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남해 금산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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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봉수(烽燧)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 제도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12,3세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둔 산꼭대기 중에서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평시에는 불꽃이나 연기를 한번 올리지만[一炬 또는 一煙],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 번, 적이 해안에 근접해 오면 세 번, 바다에서 접전이 이루어지면 네 번,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에는 다섯 번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곳 금산 봉수대는 고려 의종(毅宗, 1147~1170 재위) 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烽燧路) 가운데서 동래(東萊)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제 2봉수로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이다. 이곳에서 점화된 봉수는 창선 대방산을 통해 사천(四川), 진주(晉州) 등을 거쳐 서울에 전달되었다.

수정 국문

초고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세종실록지리지』 에 의하면 곤남군에는 봉화가 세 곳 있는데, 금산봉화는 남해도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본도(本道) 소흘산봉화와 연락한다고 하였다.

남해 금산 봉수대는 수량 1기로 높이 4.5m, 둘레 26m이며 남해군 금산 봉우리에 설치되었다. 이 봉수대는 남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정세를 중앙으로 전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남해 금산에서 첫 봉화를 피운 간봉은 진주 대방산→각산→사천 안현산 등을 거쳐 충주의 망이산 직봉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금산봉수는 처음 봉화를 피우는 경상도 남해안의 중요한 봉수의 하나였다. 설치 연대는 고려 중엽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비교적 본래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1차 수정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을 중심으로 직봉 사이에 간봉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의 시야가 트인 곳에 설치했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간봉 제2거 노선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고,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군사 통신시설로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 봉수 노선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간봉이란 보조 봉수 노선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게 하기 위하여 주로 시야가 트인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를 설치하였다. 해안지역 봉수의 경우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해안의 일정한 경계를 침범하면 3개, 아군 함대와 교전하면 4개, 적이 상륙하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지표조사를 통해 2000년대에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식 등성시설 등이 복원되었다. 연대는 특이하게 위에서 보았을 때 전면부가 타원형이고 후면부는 모서리를 없앤 사각형을 띠고 있다.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봉수 노선에 속한 간봉 9 봉수노선 중 최남단 봉수이다.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와 원산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서 처음 보이므로 조선전기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봉수대 한자 명기하고 이름 순차로 의미 설명하는 게 빠른 이해에 도움이 될 듯, 봉수의 의미 순차로 설명
    •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1개, 2개로 설명은 부적절한 듯
    • 직봉이며 간봉 등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설명 빼고 이 봉수대의 지정학적 위치상 갖는의미 설명을 해야할 듯
    • 뒷부분에 복원이나 건물터 발견 보다는 이 봉수대가 갖는 의미 - 조선시대 봉수대나 봉수제도 연구의 중요한 자료 –를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음
    • 봉수대(烽燧臺)는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烽燧路) 가운데 동래 (오늘날의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최남단의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평화로울 때는 불꽃이나 연기를 한 번, 적이 나타나면 두 번,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세 번, 경계를 침범하면 네 번,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다섯 번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고,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2차 수정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 노선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간봉이라는 보조 노선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도록 주로 시야가 트인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를 설치하였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봉수 노선 중 간봉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고,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지자체 감수결과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 노선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간봉이라는 보조 노선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도록 주로 시야가 트인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를 설치하였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비교적 원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둘레는 26m의 둥근 형태이며, 높이는 4.5m이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봉수 노선 중 간봉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대로,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어 출발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봉수대는 오장(五將) 두명과 봉군 십여명이 교대로 지켰다.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고,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공공언어 감수결과

봉수대*는 주변을 살피기 유리한 높은 산에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 시설이다.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있는 둥근 형태의 이 봉수대는 둘레는 26m이고 높이는 4.5m로, 원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연대 앞쪽에서는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연대*와 연통, 나선형의 계단 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다.

오늘날의 부산 지역인 동래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 봉수 노선 중에서 간봉**에 속한 봉수대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연대(煙臺): 봉수에 설치한 대. 대의 둘레에는 참호를 파고 위에는 가건물을 지어 각종 병기와 생활 필수품을 보관하였다.
  • 간봉(間烽): 조선 시대에 전국의 봉수망을 연결하는 주요 노선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 작은 봉수 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