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공주 소학리 효자 향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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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비는 우리나라 기록 상[「삼국사기」에 기록] 최초의 효자인 향덕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이다. 향덕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부모가 가난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성으로 모셨다. 이에 왕이 향덕에에 벼 300석, 집과 토지를 하사하고 비석을 세워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비각 안의 오른쪽의 비는 더 오래된 것으로 윗부분이 잘라져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비의 내용에 중립(重立)이라는 문구가 있어 경덕왕 때에 본래 세운 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왼쪽의 비는 영조 17년(1741)에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이 비문을 다시 써서 세운 것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 비는 우리나라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효자인 향덕(向德)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이다.
향덕은 남북국시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의 인물이다. 755년(신라 경덕왕 14)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부모님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벼 300석과 집 한 채, 토지를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그의 효행을 널리 드러내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향덕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세종 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그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쉽게 표현하여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나란히 서있다. 오른쪽의 비가 더 오래된 것으로 윗부분이 잘려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비문에 새긴 문구 중에 ‘다시 세운다’는 뜻인 ‘중립(重立)’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경덕왕 때에 건립한 이후 어느 시기인가 비석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1741년(영조 17)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趙榮國, 1698-1760)이 비문을 작성하고 이덕현(李德顯)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웠고, 비몸은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 하였고, 그 아래쪽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
또한 1980년에 공주군수가 정려비각 바로 옆에 ‘효자향덕행적비(孝子向德行蹟碑)’를 세웠는데 이때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현재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1차 수정
소학리 효자향덕비는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재위) 때의 인물이자 우리나라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효자인 향덕을 기리는 비이다.
향덕은 경덕왕 14년(755)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부모님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벼 300석과 집 한 채, 토지를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그의 효행을 널리 드러내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향덕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세종 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그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쉽게 표현하여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오른쪽의 비가 원래의 것이며, 윗부분이 잘려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비문에 ‘다시 세운다’는 뜻인 ‘중립(重立)’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인가 비석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영조 17년(1741)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趙榮國, 1698~1760)이 비문을 작성하고 이덕현(李德顯)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웠고, 몸돌은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 하였고, 그 아래쪽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적절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이 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로 알려진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재위) 때의 향덕을 기리고 있다. 향덕은 755년(경덕왕 14)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님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정성으로 모셨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벼 300석과 집 한 채, 토지를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孝家里)’라고 하였다.
향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고, 조선 세종 대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그림과 함께 효행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오른쪽의 비가 원래의 것인데, 윗부분은 잘려서 사라졌고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비문에 ‘중립(重立)’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1741년(영조 17)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趙榮國, 1698~1760)이 비문을 작성하고 이덕현(李德顯)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웠고, 몸돌은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는 글이 있고, 그 아래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
- 이 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로 알려진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재위) 때의 향덕을 기리고 있다. 향덕은 755년(경덕왕 14)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님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정성으로 모셨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벼 300석과 집 한 채, 토지를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孝家里)’라고 하였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없음.
2차 수정
소학리 효자향덕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효자로 알려진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재위) 때의 향덕을 기리는 비이다.
향덕은 경덕왕 14년(755)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님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정성으로 모셨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벼 300석과 집 한 채, 토지를 내려주었으며, 비석을 세워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자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향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고, 조선 세종 대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그림과 함께 쉽게 표현하여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현재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오른쪽의 비가 원래의 것인데, 윗부분이 잘려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비문에 ‘다시 세운다’는 뜻인 ‘중립(重立)’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인가 비석을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비는 영조 17년(1741)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趙榮國, 1698~1760)이 비문을 작성하고 이덕현(李德顯)이 글씨를 썼다. 8각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웠고, 몸돌은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형태이다. 앞면에 ‘신라효자 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는 글이 있고, 그 아래에 향덕의 효행을 칭송하는 시가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