 난후어 있다. 靑丘永言의 分類 項目도 元體에 있어서는 變함이 없지마는 後庭花, 臺, 二後庭花며 中, 平, 頭擧가 界面二數大葉, 弄, 羽樂時調, 界樂時調, 編樂大葉 等의 重疊이 있는 듯하다. 南薰太平歌는 그 分類法이 훨신 簡單하야 卷頭에 낙시뇨, 롱, 편, 송, 소용, 우됴, 후정화, 계면, 만수대엽, 원사쳥, 잡가, 가사 等 十二項目을 내세우고 本文에 들어가서는 처음에 낙시됴, 끝에 잡가, 가사의 項目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아마 낚시료, 롱, 편, 계면 等은 曲調上의 區別이고 內容 그것에 있어서는 한 首를 가지고 어느 曲調로라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인 듯하다.
쪽수▶P19-1다음 여창유취서적의 분류법을 보면 이것도 별다른 것은 없지마는 흔히 여창이라 하여 다소의 차이도 있는 듯하니 전에 의하여 그 항목 열거하면
쪽수▶P19-1다음 女唱類聚의 分類法을 보면 이것도 別다른 것은 없지마는 흔히 女唱이라 하야 多少의 差違도 있는 듯하니 前에 依하야 그 項目 列擧하면
쪽수▶P19-2羽調中大葉(우됴듕한입)
界面調中大葉(계면듕한입)
後庭花(후정화)
臺(대)
羽調長數大葉(우됴두ᄅᆞᄂᆞᆫ자진한입)
中擧(우도듕허리드ᄂᆞᆫ자진한입)……筆者註羽調中擧數大葉?
平擧(우됴막드ᄂᆞᆫᄌᆞ진한입)………筆者註羽調平擧數大葉?
短數大葉(우됴존ᄌᆞ진한입)………筆者註羽調短數大葉?
栗糖數大葉(밤엿ᄌᆞ진한입)
界面調數大葉(계면긴ᄌᆞ진한입)……筆者註界面調長數大葉?
中擧(듕허리드ᄂᆞᆫᄌᆞ즌한입)……筆者註界面調中擧數大葉?
平擧(박ᄂᆡᄂᆞᆫᄌᆞ즌한입)…………筆者註界面調平擧數大葉?
短數大葉(죤ᄌᆞ즌한입)………筆者註界面調短數大葉?
弄(項目墜落)
▶P20-1羽樂(우락)
界樂(계락)
編數大葉(편자입한즌)
(주)( ) 안은 전간인물 씨 소장본 여창가요록에 의함
쪽수▶P19-2羽調中大葉(우됴듕한입)
界面調中大葉(계면듕한입)
後庭花(후정화)
臺(대)
羽調長數大葉(우됴두ᄅᆞᄂᆞᆫ자진한입)
中擧(우도듕허리드ᄂᆞᆫ자진한입)……筆者註羽調中擧數大葉?
平擧(우됴막드ᄂᆞᆫᄌᆞ진한입)………筆者註羽調平擧數大葉?
短數大葉(우됴존ᄌᆞ진한입)………筆者註羽調短數大葉?
栗糖數大葉(밤엿ᄌᆞ진한입)
界面調數大葉(계면긴ᄌᆞ진한입)……筆者註界面調長數大葉?
中擧(듕허리드ᄂᆞᆫᄌᆞ즌한입)……筆者註界面調中擧數大葉?
平擧(박ᄂᆡᄂᆞᆫᄌᆞ즌한입)…………筆者註界面調平擧數大葉?
短數大葉(죤ᄌᆞ즌한입)………筆者註界面調短數大葉?
弄(項目墜落)
▶P20-1羽樂(우락)
界樂(계락)
編數大葉(편자입한즌)
(註)( )內는 煎間 氏 藏本 女唱歌謠錄에 依함
쪽수▶P20-217항목에 나누었다.
쪽수▶P20-2十七項目에 난후었다.
쪽수▶P20-3그러나 곡조 분류법 가집 편찬상에 얼마만한 가치를 재래하였는가. 곡조는 본래 음악상의 고저, 장단이며 창법을 규정한 것이고, 문학상 혹은 시가 형식상에서 구별한 명칭이 아닌 이상 한 수의 시가를 설령 우조니 계면조, 중대엽이니 수대엽 어느 것에 분속시켰다 하더라도 과연 그 시가를 그 곡조에 전속 고정시킬 수 있을까. 가곡원류서적 편자는 그 발문에 시가와 곡조와의 관계를 명언하여
쪽수▶P20-3그러나 曲調 分類法 歌集 編纂上에 얼마만한 價値를 齎來하였는가. 曲調는 本來 音樂上의 高低, 長短이며 唱法을 規定한 것이고, 文學上 或은 詩歌 形式上에서 區別한 名稱이 아닌 以上 一首의 詩歌를 設令 羽調니 界面調, 中大葉이니 數大葉 어느 것에 分屬식혔다 하드라도 果是 그 詩歌를 그 曲調에 專屬 固定식힐 수 있을가. 歌曲源流 編者는 그 跋文에 詩歌와 曲調와의 關係를 明言하야
쪽수▶P20-4

원문주15▶羽界, 本非係著者, 亦推移有權變之道, 唯在歌者之變通, 而或以有羽爲界, 以界爲羽, 數大葉, 弄, 樂, 編, 互相推移歌之, 非徒以譜上名目偏執可也, 韻彙之平上去入高低清濁, 亦有權變合勢之理也, 且所謂女唱辭說, 亦非女唱坪係着者也, 男唱辭說中, 移以爲之者也, 亦菲念理通神者則, 不可解得者也爾,[27]

쪽수▶P20-4

원문주15▶羽界, 本非係著者, 亦推移有權變之道, 唯在歌者之變通, 而或以有羽爲界, 以界爲羽, 數大葉, 弄, 樂, 編, 互相推移歌之, 非徒以譜上名目偏執可也, 韻彙之平上去入高低清濁, 亦有權變合勢之理也, 且所謂女唱辭說, 亦非女唱坪係着者也, 男唱辭說中, 移以爲之者也, 亦菲念理通神者則, 不可解得者也爾,[28]

쪽수▶P20-5라 하여 곡조는 시가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수의 시가는 어떠한 곡조에라도 부르는 사람 마음대로 추이명출(推移明出)할 수 있다 하였다. 이것은 가곡원류서적 편자와 같은 가학 권위자의 한 말이니 충분히 신용할 수 있다 하겠거니와 실로 보면 곡조 분류법은 그 근거가 실로 위험한 듯이 생각된다. 그러면 역대 편찬자가 즐겨 이 분류법을 쓴 것은 그 이유가 어디 있었는가. 가곡원류서적 편찬자도 곡조와 시가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으면서 감히 취하였다 한다면 우리는 그중에서 무엇을 ▶P21-1파악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으나, 아직 그들 분명히 할 수는 없지마는 이것은 아마 그 시가를 그 곡조에 고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그 곡조에 비교적 적당한 시가를 분배함에 그치지 않았는가 한다.
쪽수▶P20-5라 하야 曲調는 詩歌를 規定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一首의 詩歌는 如何한 曲調에라도 歌者 마음대로 推移明出할 수 있다 하였다. 이것은 歌曲源流 編者와 같은 歌學 權威者의 한 말이니 充分히 信用할 수 있다 하겠거니와 실로 보면 曲調 分類法은 그 根據가 實로 危險한 듯이 생각된다. 그러면 歷代 編纂者가 즐겨 이 分類法을 쓴 것은 그 理由가 어데 있었는가. 歌曲源流 編纂者도 曲調와 詩歌의 關係를 認識하고 있으면서 敢히 取하였다 한다면 우리는 그中에서 무엇을 ▶P21-1把握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으나, 아직 그들 闡明히 할 수는 없지마는 이것은 아마 그 詩歌를 그 曲調에 固定한다는 意味가 아니라, 다만 그 曲調에 比較的 適當한 詩歌를 分配함에 그치지 않었는가 한다.
쪽수▶P21-2다음 작가에 의하여 분류 편찬한 가집에는 해동가요서적동가선서적가 있다 함은 앞에서도 말하였거니와 가집은 어느 의미에 있어 입체적으로 평면적으로 모든 가인, 작품을 일당에 집합한 것이라 볼 수 있으니, 이것을 작가에 의한 분류를 시도한 것은 실로 적실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인물은 또 그 자신에 있어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 작가 분류법은 저절로 연대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되겠으나, 편찬자는 이것도 잘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해동가요서적에서 그 예를 보면 모든 작가 100여 명을 여조, 본조에 나누어 여조에 이색인물, 정몽주인물, 맹사성인물, 3인을 올리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태종인물, 성종인물, 효종인물, 숙종인물, 4대왕을 먼저 추대하고, 다음에 국초의 김종서인물, 성삼문인물, 박팽년인물, 왕방연인물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순차로 후대에 미처 최후 본인, 무명씨에 이르렀다. 동가선서적도 처음에는 곡조의 설명 격으로 김광욱인물 외 수인의 작품을 연대의 순위도 없이 나열하였지마는 제2장째부터는 태종인물, 효종인물, 숙종인물, 3대왕을 추대하고 고려의 길재인물, 이색인물, 원천석인물, 이재오인물, 이조년인물을 가지고 왔으며 그 다음에 비교적 작가의 신용이 적은 곽여인물을파소인물, 벽총인물, 최충인물, 성충인물, 우탁인물 等의 작가를 揷入하고는 本朝에 와서 맹사성인물, 김종서인물, 성삼문인물, 박팽년인물, 하위지인물, 이개인물, 유응부인물, 김종직인물의 순으로 후대에 미처 김유기인물, 김성기인물, 윤순인물, 이정보인물, 기타 기녀와 무명씨에 이르렀다.
쪽수▶P21-2다음 作家에 依하야 分類 編纂한 歌集에는 海東歌謠와 東歌選이 있다 함은 앞에서도 말하였거니와 歌集은 어느 意味에 있어 立體的으로 平面的으로 모든 歌人 作品을 一堂에 集合한 것이라 볼 수 있으니, 이것을 作家에 依하야 分類를 試한 것은 實로 的實한 方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人物은 또 그 自身에 있어 時代를 意味하는 것이 되여 作家 分類法은 제절로 年代的으로 分類하는 것이 되겠으나, 編纂者는 이것도 잘 意識하고 있었던 것이다, 即 海東歌謠에서 그 例를 보면 모든 作家 百餘 名을 麗朝, 本朝에 난후어 麗朝에 李穡, 鄭夢周, 孟思誠, 三人을 올리고 本朝에 들어와서는 太宗, 成宗, 孝宗, 肅宗, 四大王을 먼저 推戴하고, 다음에 國初의 金宗瑞, 成三問, 朴彭年, 王邦衍 等으로부터 始作하야 順次로 後代에 미처 最後 本人 無名氏에 이르렀다. 東歌選도 처음에는 曲調의 說明格으로 金光煜 外 數人의 作品을 年代의 順位도 없이 羅列하였지마는 第二張재부터는 太宗, 孝宗, 肅宗, 三大王을 推戴코 高麗의 吉再, 李穡, 元天錫, 李存吾, 李兆年을 가지고 왔으며 그다음에 比較的 作家에 信用이 적은 郭輿며 乙巴素, 薛聰, 崔冲, 成 忠, 禹倬 等의 作家를 揷入하고는 本朝에 와서 孟思誠, 金宗瑞, 成三問, 朴彭年, 河緯地, 李塏, 兪應孚, 金宗直의 順으로 後代에 미처 金裕器, 金聖器, 尹淳, 李鼎輔, 其他 妓女와 無名氏에 이르럿다.
쪽수▶P21-3이로 인하여 역대의 작가는 한 가집 내에 정연히 세워서 연대적으로 시가를 감상할 수 있고, 또 일개인의 작품은 한곳에서 충분히 완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가집에 있어서도 곡조와는 완전히 인연을 끊을 수는 없는 것 같아 처음에는 반드시 곡조의 몇을 내어 예시한 것을 볼 수 있으니, 동가선서적에도 초중대엽, 이중대엽, 북전, 초수대엽, 이수대▶P22-1엽의 예를 들었지마는 해동가요서적에도 역시 초중대엽, 이중대엽, 북전, 이북전, 초수대엽, 이수대엽의 6목를 들어서 각 1수씩-이수대엽에는 없는 것 같지마만-그에 무기명으로 배당하였다. 이것은 물론 권초의 소부분으로 거의 가집 전체에는 영향이 없겠지만 작가 분류의 가집에서도 그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또한 묵과할 수 없다.
쪽수▶P21-3일로 因하야 歷代의 作家는 一歌集 內에 整然히 羅立하야 年代的으로 詩歌를 鑑賞할 수 있고, 또 一個人의 作品은 한곳에서 充分히 玩味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歌集에 있어서도 曲調와는 完全히 因緣을 끈을 수는 없는 것 같하야 처음에는 반드시 曲調의 몇을 내어 例示한 것을 볼 수 있으니, 東歌選에도 初中大葉, 二中大葉, 北殿, 初數大葉, 二數大▶P22-1葉의 歌例를 들었지마는 海東歌謠에도 亦是 初中大葉, 二中大葉, 北殿, 二北殿, 初數大葉, 二數大葉의 六目를 들어서 各 一首式-二數大葉에는 없는 것 같지마는-그에 無記名으로 配當하였다. 이것은 勿論 卷初의 小部分으로 거의 歌集 全體에는 影響이 없겠지마는 作家 分類의 歌集에서도 그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또한 默過할 수 없다.
쪽수▶P22-2그리고 최후로 내용에 의한 분류 편찬에 대하여 일언하여 두겠다. 내용적 분류란 것은 전연 문학적 의식에 입각하여 분류한 것이라 보겠으나, 이에 속한 가집은 가장 적어 고금가곡서적이 있을 뿐이란 것은 앞에서도 말하였지마는 고금가곡서적은 단가 246수를 인륜(人倫), 권계(勸戒), 송축(頌祝), 정조(貞操), 연군(戀君), 개세(慨世), 우풍(寓風), 회고(懷古), 권로(勸老), 절서(節序), 심방(尋訪), 은둔(隱遁), 한적(閑適), 연음(讌飮), 취흥(醉興), 감물(感物), 염정(艶情), 규원(閨怨), 이별(離別), 별한(別恨), 20항목에 나누고 다시 34수의 만횡청류와 14수의 자작 단가를 부재하였으나, 그 20개의 분류 항목이란 것은 거의 단가 전체를 능히 포용할 수 있는 정밀한 분류법이라 할 수 있다. 지금 각 항목에서 제1수의 1수씩을 인용하여 편자의 이에 대한 의식을 밝히 보면 다음과 같다.
쪽수▶P22-2그리고 最後로 內容에 依한 分類 編纂에 對하야 一言하야 두겠다. 內容的 分類란 것은 全然 文學的 意識에 立脚하야 分類한 것이라 보겠으나, 이에 屬한 歌集은 가장 적어 古今歌曲이 있을 뿐이란 것은 앞에서도 말하였지마는 古今歌曲은 短歌 二百四十六首를 人倫, 勸戒, 頌祝, 貞操, 戀君, 慨世, 寓風, 懷古, 勸老, 節序, 尋訪, 隱遁, 閑適, 讌飮, 醉興, 感物, 艶情, 閨怨, 離別, 別恨, 二十項目에 난후고 다시 三十四首의 蔓橫淸流와 十四首의 自作 短歌를 附載하였으나, 그 二十個의 分類 項目이란 것은 거의 短歌 全體를 能히 包容할 수 있는 精密한 分類法이라 할 수 있다. 지금 各 項目에서 第一首의 一首式을 引例하야 編者의 이에 對한 意識을 밝히 보면 다음과 같다.
쪽수▶P22-3

