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응선생 묘 일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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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응선생묘일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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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400900000 도응선생묘일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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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도응선생묘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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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도응선생 묘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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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Tombs of Do Eung and His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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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계정길 9-20, 외 2필 (지석리)
 
|주소=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계정길 9-20, 외 2필 (지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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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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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선생 내외분과 그의 손자 순손 내외의 무덤이다. 청송당은 본관이 성주, 처음의 이름은 유이고 태조 이성계와 어릴 때부터 친구로서,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태조가 조선을 세우자 절의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홍주 노은동에 숨어 살았다. 그 후 태조가 다섯 번이나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태조가 그의 충절을 아름답게 여겨 청송당이라는 아호를 내렸다. 무덤은 남향한 언덕에 동서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각각 원형분으로 사이에 비석이 있다. 비석 앞으로 한쌍의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석등이 망주석 사이에 서 있다. 언덕 아래에 임영호가 쓴 신도비가 있다. 1993년 청송당의 무덤을 정비할 때 땅 속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이 나왔다. 비석의 내용으로 비석은 무덤을 만든 것보다 늦게 세운 비석이고, 현재의 비석은 그 후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어 여러 차례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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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응 선생 묘 일원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 내외와 그의 손자 도순손 내외의 묘역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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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응은 태조 이성계(1335~1408)와 죽마고우였지만,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노은동에 숨어 살며 고려 왕조에 의리를 지켰다. 태조가 다섯 번이나 관직을 내렸으나 도응이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태조는 도응의 충심을 아름답게 여겨 ‘푸른 소나무’라는 뜻의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를 내렸다. 도응이 죽은 후 태조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에게 묏자리를 정할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초고====
 
도응 선생 묘 일원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靑松堂) 도응 선생 내외와 그의 손자 순손(順孫) 내외의 무덤이 조성된 묘역이다. 묘가 위치한 응봉면 지석리는 도응이 말년에 은거하였다고 전해지는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와 이웃한 마을이다. 도응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무학대사에게 묘지를 점지해 줄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시켰다고 전한다.
 
  
도응 선생의 무덤은 남향한 언덕에 동서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각각 원형분 구조의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비석이 있다. 비석 앞으로는 한 쌍의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석등은 망주석 사이에 서 있다. 언덕 아래 쪽에는 1991년 후손들이 도응과 성주도씨 집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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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응 선생과 부인 단양 우씨의 무덤은 남향의 언덕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비석이 있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1991년 후손들이 도응과 성주 도씨 집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
  
도응은 본관이 성주(星州), 초명은 도유(都兪), 자는 자예(子藝), 호는 청송당(靑松堂)이다. 태조 이성계와 죽마고우였으나 태조가 조선을 세우자 절의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홍주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다. 그 후 태조가 다섯 번이나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태조가 그의 충절을 아름답게 여겨 청송당이라는 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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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주석: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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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명등: 무덤 앞이나 절 안에 돌로 만들어 세우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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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 동남쪽의 큰길가에 세운 석비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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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도응 선생 묘 일원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靑松堂 都膺) 내외와 그의 손자 순손(順孫) 내외의 무덤이 조성된 묘역이다. 묘가 위치한 응봉면 지석리는 도응이 말년에 은거하였다고 전해지는 홍주 노은동(지금의 홍성 지역)과 이웃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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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bs of Do Eung and His Family'''
  
도응은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죽마고우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태조(1392~1398 재위)로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노은동에 은거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태조가 다섯 번이나 관직을 내렸으나 도응이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태조는 도응의 충절을 아름답게 여겨 ‘푸른 소나무’라는 의미의 청송당이라는 호를 내렸다. 도응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에게 묏자리를 점지해 줄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 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시켰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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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are the tombs of Do Eung, a loyal subject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his grandson Do Sun-son, and their wives.
  
도응 선생과 부인 단양우씨의 무덤은 남향한 언덕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비석이 있다. 비석 앞으로는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1991년 후손들이 도응과 성주도씨 집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
+
Do Eung was a close friend of Yi Seong-gye (1335-1408), a renowned general of Goryeo. In 1392, Yi Seong-gye founded the Joseon dynasty (1392-1910) and became its first king, King Taejo (r. 1392-1398). Despite their friendship, Do Eung left his official post and decided to live in hiding in Noeundong (today’s Hongseong), remaining loyal to the Goryeo dynasty. Although King Taejo made five offers of an official post, Do Eung rejected them all. Admiring Do Eung’s unwavering loyalty, King Taejo bestowed him with the pen name Cheongsongdang, meaning “green pine tree.” After Do Eung’s death, King Taejo ordered the Buddhist monk Muhak (1327-1405), a feng shui expert, to select a burial site for Do Eung. The current site, located 3 km north of Noeundong, was chosen.
  
====자문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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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mbs of Do Eung and his wife, Lady U of the Danyang U Clan, are located side-by-side on a southerly-facing hill. In between them, there is a tombstone. In front of the burial mounds, there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including a table, an incense table, a pair of civil official statues, and a stone lantern. At the entrance of the path leading to the tombs, there is a stele commemorating the achievements of Do Eung and the Seongju Do Clan, which was erected in 1991 by his descendants.
# 분야별 자문위원 1
 
#*도응 선생 묘 일원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靑松堂 都膺) 내외와 그의 손자 순손(順孫) 내외의 무덤이 조성된 묘역이다. → 이곳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靑松堂 都膺) 내외와 그의 손자 도순손(都順孫) 내외의 묘역이다.
 
