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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금대암 전나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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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2120000 함양 금대암 전나무],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2120000 함양 금대암 전나무],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함양금대암전나무
 
|대표명칭=함양금대암전나무
|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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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Needle Fir of Geumdaeam Hermitage, Hamyang
|한자=咸陽金臺庵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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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咸陽 金臺庵 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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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산17-1번지
 
|소장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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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경상남도 기념물 제212호
 
|지정번호=경상남도 기념물 제2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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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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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1주(지정 당시 2주였으나 1주는 고사함.)
 
|웹사이트=[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2120000 함양 금대암 전나무],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웹사이트=[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2120000 함양 금대암 전나무],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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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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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한 늘 푸른 큰키나무[喬木]로, 대략 25m 내외까지 자란다. 재목이 곧아 건축자재로 많이 쓰인다. 껍질은 잿빛을 띤 갈색에 작은 비늘이 있고, 잎은 납작한 바늘 모양이다. 봄에 꽃이 피고 가을에 녹갈색의 솔방울 같은 열매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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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암(금대사)은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위치한 암자로, 금대암 마당앞에 있는 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늘 푸른 큰키나무이다.  
  
이곳 전나무는 1403년(태종 3)에 행호조사(行乎祖師)가 창건한 금대암의 입구에 서 있다. 나무의 나이는 대략 5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40m, 둘레가 2.92m로 현존하는 전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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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2년(1430) 경에 천태종 판사도대선사(判事都大禪師) 행호(行乎)가 금대암을 다시 크게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전해져 600여 년 정도의 수령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40m, 둘레는 2.92m로 국내에 현존하는 전나무 가운데 최고의 수령과 크기로 평가받고 있다. 처음에는 두 그루가 있었으나 2000년에 벼락을 맞아 한 그루는 고사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인이었던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은 이곳 금대암을 둘러보고 난 뒤에 쓴 시에서 “잘 있으냐 금대암아, 송하문이 같구나, 송풍에 맑은 꿈 깨어, 잠꼬대를 하는 도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금대암 주위에는 조선 전기에도 소나무과에 속하는 나무가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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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1457~1497) 때의 문인 뇌계 유호인(㵢溪 俞好仁)은 금대암을 둘러보고 쓴 시에서 “잘 있느냐 금대암아 송하문이 옛일 같구나, 소나무 바람에 맑은 꿈 깨어 잠꼬대를 하는도다.”라고 읊었다. 이를 통해 당시에도 금대암 주위에 소나무과에 속하는 나무가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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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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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edle Fir of Geumdaeam Hermitage, Hamyang'''
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교목으로, 우리나라 전국에서 자생한다. 추위에 강하고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 나무 높이는 30~40m 정도 자라는데, 클수록 매우 곧아지며 위쪽이 뾰족한 원추형이 된다. 재질이 우수하여 펄프원료나 건축용재·가구 재료로 활용된다.
 
  
이 곳의 전나무는 1403년에 승려인 행호(行乎)가 창건한 금대암(金臺庵)의 입구에 서 있다. 사찰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나이는 대략 600여 년 정도이다. 높이가 40m, 둘레가 2.92m로 현존하는 전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1차 수정====
 
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늘 푸른 큰키나무로 추위에 강하고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 나무 높이는 30~40m 정도 자라는데, 클수록 매우 곧아지며 위쪽이 뾰족한 원추형이 된다. 목재의 재질이 우수하여 펄프 원료, 건축 부재, 가구 재료 등으로 활용된다.
 
  
금대암 입구에 서 있는 이 두 그루의 전나무는 1403년 사찰이 창건되던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가 40m, 둘레가 2.92m로 현존하는 전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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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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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교목으로 추위에 강하고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 목재의 재질이 우수하여 펄프 원료, 건축 부재, 가구 재료 등으로 활용된다.
====자문의견====
 
#분야별 자문위원 1
 
#*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늘 푸른 큰키나무로 추위에 강하고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 나무 높이는 30~40m 정도 자라는데, 줄기는 매우 곧으며 위쪽이 뾰족한 원추형이 된다. 목재의 재질이 우수하여 펄프 원료, 건축 부재, 가구 재료 등으로 활용된다.
 
#*금대암 입구에 서 있는 전나무는 1403년 사찰이 창건되던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의 높이가 40m, 둘레가 2.92m, 나이는 대략 500년이 넘어 현존하는 전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고 추정된다.
 
#*기념물 지정 당시인 1998년에는 금대암 마당 앞에 2그루의 전나무가 있었으나, 2000년 1그루가 벼락에 맞아 없어지고 현재는 1그루만 남아 있다.
 