아버니나흐시고님군이먹이시니 이두분恩惠ᄂᆞᆫ하날아ᄅᆡᄀᆞ이업다이몸이죽기를限하야아니갑고어이허리 (인륜)
길흘ᄀᆞᆯ몰나거리여셔바자니니東西南北의갈길도하고할샤알픠셔가ᄂᆞᆫ사ᄅᆞᆷ아뎡길어ᄃᆡ잇ᄂᆞ니 (권계)
泰山이다갈니여슛돌만치되올지나黃河水다여위여ᄯᅴ만치되올지나그제야父母兄弟를여희거나말거다 (송축)
楚江漁夫들아고기낙가ᄉᆞᆱ지마라屈三間忠魂이드러나니魚腹中의아모리鼎鑊의삼은들니글줄이이시랴 (정조)
▶P23-1江山을됴히녀겨내비록노닐진들님향ᄒᆞᆫ마ᄋᆞᆷ이야어ᄂᆞᄯᅢ니즐소니胷中의一片丹心은하ᄂᆞᆯ이말아시리 (연군)
춤을추려ᄒᆞ고宇宙間의니러셔니扶桑若木의ᄉᆞ매걸려못출노다두어라니러션타시우즐겨나보리라 (개세)
黃河水ᄆᆞᆰ다터니聖人의나시도다草野群賢이다니러나단말가어즈버江山風月은누를주고니거니 (우풍)
天地ᄂᆞᆫ언제나며興亡을뉘아더니萬古英雄이몃치나지나거니아마도一片明月이네나알가ᄒᆞ노라 (회고)
靑春少年들아白髮老翁웃지마라공변된하ᄂᆞᆯ아래넨들엇마져머시리우리도少年行樂이ᄭᅮᆷ이런듯ᄒᆞ여라 (권로)
ᄭᅩᆺ츤불긋불긋닙흔프릇프릇이내마음우즑우즑ᄒᆞᄂᆞᆫ고야春風은불고도낫바건듯건듯ᄒᆞ노라 (절서)
가을비올마오리雨裝直領내지마라十里길엇마가리전나귀모지마라가다가술집에들면갈동말동하여라 (심방)
자다가ᄭᆡᄃᆞᄅᆞ니窓밧긔아ᄒᆡ왓다不老草왓ᄉᆞ오니혜실가마ᄅᆞ실가그아ᄒᆡ蓬萊山아ᄒᆡ로다슈고로이왓도다 (은둔)
▶P24-1山됴코물됴흔곳의바희지혀ᄯᅱ집짓고ᄃᆞᆯ아래고기낙고구름속의출가生理야足ᄒᆞᆯ가마ᄂᆞᆫ블을일은업셰라 (한적)
오날이무ᄉᆞᆷ날고一年의ᄒᆞᆯ니로다百年살아야百日을즐기리니百年을살동말동ᄒᆞᆫ人生이아니놀고어리이 (연음)
술아네그르다네글은줄내니르마네아닌견의ᄂᆞᆫ아니端士러나醉ᄒᆞ야미친말하고ᄭᆡ온後의뉘웃노라 (취흥)
花灼灼범나뷔雙々柳靑々괴고리雙々날즘ᄉᆡᆼ긔ᄂᆞᆫ즘생다雙々ᄒᆞ다마ᄂᆞᆫ엇지타이내人生은혼ᄌᆞ雙이업ᄂᆞ니 (감물)
燈盞불그므리갈졔窓前너머드던님과새배달뎌갈적외다시안아누은님은이몸이ᄲᅧ가ᄀᆞᆯ니된들니즐줄이이시랴 (염정)
綠楊은실이되고려黃鶯은북이되야渭城三春의ᄶᆞ나니ᄂᆡ의실음누고셔綠陰芳草를勝花라하더니 (규원)
別路雲初起하고離亭葉正飛라슬프다사ᄅᆞᆷ은기력이만못ᄒᆞ도다千里의不作一行歸ᄒᆞ니그를슬허ᄒᆞ노라 (이별)
슬프다우ᄂᆞᆫ즘ᄉᆡᆼ늣겁다부ᄂᆞᆫ바람月黃昏계워갈제일일이愁思로다풀긋희이슬이ᄆᆡ쳐눈물듯ᄃᆞᆺᄒᆞ리라 (별한)

쪽수▶P22-3

아버니나흐시고님군이먹이시니 이두분恩惠ᄂᆞᆫ하날아ᄅᆡᄀᆞ이업다이몸이죽기를限하야아니갑고어이허리 (人倫)
길흘ᄀᆞᆯ몰나거리여셔바자니니東西南北의갈길도하고할샤알픠셔가ᄂᆞᆫ사ᄅᆞᆷ아뎡길어ᄃᆡ잇ᄂᆞ니 (勸戒)
泰山이다갈니여슛돌만치되올지나黃河水다여위여ᄯᅴ만치되올지나그제야父母兄弟를여희거나말거다 (頌祝)
楚江漁夫들아고기낙가ᄉᆞᆱ지마라屈三間忠魂이드러나니魚腹中의아모리鼎鑊의삼은들니글줄이이시랴 (貞操)
▶P23-1江山을됴히녀겨내비록노닐진들님향ᄒᆞᆫ마ᄋᆞᆷ이야어ᄂᆞᄯᅢ니즐소니胷中의一片丹心은하ᄂᆞᆯ이말아시리 (戀君)
춤을추려ᄒᆞ고宇宙間의니러셔니扶桑若木의ᄉᆞ매걸려못출노다두어라니러션타시우즐겨나보리라 (槪世)
黃河水ᄆᆞᆰ다터니聖人의나시도다草野群賢이다니러나단말가어즈버江山風月은누를주고니거니 (寓風)
天地ᄂᆞᆫ언제나며興亡을뉘아더니萬古英雄이몃치나지나거니아마도一片明月이네나알가ᄒᆞ노라 (懷古)
靑春少年들아白髮老翁웃지마라공변된하ᄂᆞᆯ아래넨들엇마져머시리우리도少年行樂이ᄭᅮᆷ이런듯ᄒᆞ여라 (權老)
ᄭᅩᆺ츤불긋불긋닙흔프릇프릇이내마음우즑우즑ᄒᆞᄂᆞᆫ고야春風은불고도낫바건듯건듯ᄒᆞ노라 (節序)
가을비올마오리雨裝直領내지마라十里길엇마가리전나귀모지마라가다가술집에들면갈동말동하여라 (尋訪)
자다가ᄭᆡᄃᆞᄅᆞ니窓밧긔아ᄒᆡ왓다不老草왓ᄉᆞ오니혜실가마ᄅᆞ실가그아ᄒᆡ蓬萊山아ᄒᆡ로다슈고로이왓도다 (隱遁)
▶P24-1山됴코물됴흔곳의바희지혀ᄯᅱ집짓고ᄃᆞᆯ아래고기낙고구름속의출가生理야足ᄒᆞᆯ가마ᄂᆞᆫ블을일은업셰라 (閑適)
오날이무ᄉᆞᆷ날고一年의ᄒᆞᆯ니로다百年살아야百日을즐기리니百年을살동말동ᄒᆞᆫ人生이아니놀고어리이 (讌飮)
술아네그르다네글은줄내니르마네아닌견의ᄂᆞᆫ아니端士러나醉ᄒᆞ야미친말하고ᄭᆡ온後의뉘웃노라 (醉興)
花灼灼범나뷔雙々柳靑々괴고리雙々날즘ᄉᆡᆼ긔ᄂᆞᆫ즘생다雙々ᄒᆞ다마ᄂᆞᆫ엇지타이내人生은혼ᄌᆞ雙이업ᄂᆞ니 (感物)
燈盞불그므리갈졔窓前너머드던님과새배달뎌갈적외다시안아누은님은이몸이ᄲᅧ가ᄀᆞᆯ니된들니즐줄이이시랴 (艶情)
綠楊은실이되고려黃鶯은북이되야渭城三春의ᄶᆞ나니ᄂᆡ의실음누고셔綠陰芳草를勝花라하더니 (閨怨)
別路雲初起하고離亭葉正飛라슬프다사ᄅᆞᆷ은기력이만못ᄒᆞ도다千里의不作一行歸ᄒᆞ니그를슬허ᄒᆞ노라 (離別)
슬프다우ᄂᆞᆫ즘ᄉᆡᆼ늣겁다부ᄂᆞᆫ바람月黃昏계워갈제일일이愁思로다풀긋희이슬이ᄆᆡ쳐눈물듯ᄃᆞᆺᄒᆞ리라 (別恨)

