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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문절공 유사 목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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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절공 차원부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위화도 회군을 성공시키고 조선을 개창한 태조가 공신으로 책록하려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어느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하륜 등과 족보 기록에 대한 문제로 갈등을 빚어 추살(推殺)당하고, 친인척 80여명도 죽임을 당하였다. (세종때) 신원되어 시중으로 추증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받았다.<ref>차원부의 추증과 시호를 받은 시점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어, 연대 표기 없이 ‘시중으로 추증되었고 문절이란 시호를 받았다.’로 쓰는 것이 옳을 것도 같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차문절공유사’에서의 내용은 “<설원록>은, 저자가 여말의 유신(遺臣)으로 절의를 지켜 조선이 개국한 뒤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뒤의 태종)의 군대에 죽음을 당하였는데, 뒤에 억울한 사실이 밝혀져서 세조가 신원(伸寃)시켜주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라 하여 세조대 신원되고 시호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차원부’에서는 “세종 때 황보 인(皇甫仁)의 청원으로 신원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라 하고 있어 시원이 세종대에 이루어졌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차문절공유사>(1791년 규장각본) 부록편의 행장에서는 차원부가 “태종 때 문하시중에 증직되었고 세종 때 문절의 시호를 받았다고 하였다”라 하여 태종대 신원되고 세종때 문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등등 여러 기록에서 신원과 시호 받은 시점을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 때문인지 <두산백과>나 <인명사전>에서 ‘차원부’를 검색하면 마지막 줄에 “시중(侍中)에 추증(追贈)”,“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운암(雲巖), 자는 사평(思平),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 시중(侍中)에 추증, 순천(順天)의 운암사(雲巖寺)에 배향되었다.”라고 서술하며 신원과 시호를 받은 시점을 서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ref> 차원부를 문절공이라 칭한 것은 이 시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문절공 차원부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위화도 회군을 성공시키고 조선을 개창한 태조가 공신으로 책록하려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어느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하륜 등과 족보 기록에 대한 문제로 갈등을 빚어 추살(推殺)당하고, 친인척 80여명도 죽임을 당하였다. (세종때) 신원되어 시중으로 추증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받았다.<ref>차원부의 추증과 시호를 받은 시점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어, 연대 표기 없이 ‘시중으로 추증되었고 문절이란 시호를 받았다.’로 쓰는 것이 옳을 것도 같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차문절공유사’에서의 내용은 “<설원록>은, 저자가 여말의 유신(遺臣)으로 절의를 지켜 조선이 개국한 뒤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뒤의 태종)의 군대에 죽음을 당하였는데, 뒤에 억울한 사실이 밝혀져서 세조가 신원(伸寃)시켜주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라 하여 세조대 신원되고 시호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차원부’에서는 “세종 때 황보 인(皇甫仁)의 청원으로 신원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라 하고 있어 시원이 세종대에 이루어졌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차문절공유사>(1791년 규장각본) 부록편의 행장에서는 차원부가 “태종 때 문하시중에 증직되었고 세종 때 문절의 시호를 받았다고 하였다”라 하여 태종대 신원되고 세종때 문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등등 여러 기록에서 신원과 시호 받은 시점을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 때문인지 <두산백과>나 <인명사전>에서 ‘차원부’를 검색하면 마지막 줄에 “시중(侍中)에 추증(追贈)”,“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운암(雲巖), 자는 사평(思平),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 시중(侍中)에 추증, 순천(順天)의 운암사(雲巖寺)에 배향되었다.”라고 서술하며 신원과 시호를 받은 시점을 서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ref> 차원부를 문절공이라 칭한 것은 이 시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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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23일 (금) 10:55 판


차문절공유사목판
차문절공 유사 목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차문절공유사목판
한자 車文節公遺事木板
주소 전라남도 광양시
국가유산 종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지정(등록)일 1995년 7월 5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목판각류/판목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53판
웹사이트 차문절공 유사 목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신규 (문화재청에 주소가 없어서 주소 확인 필요)


