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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함양오담고택.jpg
 
|사진=함양오담고택.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4070000 함양 오담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4070000 함양 오담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함양오담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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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함양 오담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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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Odam House, Hamyang
|한자=咸陽梧潭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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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咸陽 梧潭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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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길 66-1 (개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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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지정번호=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7호
 
|지정번호=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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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4동
 
|수량/면적=4동
 
|웹사이트=[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804070000 함양 오담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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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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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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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담고택은 건축 공사의 과정을 적어둔 문서에 의해 1838년 사랑채가, 1840년 안채가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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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지은 오담 정환필(梧潭 鄭煥弼) 선생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12대 후손으로 생전에 경로효친을 제일 덕목으로 실천하였다. 성균관에서 함께 수학한 노사 기정진 선생과 함께 남계서원의 풍영루(風詠樓)에 대한 글 재료를 모아 지어 정여창 선생의 높은 학문적 경지를 재조명하는 등 문장력이 뛰어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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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후퇴 가옥으로, 기단은 자연석을 3~4단으로 쌓고 그 위에 초석을 놓은 뒤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두 네모난 형태로, 아래로 내려올수록 직경을 크게 다듬은 원기둥 모습을 취하고 있다.  
====초고====
 
이 건물은 정환필(鄭煥弼)이 조선 후기에 건립한 주택이다.
 
  
정환필은 조선 전기 문신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12대손으로 함양 일두고택(咸陽一蠹古宅)에서 분가를 하였다. 건물의 이름은 그의 호인 오담(梧潭)에서 따온 것으로 그는 1834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학식이 높아 당대 유명인들과 교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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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주거 건축 양식과 가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건물로,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 계층의 주거 형태가 남아 있는 중요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정여창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사화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사후 우의정에 증직된 인물이다. 함양 일두 고택은 정여창이 태어난 곳으로 2007년 그의 호인 일두(一蠹)를 문화재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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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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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am House, Hamyang'''
  
오담고택(梧潭古宅)은 상량문을 통해 1838년에 사랑채를, 1840년에 안채를 건립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계층의 주거형태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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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오담고택은 정환필(鄭煥弼)조선 후기에 건립한 주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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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환필(1798-1859, 호: 오담)이 건립하였다.  
 
 
정환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12대손이다. 1834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고, 학식이 높아 당대 유명인들과 교유하였다. 정여창 가문의 종택인 일두고택(一蠹古宅)에서 분가하면서 이 집을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집의 이름은 그의 호인 오담(梧潭)에서 따왔다.
 
 
 
오담고택은 사랑채, 안채, 곳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는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와 안채는 각각 1838년, 1840년에 건립하였으며, 2006-2007년에 해체 수리하였다. 건물 앞뒤에 툇간을 들여 공간을 넓게 사용한 점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가옥의 특징이다.
 
 
 
====자문의견====
 
#분야별 자문위원 1
 
#*오담고택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영역은 부속 건물인 화장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으로 구성되며, 안채영역은 안채와 그 정면 우측편에 곳간채로 배치되어 있다.
 
#분야별 자문위원 2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고,->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고
 
#*사랑채와 안채는 각각 1838년, 1840년에 건립하였으며, -> 1838년에 사랑채를 짓고 1840년에 안채를 건립하였으며, 로 수정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오담고택은 정환필(鄭煥弼, 1798-1859)이 조선 후기에 건립한 주택이다.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건립하였으며, 2006-2007년에 해체·수리하였다.
 
 
 
====2차 수정====
 
이 건물은 오담 정환필(梧潭 鄭煥弼, 1798~1859)이 조선 후기에 건립한 주택이다.
 
 
 
정환필은 조선 전기 문신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12대손이다. 1834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학식이 높아 당대 유명인들과 교유하였다. 정환필이 정여창 가문의 종택인 일두고택(一蠹古宅)에서 분가하면서 이 집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담고택은 사랑채 영역과 안채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사랑채 영역은 부속 건물인 화장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으로 구성되며, 안채 영역은 안채와 그 정면 우측편에 곳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건립하였으며, 2006~2007년에 해체·수리하였다. 건물 앞뒤에 툇간을 들여 공간을 넓게 사용한 점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가옥의 특징이다.
 
 
 
=='''문맥요소'''==
 
===Nodes===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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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필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저명한 학자인 정여창(1450-1504)의 12대손이다. 1834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지만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고, 학식이 높아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정환필이 정여창 가문의 종택인 일두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86호)에서 분가하면서 이 집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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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담고택은 사랑채 영역과 안채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건립되었으며, 2006-2007년에 해체·수리하였다. 사랑채 영역은 부속 건물인 화장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으로 구성되며, 안채 영역은 안채와 그 우측에 곳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앞뒤에 툇간을 들여 공간을 넓게 사용한 점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가옥의 특징이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2020년 7월 18일 (토) 18:26 판


함양 오담고택
Odam House, Hamyang
함양 오담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함양 오담고택
영문명칭 Odam House, Hamyang
한자 咸陽 梧潭古宅
주소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길 66-1 (개평리)
국가유산 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7호
지정(등록)일 2004년 3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4동
웹사이트 함양 오담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오담고택은 건축 공사의 과정을 적어둔 문서에 의해 1838년 사랑채가, 1840년 안채가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택을 지은 오담 정환필(梧潭 鄭煥弼) 선생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12대 후손으로 생전에 경로효친을 제일 덕목으로 실천하였다. 성균관에서 함께 수학한 노사 기정진 선생과 함께 남계서원의 풍영루(風詠樓)에 대한 글 재료를 모아 지어 정여창 선생의 높은 학문적 경지를 재조명하는 등 문장력이 뛰어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고택의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후퇴 가옥으로, 기단은 자연석을 3~4단으로 쌓고 그 위에 초석을 놓은 뒤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두 네모난 형태로, 아래로 내려올수록 직경을 크게 다듬은 원기둥 모습을 취하고 있다.

조선 후기 주거 건축 양식과 가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건물로,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 계층의 주거 형태가 남아 있는 중요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영문

Odam House, Hamyang


영문 해설 내용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환필(1798-1859, 호: 오담)이 건립하였다.

정환필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저명한 학자인 정여창(1450-1504)의 12대손이다. 1834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지만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고, 학식이 높아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정환필이 정여창 가문의 종택인 일두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86호)에서 분가하면서 이 집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담고택은 사랑채 영역과 안채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건립되었으며, 2006-2007년에 해체·수리하였다. 사랑채 영역은 부속 건물인 화장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으로 구성되며, 안채 영역은 안채와 그 우측에 곳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앞뒤에 툇간을 들여 공간을 넓게 사용한 점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가옥의 특징이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