쪽수▶P25-1이상은 각 항목에서 선택의 여부 없이 제1수를 인출한 것이지마는 그 분속의 적실함을 알겠으며 동시에 그 분류 종목이 정묘함을 이해할 수 있다.
쪽수▶P25-1以上은 各 項目에서 選擇의 與否 없이 第一首를 引出한 것이지마는 그 分屬의 適實함을 알겠으며 同時에 그 分類 種目이 精妙함을 諒得할 수 있다.
쪽수▶P25-2그런데 이 내용에 의하여 분류 편찬한 가집에 더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다. 그는 앞에서 말한 동가선서적인데, 이것은 벌써 소개한 바와 같이 원체는 작가 분류를 취한 것이지만 매 수 밑에 다시 그 내용을 지적한 것이 있으니, 실례로써 설명을 대신하면 김종서인물 작에
쪽수▶P25-2그런데 이 內容에 依하야 分類 編纂한 歌集에 더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다. 그는 앞에서 말한 東歌選인대, 이것은 벌서 紹介한 바와 같이 元體는 作家 分類를 取한 것이지마는 每首 밑에 다시 그 內容을 指摘한 것이 있으니, 實例로써 說明에 代하면 金宗瑞 作에
쪽수▶P25-3

朔風은나무긋테불고明月은눈속에ᄎᆞᆫ듸萬里邊域에一長劒집고셔셔긴ᄑᆞ람큰한소ᄅᆡ에거칠거시업서라 壯

쪽수▶P25-3

朔風은나무긋테불고明月은눈속에ᄎᆞᆫ듸萬里邊域에一長劒집고셔셔긴ᄑᆞ람큰한소ᄅᆡ에거칠거시업서라 壯

쪽수▶P25-4과 같이 ‘장(壯)’이라 하였고, 또 그 다음 성삼문인물 작에는
쪽수▶P25-4과 같이 「壯」이라 하였고, 또 그다음 成三問 作에는
쪽수▶P25-5와 같이 ‘개(慨)’라 하야 그 내용을 지적하였는데, 이러한 것을 모아 보면 유의, 의(유의), 탄, 충, 회고, 고(회고?), 은일, 은(은일?), 사, 문답, 문(문답?), 제, 개, 술, 노, 장, 영, 효, 승, 호, 경, 흥비, 별, 주춘, 횡(만횡?), 낙시조, 만횡의 28종목이 된다. 이 중에 횡, 낙시조, 만횡은 곡조의 명칭이고, 의, 고, 은, 문은 각각 유의, 회고, 은일, 문답의 중첩인 듯하니 이들을 제거하더라도 아직 21목이 되거니와 이것의 소속 시가와의 관계 및 고금가곡서적에서 분류한 항목과의 비교는 번잡함을 덜기 위하여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마는 대체에 있어 피차의 유사함을 알겠고 순전히 내용에 의하여 분류, 편찬하지 않은 다른 가집에서도 그러한 의식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주목을 끄는 바라 하겠다.
쪽수▶P25-5와 같이 「慨」라 하야 그 內容을 指摘하였는대, 이러한 것을 주모아 보면 遺意, 意(遺意), 嘆, 忠, 懷古, 古(懷古?), 隱逸, 隱(隱逸?), 思, 問答, 問(問答?), 帝, 慨, 述, 老, 壯, 咏, 孝, 昇, 豪, 景, 興比, 別, 酒春, 橫(蔓橫?), 樂時調, 蔓橫의 二十八種目이 된다. 이中에 橫, 樂時調, 蔓橫은 曲調의 名稱이고, 意, 古, 隱, 問은 各各 遺意, 懷古, 隱逸, 問答의 重疊인 듯하니 이들을 除去하드라도 아직 二十一目이 되거니와 이것의 所屬 詩歌와의 關係 및 古今歌曲에서 分類한 項目과의 比較는 繁雜을 덜기 爲하야 여기서는 約하겠지마는 大體에 있어 彼此의 類似함을 알겠고 純全히 內容에 依하야 分類 編纂하지 않은 다른 歌集에서도 그러한 意識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注目을 끄는 바이라 하겠다.
쪽수▶P25-6이상 곡조, 작가, 내용에 의한 분류에 대하여 편찬자의 의식을 보았다. 각기 분류에 대하여는 조곰 더 비판을 가하▶P26-1여 그 의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듯하나, 대강 이로써 옛 편찬인의 분류 의식을 알겠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문학에 대한 의식도 얼마큼 규찰할 수 있었을 듯이 일언이폐지하면 분류에서는 그 양으로 보아 작가와 내용에보다도 곡조에 치중한 관계상 잘못했다면 문학적 의식이 희생되지 않았을까 하는 위험을 느끼게 한다 하겠다. 그리고 이상의 분류는 주로 단가군의 분류가 되었겠지만 다시 장가와 섞어 편집하였을 경우에는 이 밖에 가체에 의한 분류법도 있을 법하다는 것을 상상케 한다.
쪽수▶P25-6以上 曲調, 作家, 內容에 依한 分類에 對하야 編纂者의 意識을 보았다. 各其 分類에 對하여는 조곰 더 批判을 加하▶P26-1야 그 意識을 分明히 할 必要가 있었는 듯하나, 大綱 일로서 古 編纂人의 分類 意識을 알겠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文學에 對한 意識도 얼마큼 窺察할 수 있었을 듯이 一言以蔽之하면 分類에서는 그 量으로 보아 作家와 內容에보다도 曲調에 置重한 關係上 잘못하얏드면 文學的 意識이 犧牲되지 않었을가 하는 危險을 느끼게 한다 하겠다. 그리고 以上의 分類는 主로 短歌群의 分類가 되었겠지마는 다시 長歌와 混編하였을 境遇에는 이 밖에 歌體에 依한 分類法도 있을 法하다는 것을 想像케 한다.

























본문3-3: 3-3


쪽수▶P26-2작품과 작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시 말할 것 없지만 시대가 지내고 오래되면 많은 작품 가운데는 불식부지간에 그 작가를 잊어버리는 수가 없지 않다. 더욱이 단가와 같이 구송되어 전하기 쉬운 것에 있어서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작품을 정당히 이해하는 데는 반드시 그 작가를 요구하는 것도 오언(謷言)을 요하지 않는 것이니 그러한 현상은 있어 좋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그 방지에 힘써서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작가를 보존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인데 가집 편찬자야말로 그 책임의 당로에 있다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충분한 의식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과거 우리 편찬자들은 충분히 이 점에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이도 있는 듯이 보인다. 이들로서 들어보면 악장가사서적, 객악보서적, 남훈태평가서적, 고금가곡서적 편찬자들이니, 악장가사서적 같은 것은 대부분이 궁중 가악에 쓰이는 가사니까 편찬자가 조금만이라도 그 의식이 있었다 하다면 그 시대에서는 작가를 찾아 기록하여 둘 수 있었을 것이고, 남훈태평가서적, 고금가곡서적도 비교적 후대에 와서 편찬된 것이니 다른 가집을 참고하더라도 얼마쯤은 그 작가를 밝혀 두지 못할 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혀 작가의 기명이 없다는 것은 요▶P27-1컨대 작가에 대한 의식이 없는 소치라 하겠거니와 이들 가집은 다 무기명한 대로 각기 주의에 의하여 작품을 나열하고 말았다.
쪽수▶P26-2作品과 作家는 떨어질 수 없는 關係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시 말할 것 없지마는 時代가 지내고 오래 되면 많은 作品 가운대는 不識不知間에 그 作家를 잊어 바리는 수가 없들 않다. 더욱이 短歌와 같이 口誦되여 傳하기 쉬운 것에 있어서는 決코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作品을 正當히 理解하는 대는 반드시 그 作家를 要求하는 것도 謷言을 要하지 안하는 것이니 그러한 現象은 있어 좋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그 防止에 힘써서 어떠한 形式으로라도 作家를 保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인대 歌集 編纂者야말로 그 責任의 當路에 있다 하여 可할 것이고, 또 充分한 意識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遺憾스럽기도 過去 우리 編纂者들은 充分히 이 點에 意識을 가지고 잇지 못한 이도 있는 듯이 보인다. 이들로서 들어 보면 樂章歌詞, 客樂譜, 南薰太平歌, 古今歌曲 編纂者들이니, 樂章歌詞 같은 것은 大部分이 宮中 歌樂에 쓰이는 歌詞이니까 編纂者가 조고만치라도 그 意識이 있었다 하다면 그 時代에서는 作家를 찾아 記錄하야 둘 수 있었을 것이고, 南薰太平歌, 古今歌曲도 比較的 後代에 와서 編纂된 것이니 다른 歌集을 叅考하드라도 얼마쯤은 그 作家를 밝혀 두지 못할 理 없을 것이다. 그런대도 不拘하고 全然 作家의 記名이 없다는 것은 要▶P27-1컨대 作家에 對한 意識이 없는 所致라 하겠거니와 이들 歌集은 다 無記名한 대로 各其 主義에 依하야 作品을 羅列하고 말았다.
쪽수▶P27-2기타 가집에 있어서는 힘 닿는 데까지의 주의는 한 것이 보이는데 아래에 각 가집에 나타나는 기명 작품 수와 작가 수를 표시하여 보면
쪽수▶P27-2其他 歌集에 있어서는 힘 다가는 데까지의 主意는 한 것이 보이는데 左에 各 歌集에 나타나는 記名 作品數와 作家數를 表示하여 보면
쪽수▶P27-3
가집 총 작품 수 기명 작품 수 작가 수
청구영언서적 ※998 106 138
해동가요서적 ※883 568 99
가곡원류서적 616 213 122
여창유취서적 178 29 23
동가선서적 235 92 122

경성대학기관본 568수에다가 이희승인물 씨 소장본에 의하여 무명씨 315수를 가하였다.
※편의상 끝에 첨부한 장가 17수는 뺐다.
쪽수▶P27-3
歌集 總作品數 記名作品數 作家數
靑丘永言 ※九九八 一〇六 一三八
海東歌謠 ※八八三 五六八 九九
歌曲源流 六一六 二一三 一二二
女唱類象 一七八 二九 二三
東歌選 二三五 九二 一二二

