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라인으로 보는 국도극장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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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13년부터 1999년까지 서울시 중구 을지로4가(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164)에 있었던 영화관 국도극장(國都劇場)[1]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역사적 의의가 많은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에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학교문화예술교육과 연계한 활동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학생들에게 '영화'나 '극'을 매개로 해당 장소의 역사적 의의와 당시 문화예술의 시대적 맥락을 구성한 자료(예:표석)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교육적 장소가 된다고 본다.

국도극장 전경 국도극장 로고
국도극장모습.png
국도극장 로고.jpg

국도극장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경성부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에 황금연예관이란 극장을 세웠는데 그것이 국도국장의 원조이다. 황금정은 그리스풍의 대리석 건물로서, 1925년에는 '경성보창극장', 1936년에는 '황금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광복 이후 1946년 신축 개관하면서 ‘국도극장’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국도극장에서 1923년에는 일본인 감독이 제작한 <춘향전>이 개봉되었고, 광복 후 1955년에 다시 한번 <춘향전>이 개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1999년에 건물을 허물고 호텔을 세우기 위해 폐관하였다. 지금은 호텔국도라는 명칭의 호텔이 자리하고 있다. [2] 앞서 언급한 국도극장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 국도극장의 역사는 영화관 명칭의 변천사를 중심으로 알아볼 수 있다. 지금부터 일제 강점기 서울에 설립된 국도극장의 자세한 역사와 상영된 영화,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활동들에 대해 세세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내용


타임라인으로 보는 국도극장의 역사


국도극장은 역사적으로 변화가 많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아서 아쉬운 문화예술 사적지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국도극장의 시대적인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국도극장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학교문화예술교육 중 '문화'와 '예술' 영역에서 초중등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적 가치를 실현하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춘향전


1923년 일본인 하야가와가 감독한 '춘향전'이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는데, 영화로 만든 '춘향전'의 첫 상영관이었다.[3] 《춘향전》은 본래 정확한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없는 구전문학으로, 조선 숙종 말 혹은 영조 초에 판소리로 불리다가 소설로 정착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소설의 이본(異本)만도 120여 종이나 되고 제목이나 내용이 이본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근대 들어 소설뿐 아니라 연극, 영화 등으로도 개작되어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기생 딸이라는 미천한 신분의 춘향과 양반 자제 몽룡의 계급을 초월한 사랑은 유교적 신분질서가 엄격하던 시대에 서민들의 신분상승 욕망을 대리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남원부사로 새로 부임하여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고 온갖 만행을 일삼는 변학도의 모습은 부패한 사회를 조롱하는 것이었으며, 한양에서 과거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돌아온 이몽룡은 당시 민중들이 갈구하던 새로운 위정자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4] 이러한 맥락에서 학교문화예술교육 관점 상 큰 의의가 있다고 판단되어 <춘향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그 외 여러 상영작들은 간략히 소개하였다.

춘향전(1923)


하야카와 마쓰지로의 춘향전(1923)

1923년 무성영화 시기 일본인 감독 하야카와 마쓰지로(早川孤舟)가 만든 것이 최초의 <춘향전>이었다. 1923년 제작된 영화 <춘향전>은 당시 인기변사였던 김조성과 개성 기생 한명옥이 이몽룡과 춘향 역으로 출연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완전한 형태의 영화(이전에는 ‘연쇄극’이라 하여, 연극 공연 중에 짧은 필름을 상영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배우를 캐스팅하고 이야기의 실제 배경인 남원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했을 뿐, 영화 제작, 감독 및 각본, 촬영 등 주요 역할은 일본인 스태프들이 담당했다. [5]

