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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0870000 남해 금산 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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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257-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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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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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봉수(烽燧)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 제도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12,3세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둔 산꼭대기 중에서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평시에는 불꽃이나 연기를 한번 올리지만[一炬 또는 一煙],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 번, 적이 해안에 근접해 오면 세 번, 바다에서 접전이 이루어지면 네 번,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에는 다섯 번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곳 금산 봉수대는 고려 의종(毅宗, 1147~1170 재위) 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烽燧路) 가운데서 동래(東萊)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제 2봉수로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이다. 이곳에서 점화된 봉수는 창선 대방산을 통해 사천(四川), 진주(晉州) 등을 거쳐 서울에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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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주변을 살피기 유리한 높은 산에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 시설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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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해발 681m) 정상에 있는 둥근 형태의 이 봉수대는 둘레는 26m이고 높이는 4.5m로, 원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연대 앞쪽에서는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연대*와 연통, 나선형의 계단 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다.
====초고====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세종실록지리지』 의하면 곤남군에는 봉화가 세 곳 있는데, 금산봉화는 남해도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본도(本道) 소흘산봉화와 연락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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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부산 지역인 동래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 봉수 노선 중에서 간봉**속한 봉수대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해 금산 봉수대는 수량 1기로 높이 4.5m, 둘레 26m이며 남해군 금산 봉우리에 설치되었다. 이 봉수대는 남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정세를 중앙으로 전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남해 금산에서 첫 봉화를 피운 간봉은 진주 대방산→각산→사천 안현산 등을 거쳐 충주의 망이산 직봉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금산봉수는 처음 봉화를 피우는 경상도 남해안의 중요한 봉수의 하나였다. 설치 연대는 고려 중엽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비교적 본래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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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煙臺): 봉수에 설치한 대. 대의 둘레에는 참호를 파고 위에는 가건물을 지어 각종 병기와 생활 필수품을 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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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봉(間烽): 조선 시대에 전국의 봉수망을 연결하는 주요 노선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 작은 봉수 조직.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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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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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umsan Beacon Station, Namhae'''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을 중심으로 직봉 사이에 간봉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의 시야가 트인 곳에 설치했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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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cons were a type of smoke-and-fire-signal communication system to warn of military events such as enemy invasions. The beacons, which are located atop mountains for visibility, had five furnaces that were lit in a particular pattern to indicate the severity of the situation.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봉수로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현재까지 비교적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상태이며 조선시대 남해안의 봉수 제도와 봉수대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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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information was relayed to the central government through a network of beacon stations across the nation. The beacon tower network was comprised of five main lines and other local auxiliary lines. This system was operational until 1894 when the modern communication system was introdu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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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ated on the peak of Geumsan Mountain (681 m above sea level), this station is presumed to have been built during the middle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It was the southernmost station of an auxiliary line of the second main line, which connected the Dongnae area (present-day Busan) and the capital, Hanyang (present-day Seoul). This station sent signals north to Daebangsan Beacon Station and west to Seolheulsan Beacon 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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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te is relatively well-preserved and measures 26 m in circumference and 4.5 m in height. The beacon, the platform, and the spiral stairs were reconstructed in the 2000s. A building site was also discovered in front of the plat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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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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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적의 침입과 같은 군사정보를 알리던 통신 수단이다.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에 설치했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다섯 개의 연조에 불을 피워서 상황을 알리는 신호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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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을 중심으로, 직봉 사이에는 간봉을 두기도 했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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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봉수 노선 중 간봉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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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는 26m이고 높이는 4.5m로, 원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고,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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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0일 (목) 02:51 기준 최신판

남해 금산 봉수대
Geumsan Beacon Station, Namhae
남해 금산 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남해 금산 봉수대
영문명칭 Geumsan Beacon Station, Namhae
한자 南海 錦山 烽燧臺
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257-3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
지정일 1987년 5월 19일
분류 유적건조물/교통통신/통신/봉수
관리자 남해군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남해 금산 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봉수대*는 주변을 살피기 유리한 높은 산에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 시설이다.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있는 둥근 형태의 이 봉수대는 둘레는 26m이고 높이는 4.5m로, 원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연대 앞쪽에서는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연대*와 연통, 나선형의 계단 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다.

오늘날의 부산 지역인 동래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 봉수 노선 중에서 간봉**에 속한 봉수대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연대(煙臺): 봉수에 설치한 대. 대의 둘레에는 참호를 파고 위에는 가건물을 지어 각종 병기와 생활 필수품을 보관하였다.
  • 간봉(間烽): 조선 시대에 전국의 봉수망을 연결하는 주요 노선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 작은 봉수 조직.

영문

Geumsan Beacon Station, Namhae

Beacons were a type of smoke-and-fire-signal communication system to warn of military events such as enemy invasions. The beacons, which are located atop mountains for visibility, had five furnaces that were lit in a particular pattern to indicate the severity of the situation.

In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information was relayed to the central government through a network of beacon stations across the nation. The beacon tower network was comprised of five main lines and other local auxiliary lines. This system was operational until 1894 when the modern communication system was introduced.

Located on the peak of Geumsan Mountain (681 m above sea level), this station is presumed to have been built during the middle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It was the southernmost station of an auxiliary line of the second main line, which connected the Dongnae area (present-day Busan) and the capital, Hanyang (present-day Seoul). This station sent signals north to Daebangsan Beacon Station and west to Seolheulsan Beacon Station.

The site is relatively well-preserved and measures 26 m in circumference and 4.5 m in height. The beacon, the platform, and the spiral stairs were reconstructed in the 2000s. A building site was also discovered in front of the platform.

영문 해설 내용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적의 침입과 같은 군사정보를 알리던 통신 수단이다.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에 설치했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다섯 개의 연조에 불을 피워서 상황을 알리는 신호를 전달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을 중심으로, 직봉 사이에는 간봉을 두기도 했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봉수 노선 중 간봉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둘레는 26m이고 높이는 4.5m로, 원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고,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문맥요소

ID Class Label Description
남해_금산_봉수대 Object 남해_금산_봉수대
남해_금산 Place 남해_금산
봉수대 Concept 봉수대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수단
J38-0087-0000 Heritage (경상남도_기념물_제87호)_남해_금산_봉수대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어 있다.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남해_금산_봉수대 봉수대 type
남해_금산_봉수대 남해_금산 currentLocation
남해_금산_봉수대 J38-0087-0000 isDesignatedAs

참고자료

  • 남해 금산 봉수대,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549&cid=40942&categoryId=33382
  • 남해금산봉수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2275
  • 남해금산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0870000
  • 『고려사』 「지리지」
  • 『세종실록지리지』→ 기존 안내문에는 고려 의종(재위 1147-1170) 때 설치되었다고 하고, 문화재청 사이트, 두산백과에는 고려 명종(재위 1171-1197) 때 설치되었다고 나오는데 근거 자료를 확인할 수 없음. 『고려사』 「지리지」에는 기록이 없고,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미 설치가 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려시대 이미 설치가 된 것은 확실함. 시기를 어느 왕대로 정확하게 산정할 수는 없으나 고려 중엽으로 추정하는 것이 가장 무난해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