#분야별 자문위원 2
 
#*존하는 전나무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 현존하는 전나무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현존하는 전나무중 가장 크다고 하면 천연기념물 제495호 진안 천황사 전나무와 사실관계에서 틀릴수 있으므로 크다는 것은 빼고 다만, “가장 오래된” 부분은 천황사 전나무는 수령이 약400년이라고 설명되어 있으므로 그대로 두어도 무방할 듯.)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오래 되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1403년-> 조선시대(1403년)’으로 하면 어떨까요?
 
 
 
====2차 수정====
 
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늘 푸른 큰키나무로 추위에 강하고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 나무 높이는 30~40m 정도 자라는데, 줄기는 매우 곧으며 위쪽이 뾰족한 원추형이 된다. 목재의 재질이 우수하여 펄프 원료, 건축 부재, 가구 재료 등으로 활용된다.
 
 
 
금대암 입구에 서 있는 전나무는 1403년 사찰이 창건되던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나무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기념물 지정 당시인 1998년에는 두 그루의 전나무가 있었으나, 2000년 한 그루가 벼락에 맞아 없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전나무는 높이가 40m, 둘레가 2.92m이다.
 
 
 
=='''문맥요소'''==
 
===Nodes===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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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암 입구에 서 있는 이 나무는 1430년 승려 행호가 금대암을 중창하던 당시에 심은 것으로 전해지며, 한국에 현존하는 전나무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기념물 지정 당시인 1998년에는 두 그루의 전나무가 있었으나, 2000년 한 그루가 벼락에 맞아 고사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전나무는 높이가 40m, 둘레가 2.92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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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신이자 문장가였던 유호인(1445-1494)이 금대암을 둘러보고 쓴 시에 "소나무 바람에 맑은 꿈을 깨어 잠꼬대를 하는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 보아 당시에도 금대암 주위에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나무가 많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 『세종실록』 권82, 세종 20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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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 권82, 세종 20년 7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007002_002 →금대암과 관련하여 행호(行乎)를 삼국시대 인물로 보고 금대암의 창건시기를 656년이라 하기도 하는데 실록 기사에 의하면 조선 전기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금대암과 관련하여 행호(行乎)를 삼국시대 인물로 보고 금대암의 창건시기를 656년이라 하기도 하는데 실록 기사에 의하면 조선 전기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 함양금대암전나무(咸陽金臺庵전나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802120000#
 
* 함양금대암전나무(咸陽金臺庵전나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802120000#
 
* 함양 금대암 전나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 함양 금대암 전나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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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함양군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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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시도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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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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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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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2020년 7월 18일 (토) 16:54 판


함양금대암전나무
Needle Fir of Geumdaeam Hermitage, Hamyang
함양 금대암 전나무,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함양금대암전나무
영문명칭 Needle Fir of Geumdaeam Hermitage, Hamyang
한자 咸陽 金臺庵 전나무
주소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산17-1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212호
지정일 1998년 11월 13일
분류 자연유산/천연기념물/생물과학기념물/생물상
수량/면적 1주(지정 당시 2주였으나 1주는 고사함.)
웹사이트 함양 금대암 전나무,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금대암(금대사)은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위치한 암자로, 금대암 마당앞에 있는 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늘 푸른 큰키나무이다.

세종 12년(1430) 경에 천태종 판사도대선사(判事都大禪師) 행호(行乎)가 금대암을 다시 크게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전해져 600여 년 정도의 수령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40m, 둘레는 2.92m로 국내에 현존하는 전나무 가운데 최고의 수령과 크기로 평가받고 있다. 처음에는 두 그루가 있었으나 2000년에 벼락을 맞아 한 그루는 고사했다.

조선 성종(1457~1497) 때의 문인 뇌계 유호인(㵢溪 俞好仁)은 금대암을 둘러보고 쓴 시에서 “잘 있느냐 금대암아 송하문이 옛일 같구나, 소나무 바람에 맑은 꿈 깨어 잠꼬대를 하는도다.”라고 읊었다. 이를 통해 당시에도 금대암 주위에 소나무과에 속하는 나무가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영문

Needle Fir of Geumdaeam Hermitage, Hamyang


영문 해설 내용

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교목으로 추위에 강하고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 목재의 재질이 우수하여 펄프 원료, 건축 부재, 가구 재료 등으로 활용된다.

금대암 입구에 서 있는 이 나무는 1430년 승려 행호가 금대암을 중창하던 당시에 심은 것으로 전해지며, 한국에 현존하는 전나무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기념물 지정 당시인 1998년에는 두 그루의 전나무가 있었으나, 2000년 한 그루가 벼락에 맞아 고사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전나무는 높이가 40m, 둘레가 2.92m이다.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문장가였던 유호인(1445-1494)이 금대암을 둘러보고 쓴 시에 "소나무 바람에 맑은 꿈을 깨어 잠꼬대를 하는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 보아 당시에도 금대암 주위에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나무가 많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