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용흥사지
| 창녕 용흥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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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명칭 | 창녕 용흥사지 |
|---|---|
| 한자 | 昌寧 龍興寺址 |
| 주소 |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대산리 632 |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기념물 |
| 지정(등록)일 | 2025년 7월 24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기타 |
| 시대 | 조선시대 |
| 수량/면적 | 11,104㎡ |
| 웹사이트 | 창녕 용흥사지,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
해설문
국문
용흥사지는 비슬산 관기봉의 남쪽 능선에 있는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남북국시대에 고승 관기(觀機)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성종 1년(982) 성범(成梵)에 의해 중창되었지만 불에 타 없어졌다가 고려 말 승려 각료(覺了)와 곽항(郭恒)이 재건하면서 두 승려의 이름을 취하여 ‘요항사(了恒寺)’라 불렸다. 임진왜란(1592) 때 또다시 불에 탔다가 광해군 6년(1614) 승려 지혜(智慧)에 의해 다시 세워지면서 절터에서 ‘용흥(龍興)’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용흥사’로 재창건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당 8채, 전 6채, 요 6채, 문과 종루, 회랑, 암자 5곳을 둔 경상좌도의 총림*이 되었다. 순조 26년(1826)에 화령옹주의 원당으로 지정된 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으나 1958년에 각료암으로 중건되었다.
용흥사지는 2021년부터 2023년에 걸쳐 이루어진 세 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대웅전지, 동원지, 서원지, 문지, 승당지, 담장, 계단, 석축, 기단, 배수로 등이 조사되어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방식을 따르는 대규모 사찰임이 밝혀졌다.
발굴 과정에서 연화문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분청사기편, 백자편, 상평통보, ‘숭정8년(崇禎八年)’, ‘강희52년(康熙五十二年)’ 등이 새겨진 명문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어 용흥사의 중창과 운영시기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용흥사지는 남북국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창녕의 비보사찰**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창녕을 대표하는 큰 사찰로서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 총림(叢林): 승려들의 참선수행을 위한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
- 비보사찰(裨補寺刹): 풍수지리적 관념으로 산천의 기운을 점쳐 지덕(地氣)을 보완하기 위해 지정되거나 건립된 사원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비슬산 관기봉의 남쪽 능선에 위치한 이곳은 남북국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용흥사가 있던 자리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용흥사는 신라의 고승 관기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고려시대인 982년 승려 성범이 중창하였다.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가 고려 말 승려 각료와 곽항이 재건하면서, 두 승려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요항사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가 1614년 승려 지혜가 다시 사찰을 세웠다. 이때 절터에서 ‘용흥(龍興)’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사찰의 이름을 다시 ‘용흥사’로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참선수행을 위한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경상좌도의 중심 사찰 중 하나였다. 1826년에는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재위 1724-1776)의 딸 화령옹주(1753-1821)의 명복을 기원하는 사찰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었고, 사찰이 있던 자리에는 1958년 작은 암자인 각료암이 중건되었다.
2021년부터 2023년에 걸쳐 이루어진 세 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용흥사지에서는 대웅전, 동원, 서원, 승당, 담장, 계단, 석축, 기단, 배수로 등의 유구가 발견되어,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방식을 따르는 대규모 사찰임이 밝혀졌다. 발굴 과정에서 연화문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분청사기편, 백자편, 상평통보, ‘숭정8년(崇禎八年)’, ‘강희52년(康熙五十二年)’ 등이 새겨진 명문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어 용흥사의 중창과 운영시기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