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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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서울앨버트테일러가옥(딜쿠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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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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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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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는 미국인 사업가 겸 언론인 앨버트 W. 테일러와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1924년에 지은 집으로,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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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W. 테일러는 운산금광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897년에 조선에 왔다. 광산업과 상업에 종사하다 1919년에 AP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과 3·1운동,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테일러 부부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던 앨버트 W. 테일러는 1948년 사망 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초고====
 
이 건물은 1919년 3.1 독립선언과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와 그의 아내(Mary Linely Taylor, 1889~1982)가 1923년에 지은 집이다. 인도여행 시 ‘딜쿠샤(DILKUSHA)’라는 건물에 감명을 받은 테일러 부부는 집의 이름도 딜쿠샤라고 했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 네바다 출신으로 아버지를 이어 평안도 운산금광을 운영했다. 1897년 조선에 온 그는 3.1운동 당시 AP통신사의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있었던 세브란스 병원에서 3.1독립선언서를 입수하자 ‘서울에서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작성하여 1919년 3월 13일 『뉴욕타임즈』에 실었다. 또한 같은 해 4월 제암리 학살사건의 참상과 일본군의 잔악행위를 직접 취재하여 『뉴욕타임즈』와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고발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이듬해 본국으로 추방당했으며, 1948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대로 아내는 1948년 한국에 와서 앨버트 테일러를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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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서양식 주택으로 1926년에 화재를 겪은 후 1930년 재건되었다. 1942년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소유주가 바뀌고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그러던 중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어렸을 때 살았던 기억을 되살려 2006년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2016년부터 진행된 복원사업을 거쳐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앨버트 테일러 가옥은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쌓은 집이다. 각 층은 응접실과 식당, 침실, 서재 등 다양한 용도의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1924년 완공되었으나, 1926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1930년 재건공사를 완료하였다. 1942년 앨버트 부부가 떠난 후 방치되었다가 1959년 조경규가 매입했으며, 1963년 조경규의 재산몰수로 국가 소유로 귀속되었다. 1991년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오인되었으나, 2006년 브루스 테일러가 방한하여 딜쿠샤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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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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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kusha House, Seoul'''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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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house was built in 1924 by the American journalist and entrepreneur Albert Wilder Taylor (1875-1948) and his wife the English actress Mary Linely Taylor (1889-1982). It is named after a house in the Dilkusha area of Lucknow, India, which had impressed Mrs. Taylor during a visit there. The name means “Palace of Heart's Delight” in Sanskrit.
딜쿠샤(DILKUSHA)는 미국 출신의 언론인이자 기업인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ely Taylor, 1889~1982)가 1924년에 지은 집이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며, 메리 테일러가 인도 북부 러크나우를 여행할 당시 감명 깊게 보았던 궁전의 이름에서 따왔다.  
 
  
앨버트 테일러는 평안북도에서 운산금광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돕기 위해 1897년에 조선에 왔다. 1919년부터는 AP통신사의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 3.1 독립선언,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그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 1919~2015)가 있었던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숨기는 것을 목격하였고 3.1운동을 취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듬해 미국으로 추방당했으며 1948년 세상을 떠났다. 평소 죽어서라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던 남편의 유언에 따라, 메리 테일러는 1948년 앨버트 테일러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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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W. Taylor came to Korea in 1897, following his father who was working at a gold mine in Pyeonganbuk-do Province. From 1919, he also worked as a correspondent for the Associated Press and covered many important events such as King Gojong’s funeral,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the massacre in Jeam-ri Village committed 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and many others. In 1942, year after the breakout of the Pacific War (1941-1945), Albert and Mary were deported by the Japanese authorities to the USA. Albert, who always wished to come back to Korea, died in 1948 and was buried at 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 in Seoul.
  
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쌓은 집이다. 각 층에는 응접실, 식당, 침실, 서재 등 다양한 용도의 공간이 있었고, 지하에는 장작, 석탄, 포도주를 보관하였다. 1923년에 착공하여 1년 만에 완공되었으나, 1926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1930년 재건공사를 완료하였다. 1942년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방치되었다가 1959년 당시 자유당 의원이었던 조경규(1904~1983)가 매입했으며, 1963년 조경규의 재산이 몰수됨에 따라 딜쿠샤도 국가 소유가 되었다. 이후 빈민들의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며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고, 이 집의 역사도 점차 잊혀졌다. 그러던 중 2006년 한국을 방문한 브루스 테일러가 딜쿠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으며, 2016년부터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2020년 일반에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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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use has two-stories and a basement. It is made of red brick and stands on the granite foundation. The house was severely damaged during a fire in 1926 but was reconstructed in 1930. After the deportation of Albert and Mary Taylor, the house changed its owner and at some point was even used as a multi-family house, which is why its original layout was changed. The identity of the house was only rediscovered in 2006 when Albert and Mary’s son Bruce Taylor (1919-2015) visited Korea to find the house he grew up in. The restoration of the house started in 2016, and in 2020, Dilkusha House was opened to the public.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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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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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는 미국의 언론인이자 사업가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ely Taylor, 1889-1982)가 1924년에 지은 집이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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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테일러는 평안북도의 한 광산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를 돕기 위해 1897년 조선에 왔다. 1919년부터는 AP통신사의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 3.1 독립선언,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테일러 부부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던 앨버트 W. 테일러는 1948년 사망 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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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쌓은 집이다. 1926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1930년 재건되었다. 1942년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소유주가 바뀌고, 한때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며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2006년 한국을 방문한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 1919~2015)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2016년부터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2020년 일반에 공개되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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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사박물관,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2018.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12&seq=20181227133541138&sso=ok
 
