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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학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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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7월 18일 (토) 18:14 판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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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학사루
Haksaru Pavilion, Hamyang
학사루 전경.jpg
대표명칭 함양 학사루
영문명칭 Haksaru Pavilion, Hamyang
한자 咸陽 學士樓
주소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학사루길 4 (운림리)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지정일 1974년 2월 16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함양 학사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학사루는 원래 관가의 객사(客舍)인 위성관의 문루(궁문이나 성문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였다. 천연 기념물 제407호인 학사루 느티나무 옆에 있었으나 197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중종 25년(1530)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학사루는 객관 서편에 있다. 최치원이 태수로 있으면서 오르던 곳인 까닭에 학사루라 이름 하였다. 그 뒤에 왜적에 의해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 누 또한 옮겨다 지었으나 이름은 그대로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1910년 함양보통학교가 개교한 후 일제 강점기 때는 교실로, 그 뒤에는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걸려 있던 유자광의 시판(詩板)을 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적인 원한으로 발전하여 연산군 4년(1498)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누각 건축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영문

Haksaru Pavilion, Hamyang


영문 해설 내용

학사루는 관아에 딸린 객사의 문루였다. 최초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원래 길 건너 함양초등학교에 있는 학사루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407호) 옆에 있었으나, 197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통일신라시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857~?)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며, 이후에도 관아의 관리들이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업무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92년에 다시 지었고, 20세기에 들어서서는 학교의 교실과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저명한 학자인 김종직(1431-1492)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1439-1512)의 시가 적힌 현판을 내리도록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개인적인 원한이 되어 1498년 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광풍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함화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8호)와 함께 함양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