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반구정 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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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임청각(臨淸閣)을 지은 이명(李洺)의 여섯째 아들 반구옹(伴鷗翁) 이굉(李肱)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1530년대 초기로 추정된다. 당시 안동 유림에서는 이 반구정에서 시회와 향회를 자주 열었다. 그래서 많은 선비들이 출입하게 되고, 또한 숙식하는 유생들이 많게 되자 동․서재(東․西齋)까지 지었다. 여기에다 장판각, 주사(廚舍)까지 지으면서 서원의 강학공간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이굉의 아들 어은(漁隱) 이용(李容) 역시 이 곳에 돌아와 은거하니 삼대(三代)가 은둔한 곳이 되었다. 조선 숙종(肅宗) 26년(1700)에 이를 기리어 ‘고성이씨 삼세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빈터만 있던 것을 영조(英祖) 16년(1740)에 중건하였으며, 1945년에 정자가 소실되어 1946년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재사는 1905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수정 국문

초고

반구정은 반구옹 이굉(伴鷗翁 李肱)이 아버지 이명(李洺)의 뜻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온 후 지은 정자이다. 조선 중종 25년(1530) 경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며, 건물의 이름은 이굉의 호를 따서 붙였다.

이명은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인 이증(李增, 1419-1480)의 아들로, 말년에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임청각(臨淸閣)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이명은 자신의 여섯째 아들인 이굉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에 이굉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반구정은 안동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고, 이후 숙식하는 유생들이 많아지자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전란 등을 거치면서 퇴락하여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영조 16년(1740) 이굉의 7대손 이시항(李時沆)이 주도하여 대대적으로 다시 지었고, 이후 고성이씨의 문중 서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반구정이 가장 위쪽에 있고 그 앞에 동서재와 장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반구정은 1945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1946년에 고쳐 세웠다. 겹집 형태의 건물은 왼쪽 후면에는 온돌방이, 중간에는 마루방이 있으며, 온돌방이 있는 오른쪽을 제외한 전면에 툇마루를 달고, 건물 뒷면에는 쪽마루를 깔았다.

비각에는 조선 숙종(肅宗) 26년(1700)에 건립한 ‘고성이씨 삼세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은 이명과 이굉, 이굉의 아들 이용(李容)까지 3대가 노년을 안동에서 은거하며 보낸 사실을 기리며 세운 것이다.

반구정의 동쪽 담 밖에 있는 재사는 1905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 반구정의 동쪽 담 밖에 있는 재사는 1905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 재사 건물에 대한 설명 찾을 수 없어 관련 자료 추가 수집 필요함.
  • 사실 관계 확인 필요 -> 정자 앞에 동서재 등의 부속 건물들이 생긴 시점이 불분명하며, 반구정이 서원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이 1740년 중수 이전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있음. 그러나 기존의 문안들에 의하면 중수 이전에 이미 모든 구조를 갖추었을 수도 있으므로 정보 확인 필요함. / ‘왜’ 퇴락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어 시기적 흐름에 기인해 ‘전란 등을 거치며’라는 문장을 추가로 삽입하였으나 이 역시 확인 후 삭제해도 무방할 듯함.
  • 이굉의 아들 이용(李容)도 노년에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1570년 어은정(漁隱亭)을 짓고 은거했다고 한다. 어은정이라는 정자명은 이용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어은’이란 아호에는 이용의 할아버지인 이명과 아버지 이굉이 벼슬을 버리고 경상북도 안동에 임청각과 반구정을 지어 유유자적 하였듯이, 이용도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강호에서 물고기 잡으며 은일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 인근에는/반구정 서쪽 방향에는 이명의 형인 이굉(李浤, 1441-1516)이 건립한 귀래정(歸來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이 있다.

1차 수정

반구정은 반구옹 이굉(伴鷗翁 李肱)이 중종 25년(1530) 경에 처음 지은 정자이다.

이굉은 고성이씨 가운데 안동에 처음 들어온 이증(李增, 1419~1480)의 손자이고 임청각을 지은 이명(李洺)의 아들이다. 이명은 말년에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으며, 이명은 자신의 여섯째 아들인 이굉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굉은 중종 26년(153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고향에서 자적하였다. 반구정은 안동 지역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고, 이후 숙식하는 선비들이 많아지면서 부속 건물들이 더해지고 규모가 확대되었다.

세월이 흐르며 퇴락하여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영조 16년(1740) 이굉의 7대손 이시항(李時沆)이 주도하여 대대적으로 다시 지었고, 이후 고성이씨 문중의 서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원래의 반구정 건물은 1945년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에 다시 세웠다.

낮은 돌담을 두른 경내에는 반구정, 동재·서재, 장판각, 비각이 있다. 반구정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고, 오른쪽 온돌방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는 앞쪽에 툇마루를 달았다. 비각에는 숙종 26년(1700)에 건립한 ‘고성이씨 삼세유허비’가 있다. 이 비석은 이명, 이굉, 이굉의 아들 이용(李容)까지 3대가 벼슬을 버리고 안동에서 은거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