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차문절공 유사 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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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문절공 유사 목판은 고려 공민왕때 학자인 문절공 차원부(1320-1407)의 유문과 일대기를 엮은 목판으로 1791년에 제작되었다. 총 53판으로 국가 기관인 운각(云閣)에서 간행함으로써 결판이 없어 인쇄사적인 가치가 매우 크다.

이 목판은 1793년 설치한 오천서원(순천시 주암면 선평리)에 보관해오다 고종 5년(1868) 서원이 철폐되자, 1897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연안차씨 문중에서 구암별묘(龜岩別廟)라는 재실을 만들어 보관해 오던 중 여수비행장 확장으로 별묘마저 철거되어 문중대표 집에 보관되어 오다가, 이곳으로 이전하여 보관ㆍ관리하고 있다.

문절공은 위화도 회군을 성공시키고 조선을 개창한 공신녹권을 주려했으나 거절당하였고, 정언(正言)ㆍ평의랑중전농사사(平議郞中典農寺事) 등의 除授에도 나가지 않았다.

조선 개국 공신 하륜 등과 갈등으로 추살(推殺) 당하고, 친인척 80여명도 죽음을 당하였다. 세종때 신원되어 시중으로 추증되고 문절이란 시호를 받았다.

수정 국문

초고

문절공 유사 목판은 고려 공민왕때 학자인 문절공 차원부(文節公 車原頫, 1320~1407)의 글과 행적를 엮은 『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을 간행할 때 만들어진 목판이다.

『차문절공유사』는 1708년(숙종 34)에 황해도 평산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이후 1768년(영조 44)에 경상도 김천에서, 1781년(정조 5)에 황해도 서흥에서, 1791년(정조 15)에 운각에서, 1915년에 차석주(車錫周)의 개편 등 모두 5차례 간행되었다. 이 목판은 1791년 국가의 인쇄기관인 운각(芸閣), 즉 교서관(校書館)에서 판각한 4번째의 판본으로 총 53판이다. 국가에서 판각을 명령하고 국가기관에서 간행한 것으로 결판이 없고 보존상태가 좋아 서지학 및 인새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이 목판은 1793년(정조 17) 건립된 오천서원(순천시 주암면 선평리)에 보관해오다 1868년(고종 5) 서원이 철폐되자, 1897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연안차씨 문중에서 구암별묘(龜岩別廟)라는 재실을 만들어 보관해 오던 중 여수비행장 확장으로 별묘마저 철거되어 문중대표 집에 보관되어 오다가, 이곳으로 이전하여 보관 · 관리하고 있다.

문절공 차원부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위화도 회군을 성공시키고 조선을 개창한 태조가 공신으로 책록하려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어느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하륜 등과 족보 기록에 대한 문제로 갈등을 빚어 추살(推殺)당하고, 친인척 80여명도 죽임을 당하였다. (세종때) 신원되어 시중으로 추증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받았다.[1] 차원부를 문절공이라 칭한 것은 이 시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1. 차원부의 추증과 시호를 받은 시점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어, 연대 표기 없이 ‘시중으로 추증되었고 문절이란 시호를 받았다.’로 쓰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차문절공유사’ 기사에서의 내용은 “『설원록』은, 저자가 여말의 유신(遺臣)으로 절의를 지켜 조선이 개국한 뒤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뒤의 태종)의 군대에 죽음을 당하였는데, 뒤에 억울한 사실이 밝혀져서 세조가 신원(伸寃)시켜주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라 하여 세조대 신원되고 시호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는데, 차원부’ 기사에서는 “세종 때 황보 인(皇甫仁)의 청원으로 신원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라 하고 있어 신원이 세종대에 이루어졌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차문절공유사』(1791년 규장각본) 부록편의 행장에서는 차원부가 “태종 때 문하시중에 증직되었고 세종 때 문절의 시호를 받았다고 하였다”라 하여 태종대 신원되고 세종때 문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등 여러 기록에서 신원과 시호 받은 시점을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 때문인지 두산백과나 인명사전에서는 “시중(侍中)에 추증(追贈)”,“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운암(雲巖), 자는 사평(思平),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 시중(侍中)에 추증, 순천(順天)의 운암사(雲巖寺)에 배향되었다.”라고 서술하며 신원과 시호를 받은 시점을 서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1차 수정

문절공 유사 목판은 고려 말의 학자인 문절공 차원부(文節公 車原頫, 1320~1407)의 글과 행적을 엮은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을 간행하기 위해 정조 15년(1791)에 만들어진 목판이다.