※京城大學本 五六八首에다가 李熙昇 氏 藏本에 依하야 無名氏 三一五首를 加하였다.
※便宜上 끝에 添附한 長歌 十七首는 빼었다.
쪽수▶P27-4이상과 같이 되여 총 작품 수의 대략 반이 기명되어 있다 할 수 있으나 각 가집 작품은 서로 중복됨이 많으므로 작가 수는 위 표 총수 494에 중첩된 것을 빼고 보면 실수는 199밖에 되지 않는 듯하다. 즉 간단히 말하면 역대 편찬자는 대략 200인의 작가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면 무기명의 작품에서도 과연 무명씨냐 명씨냐를 탐구하여 ▶P28-1그에 대한 편자의 의식을 검토할 문제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문제를 훨씬 좁혀서 이 기명된 작품의 작가에 대하여 편찬자의 의식 정도를 구명하기로 하겠다.
쪽수▶P27-4以上과 같이 되여 總 作品數의 大約 半이 記名되여 있다 할 수 있으나 各 歌集 作品은 서로 重出함이 많음으로 作家數는 右表 總數 四九四에 重疊된 것을 빼고 보면 實數는 一九九밖에 되지 않는 듯하다. 即 簡單이 말하면 歷代 編纂者는 大約 二百人의 作家를 意識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면 無記名의 作品에서도 果然 無名氏냐 名氏냐를 探求하야 ▶P28-1그에 對한 編者의 意識을 檢討할 問題도 있겠지마는 여기서는 問題를 훨신 좁히서 이 記名된 作品의 作家에 對하야 編纂者의 意識 程度를 究明하기로 하겠다.
쪽수▶P28-2우선 작가를 열록하여 보면 을파소인물, 성충인물, 벽총인물, 곽여인물, 우탁인물, 최충인물, 정지상인물, 이조년인물, 이재오인물, 서견인물, 원천석인물, 최영인물, 이색인물. 포은모당인물, 정몽주인물, 길재인물, 맹사성인물, 정도전인물, 조준인물, 이지란인물, 성여완인물, 성석린인물, 변계량인물, 황희인물, 태종인물, 이직인물, 김종서인물, 남이인물, 단종인물, 성삼문인물, 박팽년인물, 유성원인물, 하위지인물, 이개인물, 유응부인물, 월산대군인물, 김시습인물, 왕방연인물, 성종인물, 박은인물, 김종직인물, 조광조인물, 김굉필인물, 김일손인물, 서경덕인물, 박영인물, 이현보인물, 이언적인물, 조식인물, 홍섬인물, 노수신인물, 이황인물, 홍춘경인물, 안정인물, 송순인물, 송인수인물, 조욱인물, 송인인물, 엄흔인물, 성창세인물, 이후백인물, 이양원인물, 김현성인물, 고경명인물, 성수침인물, 성혼인물, 성운인물, 기대승인물, 신광한인물, 정철인물, 이이인물, 김인후인물, 서익인물, 홍적인물, 이덕형인물, 이항복인물, 임제인물, 이제신인물, 유자신인물, 신흠인물, 이정구인물, 이정개인물, 조찬한인물, 권필인물, 이안눌인물, 김류인물, 홍서봉인물, 이순신인물, 김상용인물, 김상헌인물, 조재성인물, 조헌인물, 김장생인물, 이원익인물, 박명현인물, 양사언인물, 임진인물, 양응정인물, 이중집인물, 김광욱인물, 구인구인물, 정태화인물, 채유후인물, 윤선도인물, 정두경인물, 강백년인물, 조한영인물, 효종인물, 백광훈인물, 정술인물, 한호인물, 장면인물, 정온인물, 홍익한인물, 임경업인물, 이명한인물, 정충신인물, 김응하인물, 김육인물, 이완인물, 적성군인물, 인평대군인물, 낭원군인물, 이화진인물, 이귀진인물, 허정인물, 숙종인물, 송시열인물, 남구만인물, 이택인물, 유혁연인물, 박태보인물, 구지정인물, 김성최인물, 신청하인물, 김창업인물, 유천군인물, 윤두서인물, 유숭인물, 이정변인물, 박인로인물, 장현인물, 주의식인물, 김삼현인물, 김창흡인물, 허강인물, 김유기인물, 김성기인물, 장익붕인물, 영조인물, 조현명인물, 박후웅인물, 이재인물, 이유인물, 윤유인물, 윤순인물, 조명리인물, 이정보인물, 김천택인물, 김수장인물, 김상옥인물, 김영인물, 이면승인물, 오경화인물, 이민순인물, 김시경인물, 이정진인물, 정수경인물, 익종인물, 신희문인물, 김치우인물, 김기성인물, 김조순인물, 조경렴인물, 백경현인물, 김정우인물, 구용인물, 박효관인물, 안민영인물, 송종원인물, 영은부원군인물, 박영수인물, 이상두인물, 임직인물, 박상간인물, 유희령인물, 진이인물, 홍장인물, 소춘풍인물, 소박주인물, 한우인물, 구지인물, 송이인물, 매화인물, 다복인물, 명옥인물, 천금인물, 계랑인물 등이 된다. 나타난 그대로 보면 시대▶P29-1는 삼국시대에서 이조 말기에 이르고, 계급으로 말하면 위로 국왕, 대군에서 밑으로 서인, 기녀에 이르렀 할 수 있어 형식만으로는 전 시대를 관통하고 전 계급을 망라하였다. 그러나 이들 소위 작가는 모두 그 작품의 작가임에 틀림이 없을까. 시대적으로 말하면 과연 을파소인물, 성충인물, 곽여인물, 벽총인물 같은 이의 작가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 문제고, 가집과 가집을 비교하여 볼 때는 그 작가에 있어 적잖은 충돌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 이런 것들도 중대한 문제이지마는 너무 장황한 혐도 없지 않으니 따로 다른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그러한 사실이 있다는 것만을 말해 두고 모든 것을 생략하여 다만 가집에 나타난 그대로의 편찬 의식을 말해 볼까 한다.
쪽수▶P28-2于先 作家를 列錄하야 보면 乙巴素, 成忠, 薛聰, 郭輿, 禹倬, 崔冲, 鄭知常, 李兆年, 李存吾, 徐甄, 元天錫, 崔瑩, 李穡. 圃隱母堂, 鄭夢周, 吉再, 孟思誠, 鄭道傳, 趙俊, 李之蘭, 成汝完, 成石磷, 卞季良, 黄喜, 太宗, 李稷, 金宗瑞, 南怡, 端宗, 成三間, 朴彭年, 柳誠源, 河緯地, 李塏, 兪應孚, 月山大君, 金時習, 王邦衍, 成宗, 朴誾, 金宗直, 趙光祖, 金宏弼, 金馹孫, 徐敬德, 朴英, 李賢輔, 李彦迪, 曺植, 洪暹, 盧守愼, 李滉, 洪春卿, 安珽, 宋純, 宋麟壽, 趙岦, 宋寅, 嚴昕, 成昌世, 李後白, 李陽元, 金玄成, 高敬命, 成守琛, 成渾, 成運, 奇大升, 中光漢, 鄭澈, 李珥, 金麟厚, 徐益, 洪迪, 李德馨, 李恒福, 林悌, 李濟臣, 柳自新, 申欽, 李廷龜, 李廷蓋, 趙纘韓, 權韠, 李安訥, 金瑬, 洪瑞鳳, 李舜臣, 金尙容, 金尙憲, 趙在性, 趙憲, 金長生, 李元翼, 朴明賢, 楊士彦, 林晋, 梁應濎, 李仲集, 金光煜, 具仁垢, 鄭太和, 蔡裕後, 尹善道, 鄭斗卿, 姜栢年, 曺漢英, 孝宗, 白光勳, 鄭述, 韓濩, 張晩, 鄭蘊, 洪翼漢, 林慶業, 李明漢, 鄭忠信, 金應河, 金堉, 李浣, 積城君, 麟坪大君, 朗原君, 李華鎭, 李貴鎭, 許珽, 肅宗, 宋時烈, 南九萬, 李澤, 柳赫然, 朴泰輔, 具志禎, 金聲最, 申請夏, 金昌業, 儒川君, 尹斗緒, 兪崇, 李廷變, 朴仁老, 張炫, 朱義植, 金三賢, 金昌翕, 許橿, 金裕器, 金聖器, 張翼鵬, 英祖, 趙顯命, 朴後雄, 李在, 李渘, 尹游, 尹淳, 趙明履, 李鼎輔, 金天澤, 金壽長, 金相玉, 金煐, 李勉昇, 吳擎華, 李敏淳, 金時慶, 李廷鎭, 鄭壽慶, 翼宗, 申喜文, 金致羽, 金箕性, 金祖 淳, 趙慶濂, 白景炫, 金鼎禹, 具容, 朴孝寬, 安玟英, 宋宗元, 永恩府院君, 朴英秀, 李象斗, 任直, 朴尙侃, 柳希齡, 眞伊, 紅粧, 笑春風, 小舶舟, 寒雨, 求之, 松伊, 梅花, 多福, 明玉, 千錦, 桂娘 等이 된다. 나타난 그대로 보면 時代▶P29-1는 三國時代에서 李朝 末期에 이르고, 階級으로 말하면 우흐로 國王 大君에서 밑으로 庶人 妓女에 이르럿다 할 수 있어 形式만으로는 全 時代를 貫通하고 全 階級을 網羅하였다. 그러나 이들 所謂 作家는 皆悉 그 作品의 作家임에 틀림이 없을가. 時代的으로 말하면 果然 乙巴素, 成忠, 郭輿, 薜聰 같은 이의 作家가 있었을가 하는 것이 問題고, 歌集과 歌集을 比較하여 볼 때는 그 作家에 있어 적잔은 衝突을 發見할 수도 있으니, 이런 것들도 重大한 問題이지마는 너머 張皇한 嫌도 없지 않으니 따로 다른 機會로 미루고 여기서는 그러한 事實이 있다는 것만을 말해 두고 모든 것을 省略하야 다만 歌集에 나타난 그대로의 編纂 意識을 말해 볼가 한다.
쪽수▶P29-2첫째 작가의 순위는 작가 분류에 의하여 편찬된 해동가요서적, 동가선서적 같은 것은 물론이지마는 청구영언서적 같은 데도 대강 시대순으로 하고 대대의 임금의 어제에 대하여는 특별히 존경하여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작가 앞에 올림을 잊지 않았다. 해동가요서적를 보더라도 여조에 이색인물, 정몽주인물, 맹사성인물, 3인이 보이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김종서인물, 성삼문인물 앞에 태종인물, 성종인물, 효종인물, 숙종인물를 올렸다. 또 청구영언서적에도 성충인물, 을파소인물, 우탁인물, 최충인물 이전에 태종인물대왕, 성종인물대왕, 효종인물대왕, 숙종인물대왕, 익종인물대왕이 있다. 기타 가집에 있어서도 대체로 이에 준하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녀와 같이 사회계급상 다소 천대를 받던 이들은 이 역시 특별 취급을 받아 끝에 혹은 중간에 몰아 붙인 것이 보통이다. 동가선서적은 최후에 가지고 와 무명씨를 그다음에 달고 청구영언서적은 끝에 신희문인물 다음에 진이인물 이하 8기를 가지고 왔고, 해동가요서적에는 조재성인물박명현인물의 사이에 진이인물 이하 명기 9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가집의 일반적 경향이라 할 수 있고 곡조 분류법을 취한 가집 같은 데서는 반드시 그러치 않을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가곡원류서적 같은 데서는 전연 그러한 의식이 없이 제왕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아무 구별이 없이 각기 곡조에 의하여 배열하였고 기녀의 작도 그리하였으며, [[청구영▶P30-1언]]서적에도 또한 자연 그러한 예가 없지 않을 수 없어 숙종인물대왕 어제가 다른 틈에 섞이고, 기녀의 작도 약간 산재하여 있는 것이 있다.
쪽수▶P29-2첫재 作家의 順位는 作家 分類에 依하야 編纂된 海東歌謠, 東歌選 같은 것은 물론이지마는 靑丘永言 같은 데도 大綱 時代 順으로 하고 列聖 御製에 對하여는 特別히 尊敬하야 時代를 超越하야 모든 作家 앞에 올림을 잊지 않었다. 海東歌謠를 보드라도 麗朝에 李穡, 鄭夢周, 孟思誠, 三人이 보이고, 本朝에 들어와서는 金宗瑞, 成三問 앞에 太宗、成宗, 孝宗, 肅宗을 올렸다. 또 靑丘永言에도 成忠, 乙巴素, 禹倬, 崔冲 以前에 太宗大王, 成宗大王, 孝宗大王, 肅宗大王, 翼宗大王이 있다. 其他 歌集에 있어서도 大體로 이에 準하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妓女와 같이 社會階級上 多少 賤待를 받든 이들은 이 亦是 特別 取扱을 받아 끝에 或은 中間에 모라부치는 것이 普通이다. 東歌選은 最後에 가지고 와 無名氏를 그다음에 달고 靑丘永言은 끝에 申喜文 다음에 眞伊 以下 八妓를 가지고 왔고, 海東歌謠에는 趙在性과 朴明賢의 사이에 眞伊 以下 名妓 九人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歌集의 一般的 傾向이라 할 수 있고 曲調 分類法을 取한 歌集 같은 데서는 반드시 그러치 않을 수도 있었다. 일터이면 歌曲源流 같은 데서는 全然 그러한 意識이 없이 帝王의 作品이라 할지라도 아모 區別이 없이 各其 曲調에 依하야 配列하얐고 妓女의 作도 그리하얐으며, 靑丘永▶P30-1言에도 또한 自然 그러한 例가 없지 않을 수 없어 肅宗大王 御製가 다른 틈에 섞이고, 妓女의 作도 若干 散在하야 있는 것이 있다.
쪽수▶P30-2다음 서명 위치는 대략 2종이 있는데, 하나는 그 작품 앞에 그 작가를 쓰고, 하나는 그 작품 끝에 그 작가를 쓴 것이다. 해동가요서적동가선서적은 전자의 형식을 취하였고, 가곡원류서적는 후자의 형식을 취하였으며 청구영언서적는 원체에 있어 전자의 형式을 취하였으나 간혹 후자의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 그리하여 그 작가에 간단한 그 약력을 할주(割註)하여 두었다. 그 일례를 들어 보면
쪽수▶P30-2다음 書名 位置는 大約 二種이 있는대, 하나는 그 作品 앞에 그 作家를 쓰고, 하나는 그 作品 끝에 그 作家를 쓴 것이다. 海東歌謠며 東歌選은 前者의 形式을 取하였고, 歌曲源流는 後者의 形式을 取하였으며 靑丘永言은 元體에 있어 前者의 形式을 取하였으나 間或 後者의 形式을 取한 것도 있다. 그리하야 그 作家에 簡單한 그 略曆을 割註하야 두었다. 그 一例를 들어 보면
쪽수▶P30-3