* 서울역사박물관,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2018.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12&seq=20181227133541138&sso=ok
 
* 「3·1운동 세계에 알린 이방인 앨버트 테일러」, 『중앙시사매거진』, 2018.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4228
 
* 「3·1운동 세계에 알린 이방인 앨버트 테일러」, 『중앙시사매거진』, 2018.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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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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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 "my heart is happy"? https://en.wikipedia.org/wiki/Dilkusha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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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oreatimes.co.kr/www/news/opinon/2015/06/355_153376.html -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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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Dilkusha_Kothi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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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Taylor wrote a memoir and I think 김지명쌤 is referencing this, maybe we should go with her understanding of the name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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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o, based on 김지명쌤s article, need to recheck Albert Wilder's name...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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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 sources say United Press International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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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indagrave.com/memorial/146663743/bruce-tickell-taylor This memorial states associated press -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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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arently he was sent to Seodaemun prison for 6 months while Mary was under house arrest and only then deported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79338409/albert-wilder-taylor
  
 
[[분류:문화유산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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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서울특별시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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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서울특별시 종로구 문화유산]]
 
[[분류:국가등록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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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가옥]]
 
[[분류: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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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국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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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국문초안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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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2023년 4월 10일 (월) 11:48 기준 최신판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
Dilkusha House, Seoul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
영문명칭 Dilkusha House, Seoul
한자 서울 앨버트 테일러 家屋(딜쿠샤)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 (행촌동)
지정(등록) 종목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
지정(등록)일 2017년 8월 8일
분류 등록문화재
시대 일제강점기
수량/면적 1동 / 현황실측면적 293.8㎡
웹사이트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딜쿠샤는 미국인 사업가 겸 언론인 앨버트 W. 테일러와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1924년에 지은 집으로,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앨버트 W. 테일러는 운산금광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897년에 조선에 왔다. 광산업과 상업에 종사하다 1919년에 AP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과 3·1운동,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테일러 부부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던 앨버트 W. 테일러는 1948년 사망 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서양식 주택으로 1926년에 화재를 겪은 후 1930년 재건되었다. 1942년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소유주가 바뀌고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그러던 중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어렸을 때 살았던 기억을 되살려 2006년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2016년부터 진행된 복원사업을 거쳐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영문

Dilkusha House, Seoul

This house was built in 1924 by the American journalist and entrepreneur Albert Wilder Taylor (1875-1948) and his wife the English actress Mary Linely Taylor (1889-1982). It is named after a house in the Dilkusha area of Lucknow, India, which had impressed Mrs. Taylor during a visit there. The name means “Palace of Heart's Delight” in Sanskrit.

Albert W. Taylor came to Korea in 1897, following his father who was working at a gold mine in Pyeonganbuk-do Province. From 1919, he also worked as a correspondent for the Associated Press and covered many important events such as King Gojong’s funeral,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the massacre in Jeam-ri Village committed 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and many others. In 1942, year after the breakout of the Pacific War (1941-1945), Albert and Mary were deported by the Japanese authorities to the USA. Albert, who always wished to come back to Korea, died in 1948 and was buried at 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 in Seoul.

The house has two-stories and a basement. It is made of red brick and stands on the granite foundation. The house was severely damaged during a fire in 1926 but was reconstructed in 1930. After the deportation of Albert and Mary Taylor, the house changed its owner and at some point was even used as a multi-family house, which is why its original layout was changed. The identity of the house was only rediscovered in 2006 when Albert and Mary’s son Bruce Taylor (1919-2015) visited Korea to find the house he grew up in. The restoration of the house started in 2016, and in 2020, Dilkusha House was opened to the public.

영문 해설 내용

딜쿠샤는 미국의 언론인이자 사업가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ely Taylor, 1889-1982)가 1924년에 지은 집이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평안북도의 한 광산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를 돕기 위해 1897년 조선에 왔다. 1919년부터는 AP통신사의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 3.1 독립선언,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테일러 부부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던 앨버트 W. 테일러는 1948년 사망 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딜쿠샤는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쌓은 집이다. 1926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1930년 재건되었다. 1942년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소유주가 바뀌고, 한때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며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2006년 한국을 방문한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 1919~2015)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2016년부터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2020년 일반에 공개되었다.

참고자료

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