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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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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9월 11일 (일) 20:3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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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선생 묘
채제공 선생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채제공 선생 묘
한자 蔡濟恭 先生 墓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5번지
지정번호 경기도 기념물 제17호
지정일 1973년 7월 10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채제공 선생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번암 채제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조 대부터 정조 대까지 활동한 관료이다. 그는 영조 19년(1743)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이후 청요직*인 예문관 사관직을 거쳤다. 채제공은 문한으로서의 능력과 관료로서의 실무 능력을 두루 인정받았으며 이후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아가 균역법의 폐단과 변방의 군사적 대비에 대한 문제를 진언하였다. 내직으로 복귀한 후에는 승정원 동부승지와 대사간 등을 거쳐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영조 34년(1758)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가 악화되고 세자 폐위가 결정되자 채제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세자 폐위를 막아 철회시켰다. 이를 두고 후일 영조는 정조에게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1776년 영조가 죽자 국왕의 장례 행사를 주관하는 국장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이어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를 처벌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결정하였다. 정조 원년부터 약 8년간 소론의 공격을 받아 칩거하였으나 정조 13년(1788) 우의정에 특채된 후 영의정에 올라 수원 화성을 건립하는 성역(城役)을 담당하다가 정조 23년(1798) 사직하였다.

묘는 홀로 안장되어 있으며 봉분 앞으로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과 석양(石羊)이 한 쌍씩 있다. 묘 아래 신도비가 없는데, 그 이유는 묘소에서 약 80m 가량 내려가면 정조가 채제공을 애도하며 친히 글을 지은 어제(御製) 뇌문비(誄文碑)가 있기 때문이다.


  • 청요직: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 맡았던 청직과 요직을 함께 일컫는 말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자료

  • “채제공선생 묘”, 『경기도 문화재 총람 도지정편 2』, 경기도,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2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