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선생 묘 일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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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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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목은(牧隱) 이색 선생(1328-1396)은 고려 말 그의 문하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목은 선생은 가정 이곡 선생과 함창김씨 사이에서 1328년 경북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 호지마을에서 태어났다. 1341년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왕4)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2년(공민왕1) 전제(田制)개혁, 국방개혁,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건의문을 올린 바 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81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원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1389년(공민왕1)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창왕(昌王)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이 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장단(長湍), 함창, 청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1395년(태조4)에 한산벽()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경기도 여주군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 향년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선생은 무학대사가 정한 기산면 기린봉 아래 가지현에 묻혔다. 이곳은 풍수적으로 기린이 아래로 내려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기린하전(麒麟下田) 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이색 선생의 묘는 원형이고 묘비가 있다. 묘 앞에는 망주석, 문인석, 석마상이 각각 2개씩 양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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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묘역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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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은 경상북도 영해군(현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2세 때 아버지 이곡(李穀)의 고향인 서천군 한산면 고촌리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숭정사(崇井寺), 일광사(日光寺)에서 공부하였고, 18세 때는 천방산 대둔사(大屯寺)에서 공부하였다. 1353년(공민왕 2)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고려 공민왕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학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또한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길재(吉再) 등 뛰어난 제자를 길러냈다. 조선 건국 후에는 조정에 머물라는 이성계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낙향하여 전국을 유람하던 중에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 생을 마쳤다. 이색의 셋째 아들인 이종선(李種善)이 한산 이씨 문중 묘역이 있는 이곳으로 모셔와 장사를 지냈다.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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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선생 묘 일원은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인 이색(李穡, 1328~1396)의 묘와 그 일대의 유적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색은 고려후기의 학자이자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있는 만권당(萬卷堂)에서 유학한 것으로 유명한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제자이다. 또한 조선 건국을 둘러싸고 대립한 것으로 유명한 온건개혁파인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급진개혁파인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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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의 묏자리는 기린이 내려와 풀을 뜯어 먹는 기린하전(麒麟下田)의 명당으로 전해지며. 조선 시대의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였던 무학대사가 골라준 자리라고 한다.  
조선 건국 후 고려시대의 충신들은 조선의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세 사람인 삼은(三隱) 중의 하나인 목은(牧隱)이 바로 이색이다. 이색의 묘는 원형으로 무덤 앞에는 상석(上席)·망주석(望柱石) 2기·문인상(文人像) 2기·마상(馬像) 2기가 있으며 상석의 오른편에 세워진 비석 앞면에는 '목은선생 이색지묘(牧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씌여져 있다. 이 비석은 이색의 묘표는 1433년 손자 맹균(孟畇)이 찬했고, 목은 배위인 안동권씨 묘비는 1404년 권근(權近)이 지었으며, 신도비는 하륜(河崙)이 지었고 공부(孔俯)가 썼으며, 음기(陰記)는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12대손 수경(壽慶)이 쓰고 김수항(金壽恒)이 전(篆)을 하였고 1666년(현종 7) 후손 등이 건립한 것이다.
 
이색의 묘자리는 풍수지리에 의하면 기린하전(麒麟下田)에 해당하는 것으로 무학대사가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 일원의 건물에는 사우(祠宇), 강당, 진수당, 목은영당(牧隱影堂), 재실(齋室), 전사청, 수호사(守護舍), 내삼문, 외삼문, 이색신도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27), 이종덕효행비각 등이 있다. 사우는 3칸이며, 이색과 이곡(李穀)을 주벽으로 이종학, 이자, 이개, 이종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재실인 진수당은 4칸이며, 유림의 화합이나 학문 토론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3칸의 진사청은 제구(祭具)를 보관하고 있고, 수호사는 관리인의 숙소로 사용한다. 목은영당은 1710년(숙종 36)에 지어졌으며, 이색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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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 문인상, 석마가 각각 2기씩 있다. 상석 오른쪽에는 ‘목은선생 이색지묘(牧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쓴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역의 남동쪽에는 이색을 기리기 위해 1666년(현종 7)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이색을 비롯한 한산 이씨의 선현을 모신 효정사가 문헌서원 안에 있다.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묘이다.  
 
