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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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금산봉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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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남해금산봉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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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海錦山烽燧臺 |
주소 |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257-3번지 |
지정번호 |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 |
지정일 | 1987년 5월 19일 |
분류 | 유적건조물/교통통신/통신/봉수 |
관리자 | 남해군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남해 금산 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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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봉수(烽燧)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 제도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12,3세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둔 산꼭대기 중에서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평시에는 불꽃이나 연기를 한번 올리지만(一炬 또는 一煙),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 번, 적이 해안에 근접해 오면 세 번, 바다에서 접전이 이루어지면 네 번,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에는 다섯 번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곳 금산 봉수대는 고려 의종(毅宗, 1147~1170 재위) 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烽燧路) 가운데서 동래(東萊)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제 2봉수로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이다. 이곳에서 점화된 봉수는 창선 대방산을 통해 사천(四川), 진주(晉州) 등을 거쳐 서울에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