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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은 반구옹 이굉(伴鷗翁 李肱)이 중종 25년(1530) 경에 처음 지은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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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굉은 고성이씨 가운데 안동에 처음 들어온 이증(李增, 1419~1480)의 손자이고 임청각을 지은 이명(李洺)의 아들이다. 이명은 말년에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으며, 이명은 자신의 여섯째 아들인 이굉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굉은 중종 26년(153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고향에서 자적하였다. 반구정은 안동 지역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고, 이후 숙식하는 선비들이 많아지면서 부속 건물들이 더해지고 규모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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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며 퇴락하여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영조 16년(1740) 이굉의 7대손 이시항(李時沆)이 주도하여 대대적으로 다시 지었고, 이후 고성이씨 문중의 서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원래의 반구정 건물은 1945년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에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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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돌담을 두른 경내에는 반구정, 동재·서재, 장판각, 비각이 있다. 반구정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오른쪽 온돌방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는 앞쪽에 툇마루를 달았다. 비각에는 숙종 26년(1700)에 건립한 ‘고성이씨 삼세유허비’가 있다. 이 비석은 이명, 이굉, 이굉의 아들 이용(李容)까지 3대가 벼슬을 버리고 안동에서 은거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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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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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정, 디지털안동문화대전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01&contents_id=GC02400794 → 원래 반구정 터는 이명이 귀래정(歸來亭) 동편의 수려한 강산을 동경하여 이곳에 정자를 지어 형 이굉(李汯)과 함께 노년을 보낼 것을 기약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한 곳이다. 이명은 형인 이굉을 따라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 형인 이굉은 강 아래에 귀래정을 짓고 이명은 강 건너편 상류에 안동 임청각을 지어 거처하였다. 그러나 강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이굉과 이명은 자주 만나지 못하였다. 그 뒤 반구정은 이명의 아들 이굉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굉 또한 벼슬에 뜻이 없어 안동 지역으로 돌아와 은거하니 반구정은 고성이씨(固城李氏)가 내리 삼세(三世) 동안 벼슬을 그만두고 수양하던 터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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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정,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794 → 원래 반구정 터는 이명이 귀래정(歸來亭) 동편의 수려한 강산을 동경하여 이곳에 정자를 지어 형 이굉(李汯)과 함께 노년을 보낼 것을 기약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한 곳이다. 이명은 형인 이굉을 따라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 형인 이굉은 강 아래에 귀래정을 짓고 이명은 강 건너편 상류에 안동 임청각을 지어 거처하였다. 그러나 강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이굉과 이명은 자주 만나지 못하였다. 그 뒤 반구정은 이명의 아들 이굉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굉 또한 벼슬에 뜻이 없어 안동 지역으로 돌아와 은거하니 반구정은 고성이씨(固城李氏)가 내리 삼세(三世) 동안 벼슬을 그만두고 수양하던 터전이 되었다.
 
* 반구정재사, 경북북부권문화정보센터 http://www.cultureline.kr/html/contents/heritage/03.html?page=12&area=5&type=-1&hc=-2&sk=2&sv=&seq=351 → 처음에는 정자 건물만 있었는데, 당시 안동 유림에서는 이 반구정에서 시회와 향회를 자주 열어 많은 선비가 출입하였다. 이종악(臨淸閣)의 문회계로 이 정자는 문중 자제를 위한 교육 공간이 되어 동재와 서재, 장판각, 주사까지 건축하며 서원의 강학 공간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1700년(숙종 26)에는 이명, 아들 이굉, 손자인 이용(李容)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빈 터만 있었던 것을 1740년(영조 16)에 이굉의 7대손 이시항(李時沆)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수되었으며, 1945년 정자만 소실되어 1946년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재사는 1905년에 중건된 것이다.
 
* 반구정재사, 경북북부권문화정보센터 http://www.cultureline.kr/html/contents/heritage/03.html?page=12&area=5&type=-1&hc=-2&sk=2&sv=&seq=351 → 처음에는 정자 건물만 있었는데, 당시 안동 유림에서는 이 반구정에서 시회와 향회를 자주 열어 많은 선비가 출입하였다. 이종악(臨淸閣)의 문회계로 이 정자는 문중 자제를 위한 교육 공간이 되어 동재와 서재, 장판각, 주사까지 건축하며 서원의 강학 공간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1700년(숙종 26)에는 이명, 아들 이굉, 손자인 이용(李容)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빈 터만 있었던 것을 1740년(영조 16)에 이굉의 7대손 이시항(李時沆)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수되었으며, 1945년 정자만 소실되어 1946년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재사는 1905년에 중건된 것이다.
* 반구정재사, 발길 닿는대로 홀로 거니는 길, 네이버 블로그, 2017.10.26.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1k1&logNo=22112464092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사진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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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정재사, 발길 닿는대로 홀로 거니는 길, 네이버 블로그, 2017.10.26. https://blog.naver.com/a1k1/221124640924 → 사진 확인
 