#*도응이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 도응은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시켰다고 전한다. →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하였다 한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묘가 위치한 응봉면 지석리는-> 묘가 위치한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는
 
#*사실 확인 요망 : “도응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 (無學大師,1327~1405)에게 및자리를 점지해 줄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시켰다고 전한다.”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수정사항 없음.
 
  
====2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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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도응 선생 묘 일원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靑松堂 都膺) 내외와 그의 손자 도순손(都順孫) 내외의 묘역이다. 묘가 위치한 응봉면 지석리는 도응이 말년에 은거하였다고 전해지는 홍주 노은동(지금의 홍성 지역)과 이웃한 마을이다.
+
이곳은 고려 말의 충신 도응 내외와 그의 손자 도순손 내외의 묘역이다.
 
 
도응은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죽마고우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태조(1392~1398 재위)로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노은동에 은거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태조가 다섯 번이나 관직을 내렸으나 도응이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태조는 도응의 충절을 아름답게 여겨 ‘푸른 소나무’라는 의미의 청송당이라는 호를 내렸다. 도응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에게 묏자리를 점지해 줄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 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하였다고 한다.
 
 
 
도응 선생과 부인 단양우씨의 무덤은 남향한 언덕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비석이 있다. 비석 앞으로는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1991년 후손들이 도응과 성주도씨 집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
 
 
 
=='''문맥요소'''==
 
===Nodes===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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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응은 고려 말의 명장인 이성계(1335-1408)와 죽마고우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태조(재위 1392-1398)로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노은동(지금의 홍성 지역)에 숨어 살며 고려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태조가 다섯 번이나 관직을 내렸으나 도응이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태조는 도응의 충심을 아름답게 여겨 ‘푸른 소나무’라는 의미의 청송당이라는 호를 내렸다. 도응이 세상을 떠난 후, 태조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1327-1405)에게 묏자리를 정할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 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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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응과 부인 단양우씨의 무덤은 남향한 언덕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비석이 있다. 봉분 앞으로는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1991년 후손들이 도응과 성주도씨 집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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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국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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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분류:2021 국문초안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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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영문집필]]

2021년 11월 21일 (일) 19:41 기준 최신판

도응선생 묘 일원
Tombs of Do Eung and His Family
도응선생묘일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도응선생 묘 일원
영문명칭 Tombs of Do Eung and His Family
한자 都膺先生 墓 一圓
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계정길 9-20, 외 2필 (지석리)
지정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90호
지정일 1993년 11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5,188㎡(2필)
웹사이트 도응선생묘일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도응 선생 묘 일원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 내외와 그의 손자 도순손 내외의 묘역이다.

도응은 태조 이성계(1335~1408)와 죽마고우였지만,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노은동에 숨어 살며 고려 왕조에 의리를 지켰다. 태조가 다섯 번이나 관직을 내렸으나 도응이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태조는 도응의 충심을 아름답게 여겨 ‘푸른 소나무’라는 뜻의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를 내렸다. 도응이 죽은 후 태조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에게 묏자리를 정할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도응 선생과 부인 단양 우씨의 무덤은 남향의 언덕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비석이 있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1991년 후손들이 도응과 성주 도씨 집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


  • 망주석: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 장명등: 무덤 앞이나 절 안에 돌로 만들어 세우는 등
  • 신도비: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 동남쪽의 큰길가에 세운 석비

영문

Tombs of Do Eung and His Family

These are the tombs of Do Eung, a loyal subject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his grandson Do Sun-son, and their wives.

Do Eung was a close friend of Yi Seong-gye (1335-1408), a renowned general of Goryeo. In 1392, Yi Seong-gye founded the Joseon dynasty (1392-1910) and became its first king, King Taejo (r. 1392-1398). Despite their friendship, Do Eung left his official post and decided to live in hiding in Noeundong (today’s Hongseong), remaining loyal to the Goryeo dynasty. Although King Taejo made five offers of an official post, Do Eung rejected them all. Admiring Do Eung’s unwavering loyalty, King Taejo bestowed him with the pen name Cheongsongdang, meaning “green pine tree.” After Do Eung’s death, King Taejo ordered the Buddhist monk Muhak (1327-1405), a feng shui expert, to select a burial site for Do Eung. The current site, located 3 km north of Noeundong, was chosen.

The tombs of Do Eung and his wife, Lady U of the Danyang U Clan, are located side-by-side on a southerly-facing hill. In between them, there is a tombstone. In front of the burial mounds, there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including a table, an incense table, a pair of civil official statues, and a stone lantern. At the entrance of the path leading to the tombs, there is a stele commemorating the achievements of Do Eung and the Seongju Do Clan, which was erected in 1991 by his descendants.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고려 말의 충신 도응 내외와 그의 손자 도순손 내외의 묘역이다.

도응은 고려 말의 명장인 이성계(1335-1408)와 죽마고우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태조(재위 1392-1398)로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노은동(지금의 홍성 지역)에 숨어 살며 고려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태조가 다섯 번이나 관직을 내렸으나 도응이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태조는 도응의 충심을 아름답게 여겨 ‘푸른 소나무’라는 의미의 청송당이라는 호를 내렸다. 도응이 세상을 떠난 후, 태조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1327-1405)에게 묏자리를 정할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 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하였다고 한다.

도응과 부인 단양우씨의 무덤은 남향한 언덕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비석이 있다. 봉분 앞으로는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1991년 후손들이 도응과 성주도씨 집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