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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간봉 제2거 노선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고,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간봉 제2거 노선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고,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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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군사 통신시설로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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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 '''봉수 노선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간봉이란 '''보조 봉수 노선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게 하기 위하여 주로 시야가 트인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를 설치하였다. 해안지역 봉수의 경우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해안의 일정한 경계를 침범하면 3개, 아군 함대와 교전하면 4개, 적이 상륙하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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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지표조사를 통해 2000년대에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식 등성시설 등이 복원되었다. 연대는 특이하게 위에서 보았을 때 전면부가 타원형이고 후면부는 모서리를 없앤 사각형을 띠고 있다.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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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봉수 노선에 속한 간봉 9 봉수노선 중 최남단 봉수이다.'''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와 원산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서 처음 보이므로 '''조선전기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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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요소'''==
 
=='''문맥요소'''==

2021년 5월 9일 (일) 17:17 판


남해 금산 봉수대
남해 금산 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남해 금산 봉수대
한자 南海 錦山 烽燧臺
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257-3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
지정일 1987년 5월 19일
분류 유적건조물/교통통신/통신/봉수
관리자 남해군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남해 금산 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봉수(烽燧)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 제도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12,3세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둔 산꼭대기 중에서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평시에는 불꽃이나 연기를 한번 올리지만[一炬 또는 一煙],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 번, 적이 해안에 근접해 오면 세 번, 바다에서 접전이 이루어지면 네 번,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에는 다섯 번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곳 금산 봉수대는 고려 의종(毅宗, 1147~1170 재위) 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烽燧路) 가운데서 동래(東萊)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제 2봉수로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이다. 이곳에서 점화된 봉수는 창선 대방산을 통해 사천(四川), 진주(晉州) 등을 거쳐 서울에 전달되었다.

수정 국문

초고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세종실록지리지』 에 의하면 곤남군에는 봉화가 세 곳 있는데, 금산봉화는 남해도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본도(本道) 소흘산봉화와 연락한다고 하였다.

남해 금산 봉수대는 수량 1기로 높이 4.5m, 둘레 26m이며 남해군 금산 봉우리에 설치되었다. 이 봉수대는 남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정세를 중앙으로 전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남해 금산에서 첫 봉화를 피운 간봉은 진주 대방산→각산→사천 안현산 등을 거쳐 충주의 망이산 직봉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금산봉수는 처음 봉화를 피우는 경상도 남해안의 중요한 봉수의 하나였다. 설치 연대는 고려 중엽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비교적 본래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1차 수정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을 중심으로 직봉 사이에 간봉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의 시야가 트인 곳에 설치했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간봉 제2거 노선에 속한 최남단의 봉수대로,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시설 등은 2000년대 들어 복원한 것이고,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군사 통신시설로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 봉수 노선을 중심으로 그 사이에 간봉이란 보조 봉수 노선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게 하기 위하여 주로 시야가 트인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를 설치하였다. 해안지역 봉수의 경우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해안의 일정한 경계를 침범하면 3개, 아군 함대와 교전하면 4개, 적이 상륙하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 금산(해발 681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지표조사를 통해 2000년대에 연대, 연통, 나선형의 계단식 등성시설 등이 복원되었다. 연대는 특이하게 위에서 보았을 때 전면부가 타원형이고 후면부는 모서리를 없앤 사각형을 띠고 있다. 연대 앞쪽에서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제2봉수 노선에 속한 간봉 9 봉수노선 중 최남단 봉수이다. 북쪽으로는 대방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설흘산 봉수대와 원산봉수대에 연락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서 처음 보이므로 조선전기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문맥요소

ID Class Label Description
남해_금산_봉수대 Object 남해_금산_봉수대
봉수대 Concept 봉수대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
J38-0087-0000 Heritage (경상남도_기념물_제87호)남해_금산_봉수대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어 있다.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남해_금산_봉수대 봉수대 type
남해_금산_봉수대 J38-0087-0000 isDesignatedAs

참고자료

  • 남해 금산 봉수대,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5549&cid=40942&categoryId=33382
  • 남해금산봉수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2275
  • 남해금산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0870000
  • 『고려사』 「지리지」
  • 『세종실록지리지』→ 기존 안내문에는 고려 의종(재위 1147-1170) 때 설치되었다고 하고, 문화재청 사이트, 두산백과에는 고려 명종(재위 1171-1197) 때 설치되었다고 나오는데 근거 자료를 확인할 수 없음. 『고려사』 「지리지」에는 기록이 없고,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미 설치가 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려시대 이미 설치가 된 것은 확실함. 시기를 어느 왕대로 정확하게 산정할 수는 없으나 고려 중엽으로 추정하는 것이 가장 무난해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