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김은선:족두리

DKHC Edu


족두리
簇頭里
CK0749.jpg
ckid costume0884
한글 족두리
한자 簇頭里
영문(음역) Jokduri
영문(의미) Woman’s ceremonial coronet
분류 관모 및 쓰개
성별
시대 고려, 조선
연령 성인
신분 왕족, 사대부
데이터 소스:
☞ 한국연구재단 한국복식사전 【족두리】



정의

  • 혼례, 상례, 제례에 갖추어 썼던 부녀자의 예관(禮冠)
  • Woman’s ceremonial coronet from the late Goryeo to the Joseon periods

해설

족두리는 중국 원(元)의 고고관(古古冠)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고’는 12∼13세기에 직위 있는 몽골 귀부인만이 착용하였던 관모로, ‘故姑’ ‘姑姑’ ‘固姑’ ‘顧姑’ ‘罟古’ ‘罟罟’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된다. 『高麗史』제 89권 열전에는, 원나라 황태후가 사신을 보내 충선왕의 비인 숙비(원래는 숙창원비(淑昌院妃) 김(金)씨로 충렬왕의 비였음)와 순비(順妃) 허(許)씨에게 고고(姑姑)를 주었는데, ‘고고’는 몽고 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모자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한 사신으로부터 고고를 받은 왕비들은 원나라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고 백관들은 이에 대해 예물을 드려 비妃를 축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숙창원비 김씨(숙비)는 직접 고고를 쓰고 원나라 사신을 대접하였다는 내용도 볼 수 있다.(『고려사』 제89권 열전 제2 후비2, 숙창원비 김씨, 순비 허씨) 고려에서 사용되었던 몽골 귀부인의 관모인 고고관은 조선시대에는 ‘족두리’라는 용어로 불리면서 미적 기능이 강화되어 부녀자의 예복용 관모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전하는 조선시대의 족두리는 일반적으로 검은 비단 6쪽을 둥글게 이어서 위가 아래보다 조금 넓고 평평하게 만든 높이 7~8㎝정도의 부드러운 직육면체 형상으로 모양을 잡아, 안을 솜으로 채워 마무리 한 형태이다. 족두리의 안쪽은 비어있어 착용할 때에는 가리마 위에 얹은 첩지가 족두리의 안쪽에 자리 잡게 됨으로써, 족두리를 머리 위에 안정적으로 고정시켜 준다. 『임하필기林下筆記』 권17 문헌지장편에 ‘족두리는 광해군1608~1623) 중년부터 겉은 검은 비단[玄錦]으로 하고 안은 자주로 쌌으며 속을 비게 하여 머리 위에 썼다’고 한 것을 보면, 17세기 초에 이미 국속화 된 족두리의 형태가 갖추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족두리는 몸체[틀]의 형태에 따라 솜족두리, 홑족두리, 어염족두리로 나뉘고, 꾸밈의 여하에 따라 민족두리와 꾸민족두리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한 족두리는 상례용과 제례용으로도 나뉘는데, 상례에는 솜을 두지 않고 각이 진 형태의 흰 족두리를, 제례에는 수식을 빼고 천으로만 감싼 검정색의 민족두리를 사용하였다. 혼례 때에는 옥판을 상부의 중심에 받치고 산호주와 밀화구슬과 진주를 꿰어 장식한 ‘꾸민 족두리’를 사용하였으며, 검정 비단으로 싸고 안에 솜을 놓어 허리를 잘룩하게 조여 만든 ‘어염족두리’는 어여머리나 떠구지의 밑받침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족두리 제도는 영조(英祖) 때 ‘가체금지령’에 대한 대안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32년(1756) 1월, 당시 사족(士族)의 부녀자들의 가체(加髢)에 의한 사치가 극에 달하자 이를 금하고 족두리(簇頭里)로 대신하도록 함으로써 부녀자 예복에 널리 사용하게 되었고,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12년(1788) 10월에는 족두리에 칠보(七寶) 등의 화려한 보석 장식을 금지하였으나 부녀자의 귀천 표시를 위해 남편의 직위, 품계에 따라 금권자(金圈子)나 옥권자를 족두리 위에 붙여 등위(等威)를 표시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특히 당쟁이 치열했던 시기에는 족두리가 당파를 구별하는 표시가 되기도 했는데, 노론은 솜을 가득 채워서 만들고 검은 비단으로 싼 솜족두리, 소론은 종이로 뼈대를 만들고 배접을 하여 비단으로 싼 일명 각족두리고도 하는 홑족두리를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도판자료

관련항목

시맨틱 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