춘향전(1955)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

1955년 <춘향전>은 이규환 감독이 전쟁 중에 시나리오를 썼고 1955년 1월에 개봉하여 서울 관객 18만 명(당시 서울인구 72만 명)이라는 흥행 신기록을 수립했다.[6]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해방 후 처음 한국인 감독(이규환)이 연출한 또 다른 버전의 '춘향전'도 1955년 국도극장에 내걸려, 관객 12만 명을 기록했다.[7] “훌륭한 것, 볼만한 것만 만들어내면 국산영화계도 함부로 대한민국 사람들로부터 괄시를 받지 않으리라”(《한국일보》 1955년 12월 22일 기사)는 기대와 흥분을 낳았다. <춘향전>의 대성공은 이후 사극영화를 필두로 한국영화 제작 열풍을 불러왔고, <춘향전>은 명실상부 한국영화 중흥의 교두보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영화의 필름은 아쉽게도 유실되었다.[8]

그 외 상영작들


미워도다시한번(1968) 설명
미워도다시한번.jpg
정소영 감독이 연출한 '미워도 다시 한 번'은 1968년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370,005명의 관객을 기록했다.[9]

별들의고향(1974) 설명
별들의고향.jpg
이장호 감독의 데뷔작으로, 1974년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464,308명의 관객을 기록했다.[10]


국도극장의 현재


국도극장을 주제로 한 영화


영화 '국도극장' 포스터 설명
국도극장영화.jpg
영화에서 만년 고시생 기태(이동휘 분)는 사법고시가 폐지되면서 고향 벌교로 돌아온다. 유배지로 향하듯 돌아온 고향엔 반가운 사람도, 반겨주는 사람도 없다. 형만 챙기는 엄마, 성과 없이 돌아왔다며 무시하는 형, 서울에서 뭐라도 됐을 줄 알았다는 친구. 갈 곳도 정붙일 곳도 없어진 기태의 인생은 '실패'라는 이름 앞에 멈춰져 있다. 마땅하지 않지만 생계를 위해 기태가 매표원으로 일하게 된 곳이 바로 '국도극장'이다. 서울 을지로4가가 아니라 벌교에 있는 이 가상의 영화관(과거 금융조합 건물이었다가 지금은 전시장으로 사용되는 한 문화재 건물에서 촬영했다)은 영화에서 재개봉관으로 나온다. 신작이 아니라 개봉한 지 꽤 된 영화들을 상영하는, 이 작고 낡은 영화관이 기태의 직장이 됐다. 엄마는 치매를 앓고 형은 엄마를 맡기고 이민을 떠났다. 한 모금 담배가 유일한 위로인 기태의 삶에 영화관 간판장이 오씨, 그리고 가수 지망생인 동창 영은이 기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다가온다.[11]

영화 '국도극장' 예고편 설명
영화 '국도극장' 메인 예고편[12]


국도극장 터 표석


국도극장 터 표석


국도극장 터 표석은 2003년 설치되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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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극장은 1936년 11월에 동양풍(東洋風)을 가미한 르네상스식의 황금좌로(黃金座) 개관하였다. 한국 영화 80년과 운명을 함께 해 온 이 극장은 1948년 국도극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극장은 광복 이후 ‘춘향전’ ‘미워도 다시한번’ 등 한국 영화 상영 중심지로서 영화인과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1999년 10월 30일에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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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도극장 터 표석 원문>[14]



하지만, 이 극장이 '국도극장'으로 명칭이 바뀐 올바른 년도는 1948년이 아닌 1946년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아래와 같이 수정되는 것이 올바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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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극장은 1936년 11월에 동양풍(東洋風)을 가미한 르네상스식의 황금좌 (黃金座)로 개관하였다. 한국 영화 80년과 운명을 함께 해 온 이 극장은 1946년 국도극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극장은 광복 이후 ‘춘향전’ ‘미워도 다시 한번’ 등 한국영화 상영의 중심지로서 영화인과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1999년 10월 30일에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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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도극장 터 표석 수정 권고문>



현재 국도극장 터 표석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4가 310번지에 위치해있으며, 이는 국도극장이 철거된 후 세워진 국도호텔 입구 옆과 같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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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주석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