10-1▶曹植字倢仲號南溟中宗朝 以遺逸累拜終不就
三冬에뵈옷닙고巖穴에눈비마자구름ᄭᅵᆫ볏뉘도ᄶᅬᆫ젹이업건마는西山에ᄒᆡ지다ᄒᆞ니눈물겨워ᄒᆞ노라
10-2▶三冬에뵈옷닙고巖穴에눈비마자구름ᄭᅵᆫ볏뉘도ᄶᅬᆫ젹이업건마는西山에ᄒᆡ지다ᄒᆞ니눈물겨워ᄒᆞ노라曺植字倢仲號南溟 中宗隱居 宣廟贈領相謚文貞

쪽수▶P30-3

10-1▶曹植字倢仲號南溟 中宗朝以遺逸累拜終不就
三冬에뵈옷닙고巖穴에눈비마자구름ᄭᅵᆫ볏뉘도ᄶᅬᆫ젹이업건마는西山에ᄒᆡ지다ᄒᆞ니눈물겨워ᄒᆞ노라
10-2▶三冬에뵈옷닙고巖穴에눈비마자구름ᄭᅵᆫ볏뉘도ᄶᅬᆫ젹이업건마는西山에ᄒᆡ지다ᄒᆞ니눈물겨워ᄒᆞ노라曺植字倢仲號南溟 中宗隱居 宣廟贈領相謚文貞

쪽수▶P30-4전자는 해동가요서적식이고 후자는 가곡원류서적식이다. 그러나 약력 할주는 모든 작가에 다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작가 중에 편자가 약력을 아는 者에게만 하였고, 작자는 알지만 그 연대와 약력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다만 이름만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같은 작가가 두 번 이상 나올 때는 가곡원류서적에서는 ‘견상(見上)’이란 할주를 빼지 않았다.
쪽수▶P30-4前者는 海東歌謠式이고 後者는 歌曲源流式이다. 그러나 略歷 割註는 모든 作家에 다 그러케 한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作家 中에 編者가 略歷을 아는 者에게만 하였고, 作者는 아지마는 그 年代와 略歷을 아지 몯하는 者에게는 다만 이름만을 記하였다. 그리고 같은 作家가 두 번 以上 나올 때는 歌曲源流에서는 「見上」이란 割註를 빼지 않었다.
쪽수▶P30-5이상으로서 대강 역대 편찬자들의 작가에 대한 의식 정도를 보면 어떤 데에 있어서는 작가를 명기하고 약력까지 할주한 것도 있지만 대체에 있어는 기명된 것도 아직 검토의 여지가 있는 듯하고, 어떤 가집에서는 전혀 작가▶P31-1의 기입이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는 일반이 그 의식이 충분하지 못하였다는 일언으로 평할 것 같다.
쪽수▶P30-5以上으로서 大綱 歷代 編纂者들의 作家에 對한 意識 程度를 보면 어떤 데에 있어서는 作家를 明記하고 略歷까지 割註한 것도 있지마는 大體에 있어는 記名된 것도 아직 檢討의 餘地가 있는 듯하고, 어떤 歌集에서는 全然 作家▶P31-1의 記入이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는 一般이 그 意識이 充分하지 몯하였다는 一言으로 評할 것 같다.






























본문3-4: 3-4


쪽수▶P31-2가집 편찬에 있어서는 그 작품의 그 작가도 중요하지만 또 그 원작도 등한히 할 것이 못 된다. 그런데 우리는 역대 가집을 들고 볼 때 이 방면의 의식이 퍽도 부족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한 책에 역대의 작품을 모았다 한다면 자연히 그동안의 시대에 의한 음운상 변천의 흔적이 보여야 될 것인데 아무것도 이를 감득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고려 때의 작품이나 근대의 작품이나 거의 작자를 두고는 어느 시대 작품이란 것을 알 도리가 없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 가집은 각기 의지대로 원작을 고치고 더해서 자기의 말, 심하게 말하면 자기의 작품으로 개작하고 말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집에 수록된 작품 그대로는 암만하여도 작자의 원작을 맛볼 수 없고 따라서 작자를 오해하여 작자를 위해 유감 되는 일이 적지 아니하다. 저 유명한 윤고산인물의 오우가 중 가장 언어의 미를 다하였다 보이는 석가
쪽수▶P31-2歌集 編纂에 있어서는 그 作品의 그 作家도 重要하지마는 또 그 原作도 等閑히 할 것이 몯 된다. 그런대 우리는 歷代 歌集을 들고 볼 때 이 方面의 意識이 퍽도 不足함을 깨닷지 안 할 수 없다. 첫재 한 책에 歷代의 作品을 모았다 한다면 自然히 其間에 時代에 依한 音韻上 變遷의 形跡이 보이야 될 것인대 아모 이를 感得할 만한 것을 發見할 수 없다. 高麗 때의 作品이나 近代의 作品이나 거의 作者를 두고는 어느 時代 作品이란 것을 알 道理가 없게 되였다. 그뿐만 아니라 各 歌集은 各其 意志대로 原作을 删補하야 自己의 말, 甚하기 말하면 自己의 作品으로 改作하고 말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歌集에 載錄된 作品 그대로는 암만하여도 作者의 原作을 맛볼 수 없고 딸아서 作者를 誤解하야 作者를 위해 遺憾 되는 일이 적지 아니하다. 저 有名한 尹孤山의 五友歌 中 가장 言語의 美를 다하였다 보이는 石歌
쪽수▶P31-3

고즌무스일로퓌며셔쉬이디고플은어이하야프르ᄂᆞᆫᄃᆞᆺ누르ᄂᆞ니아마도변티아닐ᄉᆞᆫ바회뿐인가ᄒᆞ노라

쪽수▶P31-3

고즌무스일로퓌며셔쉬이디고플은어이하야프르ᄂᆞᆫᄃᆞᆺ누르ᄂᆞ니아마도변티아닐ᄉᆞᆫ바회뿐인가ᄒᆞ노라

쪽수▶P31-4가 시조유취 같은 데서도
쪽수▶P31-4가 時調類聚 같은 데서도
쪽수▶P31-5

ᄭᅩᆺ슨무슨일로픠여서쉬이지고풀은어이ᄒᆞ여프르ᄂᆞᆫᄃᆞᆺ누르ᄂᆞ니아마도變치아닐ᄉᆞᆫ바회ᄲᅮᆫ인가ᄒᆞ노라

쪽수▶P31-5

ᄭᅩᆺ슨무슨일로픠여서쉬이지고풀은어이ᄒᆞ여프르ᄂᆞᆫᄃᆞᆺ누르ᄂᆞ니아마도變치아닐ᄉᆞᆫ바회ᄲᅮᆫ인가ᄒᆞ노라

쪽수▶P31-6와 같이 잘못 기록되는 것을 보면 가집 편찬이란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으나 역대 편찬자는 하여튼 그 의식이 부족하였다. 위에 두세 것 중 어느 것이라 선택할 것 없이 뽑아 그 원작에 대한 태도를 볼 것 같으면 퇴계인물의 도산육곡 기5
쪽수▶P31-6와 같이 訛記되는 것을 보면 歌集 編纂이란 것이 容易치 안하다는 것은 알 수 있으나 歷代 編纂者는 何如튼 그 意識이 不足하였다. 左에 二三 어느 것이라 選擇할 것 없이 뽑아 그 原作에 對한 態度를 볼 것 같으면 退溪의 陶山六曲 其五
쪽수▶P31-7

山前에有臺하고臺下애有水ㅣ로다ᄠᅦ만ᄒᆞᆫᄀᆞᆯ며기ᄂᆞᆫ오명가명ᄒᆞ거든엇다다皎々白駒ᄂᆞᆫ머리마ᅀᆞᆷᄒᆞᄂᆞᆫ고

쪽수▶P31-7

山前에有臺하고臺下애有水ㅣ로다ᄠᅦ만ᄒᆞᆫᄀᆞᆯ며기ᄂᆞᆫ오명가명ᄒᆞ거든엇다다皎々白駒ᄂᆞᆫ머리마ᅀᆞᆷᄒᆞᄂᆞᆫ고

쪽수▶P32-1

山前에有臺하고臺下()有水ㅣ로다ᄯᅦ만흔갈멱이는오명가명하거든엇덧타(△△△)皎々白駒는머리ᄆᆞ음ᄒᆞ는이(△△△)