* 반구정, 안동의 고가 http://www.gotaek.kr/coding/sub1/sub1_2.asp?seq=83&code_area=%BE%C8%B5%BF%B4%EF%B1%C7%BF%AA&gotaek_nm=%B9%DD%B1%B8%C1%A4&type_group=18 → 반구정은 숙부인 이굉이 건립한 귀래정 동쪽에 있으며, 방형의 토담으로 둘러쌓인 일곽은 남향배치된 반구정 앞에 동서재가 놓이고 그 앞에 장판각과 비각이 배치되었다. 재사는 반구정의 동쪽 담 밖에 튼 口자로 남향하여 놓여 있다. 정면 4칸중 가운데 2칸 마루방을 두고 양쪽에 1칸 온돌방을 들인 후 전면에 반칸규모로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 반구정, 안동의 고가 http://www.gotaek.kr/coding/sub1/sub1_2.asp?seq=83&code_area=%BE%C8%B5%BF%B4%EF%B1%C7%BF%AA&gotaek_nm=%B9%DD%B1%B8%C1%A4&type_group=18 → 반구정은 숙부인 이굉이 건립한 귀래정 동쪽에 있으며, 방형의 토담으로 둘러쌓인 일곽은 남향배치된 반구정 앞에 동서재가 놓이고 그 앞에 장판각과 비각이 배치되었다. 재사는 반구정의 동쪽 담 밖에 튼 口자로 남향하여 놓여 있다. 정면 4칸중 가운데 2칸 마루방을 두고 양쪽에 1칸 온돌방을 들인 후 전면에 반칸규모로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8  固城 李氏 臨淸閣 李명, 주간한국, 2006.12.10  https://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612/wk2006121022260137070.htm →  10대손에 이르러 이원(李原, 1368-1429)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좌의정을 지냈을 뿐 아니라 청백리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처남이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의 여섯째아들에 이증(李增)이란 이가 영산현감을 지내다 안동으로 낙향했다. 안동의 고성 이씨 입향조인 이증은 당시 지역을 대표하던 12인과 함께 유향계를 조직해 향촌사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증의 셋째아들이 임청각 이명이다. 이명의 여섯째아들인 반구옹(泮鷗翁) 이굉(李肱)은 부친인 임청각의 유지를 받들어 집을 맡았다. 이는 임청각 재세시‘여섯째아들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여섯째집이 잘 된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임청각의 가세(家勢)가 좋았다.  
 
*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8  固城 李氏 臨淸閣 李명, 주간한국, 2006.12.10  https://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612/wk2006121022260137070.htm →  10대손에 이르러 이원(李原, 1368-1429)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좌의정을 지냈을 뿐 아니라 청백리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처남이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의 여섯째아들에 이증(李增)이란 이가 영산현감을 지내다 안동으로 낙향했다. 안동의 고성 이씨 입향조인 이증은 당시 지역을 대표하던 12인과 함께 유향계를 조직해 향촌사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증의 셋째아들이 임청각 이명이다. 이명의 여섯째아들인 반구옹(泮鷗翁) 이굉(李肱)은 부친인 임청각의 유지를 받들어 집을 맡았다. 이는 임청각 재세시‘여섯째아들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여섯째집이 잘 된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임청각의 가세(家勢)가 좋았다.  

2021년 5월 24일 (월) 00:02 판


반구정 재사
반구정 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반구정 재사
한자 伴鷗亭 齋舍
주소 경북 안동시 옹정골길 81-7 (정상동)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8호
지정일 1992년 7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3동
웹사이트 반구정 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임청각(臨淸閣)을 지은 이명(李洺)의 여섯째 아들 반구옹(伴鷗翁) 이굉(李肱)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1530년대 초기로 추정된다. 당시 안동 유림에서는 이 반구정에서 시회와 향회를 자주 열었다. 그래서 많은 선비들이 출입하게 되고, 또한 숙식하는 유생들이 많게 되자 동․서재(東․西齋)까지 지었다. 여기에다 장판각, 주사(廚舍)까지 지으면서 서원의 강학공간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이굉의 아들 어은(漁隱) 이용(李容) 역시 이 곳에 돌아와 은거하니 삼대(三代)가 은둔한 곳이 되었다. 조선 숙종(肅宗) 26년(1700)에 이를 기리어 ‘고성이씨 삼세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빈터만 있던 것을 영조(英祖) 16년(1740)에 중건하였으며, 1945년에 정자가 소실되어 1946년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재사는 1905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수정 국문

초고

반구정은 반구옹 이굉(伴鷗翁 李肱)이 아버지 이명(李洺)의 뜻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온 후 지은 정자이다. 조선 중종 25년(1530) 경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며, 건물의 이름은 이굉의 호를 따서 붙였다.

