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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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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400990000 공주 소학리 효자 향덕 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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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공주 소학리 효자 향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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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Stele of Hyangdeok for His Filial Devotion in Sohak-ri, Gongju
 
|한자=公州 巢鶴里 孝子 向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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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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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이 비는 우리나라 기록 상[「삼국사기」에 기록] 최초의 효자인 향덕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이다. 향덕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부모가 가난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성으로 모셨다. 이에 왕이 향덕에에 벼 300석, 집과 토지를 하사하고 비석을 세워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
공주 소학리 효자향덕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로 알려진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향덕이라는 사람을 기리는 비이다.  
  
비각 안의 오른쪽의 비는 더 오래된 것으로 윗부분이 잘라져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비의 내용에 중립(重立)이라는 문구가 있어 경덕왕 때에 본래 세운 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왼쪽의 비는 영조 17년(1741)에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이 비문을 다시 써서 세운 것이다.
+
향덕은 755년경덕왕 14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가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정성껏 모셨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벼 300석과 집 한 채, 땅을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그의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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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고, 『삼강행실도』에는 그림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초고====
 
이 비는 우리나라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효자인 향덕(向德)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이다.
 
  
향덕은 남북국시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의 인물이다. 755년(신라 경덕왕 14)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부모님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벼 300석과 집 한 채, 토지를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그의 효행을 널리 드러내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
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오른쪽의 비가 원래의 것인데, 윗부분이 잘려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비문에 “다시 세운다”라는 뜻의 ‘중립(重立)’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인가 비석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1741년영조 17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趙榮國)이 비문을 짓고 이덕현(李德顯)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웠고, 몸돌은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는 글이 있고, 그 아래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
  
향덕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세종 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그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쉽게 표현하여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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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e of Hyangdeok for His Filial Devotion in Sohak-ri, Gongju'''
  
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나란히 서있다. 오른쪽의 비가 더 오래된 것으로 윗부분이 잘려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비문에 새긴 문구 중에 ‘다시 세운다’는 뜻인 ‘중립(重立)’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경덕왕 때에 건립한 이후 어느 시기인가 비석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1741년(영조 17)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趙榮國, 1698-1760)이 비문을 작성하고 이덕현(李德顯)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웠고, 비몸은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 하였고, 그 아래쪽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
+
This stele was erected to commemorate the filial devotion of Hyangdeok, who lived in the 8th century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668-935).
  
또한 1980년에 공주군수가 정려비각 바로 옆에 ‘효자향덕행적비(孝子向德行蹟碑)’를 세웠는데 이때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현재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
In 755, when his parents suffered from hunger and illness due to food shortages and an outbreak of infectious disease, Hyangdeok devotedly took care of them and nursed them by cutting off and feeding them a piece of his own flesh. When the king heard this news, he bestowed him with rice, a house, and land and erected a stele to make his filial piety widely known. After this, the village where Hyangdeok lived came to be known as Hyoja-ri, meaning “Village of the Filial Family.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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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gend of Hyangdeok is recorded in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amguk sagi) and the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Samguk yusa), both dating to the Goryeo period (918-1392). It is also introduced in the ''Illustrated Conduct of the Three Bonds'' (Samgang haengsildo), which dates to the Joseon period (1392-1910).
소학리 효자향덕비는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재위) 때의 인물이자 우리나라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효자인 향덕을 기리는 비이다.  
 
  
향덕은 경덕왕 14년(755)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부모님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벼 300석과 집 한 채, 토지를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그의 효행을 널리 드러내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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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rently, there are two steles inside the commemorative pavilion. It is unknown when the stele on the right was erected. Only the lower part of the stele remains. In the remaining inscription, the characters for “re-established” can be seen, suggesting that this stele was a replacement for an earlier one. The stele on the left is newer than the one on the right and was erected in 1741. Its inscription was composed by the provincial governor Jo Yeong-guk (1698-1760) and calligraphed by Yi Deok-hyeon. It consists of an octagonal pedestal and a body stone with a rounded top. On the front of the stele is an inscription that reads “Stele of the Filial Son Hyangdeok of the Silla Kingdom.” At the bottom left side of the stele, there an inscribed poem praising Hyangdeok’s filial devotion.
  