  
이색은 오늘날의 경상북도 영덕 출신으로, 공민왕 2년(1353)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고려 공민왕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며 최고의 재상 자리에 올랐으며, 대학자로도 이름을 떨쳐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정도전(鄭道傳, 1342~1398), 권근(權近, 1352~1409) 등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다. 조선 건국 후에는 조정에 머물라는 이성계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낙향하던 중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 생을 마쳤다. 이색의 셋째 아들인 이종선(李種善, 1368~1438)이 한산이씨 문중 묘역이 있는 이곳으로 모셔와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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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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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b of Yi Saek'''
  
이색의 묘가 자리한 곳은 기린이 아래로 내려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기린하전(麒麟下田) 형국의 명당으로, 조선시대의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였던 무학대사(1327~1405)가 점지한 자리라고 한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 문인상, 석마가 각각 2기씩 있다. 상석 오른쪽에는 ‘목은선생 이색지묘(牧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쓴 묘표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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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 tomb of Yi Saek (1328-1396, pen name: Mogeun), a civil official and scholar who lived at the turn of the Goryeo (918-1392) and Joseon (1392-1910) periods.
  
묘역의 남동쪽에는 이색을 기리기 위해 현종 7년(1666)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이색을 비롯한 한산이씨의 선현들을 모신 문헌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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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 Saek was born at his maternal grandparents’ house in Yeonghae (today’s Yeongdeok, Gyeongsangbuk-do Province), but moved shortly thereafter to Seocheon, which was his father’s hometown. In 1353, he placed first in the state examination and was given an official post. He was renowned for his steadfast loyalty to the Goryeo dynasty during the turbulent period between the reform of King Gongmin (r. 1351-1374)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He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served as prime minister, became an esteemed eminent scholar, and raised excellent students such as Jeong Mong-ju (1337-1392), Jeong Do-jeon (1342-1398), and Gwon Geun (1352-1409).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he refused the requests of King Taejo (r. 1392-1398) that he serve in the central government and traveled around the country until his death at Silleuksa Temple in Yeoju. He was buried here at the family cemetery of the Hansan Yi Clan by his third son, Yi Jong-seon (1368-1438).
  
====자문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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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rding to Korean feng shui principles, the site of Yi Saek’s tomb is considered to have auspicious topography that resembles the mythical creature ''girin'' feeding on grass. The location is said to have been picked by the Buddhist monk Muhak (1327-1405) who was known for his skill in feng shui.
# 분야별 자문위원 1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묘이다.
 
이색은 경상북도 영덕 출신으로, 공민왕 2년(1353)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고려 공민왕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충신으로 유명하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처 최고의 재상 자리에 올랐으며, 대학자로도 이름을 떨쳐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정도전(鄭道傳, 1342~1398), 권근(權近, 1352~1409) 등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다. 조선 건국 후에는 조정에 머물라는 이성계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낙향하던 중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 생을 마쳤다. 이색의 셋째 아들인 이종선(李種善, 1368~1438)이 한산이씨 문중 묘역이 있는 이곳으로 모셔와 장사 지냈다.
 
이색의 묘가 자리한 곳은 기린이 아래로 내려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기린하전(麒麟下田) 형국의 명당으로, 조선시대의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였던 무학대사(1327~1405)가 점지한 자리라고 한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 문인상, 석마가 각각 2기씩 있다. 상석 오른쪽에는 ‘목은선생 이색지묘(牧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쓴 묘표가 세워져 있다.
 
묘역의 남동쪽에는 이색을 기리기 위해 현종 7년(1666)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이색을 비롯한 한산이씨의 선현들을 모신 문헌서원이 있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이색의 묘가 자리한 곳은 기린이 아래로 내려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기린하전(麒麟下田) 형국의 명당으로, 조선시대의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였던 무학대사(1327~1405)가 점지한 자리라고 한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 문인상, 석마가 각각 2기씩 있다. 상석 오른쪽에는 ‘목은선생 이색지묘(牧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쓴 묘표가 세워져 있다.
 