쪽수▶P32-1

山前에有臺하고臺下()有水ㅣ로다ᄯᅦ만흔갈멱이는오명가명하거든엇덧타(△△△)皎々白駒는머리ᄆᆞ음ᄒᆞ는이(△△△)

쪽수▶P32-2로 되였고, 청구영언서적에서는
쪽수▶P32-2로 되였고, 靑丘永言에서는
쪽수▶P32-3

山前에有臺하고臺下()有水ㅣ로다ᄯᅦ만흔갈먹기ᄂᆞᆫ오며가며(△△△△)하거니엇덧타(△△△)皎々白鷗(△△)ᄂᆞᆫ멀니(△△)마음ᄒᆞᄂᆞ니(△△△)

쪽수▶P32-3

山前에有臺하고臺下()有水ㅣ로다ᄯᅦ만흔갈먹기ᄂᆞᆫ오며가며(△△△△)하거니엇덧타(△△△)皎々白鷗(△△)ᄂᆞᆫ멀니(△△)마음ᄒᆞᄂᆞ니(△△△)

쪽수▶P32-4로 되었다. 발음에 큰 차이가 없는 문자상의 변형은 아직 그만두고도 ‘엇다다’가 ‘엇더타’, ‘ᄒᆞᄂᆞᆫ고’가 ‘ᄒᆞ나니’와 같이 단어의 음운 내지 의미상의 변화가 있고 심하면 ‘백구(白駒)’가 ‘백구(白鷗)’로도 아무 의심이 없이 변하였다. 또 송강인물의 시조
쪽수▶P32-4로 되였다. 發音에 큰 差異가 없는 文字上의 變形은 아직 그만두고도 「엇다다」가 「엇더타」, 「ᄒᆞᄂᆞᆫ고」가 「ᄒᆞ나니」와 같이 單語의 音韻 乃至 意味上의 變改이 있고 甚하면 「白駒」가 「白鷗」로도 아모 疑心이 없이 變하였다. 또 松江의 時調
쪽수▶P32-5

새원원ᄌᆔ되여되롱갓삿메오이고細雨斜風의一竿빗기드러 紅蓼花白蘋洲渚의오명가명ᄒᆞ노라

쪽수▶P32-5

새원원ᄌᆔ되여되롱갓삿메오이고細雨斜風의一竿빗기드러 紅蓼花白蘋洲渚의오명가명ᄒᆞ노라

쪽수▶P32-6청구영언서적
쪽수▶P32-6는 靑丘永言에
쪽수▶P32-7

新院(△△)々主되여뫼롱이삿갓메고(△△△△△△△)細雨斜風에一竿빗기드러紅蓼花白蘋洲渚에오며가며ᄒᆞ리라(△△△△△△△)

쪽수▶P32-7

新院(△△)々主되여뫼롱이삿갓메고(△△△△△△△)細雨斜風에一竿빗기드러紅蓼花白蘋洲渚에오며가며ᄒᆞ리라(△△△△△△△)

쪽수▶P32-8로 되였고.
쪽수▶P32-8로 되였고.
쪽수▶P32-9

새여원ᄌᆔ되여柴扉ᄅᆞᆯ고텨닷고流水靑山을벗사마더뎠노라아ᄒᆡ야碧蹄예손이라커든날나가다ᄒᆞ고려

쪽수▶P32-9

새여원ᄌᆔ되여柴扉ᄅᆞᆯ고텨닷고流水靑山을벗사마더뎠노라아ᄒᆡ야碧蹄예손이라커든날나가다ᄒᆞ고려

쪽수▶P32-10해동가요서적
쪽수▶P32-10는 海東歌謠에
쪽수▶P32-11

新院(△△)々主ㅣ되야柴扉를곳쳐닷고流水青山을벗삼아더졌노라아희야碧蹄예손이라커든날나가다닐러라(△△△)

쪽수▶P32-11

新院(△△)々主ㅣ되야柴扉를곳쳐닷고流水青山을벗삼아더졌노라아희야碧蹄예손이라커든날나가다닐러라(△△△)

쪽수▶P32-12로 되었다. 또 박인로인물의 시조
쪽수▶P32-12로 되였다. 또 朴仁老의 時調
쪽수▶P32-13

王祥의鯉里잡고孟宗의竹筍ᄭᅥᆨ거검던멀리희도록老萊子의오ᄉᆞᆯ입고一生애養志誠孝를曾子ᄀᆞᆺ치ᄒᆞ리이다

쪽수▶P32-13

王祥의鯉里잡고孟宗의竹筍ᄭᅥᆨ거검던멀리희도록老萊子의오ᄉᆞᆯ입고一生애養志誠孝를曾子ᄀᆞᆺ치ᄒᆞ리이다

쪽수▶P32-14는 각 가집에 다음과 같이 와전하였다.
쪽수▶P32-14는 各 歌集에 다음과 같이 訛傳하였다.
쪽수▶P33-1

21-1▶王祥의鯉魚엇고(△△)孟宗의竹筍것거감든말이희도록老萊子의옷슬닙고一生에養志誠孝를曾子ᄀᆞᆺᄒᆞᆯ이라(△△△)(해동가요서적)
21-2▶王祥의鯉魚낙고孟宗의竹笋것거감든머리희도록老萊子의옷ᄉᆞᆯ닙고平生에(△△△)養志誠孝를曾子ᄀᆞᆺ치ᄒᆞ리라(△△△)(청구영언서적)
21-3▶王祥에鯉里잡고孟宗에竹筍것거감든머리희도록老萊子의옷슬닙고平生에(△△△)養志誠孝를曾子갓치ᄒᆞ리라(△△△)(가곡원류서적)
21-4▶王祥의鯉魚잡고孟宗의竹笋것거감던마리희도록老萊子의옷슬입고平生의(△△△)養志誠孝을曾子가치ᄒᆞ리라(△△△)(객악보서적)
21-5▶왕상의니어낙고(△△)ᄆᆡᆼ둉의쥭슌걱거감든머리ᄇᆡᆨ발토록(△△△△)노ᄅᆡᄌᆞ의옷슬입고일ᄉᆡᆼ에양지셩효를증ᄌᆞ갓치(남훈태평가서적)
21-6▶왕상에니어낙고(△△)ᄆᆡᆼ둉쥭슌것거감든머리희도록로ᄅᆡᄌᆞ의옷슬입고평ᄉᆡᆼ에양지셩효를증ᄌᆞ갓치ᄒᆞ리라(△△△)(여창가요록서적)

쪽수▶P33-1

21-1▶王祥의鯉魚엇고(△△)孟宗의竹筍것거감든말이희도록老萊子의옷슬닙고一生에養志誠孝를曾子ᄀᆞᆺᄒᆞᆯ이라(△△△)(海東歌謠)
21-2▶王祥의鯉魚낙고孟宗의竹笋것거감든머리희도록老萊子의옷ᄉᆞᆯ닙고平生에(△△△)養志誠孝를曾子ᄀᆞᆺ치ᄒᆞ리라(△△△)(靑丘永言)
21-3▶王祥에鯉里잡고孟宗에竹筍것거감든머리희도록老萊子의옷슬닙고平生에(△△△)養志誠孝를曾子갓치ᄒᆞ리라(△△△)(歌曲源流)
21-4▶王祥의鯉魚잡고孟宗의竹笋것거감던마리희도록老萊子의옷슬입고平生의(△△△)養志誠孝을曾子가치ᄒᆞ리라(△△△)(客樂譜)
21-5▶왕상의니어낙고(△△)ᄆᆡᆼ둉의쥭슌걱거감든머리ᄇᆡᆨ발토록(△△△△)노ᄅᆡᄌᆞ의옷슬입고일ᄉᆡᆼ에양지셩효를증ᄌᆞ갓치(南薰太平歌)
21-6▶왕상에니어낙고(△△)ᄆᆡᆼ둉쥭슌것거감든머리희도록로ᄅᆡᄌᆞ의옷슬입고평ᄉᆡᆼ에양지셩효를증ᄌᆞ갓치ᄒᆞ리라(△△△)(女昌歌謠錄)

쪽수▶P33-2이와 같이 원작 혹은 비교적 원작에 가깝다 신용할 수 있는 것은 표준 삼아 각 가집에 전재된 것을 비교하여 보면 거의 엄밀한 의미에 있어 하나도 원작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다 해도 될 듯하다. 이것 요컨대 편찬자가 원작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여 그 원작을 참고할 사이 없이 일반이 구송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용하고, 또 다소 어구상 의심이 있을 때는 자기의 의사대로 산정하여 버린 탓도 있겠고, 또 후인의 전사 시의 오사(誤寫)도 있겠지마는, 이 점은 우리들이 가집에 대하여 심히 불안을 느끼는 바이고 또 장래에 조심을 요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다.
쪽수▶P33-2이와 같이 原作 或은 比較的 原作에 가깝다 信用할 수 있는 것은 標準 삼아 各 歌集에 傳載된 것을 比較하야 보면 거의 嚴密한 意味에 있어 하나도 原作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다 하여 可할 듯하다. 이것 要컨댄 編纂者가 原作에 對한 意識이 不足하야 그 原作을 叅考할 사이 없이 一般이 口誦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信用하고, 또 多少 語句上 疑心이 있을 때는 自己의 意思대로 刪正하야 버린 탓도 있겠고, 또 後人의 轉寫 時의 誤寫도 있겠지마는, 이 點은 우리들이 歌集에 對하야 甚히 不安을 느끼는 바이고 또 將來에 操心을 要하지 않으면 안 될 問題다.
























본문3-5: 3-5


쪽수▶P34-1조선 시가의 형태는 가사체와 같이 전혀 분절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이런 것은 도리어 예외라 할 수 있고, 일반은 대개 각기 독특한 형식으로서 얼마에 분절할 수 있다. 장가에 보더라도 원문주16▶경기체가는[29] 1수가 몇 장으로 나뉘고 1장은 다시 전절, 후절에 나누어지며, 단가에서는 이를테면 시조가 초, 중, 종장 3장에 나뉠 것은 분명한 일이나 이러한 형태상 분절이 가집 편찬자에게 의식되어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여기서 살펴 볼까 한다. 먼저 장가집인 악장가사서적에서 보면 이 의식이 대체에 있어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를테면 감군은은 3장, 정석가는 11장, 청산별곡은 8장, 서경별곡은 14장에 분절되는 것이나 각 장을 별행에 쓰지는 안 했지마는 각 장 사이에는 〇표를 두어서 각 장의 분절을 분명히 하였고 경기체가에서도 각 장은 물론 전렬에 의하여 〇표로서 분절하였지마는 한 장 내의 전후 양절에까지도 ‘엽(葉)’이라는 작은 글자를 옆에 써서 그 연속을 구별하였다. 한낱 한림별곡 제1장에서 예를 들어보면
쪽수▶P34-1朝鮮 詩歌의 形態는 歌辭體와 같이 全然 分節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마는 이런 것은 도로혀 例外라 할 수 있고, 一般은 大槪 各其 獨特한 形式으로서 얼마에 分節할 수 있다. 長歌에 보드라도 원문주16▶景機體歌는[30] 一首가 몇 章으로 난후이고 一章은 다시 前節, 後節에 난후어지며, 短歌에서는 일터이면 時調가 初, 中, 終章 三章에 난후일 것은 明若한 일이나 이러한 形態上 分節이 歌集 編纂者에게 意識되여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여기서 삷혀 볼가 한다. 먼첨 長歌集인 樂章歌詞에서 보면 이 意識이 大體에 있어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를터이면 感君恩은 四章, 鄭石歌는 十一章, 靑山別曲은 八章, 西京別曲은 十四章에 分節되는 것이나 各 章을 別行에 쓰는 안 했지마는 各 章 사이에는 〇標를 두어서 各 章의 分節을 分明히 하였고 景機體歌에서도 各 章은 勿論 前例에 依하야 〇標로서 分節하였지마는 一章 內의 前後兩節에까지도 「葉」이라는 小字를 傍書하야 그 連續을 區別하였다. 한낱 翰林別曲 第一章에서 例를 들어보면
쪽수▶P34-2

