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

North Korea Humanities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김채영(PNU2025))이 작성했습니다.




김순남(金順男)
김순남.jpg
출처 :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한글명 김순남 한자명 金順男 영문명 Kim Sun Nam [1]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17년 몰년 1983년 출신지 서울 낙원동 전공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 작곡부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로부터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활동한 월북 작곡가.[2]


생애


유년기와 음악적 재능의 발현

1917년 5월 28일 경기도 경성부 낙원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태어났다.[3]교동보통학교기관를 마치고 15살 때인 1932년 경성사범학교기관에 입학했는데, 베토벤인물 등 서양 명곡들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학교 취주악단을 지휘하는 등 음악가로서도 재능을 보였다.[4]


일본 유학과 작곡가로의 성장

졸업 후 몇 년간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일본으로 유학했고, 도쿄 고등음악학원기관에 입학해 작곡을 전공했다.[5] 이 시절의 대표적인 스승들로 시모후사 칸이치인물와 하라 타로인물가 있었다.[6]특히 하라 타로의 경우 일본 프롤레타리아[7]음악의 정신적 지주격이었고, 김순남의 작곡 성향도 음악을 민중의 삶 속에서 찾고자 하는 하라의 사상적 영향을 깊게 받았다.[8]


해방 전후 조선 음악계 활동

1945년 이전까지의 작품은 바르토크인물, 스트라빈스키인물의 무조적 경향과 무소르크스키인물 등의 영향이 강한 사실적 작품이 주종을 이루는 작품들을 발표하였으며, 피아노 소나타 제2번과 피아노 3중주 제1번, 자신의 결혼식 때 반주 음악으로 쓴 피아노 3중주 「결혼」, 가곡 「철공소」 등이 대표적이다.[9] 해방 이후에는 해방가요 외에도 2권의 가곡집과 교향곡 제1번, 피아노 협주곡 제1번, 합창이 붙은 교향곡 「태양없는 땅」 같은 본격적인 관현악 작품들도 작곡하였고, 교향곡과 협주곡의 경우는 해당 장르에서 한반도 최초의 작품들로 기록되고 있다.[10] 민족 음계에 바탕을 둔 가곡 김소월인물 시의 「산유화」 · 「초혼」 · 「진달래꽃」 등 다섯 편의 가곡을 『산유화』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11]


월북과 북한 음악가로서의 확립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면서 좌익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는데, 이를 피해 여러 인사들이 삼팔선을 넘어 북한으로 피신했다.[12] 김순남도 대구 10.1 사건사건을 노래한 인민항쟁가 작곡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아내와 외동딸[13]을 남겨둔 채 월북했다.[14] 그 뒤 평양에서 조선음악가동맹단체 부위원장과 평양음악대학기관 작곡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오페라「인민유격대」[15]와 오라토리오「승리」, 서곡「영웅 김창걸」 등의 작품을 남겼다.[16] 또한 연극 《산사람》(1948)의 음악을 맡는 등 존경을 받는 음악인으로 활동하였다.[17]


소련 유학과 숙청

1952년에는 북한 정부의 후원으로 소련에 유학했고,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기관에서 아람 하차투리안인물에게 배웠다.[18] 하차투리안은 김순남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는지, '조선 빨치산의 노래'를 편곡해 주기도 했다.[19] 불행하게도 유학 생활은 종전과 동시에 북한에서 소환 명령이 내려져 급히 귀국하였고, 남로당단체 일파로 간주되어[20] 심한 비판을 받고 1958년에 모든 창작 권리를 빼앗기고 함경남도 신포의 조선소 주물공(鑄物工)으로 숙청당했다.[21]


복권과 후반기 작품 활동

다만 김순남은 공적 지위를 박탈당했을 뿐, 간첩 혐의 등을 받고 사법적인 처분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1960년대 초반에 복권되어 다시 창작 권리를 되찾았다.[22] 복권 후 몇 년 동안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칸타타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와 바이올린 독주곡 '이른 봄'과 함경남도 일대의 민요를 채보한 기록물 등을 발표했다.[23]


말년과 사후 평가

하지만 복권 후 몇 년뒤 결핵에 걸리면서 다시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평양과 함경남도 일대의 요양소를 전전하며 오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24] 1970년대 이후에는 복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출판물에서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게 되었다.[25] 1983년경 신포에서 세상을 떠났다.[26]