#*오류사항지적: 위 강조 표시 문장이 길다. 두 문장으로
 
#*수정내용제시: 이색의 묘가 자리한 곳은 기린이 아래로 내려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기린하전(麒麟下田) 형국의 명당이다. 조선시대의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였던 무학대사(1327~1405)가 점지한 자리라고 한다.
 
  
====2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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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ront of the earthen burial mound, there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including a tombstone, a spirit seat, a table, an incense table, a pair of pillars, a pair of civil officials, and a pair of horses. To the southeast of the tomb is a stele erected in 1666 to commemorate the life and achievements Yi Saek, as well as Munheonseowon Confucian Academy, which commemorates eight Confucian scholars of the Hansan Yi Clan, including Yi Saek.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묘이다.  
 
  
이색은 경상북도 영덕 출신으로, 공민왕 2년(1353)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고려 공민왕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최고의 재상 자리에 올랐으며, 대학자로도 이름을 떨쳐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정도전(鄭道傳, 1342~1398), 권근(權近, 1352~1409) 등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다. 조선 건국 후에는 조정에 머물라는 이성계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낙향하던 중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 생을 마쳤다. 이색의 셋째 아들인 이종선(李種善, 1368~1438)이 한산이씨 문중 묘역이 있는 이곳으로 모셔와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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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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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색(1328-1396, 호: 목은)의 묘이다.
  
이색의 묘가 자리한 곳은 기린이 아래로 내려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기린하전(麒麟下田) 형국의 명당이다. 조선시대의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였던 무학대사(1327~1405)가 점지한 자리라고 한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 문인상, 석마가 각각 2기씩 있다. 상석 오른쪽에는 ‘목은선생 이색지묘(牧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쓴 묘표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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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은 외가인 영해군(지금의 경상북도 영덕) 출신으로, 2세 때 아버지의 고향인 서천으로 이주하였다. 1353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대학자로도 이름을 떨쳐 정몽주(1337-1392), 정도전(1342-1398), 권근(1352-1409) 등 뛰어난 제자를 길러냈다. 조선 건국 후에는 조정에 머물라는 태조(재위 1392-1398)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전국을 유람하던 중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 생을 마쳤다. 이색의 셋째 아들인 이종선(1368-1438)이 한산이씨 문중 묘역이 있는 이곳으로 모셔와 장사 지냈다.
  
묘역의 남동쪽에는 이색을 기리기 위해 현종 7년(1666)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이색을 비롯한 한산이씨의 선현을 모신 문헌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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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의 묘가 자리한 곳은 풍수지리상 기린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형국의 명당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의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였던 무학대사(1327-1405)가 골라준 자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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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앞에는 묘표, 상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 문인상, 석마가 각각 2기씩 있다. 묘역 남동쪽에는 이색을 기리기 위해 1666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이색을 비롯한 한산이씨 선현 8인을 기리는 문헌서원이 있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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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30일 (토) 12:31 기준 최신판

이색 선생 묘 일원
Tomb of Yi Saek
이색 선생 묘 일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이색 선생 묘 일원
영문명칭 Tomb of Yi Saek
한자 李穡 先生 墓 一圓
주소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서원로172번길 35 (영모리)
지정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89호
지정일 1993년 11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150㎡(1필)
웹사이트 이색 선생 묘 일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묘역이다.

이색은 경상북도 영해군(현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2세 때 아버지 이곡(李穀)의 고향인 서천군 한산면 고촌리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에는 고향의 숭정사(崇井寺), 일광사(日光寺)에서 공부하였고, 18세 때는 천방산 대둔사(大屯寺)에서 공부하였다. 1353년(공민왕 2)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고려 공민왕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학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또한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길재(吉再) 등 뛰어난 제자를 길러냈다. 조선 건국 후에는 조정에 머물라는 이성계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낙향하여 전국을 유람하던 중에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 생을 마쳤다. 이색의 셋째 아들인 이종선(李種善)이 한산 이씨 문중 묘역이 있는 이곳으로 모셔와 장사를 지냈다.

