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실

North Korea Humanities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위키ID)이 작성했습니다.




한글명(한자명)
박동실.jpg
출처 : 아주경제
 
한글명 박동실 한자명 朴東實 영문명 PARK DONG SIL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897년년 몰년 1968년년 출신지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관리 전공 창극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1897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나 8살부터 소리를 배웠으며, 1910∼1930년에 전라도를 중심으로 창극 활동에 힘썼고, 광복 후에 월북하여 사회주의 창극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서편제 판소리 명창으로 평가받는다.[1]


생애


출생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관리(호적은 담양읍 객사리 241)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박장원(朴壯元)인물, 어머니는 배금순(裵今巡), 외조부는 판소리 명창 배희근(裵喜根)인물이다. 8세부터 부친에게, 나중에 서편제 명창 김채만에게 소리를 배웠다. 1909년 12세의 소년 명창으로 부친과 함께 광주 양명사(陽明社) 창극 공연에 참여하여 춘향 역을 맡은 것으로 전해진다. [2]


일제강점기

1910∼1935년 무렵까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화순협률사, 리리협률사, 부안협률사 등의 창극 공연에서 널리 활동하였고, 1936∼1945년까지는 청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공기남·임소향·조상선 등에게 판소리를 가르쳤으며, 박석기의 후원으로 김소희·한애순에게 심청가를 전수하였다. 1939년 오케 레코드기관에서 「흥보치부가」와 단가 「초한가」를 취입하였다. [3]


광복 후

광복 후 창작 판소리 「열사가」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사건 중인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에 안기옥·정남희·조상선·임소향·공기남 등과 함께 월북하였다. 월북 이후 창극 「춘향전」, 「리순신장군」을 만들었으며, 단가 형식의 「김장군을 따르자」를 창작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여 창작판소리 「녀성영웅 주옥희」 「보천보출진」 「해군영웅 김군옥」 등 9편, 장가 형식의 「조국해방실천사」, 「새로운 조국」, 「사회주의 좋을시구」, 「승리의 10월」 등 10편, 단가 형식의 「해방의 노래」, 「단결의 노래」, 「금강산 휴양의 노래」 등 수십 편을 작곡했다. 1954년과 1956년에는 예술단을 이끌고 중국을 순회하면서 창극 「춘향전」, 「심청전」을 공연하였다. [4]


말년

1956년 평양음악대학기관 교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김일성인물의 교시에 따라 판소리의 쐑소리(수리성)를 버리고 맑은 목을 쓰는 주체창법으로 전환하였다. 1958년에 공훈배우, 1961년에 인민배우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1967년에는 개성 관음사기관에서 공기남·임소향·조해숙·신우선 등에게 판소리 5바탕을 재전수하여 녹음하였다. 1956년 전쟁고아 박영선인물·박영순을 자녀로 입양하였고, 1968년 12월 4일 향년 71세로 작고했다. [5]





연구


박동실제 소리

{{글상자| |내용= 박동실제 소리는 “서편제의 예술적 지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바디(제(制)나 유(流)의 뜻, 소리를 짠 이의 다음에 붙는다)”로 꼽힌다. 그간 분단사건의 상흔으로 잊혔던 박동실제 소리가 남북간 예술교류를 이어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정병헌 전 숙명여대 교수는 “박동실 명창이 북한공간에서도 민족가극이나 혁명가극을 제작했는데, 이는 판소리 영역의 공간을 북한 예술까지 확대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6]


열사가

1945년 광복 전후에 창작한 열사가(烈士歌) 중 ‘윤봉길인물 열사가’의 한 대목을 보자. 윤봉길(尹奉吉) 열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 홍커우(虹口)공원에서 폭탄을 터트려 시라카와(白川) 대장인물을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사시킨 그 사건 사건의 그 장면 말이다. 물론 ‘열사가’는 광복 전후 문화‧예술계에 불어닥친 항일과 일제 잔재 청산의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박동실의 창작물이고, 어디까지가 구전(口傳)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박동실은 1950년 9‧28 서울 수복 후 월북해버려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열사가’는 판소리라는 전통음악의 그릇에 항일이라는 시대정신을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민족적, 예술적 의의가 심대하다. 그를 빼고 예향(藝鄕), 광주의 정신을 논할 수 없는 이유다. .[7]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박동실 Person: 김채만 A hasMaster B
Person: 박장원 Person: 박동실 A hasSon B
Person: 박동실 Institution: 평양음악대학 A worksAt B
Person: 박동실 Person: 박영선 A hasSon B
Book:「열사가」 Person: 박동실 A creator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정대하, 「“박동실제 소리엔 서편제의 예술적 지향 고스란히 담겼죠”」, 『한겨레』online, 작성일: 2019년 10월 19일.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912778.html

"박동실", 근현대서울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2519

이재호, 「[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이것이 잃어버린 '광주소리'다 ...명창 박동실을 들어보라」, 『아주경제』online, 작성일: 2021년 6월 24일.
https://www.ajunews.com/view/20210623144242110






주석


  1. "박동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박동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박동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박동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박동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정대하, 「“박동실제 소리엔 서편제의 예술적 지향 고스란히 담겼죠”」, 『한겨레』online, 작성일: 2019년 10월 19일.
  7. 이재호, 「[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이것이 잃어버린 '광주소리'다 ...명창 박동실을 들어보라」, 『아주경제』online, 작성일: 2021년 6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