차원부는 공민왕(1351~1374 재위)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유학자로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공신으로 책록하려 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어느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 하륜(河崙, 1347~1416) 등과 갈등을 빚어 추살 당하였고 친인척 80여 명도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후대에 신원되어 시중으로 추증되었고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받았다.

『차문절공유사』는 숙종 34(1708)에 황해도 평산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이후 영조 44년(1768), 정조 5년(1781), 정조 15년(1791), 1915년 등 모두 5차례 간행되었다. 이 목판은 경서와 사적의 인쇄 및 반포 등을 관장하던 관아인 교서관(校書館)에서 판각한 것으로 총 53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가에서 판각을 명령하고 국가기관에서 간행한 것으로, 결판이 없고 보존상태가 좋아 서지학 및 인쇄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숙종 34(1708)에 → 숙종 34년(1708)에 ???
    • 權臣構誣椎殺公及內外親黨七十餘人於松麻二原之間라는 내용으로 보아 80여 명이 아니라 70여명인 듯합니다.
    • 後太宗致祭贈贊成。命錄後。子安卿孫尙道。俱擧賢良。已而恐禍及。或自經或變姓作人傭。世宗加愍恤。又贈侍中賜諡 라는 내용으로 보아 태종 때 찬성으로 추증되었고, 세종 때 시중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받은 것도 세종 때인듯합니다.
    • 端宗命集賢學士河朴成諸臣。撰雪寃錄 이 내용으로 볼 때 설원록을 지은 것은 단종 때입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문절공 유사 목판은 고려 말 학자 문절공 차원부(文節公 車原頫, 1320~1407)의 글과 행적을 엮은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를 간행하기 위해 1791년(정조 15)에 제작되었다.
      차원부는 공민왕(1351~1374 재위)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후 이성계가 공신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 하륜(河崙, 1347~1416) 등과 갈등을 빚어 친인척 80여 명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후대에 신원되어 시중으로 추증되었고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받았다.
      『차문절공유사』는 1708년(숙종 34) 황해도 평산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1768년(영조 44)1781년(정조 5), 1791년(정조 15)과 1915년 등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목판은 서적의 인쇄 및 반포 등을 관장하던 교서관(校書館)에서 판각한 것으로, 총 53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가에서 판각을 주도하고 국가 기관에서 간행한 것으로, 빠진 것이 없고 보존상태가 좋아 서지학 및 인쇄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문절공 유사 목판은 고려 말의 학자인 문절공 차원부(文節公 車原頫, 1320~1407)의 글과 행적을 엮은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을 간행하기 위해 정조 15년(1791)에 만들어진 목판이다.
      차원부는 공민왕(1351~1374 재위)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해지자 관직을 사퇴하고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되어 그 계략을 묻자 출병을 반대하였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 등이 차씨(車氏) 외손의 서속(庶屬)이라고 족보에 기재하여 그들의 원한을 받아오다, 하륜 등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 및 일당 80여 인과 함께 살해당했다. 고려에 충성을 다한 두문동(杜門洞) 72인의 한 사람으로 매화 그림을 잘 그렸다. 후대에 신원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차문절공유사』는 숙종 34(1708)에 황해도 평산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이후 영조 44년(1768), 정조 5년(1781), 정조 15년(1791), 1915년 등 모두 5차례 간행되었다. 이 목판은 경서와 사적의 인쇄 및 반포 등을 관장하던 관아로 운각(云閣)이라고 불리던 교서관(校書館)에서 판각한 것으로 총 53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가에서 판각을 명령하고 국가기관에서 간행한 것으로, 결판이 없고 보존상태가 좋아 서지학 및 인쇄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2차 수정

문절공 유사 목판은 고려 말의 학자인 문절공 차원부(文節公 車原頫, 1320~1407)의 글과 행적을 엮은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을 간행하기 위해 정조 15년(1791)에 만들어진 목판이다.

차원부는 공민왕(1351~1374 재위)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후 이성계가 공신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 하륜(河崙, 1347~1416) 등과 갈등을 빚어 친인척 70여 명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후대에 신원되어 시중으로 추증되었고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받았다.

『차문절공유사』는 숙종 34년(1708)에 황해도 평산에서 처음으로 간행된 이후 영조 44년(1768), 정조 5년(1781), 정조 15년(1791), 1915년 등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 목판은 서적의 인쇄 및 반포 등을 관장하던 관아인 교서관(校書館)에서 판각한 것으로 총 53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가에서 판각을 주도하고 국가기관에서 간행한 것으로, 빠진 것이 없고 보존상태가 좋아 서지학 및 인쇄사적으로 가치가 크다.