이색의 묏자리는 기린이 내려와 풀을 뜯어 먹는 기린하전(麒麟下田)의 명당으로 전해지며. 조선 시대의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였던 무학대사가 골라준 자리라고 한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 문인상, 석마가 각각 2기씩 있다. 상석 오른쪽에는 ‘목은선생 이색지묘(牧隱先生 李穡之墓)’라고 쓴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역의 남동쪽에는 이색을 기리기 위해 1666년(현종 7)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이색을 비롯한 한산 이씨의 선현을 모신 효정사가 문헌서원 안에 있다.

영문

Tomb of Yi Saek

This is the tomb of Yi Saek (1328-1396, pen name: Mogeun), a civil official and scholar who lived at the turn of the Goryeo (918-1392) and Joseon (1392-1910) periods.

Yi Saek was born at his maternal grandparents’ house in Yeonghae (today’s Yeongdeok, Gyeongsangbuk-do Province), but moved shortly thereafter to Seocheon, which was his father’s hometown. In 1353, he placed first in the state examination and was given an official post. He was renowned for his steadfast loyalty to the Goryeo dynasty during the turbulent period between the reform of King Gongmin (r. 1351-1374)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He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served as prime minister, became an esteemed eminent scholar, and raised excellent students such as Jeong Mong-ju (1337-1392), Jeong Do-jeon (1342-1398), and Gwon Geun (1352-1409).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he refused the requests of King Taejo (r. 1392-1398) that he serve in the central government and traveled around the country until his death at Silleuksa Temple in Yeoju. He was buried here at the family cemetery of the Hansan Yi Clan by his third son, Yi Jong-seon (1368-1438).

According to Korean feng shui principles, the site of Yi Saek’s tomb is considered to have auspicious topography that resembles the mythical creature girin feeding on grass. The location is said to have been picked by the Buddhist monk Muhak (1327-1405) who was known for his skill in feng shui.

In front of the earthen burial mound, there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including a tombstone, a spirit seat, a table, an incense table, a pair of pillars, a pair of civil officials, and a pair of horses. To the southeast of the tomb is a stele erected in 1666 to commemorate the life and achievements Yi Saek, as well as Munheonseowon Confucian Academy, which commemorates eight Confucian scholars of the Hansan Yi Clan, including Yi Saek.

영문 해설 내용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색(1328-1396, 호: 목은)의 묘이다.

이색은 외가인 영해군(지금의 경상북도 영덕) 출신으로, 2세 때 아버지의 고향인 서천으로 이주하였다. 1353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대학자로도 이름을 떨쳐 정몽주(1337-1392), 정도전(1342-1398), 권근(1352-1409) 등 뛰어난 제자를 길러냈다. 조선 건국 후에는 조정에 머물라는 태조(재위 1392-1398)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전국을 유람하던 중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 생을 마쳤다. 이색의 셋째 아들인 이종선(1368-1438)이 한산이씨 문중 묘역이 있는 이곳으로 모셔와 장사 지냈다.

이색의 묘가 자리한 곳은 풍수지리상 기린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형국의 명당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의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였던 무학대사(1327-1405)가 골라준 자리라고 한다.

봉분 앞에는 묘표, 상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 문인상, 석마가 각각 2기씩 있다. 묘역 남동쪽에는 이색을 기리기 위해 1666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이색을 비롯한 한산이씨 선현 8인을 기리는 문헌서원이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이색선생_묘_일원 Object 이색 선생 묘 일원
J34-0089-0000 Heritage (충청남도_기념물_제89호)_이색 선생 묘 일원
이색 Actor 이색 1328~1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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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arget Relation
이색선생_묘_일원 이색 isTombOf
이색선생_묘_일원 J34-0089-0000 isDesignatedA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