元淳文仁老詩公老四六李正言陳翰林雙韻走筆冲基對策光釣經義良鐘詩賦위試塲ㅅ景긔엇더니하니잇고()學士의玉箏門生琴學士의玉箏門生위날조차몃부니잇고〇

쪽수▶P34-2

元淳文仁老詩公老四六李正言陳翰林雙韻走筆冲基對策光釣經義良鐘詩賦위試塲ㅅ景긔엇더니하니잇고()學士의玉箏門生琴學士의玉箏門生위날조차몃부니잇고〇

쪽수▶P34-3와 같다. 이와 같이 악장가사서적는-어부가와 같이 당연히 12장에 분절될 것이 분절되지 않은 채로 있는 것도 있지마는-대체에 있어 그 의식이 명확하였다.
쪽수▶P34-3와 같다. 이와 같이 樂章歌詞는-漁夫歌와 같이 當然히 十二章에 分節될 것이 分節되지 않은 채로 있는 것도 있지마는-大體에 있어 그 意識이 明確하였다.
쪽수▶P34-4그러나 단가집이 되면 이 방면이 실로 불분명한 듯하다. 불분명하다는 것보다 차라리 그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해동가요서적와 같이 편찬의식이 여러 방면으로 충분히 활동하여 있는 가집에 있어서도 아마 이것만은 등한히 한 듯하여 아무 분절이 있는 것을 볼 수 없고 청구영언서적이며 동가선서적 등도 대부분, 분명하지 못하였다. [[고금가▶P35-1곡]]서적은 아직 그 원본을 접견하지 못하였으니 상세한 것은 물론 알 수 없으나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복사본에는 역시 분절의 흔적이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가곡원류서적, 남훈태평가서적, 객악보서적만은 비교적 그 의식이 명료하게 나타난 듯하니, 가곡원류서적는 1수의 시조를 대개 5장에 분절하였다. 이것은 시조를 노래로 부를 때 5장에 나누어 부르고, 본 가집이 주로 창곡을 위하여 편찬된 탓이라 싶으나 지금 그 분절된 상태를 실례에 의하여 보면
쪽수▶P34-4그러나 短歌集이 되면 이 方面이 實로 不分明한 듯하다. 不分明하다는 것보다 차라리 그 意識이 全然 없는 것이 大部分이다. 即 海東歌謠와 같이 編纂 意識이 여러 方面으로 充分히 活動하여 있는 歌集에 있어서도 아마 이것만은 等閑히 한 듯하야 아모 分節이 있는 것을 볼 수 없고 靑丘永言이며 東歌選 等도 大部分, 分明틀 몯 하였다. 古今歌▶P35-1曲은 아직 그 原本을 接見치 몯하였으니 詳細한 것은 勿論 알 수 없으나 내가 가지고 있는 그 複寫本에는 亦是 分節의 痕趾이 보이지 안는다. 그런대 歌曲源流, 南薰太平歌, 客樂譜만은 比較的 그 意識이 明瞭하게 나타난 듯하니, 歌曲源流는 一首의 時調를 大概 五章에 分節하였다. 이것은 時調를 노래로 부를 때 五章에 난후어 불으고, 本 歌集이 主로 唱曲을 爲하야 編纂된 탓이라 싶으나 지금 그 分節된 狀態를 實例에 依하야 보면
쪽수▶P35-2

黃河水맑다터니 聖人이ᄂᆞ시다 草野群賢이다이러난단말가 어즈버 江山風月을누를쥬고이거니

쪽수▶P35-2

黃河水맑다터니 聖人이ᄂᆞ시다 草野群賢이다이러난단말가 어즈버 江山風月을누를쥬고이거니

쪽수▶P35-3와 같다. 이러한 분절이 본 가집에 있어서는 결코 잘못된 예ᅌᅬ가 아니고 일반적 주지인 듯이 보인다. 이에 대하여 남훈태평가서적는 대부분은 분절하지 않았지마는 처음 4장에는 각 수를 3장에 분절하여 장과 장 사이에는 구점을 찍어 분장을 명확히 하였다. 이 역시 예를 들어보면
쪽수▶P35-3와 같다. 이러한 分節이 本 歌集에 있어서는 決코 잘못된 例外가 아니고 一般的 主旨인 듯이 보인다. 이에 對하야 南薰太平歌는 大部分은 分節하지 않었지마는 처음 四張에는 各 首를 三章에 分節하야 章과 章 사이에는 句點을 찍어 分章을 明確히 하였다. 이 亦是 例를 들어보면
쪽수▶P35-4

간밤에부든바람만졍도화ᄃᆞ지거다, 아희는뷔를들고스로랴ᄒᆞ는고야, 낙화들고지아니랴스러무ᄉᆞᆷ

쪽수▶P35-4

간밤에부든바람만졍도화ᄃᆞ지거다, 아희는뷔를들고스로랴ᄒᆞ는고야, 낙화들고지아니랴스러무ᄉᆞᆷ

쪽수▶P35-5과 같은대, 본 가집이 특히 첫 4장만에 그러한 분절을 시행하고 그 다음부터는 이것 또한 생략한 것은 아마 처음 몇 장에 예시하여 이하 같은 모습이라는 뜻을 표한 듯이 보인다. 이 4장 분절법과 3장 분절법은 시조의 보통 분절법으로 알려 왔고 그것이 이 양 가집 편찬자에 의식적으로 표기된 것이지마는 객악보서적의 분절법은 종래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지 않던 분절법을 썼다. 즉 그에서 일례를 들면
쪽수▶P35-5과 같은대, 本 歌集이 特히 첫 四張만에 그러한 分節을 施行하고 그 다음부터는 이것 또한 略한 것은 아마 처음 몇 張에 例示하야 以下 同樣이라는 뜻을 表한 듯이 보인다. 이 五章 分節法과 三章 分節法은 時調의 普通 分節法으로 알려 왔고 그것이 이 兩 歌集 編纂者에 意識的으로 表記된 것이지마는 客樂譜의 分節法은 從來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지 않든 分節法을 썼다. 即 그에서 一例를 들면
쪽수▶P35-6

空山이寂寞한듸슬피우ᄂᆞᆫ져杜鵑아蜀國興亡이어제오날아이여든 至今히 피나게우러서남의ᄋᆡ를긋느니

쪽수▶P35-6

空山이寂寞한듸슬피우ᄂᆞᆫ져杜鵑아蜀國興亡이어제오날아이여든 至今히 피나게우러서남의ᄋᆡ를긋느니

쪽수▶P35-7와 같이 특히 종장 제1구의 독존적 가치를 인정하여 이를 중심으로 전후에 양분하였다. 5장 분절을 음악적이라 하고 3장 분절을 문학적이라 한다면 이 분절법은 또한 무엇이라 할까. 장래의 연구에 한 가지 남긴 과제라 하겠거▶P36-1니와 본 가집은 시종일관 이 분절의 태도를 잊지 않았다.
쪽수▶P35-7와 같이 特히 終章 第一句의 獨存的 價値를 認證하야 이를 中心으로 前後에 兩分하였다. 五章 分節을 音樂的이라 하고 三章 分節을 文學的이라 한다면 이 分節法은 또한 무엇이라 할가. 將來의 硏究에 한 가지 남긴 課題라 하겠거▶P36-1니와 本 歌集은 終始 一貫하야 이 分節의 態度를 잊지 않었다.
쪽수▶P36-2그리고 다음은 이상과는 다소 성질이 다르지만, 보통 우리는 시조를 초장 4구, 중장 4구, 종장 4구 도합 12구에 나누는데 전간공작인물 씨 소장인 (여창가요록서적손진태인물 씨 편인 (조선고가요집서적 권두에 붙여 놓은 그 사진면에 의하면 1수를 12구에 구분한 듯하다. 그에 나타난 것 중에 1수를 뽑아 보면
쪽수▶P36-2그리고 다음은 以上과는 多少 性質이 달르지마는, 普通 우리는 時調를 初章 四句, 中章 四句, 終章 四句 都合 十二句 에 난후는대 前間恭作 氏 所藏 인 女唱歌謠錄은 孫晋泰 氏 編인 朝鮮古歌謠集 卷頭에 부치 놓은 그 寫眞面에 依하면 一首를 十二句에 區分한 듯하다. 그에 나타난 것 中에 一首를 뽑아 보면
쪽수▶P36-3

