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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릉(익산 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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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릉(익산 쌍릉)
익산 쌍릉,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대왕릉(익산 쌍릉)
한자 大王陵(益山 雙陵)
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 6-13
지정번호 사적 제87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왕실무덤/고대
시대 백제
수량/면적 55,534㎡
웹사이트 익산 쌍릉,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무덤 2기 가운데 북쪽 봉분이 큰 것은 대왕릉이라고 불렸다. 무덤방은 화강암을 매끈하게 다듬어서 만든 백제 후기 굴식돌방이다.

둥그런 봉분은 지름이 25m 정도이며, 높이가 3.8m이다. 무덤방은 길이가 4.0m, 너비가 1.75m, 높이가 2.25m이다. 백제왕릉이라고 하는 부여 능산리 굴식돌방 무덤과 같은 모양인데, 길이가 3.26m로 능산리에서 가장 큰 동하총보다도 크다. 남면 중앙에 널길*이 있는데 널문*으로 닫혀있었다. 무덤방 바닥 한가운데에 길이가 2.71m, 너비가 0.85m, 높이가 0.25m인 관대*가 만들어져 있다. 2017년 조사에서 판축 기법으로 봉분을 쌓은 것을 확인했는데, 백제 고분 가운데 첫 사례였다. 대왕릉은 무덤방의 모양이나 크기, 인골 분석을 통해 백제 30대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한다.


  • 널길(羨道) : 고분의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
  • 널문(羨門) : 시신을 안치한 방 입구
  • 관대(棺臺) : 무덤 안에 시신을 넣은 관을 얹어놓던 평상이나 낮은 대(널받침)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북쪽에 있는 이 봉분은 7세기에 만들어진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이다.

규모가 더 커서 대왕릉으로 불리며, 2017년의 발굴조사 결과 봉분의 규모는 지름은 약 25m, 높이는 약 3.8m로 밝혀졌다.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무덤방의 규모는 길이 4m, 폭 약 1.8m, 높이 약 2.3m이며, 중앙에 관을 올리기 위한 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봉분은 건축물을 지을 때 주로 이용하는 기법을 활용해, 진흙과 모래질 점토를 번갈아 쌓아 올렸다. 이러한 축조 방식은 백제의 고분 중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사례이다.

한편, 2017년의 발굴조사 때 관 받침 상부에서 사람의 뼈 102개체가 담긴 나무 상자가 발견되었는데, 이 뼈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분석 결과 ‘620~659년 사이에 숨진 60대 전후의 남성’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에 따라 이 무덤이 익산에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고자 했던 백제의 제30대 임금 무왕(재위 600-641)의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참고자료

  • 백제왕도 핵심유적 익산지역 발굴조사 마스터플랜 수립 보고서, 문화재청, 2020.12. -> 2017년 100년 만에 다시 실시된 쌍릉 발굴조사를 통해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대왕릉은 봉분의 크기가 기존에는 30m로 알려져 있었으나, 조사결과 동서 약 25m, 남북 약 28m로 확인되었다. 봉분 높이는 동쪽 기반층을 기준으로 약 380㎝ 내외로 확인되었다. 대왕릉의 봉분 축조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당시 건축기술에 이용되던 판축기법을 접목시켜 조성한 점이다. 이는 보고된 횡혈식석실묘 가운데 유일한 것으로서, 소왕릉 역시 동일한 기법으로 봉분을 성토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판축기법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 때 조성된 미륵사지와 제석사지 등지에서도 확인된 바 있어 시기적인 연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 특징적인 것은 현실 내 관대 상부에 목함이 있었으며, 목함 내부에서는 한 사람분의 인골 102개체가 발견되었다. 카톨릭대학교 의대 응용해부학연구소 팀의 분석결과, 성별은 남성, 나이는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으로 판명되어, 그 주인공이 무왕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 신라서 온 선화공주는 익산 쌍릉에 없었다, 한겨레, 2019.9.19.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10100.html -> 주목되는 것은 소왕릉이 지난해 발굴된 대왕릉을 그대로 빼어닮은 왕릉급의 얼개임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소왕릉의 봉분은 지름 12m, 높이 2.7m 정도다. 암갈색 점질토와 적갈색 모래질점토를 번갈아 쌓아올린 판축기법을 썼는데, 대왕릉 판축기법과도 유사하다. 석실은 백제 말기 사비시대 왕릉의 전형적인 얼개인 육각형 단면의 굴식돌방(횡혈식석실)이다. 길이 340㎝, 폭 128㎝, 높이 176㎝로 대왕릉의 석실 규모(길이 400㎝, 폭 175㎝, 높이 225㎝)보다 작으나 측벽 2매, 바닥석 3매, 덮개돌 2매, 후벽 1매, 고임석 1매의 짜임새는 같으며, 석재 가공 또한 대왕릉처럼 정교하다. / 소왕릉은 지난해 발굴한 대왕릉에서 약 180여m 떨어져 있으며, 함께 묶여 쌍릉으로 불리고 있다. 대왕릉과 소왕릉은 향가 <서동요>에 나오는 연애담 설화의 주인공으로 익산에 백제의 왕도를 새롭게 닦으려 했던 무왕과 그의 부인 선화공주가 각각 묻힌 무덤이라고 <고려사> 등에 기록이 전해져 왔다. 실제로 지난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대왕릉 재발굴 당시 나온 인골이 ‘620~659년 숨진 60대 전후 남성’이란 분석결과를 내놓으며 무덤 주인이 무왕임을 사실상 확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