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금수정
2020 국문
초고
영평천으로 둘러싸인 옛 영평현의 구읍지와 인접한 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옛부터 영평8경의 하나로 손꼽혀온 이 정자는 조선 중기에 김명리가 세웠다. 풍수지리상 소의 머리 형국이라고 해서 우두정이라고 했다가, 봉래 양사언이 소유하면서 ‘금수정’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 후 안동김씨 일가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으며, 수차례에 걸쳐 중수되다가 한국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기단과 장초석만이 남아있던 것을 1989년 포천군의 지원을 받아 복원하였다. 현 정자의 현판은 암벽에 새긴 양사언 선생의 ‘金水亭’이란 글씨를 탁본하여 이것으로 제작한 것이다.
주위에는 창옥병을 비롯해서 준암·연화암·동척석문 등 경승지가 펼쳐져 있어 옛부터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아와 시와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며 명필인 양사언을 비롯하여 사암 박순·한음 이덕형·석봉 한호·강산 이서구 등 역대 명류들과 얽힌 일화와 유적이 남겨져 있다. 지금도 볼 수 있는 동북쪽 암벽에 새겨진 ‘금수정’ 이란 양사언 선생의 글씨를 비롯하여 10m 위 바위돌에 새긴 ‘취대’ 라는 글씨, 그리고 냇가 한복판 바위에 ‘경도’ 라고 쓴 각자 등은 그 옛 자취의 일부이다.
수정
영평천 옆의 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예부터 영평8경의 하나로 손꼽혀온 이 정자는 조선 중기에 김명리(金明理)가 세웠다. 풍수지리상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정(牛頭亭)이라고 했다가,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소유하면서 ‘금수정’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 후 안동김씨 일가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으며, 수차례에 걸쳐 중수되다가 한국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기단과 주춧돌만이 남아있던 것을 1989년 복원하였다. 현 정자의 현판은 암벽에 새긴 양사언의 ‘금수정(金水亭)’이란 글씨를 탁본하여 이것으로 제작한 것이다.
주위에는 창옥병을 비롯해서 준암·연화암·동척석문 등 경승지가 펼쳐져 있어 예부터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아와 시와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며 명필인 양사언을 비롯하여 이덕형(李德馨, 1561~1613)·한호(韓濩, 1543~1605) 등 역대 명류들과 얽힌 일화와 유적이 남겨져 있다. 지금도 볼 수 있는 동북쪽 암벽에 새겨진 ‘금수정’이란 양사언 선생의 글씨를 비롯하여 냇가 한복판 바위에 ‘경도(瓊島, 옥 같은 섬)’라고 쓴 글씨 등은 그 옛 자취의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