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도응선생 묘 일원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선생 내외분과 그의 손자 순손 내외의 무덤이다. 청송당은 본관이 성주, 처음의 이름은 유이고 태조 이성계와 어릴 때부터 친구로서,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태조가 조선을 세우자 절의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홍주 노은동에 숨어 살았다. 그 후 태조가 다섯 번이나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태조가 그의 충절을 아름답게 여겨 청송당이라는 아호를 내렸다. 무덤은 남향한 언덕에 동서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각각 원형분으로 사이에 비석이 있다. 비석 앞으로 한쌍의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석등이 망주석 사이에 서 있다. 언덕 아래에 임영호가 쓴 신도비가 있다. 1993년 청송당의 무덤을 정비할 때 땅 속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이 나왔다. 비석의 내용으로 비석은 무덤을 만든 것보다 늦게 세운 비석이고, 현재의 비석은 그 후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어 여러 차례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정 국문

초고

도응 선생 묘 일원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靑松堂) 도응 선생 내외와 그의 손자 순손(順孫) 내외의 무덤이 조성된 묘역이다. 묘가 위치한 응봉면 지석리는 도응이 말년에 은거하였다고 전해지는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와 이웃한 마을이다. 도응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무학대사에게 묘지를 점지해 줄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시켰다고 전한다.

도응 선생의 무덤은 남향한 언덕에 동서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각각 원형분 구조의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비석이 있다. 비석 앞으로는 한 쌍의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석등은 망주석 사이에 서 있다. 언덕 아래 쪽에는 1991년 후손들이 도응과 성주도씨 집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

도응은 본관이 성주(星州), 초명은 도유(都兪), 자는 자예(子藝), 호는 청송당(靑松堂)이다. 태조 이성계와 죽마고우였으나 태조가 조선을 세우자 절의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홍주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다. 그 후 태조가 다섯 번이나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태조가 그의 충절을 아름답게 여겨 청송당이라는 호를 내렸다.

1차 수정

도응 선생 묘 일원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靑松堂 都膺) 내외와 그의 손자 순손(順孫) 내외의 무덤이 조성된 묘역이다. 묘가 위치한 응봉면 지석리는 도응이 말년에 은거하였다고 전해지는 홍주 노은동(지금의 홍성 지역)과 이웃한 마을이다.

도응은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죽마고우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태조(1392~1398 재위)로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노은동에 은거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태조가 다섯 번이나 관직을 내렸으나 도응이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태조는 도응의 충절을 아름답게 여겨 ‘푸른 소나무’라는 의미의 청송당이라는 호를 내렸다. 도응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에게 묏자리를 점지해 줄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 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시켰다고 전한다.

도응 선생과 부인 단양우씨의 무덤은 남향한 언덕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비석이 있다. 비석 앞으로는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1991년 후손들이 도응과 성주도씨 집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도응 선생 묘 일원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靑松堂 都膺) 내외와 그의 손자 순손(順孫) 내외의 무덤이 조성된 묘역이다. → 이곳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靑松堂 都膺) 내외와 그의 손자 도순손(都順孫) 내외의 묘역이다.
    • 도응이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 도응은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시켰다고 전한다. →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하였다 한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묘가 위치한 응봉면 지석리는-> 묘가 위치한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지석리는
    • 사실 확인 요망 : “도응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 (無學大師,1327~1405)에게 및자리를 점지해 줄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시켰다고 전한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수정사항 없음.

2차 수정

도응 선생 묘 일원은 고려 말의 충신 청송당 도응(靑松堂 都膺) 내외와 그의 손자 도순손(都順孫) 내외의 묘역이다. 묘가 위치한 응봉면 지석리는 도응이 말년에 은거하였다고 전해지는 홍주 노은동(지금의 홍성 지역)과 이웃한 마을이다.

도응은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죽마고우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태조(1392~1398 재위)로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노은동에 은거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태조가 다섯 번이나 관직을 내렸으나 도응이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자, 태조는 도응의 충절을 아름답게 여겨 ‘푸른 소나무’라는 의미의 청송당이라는 호를 내렸다. 도응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에게 묏자리를 점지해 줄 것을 명하였고, 노은동으로부터 북동쪽으로 3㎞ 가량 떨어진 이곳에 자리를 잡아 안장하였다고 한다.

도응 선생과 부인 단양우씨의 무덤은 남향한 언덕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비석이 있다. 비석 앞으로는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는 1991년 후손들이 도응과 성주도씨 집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