이명은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인 이증(李增, 1419-1480)의 아들로, 말년에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임청각(臨淸閣)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이명은 자신의 여섯째 아들인 이굉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에 이굉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반구정은 안동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고, 이후 숙식하는 유생들이 많아지자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전란 등을 거치면서 퇴락하여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영조 16년(1740) 이굉의 7대손 이시항(李時沆)이 주도하여 대대적으로 다시 지었고, 이후 고성이씨의 문중 서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반구정이 가장 위쪽에 있고 그 앞에 동서재와 장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반구정은 1945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1946년에 고쳐 세웠다. 겹집 형태의 건물은 왼쪽 후면에는 온돌방이, 중간에는 마루방이 있으며, 온돌방이 있는 오른쪽을 제외한 전면에 툇마루를 달고, 건물 뒷면에는 쪽마루를 깔았다.

비각에는 조선 숙종(肅宗) 26년(1700)에 건립한 ‘고성이씨 삼세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은 이명과 이굉, 이굉의 아들 이용(李容)까지 3대가 노년을 안동에서 은거하며 보낸 사실을 기리며 세운 것이다.

반구정의 동쪽 담 밖에 있는 재사는 1905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 반구정의 동쪽 담 밖에 있는 재사는 1905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 재사 건물에 대한 설명 찾을 수 없어 관련 자료 추가 수집 필요함.
  • 사실 관계 확인 필요 -> 정자 앞에 동서재 등의 부속 건물들이 생긴 시점이 불분명하며, 반구정이 서원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이 1740년 중수 이전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있음. 그러나 기존의 문안들에 의하면 중수 이전에 이미 모든 구조를 갖추었을 수도 있으므로 정보 확인 필요함. / ‘왜’ 퇴락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어 시기적 흐름에 기인해 ‘전란 등을 거치며’라는 문장을 추가로 삽입하였으나 이 역시 확인 후 삭제해도 무방할 듯함.
  • 이굉의 아들 이용(李容)도 노년에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1570년 어은정(漁隱亭)을 짓고 은거했다고 한다. 어은정이라는 정자명은 이용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어은’이란 아호에는 이용의 할아버지인 이명과 아버지 이굉이 벼슬을 버리고 경상북도 안동에 임청각과 반구정을 지어 유유자적 하였듯이, 이용도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강호에서 물고기 잡으며 은일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 인근에는/반구정 서쪽 방향에는 이명의 형인 이굉(李浤, 1441-1516)이 건립한 귀래정(歸來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이 있다.

1차 수정

반구정은 반구옹 이굉(伴鷗翁 李肱)이 중종 25년(1530) 경에 처음 지은 정자이다.

이굉은 고성이씨 가운데 안동에 처음 들어온 이증(李增, 1419~1480)의 손자이고 임청각을 지은 이명(李洺)의 아들이다. 이명은 말년에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으며, 이명은 자신의 여섯째 아들인 이굉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굉은 중종 26년(153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고향에서 자적하였다. 반구정은 안동 지역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고, 이후 숙식하는 선비들이 많아지면서 부속 건물들이 더해지고 규모가 확대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퇴락하여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영조 16년(1740) 이굉의 7대손 이시항(李時沆)이 주도하여 대대적으로 다시 지었고, 이후 고성이씨 문중의 서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원래의 반구정 건물은 1945년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에 다시 세웠다.

낮은 돌담을 두른 경내에는 반구정, 동재·서재, 장판각, 비각이 있다. 반구정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오른쪽 온돌방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는 앞쪽에 툇마루를 달았다. 비각에는 숙종 26년(1700)에 건립한 ‘고성이씨 삼세유허비’가 있다. 이 비석은 이명, 이굉, 이굉의 아들 이용(李容)까지 3대가 벼슬을 버리고 안동에서 은거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반구정 Place 반구정
이굉 Actor 이굉(李肱)
이명 Actor 이명(李洺) 이굉의 아버지. 임청각 지음
이증 Actor 이증(李增, 1419-1480) 이명의 아버지.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이시항 Actor 이시항(李時沆) 이굉의 7대손. 중건자
1945년_화재 Event 1945년_화재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에 중건함.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Object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이명-이굉-이용 3대가 은거하는 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
이용 Actor 이용(李容) 이굉의 아들.
어은정 Place 어은정 이용이 세운 정자.
임청각 Place 임청각 이명이 세움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반구정 이굉 constructor
반구정 이굉 isNamesakeOf
이증 이명 hasSon
이명 이굉 hasSon
이굉 이용 hasSon
어은정 이용 constructor
이굉 이시항 hasDescendant
반구정 이시항 renovator
반구정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hasPart
반구정 1945년_화재 isDamagedBy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이굉 commemorates / isSteleOf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이명 commemorates / isSteleOf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이용 commemorates / isSteleOf
임청각 이명 constructor