담안에, 셧는ᄭᅩᆺ이, 모란인가, ᄒᆡ당화ᅟᅵᆫ가, 햇득발굿, 퓌여잇셔, 남의눈을, 놀ᄂᆡ나니, 두어자라, 님잇시랴, 나도것거, 보리라

쪽수▶P36-3

담안에, 셧는ᄭᅩᆺ이, 모란인가, ᄒᆡ당화ᅟᅵᆫ가, 햇득발굿, 퓌여잇셔, 남의눈을, 놀ᄂᆡ나니, 두어자라, 님잇시랴, 나도것거, 보리라

쪽수▶P36-5가집에 나타난 분절 의식은 대강 탐색하면 이상과 같이도 되지만 그러나 분절이라는 그것이 음악적 혹은 문학적으로 형식상 분단을 할 때 필요한 것이고, 단순한 1수의 시가로서는 더욱이 가집 편찬에 당하여서는 그렇게까지 의식하지 않고는 안 될 것도 싶지 않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가집은 이것을 등한히 하여 왔으나 그로 인해 가집의 손색이 될 것도 같지 않고, 가곡원류서적, 남훈태평가서적, 여창유취서적와 같은 창곡을 위하여 편찬된 가집에 있어서만이 필요, 적당하다 하겠다.
쪽수▶P36-5歌集에 나타난 分節 意識은 大綱 探索하면 以上과 같이도 되지마는 그러나 分節이라는 그것이 音樂的 或은 文學的으로 形式上 分段을 할 때 必要한 것이고, 單純한 一首의 詩歌로서는 더욱이 歌集 編纂에 當하여서는 그러케까지 意識하지 안 하고는 안 될 것도 싶지 않다. 그러므로 大部分의 歌集은 이것을 等閑히 하여 왔으나 글로 因하야 歌集의 損色이 될 것도 같지 않고, 歌曲源流, 南薰太平歌, 女唱類聚와 같은 唱曲을 爲하야 編纂된 歌集에 있어서만이 必要 適當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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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38-3이상 가체, 분류, 작가, 원작, 분절, 편자 및 서발에 대한 편찬자의 의식을 말하였다. 가집 편찬 사업은 시대적 사업이요 또 시가의 총결산적 사업이라고도 할 수 있어 시가에서는 중요한 사업의 하나이다. 조선에서 이 사업이 일어난 것은 기록상으로도 꽤 오랜 옛날부터요. 시대에 있어 다소 성쇠는 있었겠지만은 어쨌든 근대에 이르도록 끊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 편찬의식도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만큼 많은 기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에 가직히 나아가 접할 때는 이상 말하여 온 바와 같이 충분한 기대에 병행하지 못하였다. 즉 고찰을 시도한 것만으로 보더라도 가체에 있어는 중심 태도는 산란함이 없었다 하더라도 약간의 장단이 서로 착종하였음을 볼 수 있었고, 분류에 있어는 곡조를 중요시한 관계상 잘못하면 그 효과를 잃을 위험이 있었고, 작가에 있어는 아직 고증을 요할 점을 남긴 것이 ▶P39-1있었고, 원작에 있어는 전폭적 실패를 하였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또 분절에 있어는 비교적 힘을 써 왔지마는 편자 및 서발에 와서는 대부분이 그 의식이 유치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쪽수▶P38-3以上 歌體, 分類, 作家, 原作, 分節, 編者 及 序跋에 對한 編纂者의 意識을 말하였다. 歌集 編纂 事業은 時代的 事業이요 또 詩歌의 總決算的 事業이라고도 할 수 있어 詩歌에서는 重要한 事業의 하나이다. 朝鮮에서 이 事業이 일어난 것은 記錄上으로도 꽤 오랜 녯날부터요. 時代에 있어 多少 盛衰는 있었겠지마는 어째던 近代에 이르도록 끊어지지 않었다. 딸아서 그 編纂 意識도 歷史的 背景을 가지고 있는 만큼 많은 期待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實際 그에 가직히 나아가 接할 때는 以上 말하여 온 바와 같이 充分한 期待에 並行하지 몯하였다. 卽 考察을 試한 것만으로 보드라도 歌體에 있어는 中心 態度는 散亂함이 없었다 하드라도 若干의 長短이 서로 錯綜하얏슴을 볼 수 있었고, 分類에 있어는 曲調를 重要視한 關係上 잘못하면 그 効果를 잃을 危險이 있었고, 作家에 있어는 아직 考證을 要할 点을 남긴 것이 ▶P39-1있었고, 原作에 있어는 全幅的 失敗를 하였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또 分節에 있어는 比較的 힘을 써 왔지마는 編者 及 序跋에 와서는 大部分이 그 意識이 幼稚함을 免하지 몯하였다.
쪽수▶P39-2편찬 의식은 일면에 있어 문학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면 이로인하여 다소간은 우리 선인들의 문학의식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를 것이나 그러나 여기는 개인 가집은 전연 취급하지 않았고 또 상술한바 6항목의 편찬의식은 감히 편찬자 의식 범위의 전체가 아닐 것이다.
쪽수▶P39-2編纂 意識은 一面에 있어 文學意識을 反映하는 것이라 한다면 일로 因하야 多少間은 우리 先人들의 文學意識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를 것이나 그러나 여기는 個人 歌集은 全然 取扱하들 안 하였고 또 上述한바 六項目의 編纂 意識은 敢히 編纂者 意識 範圍의 全體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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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삼국사기서적 권제1 명성왕인물 2년에
    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常入内用事, 仍命與大矩和尙, 修集鄉歌, 謂之三代目云,
  2. 삼국유사서적 48경 문대왕전에
    國仙邀元郎, 譽昕郎, 柱元叔宗郎, 遊覽金蘭, 暗有爲君主理邦國之意, 乃作歌三首, 心使弼舍知, 授針卷, 送大炬和尙處, 令作三歌
    라 한 것이 있으니 이 대거(大炬)는 곧 대구인물와 동일인물인 듯하다.
  3. 三國史記 卷第一 冥聖王 二年에
    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常入内用事, 仍命與大矩和尙, 修集鄉歌, 謂之三代目云,
  4. 三國遺事 四十八景 文大王傳에
    國仙邀元郎, 譽昕郎, 柱元叔宗郎, 遊覽金蘭, 暗有爲君主理邦國之意, 乃作歌三首, 心使弼舍知, 授針卷, 送大炬和尙處, 令作三歌
    라 한 것이 잇으니 이 大炬는 곳 大矩와 同人인 듯하다.
  5. 세종실록서적 권제47 참조
  6. 世宗實錄 卷第四十七 叅照
  7. 위의 실록서적 권제61 참조
  8. 仝上實錄 卷第六十一 叅照
  9. 관습(慣習)은 관습도감이란 것인데 세종인물조에 설치되어 향당악(鄕唐樂)을 담당하였다. 허백당집서적 문1장 악원제명기에 “我世宗大王憤前代之委靡, 思復古樂, 以雅樂, 屬太掌寺, 設慣習都監, 敎鄕唐之樂, 以맹사성인물, 朴堧等, 相繼爲提調, 以委制作之任, 所謂雅樂者, 祭祀正樂之歌, 唐者, 相會明廷之樂, 鄕者, 本朝國俗之音也”라 운운
  10. 세종대왕실록서적 권제61 참조
  11. 慣習은 慣習都監이란 것인데 世宗朝에 設置되여 鄕唐樂을 司掌하얏다. 虛白堂集 文一掌樂院題明記에 󰡔我世宗大王憤前代之委靡, 思復古樂, 以雅樂, 屬太掌寺, 設慣習都監, 敎鄕唐之樂, 以孟思誠, 朴堧等, 相繼爲提調, 以委制作之任, 所謂雅樂者, 祭祀正樂之歌, 唐者, 相會明廷之樂, 鄕者, 本朝國俗之音也󰡕라 云云
  12. 世宗大王實錄 卷第六十一 叅照
  13. 조선가집성서적 제1집 30쪽
  14. 朝鮮歌集成 第一輯 三〇頁
  15. 퇴계인물의 서어부가후(앞서 나옴)에
    佐郎黄君仲舉, 於先生, 親且厚矣, 常於朴俊書中, 取此詞(漁父詞), 又得短歌之漁父作者十闋, 玆以爲獻先生
    이라 함으로 보면 선생이 얻은 어부사는 황중거인물박준인물가집 중에서 빼온 것임을 알겠고 농암인물의 어부가 서문에(농암집서적 권4)
    得此之後, 盡棄其前所玩悅歌詞, 而專意于此, 手自騰册, 花朝月夕, 把酒呼朋, 使詠於汾江小艇之上, 興味尤其, 亹亹忘惓第以語多不備, 政重疊, 必其傳寫有之訛, 此非聖賢經據之文,妄加撰改, 一篇十二章, 去三爲九, 作長歌而詠焉
    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농암집서적에 전하는 어부사는 박준인물가집에서 얻은 것을 산개한 것임을 알겠다.
  16. 退溪의 書漁父歌後(前出)에
    佐郎黄君仲舉, 於先生, 親且厚矣, 常於朴俊書中, 取此詞(漁父詞), 又得短歌之漁父作者十闋, 玆以爲獻先生
    이라 함으로 보면 先生이 얻은 漁父詞는 黃仲舉가 朴俊 歌集 中에서 빼온 것임을 알겠고 聾岩의 漁父歌 序文에(聾岩集卷之四)
    得此之後, 盡棄其前所玩悅歌詞, 而專意于此, 手自騰册, 花朝月夕, 把酒呼朋, 使詠於汾江小艇之上, 興味尤其, 亹亹忘惓第以語多不備, 政重疊, 必其傳寫有之訛, 此非聖賢經據之文,妄加撰改, 一篇十二章, 去三爲九, 作長歌而詠焉
    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聾岩集에 傳하는 漁父詞는 朴俊 歌集에서 얻은 것을 删改한 것임을 알겠다.
  17. 졸고 󰡔청구영언해제원고󰡕(조선어문학회보학술지 제2호권호 소재)와 그 보필 (같은 회보학술지 제4호권호 소재) 참조
  18. 拙稿 󰡔靑丘永言解題󰡕(朝鮮語文學會報 第二號 所載)와 그 補筆 (仝會報 第四號 所載) 叅照
  19. 졸고 󰡔해동가요해제원고󰡕(조선어문학회보학술지 제3호권호 소재)와 그 보필(같은 회보학술지 제4호권호 소재) 참조
  20. 拙稿 󰡔海東歌謠解題󰡕(朝鮮語文學會報 第三號 所載)와 그 補筆(仝會報 第四號 所載) 叅照
  21. 졸고 󰡔남훈태평가해제원고󰡕(조선어문학술지 제7호권호 소재) 참조
  22. 拙稿 󰡔南薰太平歌解題󰡕(朝鮮語文 第七號 所載) 叅照
  23. 여창유취서적는 일명 여창가요록이라 하여 세간에 단행본으로 전하는 것이 있다. 그 원본은 전간공작인물 씨의 소장으로 씨의 소장본에는 권말에 설봉(雪峯)의 자서(自署)가 있다 하여, 또는 이것으로 한 경오(고종인물 7년)년간에 설봉이라는 기생의 편이리라 고증하였으나, 원본을 보지 못한 나로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본서는 늘 가곡원류서적에 부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곡원류서적와 같은 사람의 편찬이리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된다면 가곡원류서적의 편자 박효관인물은 호를 운안(雲岸)이라 하엿으니 운안과 설봉은 그 자획에 있어 흡사한 점으로 보아 혹은 후세에 잘못 옮긴 채로 유전되어 마치 다른 사람의 편과 같이 인증되지 않았는가도 싶다. 잠시 의문으로 남겨두어 후일 정확한 고증이 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24. 이왕직도서관기관본 서문 참조
  25. 女唱類聚는 一名 女唱歌謠錄이라 하야 世間에 單行本으로 傳하는 것이 있다. 그 原本은 前間恭作 氏의 所藏으로 氏의 藏本에는 卷末에 雪峯의 自署가 있다 하여, 또는 이것으로 한 庚午(高宗 七年)年間에 雪峯이라는 妓生의 編이리라 考證하엿으나, 原本을 보지 몯한 나로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本書는 늘 歌曲源流에 付載되여 있는 것으로 보아 歌曲源流와 同人의 編纂이리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니, 그러케 된다면 歌曲源流의 編者 朴孝寬은 號 를 雲岸이라 하엿으니 雲岸과 雪峯은 그 字劃에 있어 必似한 點으로 보아 或은 後世에 訛寫하야 流傳되여 마치 別人의 編과 같이 認證되지 않었는가도 싶다. 暫時 疑問으로 남겨두어 後日 正確한 考證이 될 機會가 있기를 바란다.
  26. 李王職圖書館本 序文 叅照
  27. 규장각기관본 발문 참조
  28. 奎章閣本 跋文 叅照
  29. 경기체가란 명칭은 아직 널리 쓰이는 명칭이 아니나, 일찍이 안확인물 씨가 󰡔조선가시의 묘맥원고󰡕(별건곤학술지 소화 4년 12월호권호 소재) 중에서 처음으로 쓴 것으로 생각한다. 한림별곡, 오륜가와 같이 각 장 끝 구에 ‘景幾(긔)엇더하니잇고’를 다는 것이 거의 이 종류 시가의 특색같이 되었으므로 ‘경기(景幾)’라 하면 곳 그 시가체를 연상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 명칭이 적당하다 생각하고 즐겨 쓴다.
  30. 景幾體歌란 名稱은 아직 널리 쓰이는 名稱이 아니나, 일즉이 安廓 氏가 󰡔朝鮮歌詩의 苗脈󰡕(別乾坤 昭和 四年十 二月號 所載) 中에서 처음으로 썻는 듯이 생각한다. 翰林別曲, 五倫歌와 같이 各 章 끝 句에 󰡔景幾(긔)엇더하니잇고󰡕를 다는 것이 거의 이 種類 詩歌의 特色같이 되었음으로 󰡔景幾󰡕라 하면 곳 그 詩歌體를 連想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 名稱이 適當타 생각하고 즐겨 쓴다.






현대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