연구


주요 작품들

대한민국에서는 80년대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숙청 뒤 복권되었지만 병으로 작품활동을 그만두고 이후 북한 당국과 음악계에서 의도적으로 그를 재조명하지 않아서 김순남의 작품 연구에는 한계가 있다.[27] 해금사건[28]후 발표된 각종 연구 자료들과 자필 악보 등의 자료들이 선보여지면서 서구 음악계의 최신 조류를 흡수함과 동시에 전통음악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는 창작 태도가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29] 그러나 현재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작품은 두 편의 가곡집과 해방가요 몇 편 정도다.[30] 악보가 분실, 소실되거나 일부만 남아 있는 작품들 중에는 교향곡(교향곡 제 1번)과 협주곡(피아노 협주곡 D조), 그랜드 오페라(인민유격대)가 있다.[31] 현재 발굴된 자료로는 피아노 협주곡 1악장과 2악장 일부의 피아노 두 대용 자필 악보만이 확인되고 있다.[32]


가곡

2권의 가곡집은 남한에서 출판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의 '철공소' 같은 거의 무조에 가까운 곡부터 '산유화' 같이 최대한 단순화된 민요풍 노래까지 다양한 곡들이 들어 있다.[33] 특히 '산유화'의 경우 가장 대중적인 노래로, 조수미인물 같은 유명 음악가들도 음반으로 냈다.[34] 또한 '자장가'는 월북하면서 대한민국에 남긴 딸을 그리워하며 작곡했다고 전해진다.[35]


기악곡

해방 이후에는 2권의 가곡집과 교향곡 제1번, 피아노 협주곡 제1번, 합창이 붙은 교향곡 「태양없는 땅」 같은 본격적인 관현악 작품들을 작곡하였고, 교향곡과 협주곡의 경우는 해당 장르에서 한반도 최초의 작품들로 기록되고 있다.[36]

  • 교향곡 제1번 C조 (1947)
  • 피아노 협주곡 D조 (1947)
  • (합창)교향곡 '태양없는 땅' (1947)
  • 바이올린 독주곡 이른 봄 (1966)


기타

..

  • 오페라
    • 인민유격대 (1949)
  • 해방가요 (???맞나)


창작 성향

대체로 모든 작품들이 일제강점기 때 강압적으로 금지되었던 한반도 전통음악의 요소를 살림과 동시에 서양의 근대음악 기법을 가미해 새로운 형태의 민족음악을 발전시킨다는 '전통과 현대를 절충한 새로운 길의 모색'이라는 사고관을 보여주고 있어서, '한국 근대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린다.[37]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순남 Person: 김세원 A hasDaughter B
Person: 김순남 Institution: 교동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순남 Institution: 경성사범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순남 Institution: 도쿄 고등음악학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Timeline


▶Timeline임베딩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현행 로마자 표기법(문화체육관광부 고시 제2014-0042호)에 따른 표기.
  2. 김순남(金順男)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4.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5.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6.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7. 『경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 이외에는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 『프롤레타리아online,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8. 김순남(金順男)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김순남(金順男)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김순남(金順男)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1. 김순남(金順男)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13. 대한민국의 성우 겸 방송인 김세원인물.『김세원online, 위키백과.
  14. 김순남(金順男)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 한반도 최초의 본격 오페라.『김순남online, 나무위키.
  16. 김순남(金順男)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 김순남(작곡가)online, 위키백과.
  18.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19.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20. 실제로 김순남은 남로당의 최고 지도자였던 박헌영인물과 친분이 두터웠고, '박헌영에게 드리는 노래'라는 곡까지 써줬다고 한다.『김순남online, 나무위키.
  21. 김순남(金順男)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2.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23.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24.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25.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26.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27. 김순남(작곡가)online, 위키백과.
  28. 정부는 19일 노태우 대통령인물의 7·7 특별선언사건 후속조치로 홍명희인물 등 5명을 제외한 120여 명의 월북 작가들의 해방 전 문학작품을 전면 해금하고 앞으로 출판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정부, 홍명희 등 5명 제외한 월북 작가의 해방 전 작품 해금online,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9. 김순남(작곡가)online, 위키백과.
  30. 김순남(작곡가)online, 위키백과.
  31. 김순남(작곡가)online, 위키백과.
  32. 김순남(작곡가)online, 위키백과.
  33.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34. 김순남online, 나무위키.
  35. 김순남(작곡가)online, 위키백과.
  36. 김순남(金順男)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7. 김순남online,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