향덕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세종 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그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쉽게 표현하여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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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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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의 인물인 향덕을 기리는 비이다.  
  
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오른쪽의 비가 원래의 것이며, 윗부분이 잘려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비문에 ‘다시 세운다’는 뜻인 ‘중립(重立)’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인가 비석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영조 17년(1741)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趙榮國, 1698~1760)이 비문을 작성하고 이덕현(李德顯)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웠고, 몸돌은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 하였고, 그 아래쪽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
+
향덕은 755년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님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정성으로 모셨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벼, , 땅을 상으로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라 하였다.  
  
====자문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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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덕의 이야기는 고려시대에 간행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고, 조선시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에는 그림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 분야별 자문위원 1
 
#*적절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이 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로 알려진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재위) 때의 향덕을 기리고 있다.''' 향덕은 '''755년(경덕왕 14)'''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님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정성으로 모셨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벼 300석과 집 한 채, 토지를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孝家里)’라고 하였다.<br/> 향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고''', 조선 세종 대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그림과 함께 효행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br/> 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오른쪽의 비가 원래의 것인데, 윗부분은 잘려서 사라졌고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비문에 '''‘중립(重立)’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1741년(영조 17)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趙榮國, 1698~1760)이 비문을 작성하고 이덕현(李德顯)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웠고, 몸돌은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는 글이 있고, 그 '''아래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없음.
 
  
====2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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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오른쪽의 비는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으며,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비문에 ‘다시 세운다’는 뜻의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인가 비석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1741년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1698-1760)이 비문을 짓고 이덕현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과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의 몸돌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 중앙에는 ‘신라 효자 향덕의 비’라고 새겨져 있고, 왼쪽 아래에는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소학리 효자향덕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로 알려진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재위) 때의 향덕을 기리는 비이다.
 
 
 
향덕은 경덕왕 14년(755)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님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정성으로 모셨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벼 300석과 집 한 채, 토지를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향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고, 조선 세종 대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그림과 함께 쉽게 표현하여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오른쪽의 비가 원래의 것인데, 윗부분이 잘려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비문에 ‘다시 세운다’는 뜻인 ‘중립(重立)’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인가 비석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영조 17년(1741)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趙榮國, 1698~1760)이 비문을 작성하고 이덕현(李德顯)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웠고, 몸돌은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는 글이 있고, 그 아래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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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권1, 〈효자도(孝子圖)〉, 상덕규비백제(向德刲髀百濟).
 
*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권1, 〈효자도(孝子圖)〉, 상덕규비백제(向德刲髀百濟).
 
* 충청남도·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충청남도 문화재대관 2 도지정문화재Ⅰ』, 2009.
 
* 충청남도·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충청남도 문화재대관 2 도지정문화재Ⅰ』, 2009.
* 공주 소학리 효자향덕비(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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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소학리 효자향덕비(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400990000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400990000  
 
 
*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481  
 
*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481  
 
*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1701610
 
*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17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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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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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영문집필]]

2021년 9월 22일 (수) 17:30 기준 최신판

공주 소학리 효자 향덕비
Stele of Hyangdeok for His Filial Devotion in Sohak-ri, Gongju
공주 소학리 효자 향덕 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공주 소학리 효자 향덕비
영문명칭 Stele of Hyangdeok for His Filial Devotion in Sohak-ri, Gongju
한자 公州 巢鶴里 孝子 向德碑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 76-6번지
지정번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
지정일 1982년 12월 31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통일신라
수량/면적 2기
웹사이트 공주 소학리 효자 향덕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공주 소학리 효자향덕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로 알려진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향덕이라는 사람을 기리는 비이다.

