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함양 학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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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누각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선생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이곳에 올라 시를 자주 지었기 때문에 학사루(學士樓)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관청의 객사(客舍) 자리인 현 함양초등학교 한에 있었던 것을 197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이전 당시에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92년(숙종 18)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원래 학사루는 객사의 부속 건물로 함양 읍성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학사루를 제외하고 객사를 비롯한 다른 중요한 건물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비교적 큰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렇게 화려한 건물은 아니지만, 누의 아래와 위, 지붕의 비례가 대단히 조화롭고 안정되어 있으므로, 조선시대 관청에서 지은 누각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과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걸려 있던 유자광(柳子光, ?~1512)이 쓴 시를 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적인 원한으로 발전하여 1498년(연산군 4)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수정 국문

초고

이 누각은 신라 말기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 857~?)이 함양 태수(당시에는 천령 태수)로 있을 때 자주 올라 시를 지었기 때문에 학사루(學士樓)라고 불리었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조선 중기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의 시를 내리도록 한 것이 원인이 되어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 옆에 객사(客舍)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齊雲樓), 서쪽에는 청상루(淸商樓), 남쪽에는 망악루(望嶽樓)가 있었다고 전한다. 지방 관리가 피로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몸과 마음을 달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92년에 중수하였으며 197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2015년에 단청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1차 수정

학사루는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 857~?)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는 누각이다. 최초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이었으며, 지방 관리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피로한 몸과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92년에 중수하였으며 197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2015년에 단청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중기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의 시를 내리도록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적인 원한이 되어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팔작지붕에 겹처마가 있으며, 원형 누하주 상부는 기둥 사이에 장귀틀로 연결하고 동귀틀에 널판을 끼운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계자난간으로 둘려져 있다. --> 건축관련 기술 추가함.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원래는 -> 이 누각은 으로 수정
    • 사적인 원한이 -> 개인적으로 원한이
  3.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지방 관리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업무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92년에 중수하였다. 197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2차 수정

학사루는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 857~?)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는 누각이다. 최초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누각은 원래 관아에 딸린 건물이었으며, 지방 관리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업무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92년에 중수하였다. 197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2015년에 단청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중기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의 시를 내리도록 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개인적인 원한이 되어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