참고자료

  • 반구정,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794 → 원래 반구정 터는 이명이 귀래정(歸來亭) 동편의 수려한 강산을 동경하여 이곳에 정자를 지어 형 이굉(李汯)과 함께 노년을 보낼 것을 기약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한 곳이다. 이명은 형인 이굉을 따라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 형인 이굉은 강 아래에 귀래정을 짓고 이명은 강 건너편 상류에 안동 임청각을 지어 거처하였다. 그러나 강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이굉과 이명은 자주 만나지 못하였다. 그 뒤 반구정은 이명의 아들 이굉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굉 또한 벼슬에 뜻이 없어 안동 지역으로 돌아와 은거하니 반구정은 고성이씨(固城李氏)가 내리 삼세(三世) 동안 벼슬을 그만두고 수양하던 터전이 되었다.
  • 반구정재사, 경북북부권문화정보센터 http://www.cultureline.kr/html/contents/heritage/03.html?page=12&area=5&type=-1&hc=-2&sk=2&sv=&seq=351 → 처음에는 정자 건물만 있었는데, 당시 안동 유림에서는 이 반구정에서 시회와 향회를 자주 열어 많은 선비가 출입하였다. 이종악(臨淸閣)의 문회계로 이 정자는 문중 자제를 위한 교육 공간이 되어 동재와 서재, 장판각, 주사까지 건축하며 서원의 강학 공간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1700년(숙종 26)에는 이명, 아들 이굉, 손자인 이용(李容)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빈 터만 있었던 것을 1740년(영조 16)에 이굉의 7대손 이시항(李時沆)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수되었으며, 1945년 정자만 소실되어 1946년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재사는 1905년에 중건된 것이다.
  • 반구정재사, 발길 닿는대로 홀로 거니는 길, 네이버 블로그, 2017.10.26. https://blog.naver.com/a1k1/221124640924 → 사진 확인
  • 반구정, 안동의 고가 http://www.gotaek.kr/coding/sub1/sub1_2.asp?seq=83&code_area=%BE%C8%B5%BF%B4%EF%B1%C7%BF%AA&gotaek_nm=%B9%DD%B1%B8%C1%A4&type_group=18 → 반구정은 숙부인 이굉이 건립한 귀래정 동쪽에 있으며, 방형의 토담으로 둘러쌓인 일곽은 남향배치된 반구정 앞에 동서재가 놓이고 그 앞에 장판각과 비각이 배치되었다. 재사는 반구정의 동쪽 담 밖에 튼 口자로 남향하여 놓여 있다. 정면 4칸중 가운데 2칸 마루방을 두고 양쪽에 1칸 온돌방을 들인 후 전면에 반칸규모로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8 固城 李氏 臨淸閣 李명, 주간한국, 2006.12.10 https://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612/wk2006121022260137070.htm → 10대손에 이르러 이원(李原, 1368-1429)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좌의정을 지냈을 뿐 아니라 청백리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처남이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의 여섯째아들에 이증(李增)이란 이가 영산현감을 지내다 안동으로 낙향했다. 안동의 고성 이씨 입향조인 이증은 당시 지역을 대표하던 12인과 함께 유향계를 조직해 향촌사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증의 셋째아들이 임청각 이명이다. 이명의 여섯째아들인 반구옹(泮鷗翁) 이굉(李肱)은 부친인 임청각의 유지를 받들어 집을 맡았다. 이는 임청각 재세시‘여섯째아들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여섯째집이 잘 된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임청각의 가세(家勢)가 좋았다.
  • [귀래정(안동)] 항목 참조 → 반구정은 숙부인 이굉이 건립한 귀래정 동쪽에 있으며, 방형의 토담으로 둘러쌓인 일곽은 남향배치된 반구정 앞에 동서재가 놓이고 그 앞에 장판각과 비각이 배치되었다. ; 귀래정은 조선시대의 문신 이굉(李浤, 1441-1516)이 1513년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이굉은 고성이씨의 안동 입향조인 이증(1419-1480)의 둘째 아들이다. / 이증의 둘째 아들 이름과 이명의 여섯째 아들 이름이 ‘이굉’으로 같으나 한자가 다르며, 두 사람은 백부와 조카 사이. 귀래정 동쪽 방향에 반구정이 있다고 함.
  • [임청각] 항목 참조 → 이명은 조선 초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했던 선조의 공훈을 인정받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갔으며, 갑자사화 당시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이 즉위한 이후 풀려나 의흥(지금의 군위 지역)의 지방관을 지냈다. 이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 임청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