  • 광양시에서 보내준 자료

문절공 유사 목판은 고려 공민왕때 학자인 문절공 차원부(1320-1407)의 유문과 일대기를 엮은 목판으로 1791년에 제작되었다. 총 53판으로 국가 기관인 운각(云閣)에서 간행함으로써 결판이 없어 인쇄사적인 가치가 매우 크다. 이 목판은 1793년 설치한 오천서원(순천시 주암면 선평리)에 보관해오다 고종 5년(1868) 서원이 철폐되자, 1897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연안차씨 문중에서 구암별묘(龜岩別廟)라는 재실을 만들어 보관해 오던 중 여수비행장 확장으로 별묘마저 철거되어 문중대표 집에 보관되어 오다가, 이곳으로 이전하여 보관ㆍ관리하고 있다. 문절공은 위화도 회군을 성공시키고 조선을 개창한 공신녹권을 주려했으나 거절당하였고, 정언(正言)ㆍ평의랑중전농사사(平議郞中典農寺事) 등의 除授에도 나가지 않았다. 조선 개국 공신 하륜 등과 갈등으로 추살(推殺) 당하고, 친인척 80여명도 죽음을 당하였다. 세종때 신원되어 시중으로 추증되고 문절이란 시호를 받았다.

수정 국문

초고

문절공 유사 목판은 고려 공민왕때 학자인 문절공 차원부(文節公 車原頫, 1320~1407)의 글과 행적를 엮은 『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을 간행할 때 만들어진 목판이다.

『차문절공유사』는 1708년(숙종 34)에 황해도 평산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이후 1768년(영조 44)에 경상도 김천에서, 1781년(정조 5)에 황해도 서흥에서, 1791년(정조 15)에 운각에서, 1915년에 차석주(車錫周)의 개편 등 모두 5차례 간행되었다. 이 목판은 1791년 국가의 인쇄기관인 운각(芸閣), 즉 교서관(校書館)에서 판각한 4번째의 판본으로 총 53판이다. 국가에서 판각을 명령하고 국가기관에서 간행한 것으로 결판이 없고 보존상태가 좋아 서지학 및 인새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이 목판은 1793년(정조 17) 건립된 오천서원(순천시 주암면 선평리)에 보관해오다 1868년(고종 5) 서원이 철폐되자, 1897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연안차씨 문중에서 구암별묘(龜岩別廟)라는 재실을 만들어 보관해 오던 중 여수비행장 확장으로 별묘마저 철거되어 문중대표 집에 보관되어 오다가, 이곳으로 이전하여 보관 · 관리하고 있다.

문절공 차원부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위화도 회군을 성공시키고 조선을 개창한 태조가 공신으로 책록하려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어느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하륜 등과 족보 기록에 대한 문제로 갈등을 빚어 추살(推殺)당하고, 친인척 80여명도 죽임을 당하였다. (세종때) 신원되어 시중으로 추증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받았다.[1] 차원부를 문절공이라 칭한 것은 이 시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1. 차원부의 추증과 시호를 받은 시점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어, 연대 표기 없이 ‘시중으로 추증되었고 문절이란 시호를 받았다.’로 쓰는 것이 옳을 것도 같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차문절공유사’에서의 내용은 “<설원록>은, 저자가 여말의 유신(遺臣)으로 절의를 지켜 조선이 개국한 뒤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뒤의 태종)의 군대에 죽음을 당하였는데, 뒤에 억울한 사실이 밝혀져서 세조가 신원(伸寃)시켜주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라 하여 세조대 신원되고 시호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차원부’에서는 “세종 때 황보 인(皇甫仁)의 청원으로 신원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라 하고 있어 시원이 세종대에 이루어졌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차문절공유사>(1791년 규장각본) 부록편의 행장에서는 차원부가 “태종 때 문하시중에 증직되었고 세종 때 문절의 시호를 받았다고 하였다”라 하여 태종대 신원되고 세종때 문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등등 여러 기록에서 신원과 시호 받은 시점을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 때문인지 <두산백과>나 <인명사전>에서 ‘차원부’를 검색하면 마지막 줄에 “시중(侍中)에 추증(追贈)”,“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운암(雲巖), 자는 사평(思平),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 시중(侍中)에 추증, 순천(順天)의 운암사(雲巖寺)에 배향되었다.”라고 서술하며 신원과 시호를 받은 시점을 서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1차 수정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차문절공유사목판’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602120000

  • 한국민족문과대백과 ‘차원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177

  • 한국민족문과대백과 ‘차문절공유사목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7254

  • Cultural Heritage Wiki ‘삼봉집 목판’ 참고

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C%82%BC%EB%B4%89%EC%A7%91_%EB%AA%A9%ED%8C%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