향덕은 755년경덕왕 14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가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정성껏 모셨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벼 300석과 집 한 채, 땅을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그의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향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고, 『삼강행실도』에는 그림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오른쪽의 비가 원래의 것인데, 윗부분이 잘려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비문에 “다시 세운다”라는 뜻의 ‘중립(重立)’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인가 비석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1741년영조 17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趙榮國)이 비문을 짓고 이덕현(李德顯)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웠고, 몸돌은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는 글이 있고, 그 아래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

영문

Stele of Hyangdeok for His Filial Devotion in Sohak-ri, Gongju

This stele was erected to commemorate the filial devotion of Hyangdeok, who lived in the 8th century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668-935).

In 755, when his parents suffered from hunger and illness due to food shortages and an outbreak of infectious disease, Hyangdeok devotedly took care of them and nursed them by cutting off and feeding them a piece of his own flesh. When the king heard this news, he bestowed him with rice, a house, and land and erected a stele to make his filial piety widely known. After this, the village where Hyangdeok lived came to be known as Hyoja-ri, meaning “Village of the Filial Family.”

The legend of Hyangdeok is recorded in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amguk sagi) and the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Samguk yusa), both dating to the Goryeo period (918-1392). It is also introduced in the Illustrated Conduct of the Three Bonds (Samgang haengsildo), which dates to the Joseon period (1392-1910).

Currently, there are two steles inside the commemorative pavilion. It is unknown when the stele on the right was erected. Only the lower part of the stele remains. In the remaining inscription, the characters for “re-established” can be seen, suggesting that this stele was a replacement for an earlier one. The stele on the left is newer than the one on the right and was erected in 1741. Its inscription was composed by the provincial governor Jo Yeong-guk (1698-1760) and calligraphed by Yi Deok-hyeon. It consists of an octagonal pedestal and a body stone with a rounded top. On the front of the stele is an inscription that reads “Stele of the Filial Son Hyangdeok of the Silla Kingdom.” At the bottom left side of the stele, there an inscribed poem praising Hyangdeok’s filial devotion.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의 인물인 향덕을 기리는 비이다.

향덕은 755년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님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정성으로 모셨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벼, 집, 땅을 상으로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라 하였다.

향덕의 이야기는 고려시대에 간행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고, 조선시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에는 그림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오른쪽의 비는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으며,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비문에 ‘다시 세운다’는 뜻의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인가 비석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1741년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1698-1760)이 비문을 짓고 이덕현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과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의 몸돌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 중앙에는 ‘신라 효자 향덕의 비’라고 새겨져 있고, 왼쪽 아래에는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공주_소학리_효자_향덕비 Object 공주_소학리_효자_향덕비
H34-0099-0000 Hertitage (충청남도_유형문화재_제99호)_공주_소학리_효자_향덕비
향덕 Actor 향덕(向德) 생몰년 미상
신라_경덕왕 Actor 신라_경덕왕(景德王,_재위_742-765)
삼국사기 Record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 Record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강행실도 Record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조영국 Actor 조영국(趙榮國_1698-1760) 1698-1760
이덕현 Actor 이덕현(李德顯) 생몰년 미상
효자향덕행적비 Object 효자향덕행적비(孝子向德行蹟碑) 1980년에 세워진 것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공주_소학리_효자_향덕비 향덕 isSteleOf
공주_소학리_효자_향덕비 신라_경덕왕 isRelatedTo
삼국유사 향덕 documents
삼국사기 향덕 documents
삼강행실도 향덕 documents
공주_소학리_효자_향덕비 조영국 writer
공주_소학리_효자_향덕비 이덕현 calligrapher
공주_소학리_효자_향덕비 효자향덕행적비 isNear
공주_소학리_효자_향덕비 H34-0099-0000 isDesignatedAs

참고자료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9, 〈신라본기〉 제9 경덕왕(景德王).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48, 〈열전〉 제8 향덕(向德).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5, 〈효선(孝善)〉 제9 향득사지할고공친 경덕왕대(向得舍知割股供親 景德王代)
  •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권1, 〈효자도(孝子圖)〉, 상덕규비백제(向德刲髀百濟).
  • 충청남도·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충청남도 문화재대관 2 도지정문화재Ⅰ』, 2009.
  • 공주 소학리 효자향덕비(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400990000
  •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481
  •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170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