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고산정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안동에서 활약한 성성재(惺惺齋) 금란수(琴蘭秀, 1530~1604)의 정자이다. 그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35세 되던 조선 명종(明宗) 19년(1654)에 정자를 지어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하며 지냈다고 한다.
건립 당시의 사정과 주위의 경치는 『일동록(日東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퇴계(退溪) 이황(李滉)도 여러 번 문인들과 함께 와서 머물다 갔다고 한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3m 가량의 자연석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다음 기단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시대 정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학문 수양을 위해 조선 명종 19년(1564)에 지은 정자이다.
금란수는 정유재란 때 고향인 경북 봉화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여 안동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낙동강을 끼고 있는 절벽 아래에 이 건물을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후에 뒷산의 이름을 따서 ‘고산정’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연석으로 높게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건물을 지어 올렸다. 오른쪽 전체와 왼쪽 후면을 온돌방으로 꾸미고 나머지 공간에 마루를 깔았다. 건물의 세 면에는 난간을 두른 쪽마루를 덧달고, 난간 양 끝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건물 안에는 금난수의 시와 함께 그의 스승이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시를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은 창건 당시부터 예안 지역의 대표적인 절경으로 알려졌으며, 이황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아와 경치를 즐기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고산정 왼쪽에는 과거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학번식지(鳥鶴蕃殖地)’라는 천연기념물 비가 서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학이 많이 서식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 기존 국문 중 년도 오류 수정 ; 조선 명종(明宗) 19년 (1654)->1564
- 이황이 지은 시 중 <서고산벽> - 고산정과 주인 금난수에 대한 내용. (日洞主人琴氏子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 隔水呼問今在否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 耕夫揮手語不聞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 愴望雲山獨坐久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퇴계집》 권2)
- 금난수는 고산정을 짓기에 앞서 지금의 성성재 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4호) 아래에 자신의 호를 따서 ‘성재(惺齋)’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1차 수정
고산정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학문 수양을 위해 명종 19년(1564)에 지은 정자이다.
금난수는 경상북도 봉화 출신으로, 명종 16년(1561) 생원시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은거하며 노모를 모시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여 안동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낙동강을 끼고 있는 절벽 아래에 고산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강물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자연석으로 축대를 높이 쌓은 후 정자를 지어 올렸다. 정자의 오른쪽 전체와 왼쪽 뒷면은 온돌방으로 꾸미고, 왼쪽 앞면에는 마루를 깔았다. 앞면과 양옆에는 난간을 두른 쪽마루를 덧달았다. 정자 안에는 금난수와 그의 스승이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남긴 시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절경으로 알려졌으며, 이황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여러 차례 고산정을 찾아와 경치를 즐기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